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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2년 2월 20일 빛의 결혼식
한 여대생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녀는 전남대학교 사학과 76학번이었다. 박기순은 오빠의 지기들이었던 윤한봉이니 김남주니 하는 광주 지역의 운동권 괴수(?)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될성부른 떡잎(?)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8년 6월 학내 시위에 연루되어 무기정학을 당한다.
학교로부터 거부당한 박기순은 또 하나의 학교에 마음을 쏟게 된다. 그것은 야학이었다. 그녀는 광주 출신 서울 학생들로부터 야학 경험을 전해 들으며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야학만한 것이 없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한 번 마음 먹으면 똑소리가 났던 그녀는 자신의 학교 인맥들을 야학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들불야학이었다. 그녀와 함께 한 이름 가운데 윤상원이 있었다. 후일의 광주항쟁 시민군 대변인. “고등학생은 나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면서 어린 동생들을 내몰고는 총을 들고 도청을 지켰던 청년.
강학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해서 야학교사를 이리 불렀다)으로서 학강 (배우면서 가르친다고 해서 야학 학생을 이리 불렀다)들과 어우러지는 한편, 박기순은 위장취업자가 되어 노동자로서의 삶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눈코뜰새없는 긴장과 과로의 연속. 하지만 그녀에게는 피붙이만큼이나 소중한 친구들과 동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민족의 새아침이 밝아오는가. 땀과 눈물 삼켜가면서 뛰어가자. 친구, 사랑하는 친구, 들불이 되자” (들불야학의 노래 중)
1978년의 크리스마스. 통금이 엄연하던 시절의 크리스마스는 젊은 청춘들이 밤을 하얗게 밝힐 수 있는 몇 안되는 날이었고 다음 날도 그녀는 야학에 쓸 땔감을 찾기 위해 강학, 학강들과 함께 거리를 누비다가 겨우 오빠 집을 찾아 몸을 누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허무하게 세상을 등지고 만 것이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죽음. 동료들은 넋을 잃고 슬퍼했다. 광주의 또순이 박기순의 이름은 이미 광주를 넘어서 있었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황석영이 조사를 읽었고 김민기가 노래를 불렀다. 김민기가 택한 노래는 ‘상록수’였다. 아마 2절에서 사람들은 울었을 것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그녀가 죽은 지 11개월 뒤 영원할 것 같던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 그리고 서울의 봄이 왔지만 그 봄은 봄이 아니었다. 꽃샘추위의 열 배 쯤 되는 동장군이 워커발에 대검 꽂고 그 봄을 덮쳤다. 광주는 그 흉악한 동장군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광주항쟁이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되짚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앞서 말한 박기순의 동료, 박기순이 야학으로 끌어들였고 박기순이 죽었을 때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야/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기순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우리의 가슴 속에서 피어난다”고 울먹였던 윤상원은 그 항쟁의 한복판에서 장렬하게 산화해 갔다.
그리고 1982년 2월 20일 망월동 묘역. 박기순과 윤상원의 친지들이 모였다. 그들은 조촐한 행사를 준비 중이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자 했으나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한 여자와 그녀의 죽음에 크게 슬퍼했고 그녀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다가 죽었다 할 한 남자의 영혼 결혼식이 열린 것이다. 신랑 윤상원 신부 박기순. 친지들은 두 불운했지만 빛났던 청춘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날 광주에 있던 황석영의 집에서는 또 하나의 역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곳에 모인 젊은이들은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 결혼식을 소재로 한 노래굿 “넋풀이" (일명 빛의 결혼식)를 녹음하고 있었다.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의 둔탁한 레코드 버튼을 연신 누르며 그들은 몇몇 노래들을 불렀다. “에루아 에루얼싸”도 있었고 이미 불리워지던 곡들도 있었지만 전혀 새로운 노래 하나가 테이프에 실리고 있었다.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서 몇몇 구절을 따온 가사를 만들고, 79년 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이라는 팀으로 출전, 은상을 탔고 81년의 험악한 시기에 간 크게도 광주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5.18을 추모하는 노래 <검은 리본>을 불렀던 김종률이 작곡한 행진곡이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노래굿 상에서 이 노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였다고 한다. 청춘의 사랑도 접고 명예 따위 구하지 않고 이름은 가명으로 바꿔 가면서 세상의 그늘을 걷던 사람들, 이 그늘을 없애리라 맹세했던 한 남자와 한 여자. 한다 하는 유지들은 꽁무니를 빼고 시민들도 가슴을 치며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그날 도청을 지키고 죽어간 사람과 그에게 크나큰 감동과 슬픔을 안겨 주었던 사람.
