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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베 간 안내상의 사제폭탄과 1980년대의 반미문화.eu
게시물ID : sisa_3745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회색병뚜껑
추천 : 10
조회수 : 438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3/03/26 23:05:05

어제 베스트간 http://todayhumor.com/?bestofbest_103859 글에 좀 콜로세움이 열렸네요.

물론 사제폭탄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고 

왜 당시에 안내상씨와 그를 비롯한 운동권의 반미(反美)성향이 극심했는지 써봅니다.


1980년대 이전까지 대한민국은 미국의 최고 우방국으로 전 국민적으로 친미적인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은 항상 중요했고 당시 독재정권은 언론을 통해

미국은 항상 좋은나라, 선진국, 고마운 나라로 포장하고 막연한 환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과 노태우가 주축이 되어 12.12쿠데타가 일어납니다.


반미가 생겨난 이유

1. 군사쿠데타 묵인

당시엔 평시작전통제권을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었으므로(1994년 반환) 미국의 동의도 없이 군사를 움직인 겁니다.

미국은 쿠데타 8일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알고 항의했지만 곧 묵인합니다.

(주한미군과 통신선이 엄연히 존재했는데 8일이나 지나서 알았다는 게 미스터리..지만 이건 각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2. 광주 학살 묵인(은 곧 동조)

제가 5.18 자유공원에서 직접 찍어온 사진입니다.

사진 내용 :

16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A.위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연합사령관은 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신군부는 5월 20일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연락사에 부대이동을 문의하자

위컴은 미국정부와 협의한 후 동의(agreed)함으로써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였다.


한편 5월 22이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 오키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 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또 미행정부는 "광주사태가 더 악화될 경우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고 일반국민에게 광주민중항쟁을 부정적으로 부각시켜 신군부를 두둔했고 무력진압을 합법화시켰다.


80년대 이후 반미운동은 민주주의나 양민보호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체제옹호적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고있던 것입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미국에 밉보이면서 까지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정권을 잡기 위해선 미국의 지지가 꼭 필요했으니까요.

미국은 신군부가 친미적이라는 걸 확인했고 자국의 이익에 된다고 생각해서 묵인해줍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을 등에 업은 신군부는 정권을 잡고 전두환은 11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3. 주한미군 범죄

연도별 발생현황을 살펴보면, SOFA가 처음 발효된 1967년부터 1987년까지 20년간의 통계를 살펴보면 총 39,452건의 미군범죄가 발생하였는데, 평균 1년에 1,972건, 하루 5건의 범죄가 발생한 셈이다. 이후 매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1992년에는 총 발생건수가 754건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그 뒤 적게는 6백건대에서 많게는 9백건대까지 오르다 2000년 들어 총 발생건수가 5백건대로 대폭 감소한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1년 현재 전체 미군범죄는 총 552건으로, 이틀에 3건 정도다. 

-출처 :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가장 유명한 주한미군 범죄가 바로 '윤금이 피살 사건' 일 것입니다.

1992년 동두천 미군기지 주변 술집 종업원이었던 윤금이씨가 주한 미군인 케네스 이병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입니다.

(피살 현장 사진은 웬만하면 안 찾아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미군범죄를 보며 주한미군 철수문제도 자주 거론되게 됩니다.


4. 광주항쟁을 기점으로 한국 학생운동의 기조가 반미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민족주의가 부상하게 됩니다. 

이때 바로 한국의 특수한 좌파운동계열인 NL(민족해방)의 탄생합니다.

민족해방은 미국이 광주항쟁을 묵인하는 걸 보고 한국 사회를 '식민지반(半)자본주의'로 평가했고 대한민국 사회를 미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보았습니다.

민족해방이 주류로 흐르자 일부에선 타민족이자 식민의 주체인 미국보다는 한 민족인 북한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남과 북의 경제적인 차이도 크지 않았고(이제 막 대한민국이 역전하던 시기)

대북정보가 민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에 악랄한 북 정권의 실체를 모르던 민중들은 그렇게 믿을만도 했습니다.

북한과 마찬가지로 알려지지 않았던 미지의 왕국 중국에 대해서 리영희 선생이 문화대혁명을 옹호했던 흑역사가 있던 것 처럼 말입니다.


뭐 어찌되었든 독재정권이 종식될 때까지 반미는 주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어난 미국에 대한 반감을 나타낸 직접적인 사건이 안내상씨가 연루되었던 美문화원 폭파, 방화사건이 있었고 성조기 소각, 美영사관 투석사건 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민족과 통일을 내세우며 무단방북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당시 민중가요에도 반미를 많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반미기조는 사그라들었다가 2000년대 초 미군장갑차 압사사건과 김동성 선수 사건 등을 통해서 잠시 반미가 부활했으나 현재는 다시 사그라든 상태라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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