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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노라고 규정되는 이들의 특징.
게시물ID : sisa_3764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놀놀이
추천 : 11/3
조회수 : 337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3/04/03 18:03:55


그들이 정치를 적대를 판단하는 규정의 기원은 역사적 유산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대의제 그리고 현실의 실생활의 차원과 관계맺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 속에서 - 정치적 적대는 양자 간의 - 확립된 정치 세력이 갖는 그 본래적인 성격의 문제로 간단하게 환원할 수 없는 곤궁함에서 제기된다. (여기에서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정치적 대상의 복잡성은 이를 가중시킨다. 그래서 그 가능성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다. 단지 누구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가정만이 있다.)


동시에 그것-소통이 가능하다면 정치는 불필요하다. 아주 역설적이게도, 어떤 점에서는 정치는 일종의 안전장치같은 것이다. 그 한계는 매번 시험된다. 상대 정치 세력의 내심과 그 의도가 분명 확실한 것이라면 - 그 실증적인 파악이 가능한 문제가 된다면 - 정치 아닌 행동?이 필요한 문제가 될뿐이다. 물론, 그 행동조차 정치적 행위에 속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모두가 연상하는 정치에 대한 형상과 형식과는 상이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 정치적 세력에 대한 상징화와 그 이면 - 그 상징적 가치에 기반한 세력과 집단을 실제적으로 규율하는 통치의 문제에 있어 - 현재의 권력적인 형태는 너무나도 잘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성은 이제는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잡성이 권력이 형태가 되었고 그 특성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정치가 정치이기 위해 필요한 적대의 문제를 이런 분명한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곤궁함 자체에서 이끌어낼 수밖에 없는 문제 - 이는 곧, 현재에 대한 인식의 차원에서 언급되는 그 적대나 적대의 양식이 파악 불가능한 문제를 - 현재 시대가 인정하는 근거를 통해 표현하는 양식적 설명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그 의미가 크게 왜곡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그 적대가 계급적 이해의 문제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는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 때문이지만, 실재 그 계급적인 정치적 형상화조차 결코 단순하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데 있다. 그래서 사회, 국가, 경제 구조에 대한 분석과 이에 기반한 정치적 주장들이 갖는 차이는 -  그리고 그것이 갖는 다양한 그 양식적 설명들 모두가 어떤 구분이나 삭제없이 그리고 탈락없이 실질적인 차원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그 모든 것들은 사전적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오직 적대의 양식-제기 방식 자체가 어떠한 차별없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요건을 기본적으로 이미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전재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의 개인적인 정체성 따위는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어차피 공론화와 공론장의 기능은 그 합의 가능성 유무와는 상관없이 그래서 복합적이며, 그럴 수밖에 없는 자기 표현의 장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친노는, 이런 정치적 적대를 순수하게 -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 비판적인 견해들에 한하여 이미 규정되고 파악된 것 - 이미 국가 역사 교육을 통해/동시에 이에 상반된 민족주의적 역사 견해를 통해 확보되어 있는 그 양식적 편견에 기대어 정치적 규정을 사용한다 - 그리고 그것을 통해 파악된 정치적 성향과 그 상징적인 성격의 문제 속성으로 간단하게 묘사하는 것에서 그 모든 적대의 방식을 실행한다. 

그 유비성, 비교 가능한 문제 - 그러나 실제 정치적으로 기능하는 것은 이런 상징적인 규정들이 갖는 순수 언어적 기능의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현재에도 유의미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며, 모두가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제기되는 적대의 양식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 세력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을 간단하게 규정하는 부정화된 양식 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것이 상대 정치세력에 대한 실질적인 이유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논증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곧장 자신들이 가지는 혹, 자신들이 사용하는 그 구성적 이념이 가지는 현실에 대한 한계적 설명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즉, 그 모든 것들-그 규정의 차원에 제기되는 부정적인 상징성들이 특정한 사건 규정에 비롯된 다양한 유형들, 개별 인간에 대한 규정들 그 이데올로기적인 지식들 - 특정 사건 의의 - 그 중심성을 기반으로 구성된 역사적 판단이나 이에 기반한 구성적 이념 -역사 서사-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들이라는데 있다. 

