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하등인간
게시물ID : panic_5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시간소년
추천 : 13
조회수 : 22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7/08/05 16:02:47
본격 SF 공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수있다면 만들고싶은작품



-----------------------------------------------



지배당하는 것은 최악의 일이지만, 저항하다 죽는 것도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 만약에 노예 생활이 몸에 맞는다면 그냥 그대로 생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들은 노예들에게 관대했다. 나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은 원래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고, 별다른 차별을 느끼지 못했다. 

지배라는 말을 쓰는 것도 어쩌면 합리적이지 못했다. 전쟁이나 지배는 차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배당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행동지침이 발표되었지만, 차별이 없으니 달라질 것도 없었다. 방송에 나온 아나운서는 지구라는 별이 어떤 것에 지배당했으며 그들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희극적인 사건. 사람들은 방송을 보고 웃었다. 뉴스를 잘 보지 않는 어린 아이들도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술안주는 그런 이야기들이 대신했고, 나도 맥주 앞에, 땅콩 대신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인터넷에도 장난스런 글이 올라와서 온통 게시판을 어지럽혔다. 늘 듣던 지구라는 말이 지배라는 단어와 함께 쓰이자 사람들에겐 그 단어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다시 방송이 나왔고, 같은 내용이었고, 아나운서는 웃지 않았다. 방송국에는 전화가 폭주했다. 하지만, 전화기를 붙잡은 사람은 아나운서가 화면을 통해 말했던 정보 이상을 얻지 못했다. 방송국도 사실을 잘 몰랐다. 

곧,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나섰다. 그리고 아나운서가 했던 얘기를 반복했다. 덧붙여서 그들이 더 이상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냥 행동지침에만 따라달라고 스피커는 대표의 말을 뱉어냈다. 곧이어 다른 나라의 대표들이 다른 나라 말로 같은 말을 내뱉는 모습이 방송되었다. 그들이 덧붙인 말도 같았다. 인터넷 게시판은 혼란의 말로 가득 찼지만, 현실은 의외로 조용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신문은 더 이상 그 사건에 대해 토론하지 않았다. 단지 아나운서의 말, 대표의 말을 그대로 적爭塚?광고를 한 면에 실었을 뿐이다. 커다란 사이트에서도 그 일을 공론화 시키는 것을 자제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분위기가 흘러가니 정말로 지배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사이트들을 찾아다니며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물었다. 나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주위에 생긴 일을 말해 주었다. 작은 데모가 있었고,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정부에 항의 하지 않았냐고 물었고, 그들은 항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지배자의 방침이어서 어쩔 수 없다는 말과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아나운서가 처음 말을 한지 29일이 지났고, 나라의 대표가 말을 한지 28일이 지난 날, 우리에게 소포가 배달되었다. 소포에는 통이 들어있었다. 이 항아리 모양의 검은 통은 겉은 매끈한 도자기처럼 생겼고, 광이 나는 왁스가 칠해져 있었다. 사람 얼굴보다 5cm 정도 커 보이는 이 통은 화분으로 쓰기에도 적절치 못해 보였다. 방송은 통의 사용법에 대해 말했다. 

상당히 굴욕적인 일이었다. 아나운서는 통 속에 얼굴을 넣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것은 전 세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게 될 일이라고 했다. 아나운서는 통에 대한 설명을 계속했다. 

첨단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는 복잡한 기계다. 얼굴을 넣으면 첨단 장치들은 파란색 눈을 뜬다. 얼굴 골격, 눈 속의 핏줄 등등을 분석해서 정보를 지배자의 중앙정보관리국으로 보낸다. 지배자가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경보가 울렸을 때나 밤 12시에 얼굴을 넣지 않는다면, 바로 탈영자 취급을 받는다고, 꼭 지켜달라고 당부까지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지배자의 뜻에 따라 처벌당할 것이라 했다. 나라의 대표는 통에 얼굴을 넣는 장면을 스스로 연출했다. 사람들은, 대표라는 사람이 무릎을 꿇는 장면을 봐야 했으며 비참한 자세로 얼굴 전체를 통 속에 넣는 모습을 기억해야 했다. 