그래서 원래 가사는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였다. 하지만 가사는 사람들의 입 속에서 “앞서서 나가니”로 바뀐다. 그렇게 가사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허문 것이다. 그날 녹음이 끝난 뒤 녹음한 테이프를 가슴에 하나씩 품고, 혹여라도 경찰의 눈에 띄더라도 같이 잡히지 않고 한 명이라도 도망갈 수 있게 저만치 떨어져 걸었던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그 뒤 숨죽여 노래를 따라 부르던 사람들을 통해서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많은 청춘들이 윤상원으로, 박기순으로 빙의됐고 그들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펼쳐진 80년대의 불의 바다의 불방울들이 됐다.
<아침이슬>은 해금되던 날 노태우도 김민기를 찾아와 함께 불렀고, 퇴임연설을 마친 가카께서도 청와대 뒷산에서 촛불시위대가 부르는 <아침이슬>을 따라 부르실 수 있는 노래였지만 이 노래만큼은 그들의 영역이 될 수 없고 되지도 않았고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 노래는 박기순과 윤상원. 진실로 열심히 살고 뜨겁게 죽었던 이들의 영혼이 서린 노래이고 아울러 그 뒤를 따르고자 했던 수천 수만의 사람들의 열정과 한숨이 마디마다 음표마다 배어 있는 노래이니까. 1982년 2월 20일 ‘임을 위한 행진곡’이 태어났다.
광주 관련 산하의 오역 포스팅 3
자. 니들이 말하는 인민군 특공대 대장의 최후다. 과연 니들이 아베를 탓할 수 있냐. 일본의 망언을 욕할 수 있냐. 이 털복숭이 양심들아.
1980년 5월 27일 광주 항쟁의 마지막 불꽃
1980년 5월 27일 새벽, 47개 대대 2만 317명으로 편성된 계엄군은 5개 방면을 통해 일제히 진입했다. 그 중 핵심은 역시 공수부대였다. 전남도청 등 목표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은 것은 각 공수여단의 특공조들이었다. 전일빌딩과 YWCA를 장악한 것은 11공수여단이었다. 열흘 전 광주 시민들의 목숨 선 봉기를 유발한 무자비한 진압을 자행했던 7공수여단은 광주공원을 접수했고 , 시민군 지도부가 모여 있던 전남 도청은 3 공수여단이 맡았다. 3공수여단 장교 13명, 사병 66명은 5월 27일 오전 4시경 전남도청에 도착, 후문을 넘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진입하여 1시간 21분만에 도청을 점령했다.