어떠한 구성적인 이념이든 이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동시에 이런 형태의 비판은 그 구성적 이념에 기반하여 현재를 성명해야 하는 그 한계를 실제적으로 극복하거나 더불어 설명하고자 할 때, 그것의 현실적인 존재 유무가 정당화될 뿐이다. - 여기에는 이런 실제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규제적 이념-다양한 역사 서술이 공통되게 지니고 있는 윤리적인 지점이 - 현실에 존재하는 사실적인 근거를 통해 그것이 손상없이 여전히 지탱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노력 또한 전재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


구성적 이념의 비판을 그 규제적 이념의 탈락이나 실패한 인식의 문제로 환원하는 행위 - 그들은 어떤 의심도 없이 이것을 행하는 이들이다. - 근대에 대한 비판이 근대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완전한 단절을 기획하지는 못한다. 동시에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가 사회주의의 규제적 이상의 실패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이런 이념의 층위와 그 판단을 무력화하는 것을 통해 그들의 역사적 판단과 더불어 그 상징적 가치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의 형태는 그들의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몰이해를 부각시킬 뿐이다. 

이런 이념을 판단의 층위가 갖는 이중적인 단절과 지속성의 관념이 실제 인류의 역사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들이야말로 진정 이념적인 정치 세력이며 동시에 근본주의자의 편벽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규정들, 역사적 견해-실재적으로는 특정 사건 중심의 사고의 편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구성적 이념을 기반으로 현실 인식을 왜곡하는 나아가 공통된 관념으로 존재하는 규제적 이념에 대한 믿음을 실제적으로 무력화하는 이들이 친노라는 존재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제 믿고자 하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 결코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을 부인한다.


예를 하나 들면 그들이 규정하는 '친일파'를 들 수 있다. 그들은 과거에 존재했다. 그러나 그 규정에 있어서의 문제는, 그 당위성이 구성되기 위한 요건들 속에 있다. 

왜 친일파는 청산되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오히려 중요한 문제다. 당시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다. 그들이 처벌되어야 하는 규정의 문제는 단순하게 민족/반민족, 국가/반국가적 행위에 대한 상징적 가치 기준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부차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언급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 그런 상징적 규정이야 말로 이미 주어진 자연적인 산물이 아니며, 그들이 처벌되어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가 - 그들의 정치적 존재 양태가 앞으로의 국가나 사회 형성과 유지에 있어 그 권력의 존립의 성격에 지극히 상반된 것이기에 그들은 처벌되어야 마땅할 뿐이다.  