사람들은 분개했다. 인터넷은 폭주했으며 큰 소리로 선동하며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이것에 대항한 행동지침에 대해 말해주기를 바랬다. 지배자에 맞서서 뭔가를 하자는 말이 흘러나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규방송은 변함없었고, 간간이 화면 밑쪽에 통에 머리 넣는 것을 잊지 말라는 당부의 말만 깜빡거렸다. 
“도대체 지배자란 놈이 어떤 놈이기에, 세상이 이러냐! 통에 얼굴을 넣다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보이지도 않고, 어떻게 세상을 지배한단 말이냐!”
아버지는 실체가 없는 상대를 욕했고, 그 말은 내가 다 주워 담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통을 땅에 내리치려는 자세를 취했고, 우리 가족은 통이 깨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곧 아버지는 통을 내려놓았고 그들에 말에 따르며 잠시 상황을 파악하자라는 말을 던졌다.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아버지를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태양이 땅을 비추는 곳과 밤이 찾아온 그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통을 깨뜨린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그런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다음 날 경찰이 그를 연행했고, 다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은 더 이상 통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통에 얼굴 넣는 생활을 하며 6년을 지냈는데, 아직 경보가 울린 적은 없었다. 적어도 12시까지만 집에 들어가면 아무 문제가 없었고, 차라리 규칙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통에 얼굴을 넣는 일에 익숙해졌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친구들은 학교 앞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학교 앞으로 긴 혀처럼 늘어져 있는 길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축제 계획으로 머리 속이 복잡했으나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다른 것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 졌다. 

저녁이 찾아오는 대학가에 길거리에 늘어선 상점들이 불을 켤 무렵이었다. 나는 후배와 함께 밥을 먹고 들어오는 길이었고, 하늘이 좀 흐린 것이 기분 나빴을 뿐, 다른 징후는 없었다. 살인이 일어나기 좋은 그런 시각도 아니었고, 불들이 환하게 길가를 밝히고 있어, 마땅한 장소도 아니었다. 

남자는 키가 컸으나 광대뼈가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낼 만큼 말랐다. 그리고 단발머리. 보통 사람은 소화하기 힘든, 어쩌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이 어두웠다. 오랫동안 어둠의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한번에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여자는 축 늘어진 채로 목에서 피를 뿜어댔다. 여자의 뇌는 피가 자신의 몸을 벗어나길 원하지 않았겠지만, 심장은 무심하게 펌프질을 계속했다. 남자의 짧은 단도는 목을 반 정도 도려낼 때까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상점의 불빛 앞에서 멈춰버렸다. 어느 서양화가의 그림 속의 한 장면 같은 느낌. 주저앉아 버린 여학생들도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도 살인자를 말리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장면이지만, 달려들 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움직임을 막은 것은 남자의 한마디였다. 
"나는 지배자의 명을 받았다!" 
지배자. 그는 지배자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맡아 보지 않아도 냄새가 날 것이 뻔해 보이는 입으로 외쳤다. 사람들은 그 말에 굳었고, 아무도 용기를 내지 못했다. 지배자라는 존재를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지배자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확인과는 상관없이 모른 척 자리를 지나쳤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지배자와 관련된 사항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배였다. 

피는 보도블록 위를 물들이고, 여자는 괴상한 자세로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는 잠시 여자를 바라보다가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는 사람들이 보였고, 그 중 몇은 경찰서의 번호를 눌렀다. 나는 그 몇 명에 끼지 않고 학교 정문을 향했다. 
"넌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
친구는 답답하다는 듯이 나를 몰아세웠다. 동아리 방의 기타들이 흉물스럽게 창가 쪽으로 기대어 있다. 나는 그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쩔 수 없었어. 지배자의 명을 받았다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거짓말일 것이 뻔하잖아. 설마 지배자가 길 한 가운데서 살인을 하라고 시켰겠어?"
보도블록 바닥에 뿌려진 피가 엉겨서 내 머리 속의 혈관들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영상이 떠나질 않았다. 
"거짓말일 것이 뻔하다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지? 네가 지배자에 대해 아는 것이 뭐가 있어?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존재야."
분노했던 친구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에는 대항할 방법이 없어. 확신이 없으면 사람은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야. 너 오늘 통 속에 얼굴 넣지 않을 수 있어? 그렇게 못하잖아. 확신이 없으면 인간은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어." 
우리는 서둘러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지배자에 대한 논쟁은 예전부터 많이 있어왔고, 언제나 생산성 없는 대화였으며, 약간의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평소에 말이 많던 동아리 후배의 얼굴을 파랗게 질린 채 진정이 되지 않는 듯 했다. 

