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모란 사람은 자식에게는 손톱만큼도 관심 없고, 돈 쓸 궁리, 나가서 놀 궁리만 하던 사람이었음.
초등학교 2학년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음. 이유는 친모의 바람.
엄마없이 자란다는 것.
이게 얼마나 어린 아이에게 큰 고통인지 겪어본 사람들은 알 거임
학부모 참관일, 소풍, 기타 등등..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즐거운 날들이 엄마가 없는 나에겐 끔찍할 정도로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이었음.
선생님이 어머니와 면담을 해야 하니 시간이 언제 되시냐고 물을 때,
엄마가 없다고 말하기 싫어서 일 나가셔서 밤 12시에 들어오신다고 하고, 거짓말을 할 때면 말도 못하게 서러움이 사무침..
아버지는 그래도 할 만큼 해 주셨음
애미없는 아이 소리 듣지 않게 하려고, 옷도 늘 깔끔하게 입히려고 하고, 아침밥도 꼭 먹여서 보내는 등
노력하셨고, 그 이상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 해 주셨지만,
직장 다니는 살림에 서투른 남자가 하면 얼마나 할 수 있었겠음..
방학에라도 아버지 편하라고, 형과 큰집에 내려가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손꼽아 기다리는 방학이, 나에게는 언제쯤 눈칫밥 먹는게 끝날까 라며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이었음.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은 엄마가 없다는걸 들킬까봐 친구를 집에 부르지도 못하고,
눈치만을 보다가, 불안불안하게 생활하며 지나갔음.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아버지가 재혼을 하게 되었음.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는, 결혼 경험이 없는 사람.
상대집안이 꽤 잘 사는 집안이었는데 새엄마가 우연히 아버지 얘기를 전해듣고,
아버지와 우리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와 만나보게 되었고, 재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음.
평생 혼자살면서, 당신의 아버지에게 막내딸이라고 평생 돈 받아가면서, 교회에서 하루종일 일주일 내내 봉사하고 있던 사람이었음.
지인의 99%가 교인인 사람..
재혼을 하고, 엄마가 생겼다는 기쁨도 잠시.
다른 기독교 가족들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새엄마가 온 첫 날부터 한 말은 '부모에게 절대 복종할 것' 이었음.
그것이 성경에 쓰여있다고, 자식은 부모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 다는 것이었음.
그때는 몰랐음.
절대 복종이라는 단어가 정말로 그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나타내는 줄은..
초등학교 때의 삶은 천국이었단 것을 미리 알려주었으면 조금 견디기 편했을까..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육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심지어 자신의 아이도 아닌 남의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
아이는 부모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니 아이가 제대로 따를리가 있나..
중학생, 그 섬세할 나이에
조금의 반항이라도 했다간 말도 못 할 체벌이 내려졌음.
내 인생에 그렇게 맞아본 시절은 다신 없을 것 같음.
한 8시간 무릎 꿇고 앉아있던 경험 있는 사람은 있을까 모르겠지만
8시간 꿇어앉아있으면 다리 전체에 시퍼렇게 멍이 듬. 다음날은 물론 다다음날까지 제대로 걷지도 못함..
애를 키워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때려야 하는 지도 모름.
손에 집히는 거로 때리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맞는게 얼마나 비참한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름
한 마디라도 빈정대거나, 싫다는 말을 하거나, 그 어떠한 '절대복종'이 아닌 행동을 하면 그 즉시 징벌이 내려졌음.
뭐 반항이라고 해서 큰게 있는 것도 아니었음.
흔한 예를 들면
새엄마가 온 후 교회를 따라다니게 되었는데
일요일, 아버지나 형이 일이 있어서 교회를 빠지게 되면,
왜 그런 사람 있잖음..
애들 반이 도망간 야자시간, 도망간 애들에게 뭐라고 해야 하는데
남아서 야자하고 있던 애들한테 정신머리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사람..
딱 그런 식으로 교회에 온 나한테 뭐라고 하면
왜 그걸 나한테 말하냐, 는 한마디만 해도 헬게이트가 열렸음..
그래.. 차라리 맞는건 아프고 말지..
거의 매일 식탁에서 내 반찬은 따로 분리되어서 나왔음.
밥과 김치. 끝.
심지어 밥과 김치도 양을 딱 정해서.
아버지가 몇번 우리들의 편을 들었지만, 자식편 들지 말라는 새엄마와 몇 번이고 싸우고 난 후에
아버지도 지쳐서 더 이상 우리의 편을 못들어주겠다고 하였음.
저 김치와 밥.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집에서 먹은 밥중에 절반 이상은. 아니 한 80%는 6년 내내 집에서 김치와 밥만을 먹고 살았던 것 같음.