즉, 그들이 처벌되어야 할 실재적 이유가 곧장 상징적 가치 기준에 의해 쉽게 판단되고 결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그 규정의 문제는 - 현재의 권력의 성격에 기반하여 판단되어야 하는 - 현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권력의 존립 형태 - 나아가 권력이 존립하기 위한 권력 자신의 자기 정당성을 문제에 기반하여 제기되는 상징성(규제적 성격)에 대한 동의 여부를 결정짓는 절차적 과정을 생략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과거의 친일파는 친일파일 뿐이다. 그러나 현재 상대 정치 세력을 그렇게 동일한 상징성으로 규정하는 문제는 이런 중간의 엄밀한 과정을 생략한 채 제기하고 상징화될 수는 없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는 곧장 어떤 특정한 양식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의 정치, 그 역사적 판단, 그 구성적 이념을 현재에 다시 환기시킨다. 하지만 그런 구성적인 이념에 그들이 치열하게 복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고 있는 상대 정치 세력을 그저 친일적인 세력으로 규정하는 행위는 실재 공론화해야할 - 현재 존립하고 있는 그 권력의 정치적 (국가나 정부 나아가 현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권력의 장치들에 대한) 성격의 문제에 관련한 논의 자체를 생략해버리는, 지극히 반정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거나 - 그것을 하나의 레토릭으로만 그 의미를 규정하는 것에 한한다는 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 이는 지극히 불필요한 과잉과 과장을 불러일으키며, 그 자체로 단순히 대중에 대한 자기 정치 헤게모니적인 논리와 규정의 문제로 - 그것을 사용할 뿐임을 알게 된다. (나아가 이런 정치 규정성은 엔엘과의 정치적 친화성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들의 민주/반민주의 성격 규정의 문제조차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이미 보편적인 내면화의 단계에 접어들었고, 이제는 누구의 성과인가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즉, 형식 민주주의를 넘어 그 실질적인 민주화의 실현성의 문제, 필요성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다. 그 실질적인 노력이 정치적으로 방기된 상황에서 - 경제 민주화의 논의 역시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서 친노라는 정치세력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정치적 주장에 대해 그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친노는 자신들이 집권에 실패한 문제를 여전히 실질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구체화시켜야만 하경제 민주화를 비롯한 실질적인 민주화의 논의의 필요성을 언급하지 않은 채 봉쇄해 버린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정치적 성과나 결과에 대해 비판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정치적 세력이나 역할이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면 그럴 필요성조차 불필요한 행위일 것이다. 동시에 그런 정치적 역할을 하는데 있어 실질적인  세력이기에 공적으로 비판받는다는 사실 - 그리고 그 제기되는 사안에 대해 단순히 비판을 봉쇄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 그 봉쇄의 정치적 배경을 묘사할 뿐이다. 


그들의 집권의 실패가 그것 - 좌클릭에 있다고 규정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어떤 중립성이 전재되는 - 중립적인 입장이 갖는 집권의 편리성과 그에 기반한 정치적 이점을 기능적인 판단할 뿐이다. - 그 허위(정치적 중립은 어떤 의미에서든 허위적이며 기만적이다.)에 물들어 모든 상황을 중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제기되는 정치 강박적 태도에 연원하는 - 그들 스스로 집권의 실패를 단순하게 자기 정당화를 통해서 자신들의 면면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나아가 보수적인 정치로 회귀하려는 고착적 양상으로까지 자신을 형상화하려는 태도로 드러날 뿐이다. 이는 어떤 점에서는 자기 부정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 즉 스스로 보수화할 거라면 이제 과거 민주화의 성과 자체는 더이상 제기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닐까? 


신자유주의 정책의 현실적인 당위성이나 불가피함을 현재에도 단순하게 반복하는 수준이라면 이전의 민주화의 성과를 다시 언급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현재에 제기된 실질적인 민주화-경제 민주화의 실패를 스스로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이들이 과거의 민주화의 성과를 반복하여 언급하는 것은 어떤 의미와 의의가 있는 것일까? 현재 자신의 정치적 성과물에 대한 비판없이 그들이 어떻게 새로운 정치적 결과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바로 그런 한계에 직면하여 형식 민주주의의 실현의 문제 자체가 오히려 조롱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실질적인 민주화의 문제는 지극히 보편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그 상황에서 비판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친노는 친노이기에 친노일 뿐이다. - 누군가는 말한다. 친노를 비판하지 말고 차라리 노무현을 비판하라고, 그렇게 그런 변명조차도 이렇게 소급될 뿐이다. 


죽은 자는 이제 더이상 말이 없기에 그리고 더이상은 말할 수 없기에 - 그가 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죽은 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죽어야 할 그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 너희들이야말로 진정 죽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수 있을 뿐이다. 


친노를 비판하지 말라는 그 모호한 규정의 문제는 전적으로 내 잘못이 아니다. 이 또한 그들의 비판의 불철저함에서 비롯된 정치 행위의 과정 속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의 존재 규정 자체의 모호함은) 변명이 아닌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집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차용하고 사용해왔고, 이제는 그 집권 가능성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그 모든 것들을 내던진 것에 불과하다. - 친노라는 그 구성된 형태의 성격이나 이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위해 진정 부정하는 그 규제적 이념을 고민하는 과정으로부터 그들이 진정 정치적 배외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친노는 나에게 있어 파쇼와 동일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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