나는 가로등이 낮게 깔린 구름을 빨갛게 물들이는 장면을 바라보다가 책을 주섬주섬 챙기고 동아리 방을 나왔다. 어느 커다란 짐승의 내장 같은 복도를 지나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인 지하철로 향했다. 도중에 살인이 일어났던 장소를 지났으나 핏자국 말고는 사건을 증명해주는 단서가 없었다. 보통 살인 사건에 그려져 있는 하얀 테두리의 그림 따위는 없었다. 핏자국조차 내일이면 사라져 버릴 듯이 희미해져 있다.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즐거운 표정으로 거리를 지나쳤다. 

집에는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여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잠시 동생들과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12시가 가까워졌다. 동생들과의 수다에 살인 사건 얘기는 넣지 않았다. 
“자……. 11시 50분이다. 준비해라.”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 ‘준비’라는 말에는 머리를 넣을 준비와 잠을 잘 준비라는 뜻이 들어 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늦게 자는 것을 싫어하셨다. 참외를 깎던 어머니가 먼저 통 앞으로 다가갔다. 참외 끝에 아슬아슬하게 껍질이 걸려 있다. 동생은 손가락으로 껍질을 걷어내고, 참외를 오물거린다. 
“어머니, 아직 9분이나 남았어요.”
“그게……. 불안해서 말이지. 아무리 오래 해도 익숙해지질 않네.”
어머니는 먼저 통에 얼굴을 넣는다. 무릎을 꿇은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텔레비전에서 나오고 있는 토크쇼는 재미가 없다. 화면 밑에 12시가 되어간다는 표시가 나온다. 토크쇼에 나오는 사람들은 생방송에 대비해서 통을 가져왔다. 양해의 말을 한 후에 연예인들과 가수는 통에다 얼굴을 넣었다. 여러 사람이 무릎을 꿇고 얼굴을 통속에 넣은 모습이 방송되고, 화면을 관리하는 사람도 통에 얼굴을 넣었는지 다른 화면을 내보내지 않았다. 
-J씨는 요즘 음반 준비로 바쁘다면서요? 
사회자는 자신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 통 속에 마이크를 집어넣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버지가 통속에 얼굴을 넣었고, 동생들도 그렇게 했다. 우리 집에 통 할당량은 다섯 개. 이제 하나 남은 것이 내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 밑은 5분전을 가리키고 있다. 검은 색 줄 위에 쓰인 빨간 글자들이 깜빡인다. 내 심장 박동을 흉내 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매일 하던 일인데 이상하게 불안했다. 토크쇼 출연자 중, 남은 두 명이 통속으로 얼굴을 넣고 있었다. 귀에서 어깨까지 늘어뜨린 체인이 바닥에 닿으며 소리가 났다. 
나도 통 앞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그 속으로 처박았다. 그런데…….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얼굴을 넣으면 시스템이 시작되고, 파란색 불이 들어오는 정상이고, 지금까지 늘 그래왔었다. 
“어? 이거 불이 안 들어오네!”
나는 통에서 얼굴을 뺐다. 아버지는 통 속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불이 안 들어오다니?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그런 적 없었잖아!”
아버지의 목소리는 통 속에서 울림이 되어 내 귀로 들어왔다. 심장이 고기 기름 튀듯이 뛰기 시작했다. 시야가 좁아지고 아찔했다. 
“모르겠어요. 고장……. 고장난건가?"
동생들의 통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장 났다고? 그럼 어떻게 해?”
모두들 무릎 꿇은 정적인 동작이지만, 제각기 떠들어대는 소리가 거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통속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가족들이 부러워졌다.  
“아……. 관리국! 관리국으로 빨리 뛰어가! 거기엔 늘 여분의 통이 있었어.”
“관리국이요?”
“아파트 단지 모퉁이에 붙어 있는 곳 있잖아!”
아버지 말이 빠르고 통속의 울림 때문에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어느 곳을 뜻하는 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 줄로 무릎을 꿇고, 얼굴을 통 속에 넣고 있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파란 눈들은 이미 그들의 정보를 전송하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움직이는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이미 같은 자세로 통 속의 파란 불빛을 마주하고 있을 테이니 조용한 것이 당연했다. 하늘에는 별도 보이지 않았다. 이마의 땀은 내 발소리에 맞춰 흘러 내렸다. 조금만 늦는다면 경찰에 연행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끌려가는 곳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아직 돌아왔다는 사람의 말을 듣지 못했다. 