저런 경험때문에
군대밥이 맛없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서 병장이 되어도 짬이 맛있다고 냠냠 쩝쩝 먹는 걸로 유명하기도 했으니..
서러운 에피소드야 수십페이지는 쓸 정도로 넘쳐남.
부모님의 이혼 이후로 억지로라도 밝은 모습을 연기했기에. 인망은 두터웠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3까지는 줄곧 반장을 해왔음.
다만, 엄마의 지원이 없는 반장이 선생님들 눈에 얼마나 껄끄러웠을지..
중간고사 같은거 끝나면 다른 반 반장의 엄마는 피자도 쏘고 하는데, 나는 그런걸 엄마에게 말 할 수 없으니,
애들에게 시험보느라 수고했는데 반장인데 피자 못사줘서 미안하다며 용돈으로 아이스크림 같은거 사서 나눠주기도 했었으나,
중 3 올라가면서 애들의 추천으로 전교회장에 출마하게 되었을 때는 정말 눈앞이 깜깜했음.
왜 사퇴하지 않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부모님의 지원을 못받는다.'라는 이유는 중학생 아이들에게 사퇴의 이유로 설득이 안 되었던걸로 기억..
그 후, 부회장도 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세 명중 억지로 떨어지고 싶어하는 한 명으로 출마..
나라고,
나라고 왜 전교회장을 하고 싶은 욕심이 없었겠음..
나도 하고 싶었다고 씨발...
선거에 나가, 떨어지기 위해 일부러 현실과는 관계가 먼 코믹한 공약을 내 걸고, 떨어지기 위해 어설픈 연설을 했던 중학생...
선거 결과는 결국 3위.
참... 낙선했을 때는 안도감도 들고, 애들이 일부러 떨어지려고 한걸 몰라서 다행이기도 한데, 씁쓸하고..
만감이 교차했었음..
말하자면 끝도 없으니..
고등학교도 그렇게 보내고,
형은 집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서 알바를 하면서 자취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집앞에 있는 대학에 가게 되었음.
형 처럼 나가서 자취하지 않고, 집 앞의 대학을 선택한 이유를 적으면 나를 아는 사람은 알아볼 것이기 때문에 적지 않겠지만
이유가 있어서 다른 학교를 선택할 수가 없었음.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용돈 한푼 받지 않고, 줄곧 알바를 해서 생활을 하는데,
무슨 엄친아들이 그렇게 많은지..
엄마 친구 자식들은 무슨 알바를 하면서 부모님한테 용돈도 바치면서 서울의 모든 대학의 과수석을 맡고 있는지 ..
얼굴만 마주쳤다 하면 비교비교비교.
백번 참고 듣다가, 내가 한번이라도 비교하면 엄마를 개무시한다고 20살 되서도 맞고..
맞다가 매라도 한번 잡을라 치면, 무슨 세계 종말이라도 온 양 사방에 전화를 하며 이놈이 때리는데 매를 가로챘다고...
외가건 친가건 다 올라오라면서 어떻게 부모가 때리는데 매를 뺐을 수가 있냐며..
가장 자유로울 20살
집-학교-알바-집 루트 때문에 동아리/캠퍼스 생활이라곤 해 본적도 없었음.
술이라도 한잔 먹고 들어가는 날에는 사탄새끼라며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니..
07년 봄
입대를 위해 신체검사를 받게 되었음. 결과는 4급. 공익판정을 받았는데.
4급 판정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새엄마가 바로 보인 반응은 재검받으러 가자 였음.
군대 2년이라도 서로 얼굴을 안보고 살자는 말에,
눈이 안 좋아서 공익 판정 받았었는데, 병원가서 치료 받고 나서 재검을 신청해서 3급 현역 판정 받았음.
진짜 친한 친구들은 재검받고 군대를 간 진짜 이유를 알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내가 투철한 애국심으로 군대를 자원해서 간 줄 알고있음...
군생활은 빡셌지만, 집보다 훨씬 나았음.
08년1월 군번, 그 해 6월 이등병이 사고를 쳐서 고참들이 한번 싹 영창을 간 후엔 달라졌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매일 밤 점호 후 소등전까지 잘못한게 없어도 군기를 잡기위해 일단 맞고 보는 부대였지만
밥도, 스트레스도 집보단 나았음.
아 본인처럼 병을 치료하거나, 학력이 부족했는데 학력을 채우거나, 영주권있는 사람이 자원해서 입대했을 경우
병영자진이행 모범병사 문화탐방이라고 자진이행 병사가 육해공군 전체중 100명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병사들을 데리고 9박 10일로 전국을 관광하고, 휴가도 받는 자진이행 병사 장려 프로그램이 있었음.. (본인은 09년도 참가)
그 병역자진이행 모범병사 문화 탐방 2일차에 모여서 자고 있는데, TV에서 무슨 운동선수들 병역 회피 브로커들 잔뜩 잡았다는 뉴스가 뜬게 유머..
