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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관과 보급병 이야기.
게시물ID : military_371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eio
추천 : 70
조회수 : 8901회
댓글수 : 25개
등록시간 : 2014/01/15 02:10:06
 
 계급이 올라 이제는 더이상 오를곳이 없는 병장이 되고 분대장을 달고 난 후 내 군생활엔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내무실을 옮기게 된 것이었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지만 각소대 화기분대 인원들과
본부소대 계원들로 이루어진 내무실을 따로 만들게 된 것이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입장에서 봤을땐 그리 탐탁치 않은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일말의 재고도 없이 우린 그렇게 대역죄인이라도 된것처럼 본부소대로 귀양아닌 귀양을 가게 되었다.
 
역시 나의 우려는 그대로 들어맞는 듯 했다. 소대마다 생활 분위기가 틀리고 내무생활에서 맡은 임무가 틀리기 마련인데
갑자기 한곳에서 같이 생활을 하게 되니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로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고 괜한 기싸움으로 인해
분위기가 냉랭해 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특히 계원들과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우리는 밤새 근무를 나가고 낮에 잠을 잤고
계원들은 평범하게 낮에 일하고 밤에 잠을 잤기 때문에 생활 패턴 자체가 판이하게 달랐고 내무생활 분위기 또한 우리와 달랐다.
우리들은 선임이 하는일 과 후임이 하는일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예전군대라면 계원들은 그냥 내키는 사람이 내킬 때 하는
프리한 분위기였다. 이것이 선진병영인가 하는 문화충격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걸 받아들이기엔 이미 나는 너무 빈티지한 
군대문화에 익숙해진 사람이었다. 계속되서 악화되기만 하는 분위기에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먼저 손을 내밀기로 마음 먹었다. 일과가 끝나고 근무를 나가기 전에 먼저 솔선수범하여 청소를 시작했지만 지금 보고있는
티비프로만 다 보고 청소하자는 계원 후임의 말에 나는 완전히 맛탱이가 가버렸다.
 
그리고 또한가지 나를 불편하게 하는건 보급관님의 존재였다. 전에 있던 보급관님은 사단으로 전출을 가고 새로 보급관님이 부임했는데
전에 있던 보급관님과는 달리 그는 매우 깐깐한 스타일이었다. 전의 보급관님이 동네아저씨 처럼 편한 스타일이었다면 새 보급관님은
완전 상남자에 리얼솔져 스타일이라 항상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자주 오지는 않지만 올때마다 자기 사무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우리 내무실로 와서 생활하고 잠을 자 우리를 항상 불편하게 만들었다. 힘들던 시절을 버텨내고 이제 좀 군생활이 편해지나 싶었더니
이게 왠 날벼락인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렇게 내 남은 군생활은 고통으로 얼룩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시간이 지나자 내 생활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초반의 갈등도 어느정도 해소되어 이제는 서로 같이 생활
하는데 적응이 되었고 계원들과도 제법 친해지게 되었다. 나의 군생활은 어느덧 그 전보다 더 윤택해지고 있었다. 계원들과 친해지니
남들 하나 챙겨줄 때 두개를 채겨주기도 하고 남는 부식 하나라도 더 챙겨먹을수 있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보급관님과 친해진 것은
큰 수확이었다. 남들보다 자주 보다보니 이런저런 얘기들도 많이 나누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보급관님이 우리를 대하는 것도
전과 달리 많이 살가워졌다. 그리고 그 효과는 굉장했다.
 