호흡이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속도를 늦출 수는 없다. 길모퉁이를 돌자 ‘산곡2동 관리국’이라는 팻말이 나타났다. 그 옆에 관리국이 있다. 11시 59분. 잘만하면 시간을 맞출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관리국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늘이 머리 위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가쁜 호흡사이로 다리의 힘이 다 빠져 나가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짙은 안개가 내 귓구멍을 타고 뇌 주름을 무겁게 눌러댔다. 
늦었다…….
손목시계는 PM 12 라는 글자를 환하게 내뿜고 있었다. 6년 동안 한 번도 손목시계가 이 시간을 가리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내 얼굴은 통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살짝 웃음이 나왔다. 절망이 크면 웃음이 나오는 것인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내일 아침이면 경찰들이 나를 체포하러 올 것이고, 면회도 가능하지 않은 무언가가 나를 기다렸다. 빨리 집에 가서 가족들이 얼굴이나 실컷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기약할 수 없는 시간들 동안 사진으로도 못 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다리는 어느 때보다 더 무거웠다. 등을 흠뻑 적시고 있던 땀이 식으면서 불덩이처럼 뜨거웠던 내 심장을 식혔다. 오히려 추위까지 느껴졌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감옥에 가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장면을 봐야 했다. 통 앞에 가족들 모두가 쓰러져 있었다. 네 명분의 피는 카펫을 짙게 물들이고, 그 피는 잘려 있는 목에서 쏟아져 나왔다. 통 속에 가족들의 얼굴이 피범벅이 된 채로 놓여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나라의 대표의 연설이 나오고 있었다. 내 정신은 지상을 떠난 듯이 혼란스러웠지만, 귀는 그의 연설을 한자도 빼놓지 않고 잡아넣었다.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지배자는 더 이상 우리가 쓸모없다고 말했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과 몇 종류의 동물, 식물이 오늘부로 멸종할 것입니다. 지금 발표는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을 위해 방송되고 있습니다. 이 방송은 지배자의 뜻에 의해 하는 것이며 방송이 끝난 뒤 저도 생을 마감할 것입니다. 통 속에는 날카로운 셔터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자정을 기해서 셔터가 작동되었습니다. 세계 인구의 99%이상이 목이 잘렸습니다. 기계의 오작동에 의해 몇몇 사람이 살아남았고, 지배자를 피해 오지로 숨은 사람들이 아직 목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배자는 인간이 지구상에 살아남기를 원하지 않고, 그들의 뜻에 따라 남은 1%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자결하십시오. 지배자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멸종시킬 것이라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지배자를 피해갈 순 없습니다. 하등한 인간들은 오늘 내로 완전히 멸종될 것이라고 뜻을 전달했습니다…….

텔레비전을 껐다. 거실은 고요해졌다. 다섯 명이나 있는데, 어떻게 이토록 고요할 수가 있을까. 지배자.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지구의 인류를 멸망시키려 하는 것일까. 왜, 내 가족들이 한번도 보지 못한 존재에 의해서 목이 잘린 비참한 자세로 죽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두피를 열손가락으로 긁으며 소파에 앉았다. 핏줄을 타고 고통이 타고 올라왔고, 심장 박동에 맞추어 망치로 귀 옆을 쾅쾅 치는 것 같았다. 피 냄새가 거실에 진동했고, 조금 뒤 후각세포는 피로에 빠져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피비린내 풍기는 파란 눈이 나를 보았다. 윙-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 장은호님 작품

여기서 끝은아닌거같은데 ;; 뒷내용이 더없는건가요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