이렇게 길게 쓸 생각 없었는데,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본론으로 돌아가서.. 후다닥 정리하자면
작년 11월 부터 교회를 안나가겠다고 말을 했음.
믿음 한톨 없이 그나마 덜 욕먹으려고 무려 10년이 넘게 따라다닌 교회였으나,
교회에서 뭐 핸드폰이라도 만졌다간 사탄새끼니 뭐니, 무슨 시계한번 봤다가 죽일 놈이 되는 것도 지긋지긋해서 안나가겠다고 했음
그리고 돌아온 대답이 그럼 일요일에는 집에 있지 말것이 조건이었음
말이 일요일에 집에 있지 말 것이지.. 본인 나이가 25살 건장한 남잔데, 통금 시간이 11시임.
통금 시간이 있는 이유는 위험해서가 아니고, 새엄마가 11시에 자는데 그 이후에 들어오면 잠에서 깬다는 이유..
일요일 0시 부터 24시까지 집에 있지 말 것.
얼핏 보면 하루지만 통금시간 때문에 일요일밤 24시가 지난다고 집에 들어가질 못하기 때문에 토요일, 일요일 모두 밖에서 자고 들어와야 함.
그 11월 교회를 안가는 이후로, 밥-김치도 집에서 못 먹게 되었고,
진작에 빨래, 청소는 직접 했으나, 새엄마가 이제 자기가 한 것은 손도 대지 말라고 해서
집에 내 수건, 치약 등등을 따로 사다놓고 완전히 잠만 자며 살고 있음. 얼굴도 보이지 말고 살라고 해서, 새벽 5시 45분에 새엄마가 수영을 가면, 오기 전까지 빨래하고, 청소하고, 옷갈아입고 밥도 못 얻어먹고 나오는 생활이 1년이 다 되어감..
토요일, 일요일
일주일에 이틀을 밖에서 자야 하는데, 밥을 세끼 먹기 아까워서 하루에 두끼만, 학생식당에서 아침 저녁만 먹는 상황인데
찜질방에 매일 갈 수도 없다보니,
결국 1년간 잠깐잠깐 활동했을 뿐 사실상 유령회원이었던 동아리 방에 들어가서 자거나, 학교 도서관에 가서 자고,
새벽 4시 아무도 없을 때, 화장실 가서 세수랑 머리만 감고 나오고 하는 생활을 1년간 해왔음.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토/일요일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거에 재미들렸는지,
공휴일에 들어오지 마라, 아버지 출장가 있을때 들어오지 마라 등 점점 늘려나감..
어차피 올해만 지나면 졸업해서 일하면서 나가 살 것이라 참고참고 지내는데,
오늘 아버지가 출장 가는 걸 모르고 있었음..
학교에서 집에 가자, 아버지 출장갔다고 들어오지도 못하게 문을 있는대로 다 잠그고 나가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평소에 나가서 자는 날에는 미리 수건이나 세면도구, 갈아입을 옷, 저번 주 부터는 밤에 추우니까 핫팩도 들고 다니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나와서 도서관에서 잘까하다가
동아리방에 아무도 없는 걸 보고 들어가서 의자 몇개 이어서 자고있는데,
새벽 2시에 동아리 몇몇이 와서 동방에서 시험끝난 기념 2차 놀자판..
술 한번 사준적도 없고, 동아리 행사에 참여한 건 1년 반전이 마지막..
해준 것도 없는 유령 회원 선배.
저 사람은 왜 맨날 행사는 참여 안하면서, 아무도 없을 때 항상 자고있는 건가,
라는 표정으로 들어온 후배들 앞에서
주섬주섬 누워있던 의자를 정리하고, 신경쓰지 말고 놀라며 죄인처럼 쫓겨나듯이 나가,
문을 닫고 난 뒤
저 선배는 왜 여기서 자는 거야. 집도 가까우면서.. 라는 소리를 문 밖에서 들으면서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자꾸만 듬..
하도 맞아서 상처 투성이인 몸.
중고등학교때와는 달리 술한잔 할 돈이 없으면 어딘가 하소연 할 수도 없는 인간관계.
술한잔 하고 싶어도 텅 비어버린 주머니..
원하지 않은 학교를 선택하고,
여자친구와 헤어지라면 헤어지고,
남들 다 빠지고 싶어하는 군대를 제발로 좋다고 걸어들어가야했고..
그냥 내 처지가 불쌍해서 이 야심한 밤에 글 한번 올려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