당시 도청에는 157명의 시민군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승리의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꼼짝없이 죽을 목숨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들은 남았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고아나 무연고자들이었다고 한다. "가족 없는 우리가 남을 테니 가족 있는 사람들은 가라"고 했다는 말도 전한다. 자칫하면 부랑자들의 난동 정도로 매도될 수 있는 '시민군'의 인적 구성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윤상원이 있었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은행원 생활도 했던 그는 안온한 생활을 포기하고 광주로 돌아온다. '포기'했다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다. "양복 입고 어딘가에 출근하는 모습을 잠시나마 보여 드리는 것이 힘들게 대학 보내 주신 부모님께 대한 효도"라고 말했다고 하니 애초에 그는 그렇게 편안한 삶을 누릴 의사가 없었던 듯 하다. 이후 '대졸' 학력을 숨기고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취업을 한 윤상원은 공장지대 근처에서 노동자를 위한 '들불야학'을 운영하는 대학 후배들의 권유로 야학 강사를 맡게 된다. 그러던 중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의 짐승같은 진압이 이뤄진 뒤 자연스럽게 발생한 항쟁 열흘 내내 윤상원은 그 중심에 있었다. 그와 그 동료들이 만든 '투사회보'는 모든 언론이 사라진 광주의 유일한 매체였고, 청년학생 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그는 외신 기자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회견실 탁자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란 예감을 받았다.....그는 한국인으로 흔치않은 곱슬머리였다. 그의 행동에는 자신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무장한 동료들의 허둥거림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침착함이 있었다.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 (볼티모어 선 지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
후일 한국을 다시 찾은 마틴 기자는 더 구체적인 기억을 들려 주었다. 외신기자회견장에서, 윤상원이 마치 십자가상의 죽음을 앞두고 성만찬을 베풀던 예수님처럼 외신기자들을 스윽 훑어 보았다고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정지하는 느낌을 받는다. 브래들리 마틴이 볼티모어 선지에 기록한 바로 그 순간의 윤상원의 모습과 시선이었다. "정말 예수님을 보는거 같은" 느낌이었고 감당할 수 없는 부담감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어머니 마리아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은 사도 요한처럼 그 역시 윤상원과 5.18 광주 항쟁을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극심한 감박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고 한다. 꿈에서조차 윤상원은 그때 그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 마틴을 괴롭혔다. "매일 폭음을 하고.. 인생을 힘들게 살았어요."
그래서였을까. 마틴 기자는 광주를 방문할 때마다 윤상원의 집까지 찾아가 윤상원의 아버지를 만났다. 일제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 윤석동과 일본 특파원을 역임했던 마틴은 서툰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다. 마틴은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윤상원이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사람들이 알게 될 겁니다."
외국인 기자의 가슴에 그토록 고통스럽게, 그리고 깊숙하게 틀어박혔던 그 형형한 눈빛으로 27일의 캄캄한 새벽을 쏘아보던 윤상원의 마지막 모습은 평소의 그와도 달랐다고 한다. 도청을 함께 지켰던 동료 이양현의 말이다. "마치 5월 광주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습니다. 판소리를 곧잘 하고 평소에는 그렇게 순박하고 소탈했던 사람이 그때 도청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으니까요. 논리정연하고 단호하고 상황 판단도 빨랐습니다. 마지막에는..... 고등학생들을 억지로 내보냈습니다."
계엄군의 진입이 시작되기 전 윤상원은 그때껏 남아 있던 고등학생과 미성년자들을 강제로 내몬다. "나가라.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달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여 내보낼 사람들을 내보낸 뒤 남은 사람들은 카빈총을 쥐고 예정된 최후를 기다린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도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했던 예수와 같이.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고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며,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고 울부짖는 여성의 방송 소리의 말미에 드르륵 드르륵 M,16 소총 소리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광주 도청 진입 작전이 전개됐고 끝까지 총을 놓지 않고 싸우던 윤상원은 계엄군의 집중 사격을 받고 목숨을 잃는다.
그의 바지에는 전날 만났던 외신 기자들의 명함이 들어 있었다. 보안사 요원이 찍은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그는 두 팔을 벌린 채 흡사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누워 있다. 사망한 후 눕혀졌던 매트에 불 붙은 커튼이 떨어져서 불에 그을린 참혹한 모습이었다. 광주가 이 나라의 십자가였다면 그는 그 위에서 못 박히고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며 죽어간 목수의 아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시 골고다 언덕을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 (김종태,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 중) 말이다. 우리 역사에는 예수를 닮은 이들이 많다. 육신으로는 부활하지 못하였으되 수많은 청춘들의 결단과 노래 속에 부활한. 윤상원, 그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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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와 부정속에서도
4월의 하늘과
5월의 봄은
푸르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