한달에 한 번 씩 실시하는 즉각조치 사격이 있는 날이었다. 근무에 들어가기 전에 바닷가에서 실사격 훈련을 하는 날이었는데
그때마다 중대장님과 보급관님이 항상 동행을 했다. 근무지에 도착해 훈련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옆쪽 백사장에서 불빛이 보였다.
차가 한대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밤에는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었지만 낮에는 근처에 해수욕장도 있고 또 주변에 모텔도 많고
밤바다에서 은밀한 밀회를 즐기기 위해 가끔 민간인들이 들어올 때가 있었다. 그럴때는 직접 가서 통제를 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간부들이 잔뜩 있는 자리에 민간인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보통은 가서 돌려보내면 군소리 없이 돌아갔지만 가끔 돌아가지
않고 버티는 진상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아주 제대로 걸린 날이었다. 이미 한참전에 출발했던 후임은 함흥차사가 되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결국 나까지 그쪽으로 가게 되었다. 도착해보니 왠 남녀와 후임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술이라도 한잔 거하게 걸쳤는지 벌건 얼굴로 내가 오자마자 걸쭉하게 욕부터 날리던 그 사내를 보니 아.. 개머리판은 이럴때
쓰라고 만든거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화를 누르고 좋게 이야기 했지만 그는 끝까지 막무가내였다. 그러다 결국 보급관님이
몸소 행차하셨고 나는 최소 군장이구나 라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덩치 하시던 보급관님을 본 그 사내는 잠시 움찔했지만 술기운인지 아니면 여자 앞이라 그런건지 기죽지 않고 폭언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런 진상들은 평소에 모여서 주기적으로 강의라도 듣는건지 아니면 전국진상연합에서 내려온 프로토콜이라도 있는건지 항상
비슷한 멘트를 날렸다. 내가 내돈으로 세금내고 내가 오겠다는데 니들이 뭔데 오라가라 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보급관님이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해졌다. 보급관님은 몇마디 하지 않았다. 당신들 지금 여기 있는것 자체가 국가보안법 위반이고
우리는 지금시간부로 실사격 훈련을 할건데 어디 계속 그자리에 있어보라는 말이었다. 누가 잘못인지 내일 뉴스에서 한번 봅시다 라고
말하고 대꾸할 틈도 없이 그대로 돌아서 가버린 보급관님의 뒷모습을 사내는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온 보급관님은
한참을 그쪽을 응시했다. 아직까지 차는 그대로 있었다. 그러자 보급관님은 확성기를 꺼내들더니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밤바다에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졌고 차는 빛의속도로 백사장을 빠져나갔다.
 
보급관님이 처음 부임했을때 돌던 소문이 사단에서 근무하다 욱하는 성질 때문에 대대 보급관으로 좌천된거라는 소문이었는데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그냥 부풀려진 소문쯤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 소문은 어쩌면 과장이 아닌 축소된 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고 이제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걱정하고 있는데 내 걱정과는 달리 보급관님은
오히려 날 보며 씩 웃고 말 뿐이었다.
 
뜻밖의 행운은 다시 찾아왔다. 이제는 새로운 생활에 완전히 적응해 같이 내무실을 쓰는 다른소대 사람들과도 원만하게 지낼 수 있었고
계원들과도 친해졌다. 특히 그 중에 보급계원으로 있던 후임과는 우연히 같은지역 사람인 걸 알게 된 후 많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러다 분대 후임 하나가 사고를 치게됐다. 가스마개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사실 가스마개를 잃어버리는 건 원주민식으로 치면
장작으로 만든 길을 맨발로 밟고 걸어간다거나 높은 곳에서 덩쿨만 묶고 뛰어내린다거나 하는 성인식과 같은 일에 불과했다.
일이등병때 통과의례 같이 한번은 겪고 지나가는 일이라 욕한번 먹고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남는 가스마개가 없다는
것이었다. 보통 전임분대장들이 한두개씩 물려주고 가는 터라 소대에 남는 가스마개가 한두개 쯤은 있기 마련인데 그때는 남는게
없었다. 이미 다른 후임들이 잃어버린걸 메꾸다 보니 남는 가스마개가 없었고 다른 소대를 돌아가며 물어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러면 상황이 곤란해지는 것이었다. 안그래도 전장비다 뭐다 검열을 앞두고 재물관리에 신경쓰고 있던 시기였기에 가스마개를 잃어
버렸다고 보고하는 순간 후임이나 나나 앞으로의 휴가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참을 헤매다 포기하려던 순간 나에게 구원의 빛이
다가왔다.
 
보급병 후임이 내 얘기를 듣고는 조금만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일이 지난 후 그 후임이 나를 불렀다. 그가 내민건 가스마개였다.
아니 이 귀한걸 어디서 구했냐고 묻자 그 후임은 공무차 사단에 다녀오면서 사단에 있던 동기에게 LED라이트와 교환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개념없는 발언으로 내 맛탱이를 가게 했던 후임은 다시한번 감동으로 내 맛탱이를 가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 후임은 가스마개를 등과교환한 강철의 보급술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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