가수 인순이는 16년 전 아기를 가졌을 때 "혹시 아이가 나를 많이 닮으면 어쩌나, 수도 없이 되뇌었다"고 했다. 혼혈인으로 자라며 받은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대중의 사랑 속에 무대를 휘젓는 그이지만 "학교 다닐 땐 남들 앞에 서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고 했다. 고민 끝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외국인학교에 보내 덜 상처받게 하고 싶었다. 인순이는 돌아오자마자 이런 사연을 방송에서 숨김없이 알렸다. "마음껏 욕해 달라"고 했다. 그의 원정출산에 돌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3년 전 연예인 학력위조 파문 때는 중졸 학력을 고졸로 속여왔다는 게 드러났다. 그는 "가난해서 고등학교에 못 갔다. 나 자신과 팬들에게 정직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때도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지난 몇십년 우리 사회가 혼혈인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다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인순이는 1957년 포천에서 태어났다. 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뱃속에 있을 때 떠나다시 오지 않았다. 열네살 때까지 가끔 편지를 주고받다 소식이 끊겼다. 그런 그에게 작년에 '아버지'라는 노래가 들어왔다. '한 걸음도 다가갈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라왔는지/ 눈물이 말해준다….' 그는 이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를 단 한 번 본 적도 없으면서 아버지 심정을 노래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노래를 부르다 울컥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인순이는 1999년 뉴욕 카네기홀 공연을 앞두고 잔뜩 흥분해 신경성 장염과 위염으로 한 달을 고생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에 가서 그가 어머니 힘만으로 얼마나 잘 자랐는지 보여줄 기회라고 별렀다. 지난주 다시 가진 카네기홀 공연에서 그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6·25 참전용사 100명을 모셔놓고 "여러분은 모두 제 아버지"라고 인사했다.
그는 작년에 '군인의 딸' 자격으로 공군대학에 특강을 나가 마지막 한마디로 강의실을 뒤집어놓았다. "외국에 파병 나가도 책임지지 못할 씨는 뿌리고 오지 마세요." 인순이니까 할 수 있는 얘기였다.
노래 '아버지'도 용기를 내 녹음했다. 카네기홀 공연에선 "전쟁통에 나 같은 자식을 두고 떠난 뒤 평생 마음의 짐으로 안고 사는 참전용사들이 이제 짐을 내려놓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