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을 한다니 친구들이 소나 개나 소개팅을 한다며 아우성이다.
질투와 시기로 얼룩진 녀석들의 악담을 애써 무시하며 평소에 행실을
똑바로 하면 본인처럼 소개팅이 물밀 듯이 몰려온다고 일침을 놓았다.
마치 '은전 한 닢'에 나오는 걸인처럼 평소에 소개팅을 구걸했던 내 평소
행실은 일절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소개팅을 철저하게 대비하겠다고 다짐한 나는 화장실에서조차 깔깔 유머집
이십칠 페이지까지 정독하며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있을 침묵 불상사를 메꾸기 위한 비장의 카드라고나 할까.
최불암 시리즈가 없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소개팅이 최불행이 되지 않았을까.
구세주 같은 그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
소개팅 이박삼일 전에 소개팅 장소에 나가겠다며 텐트를 챙기던 나를 놀란
친구들이 겨우 뜯어말렸다. 결국 당일 두 시간 전에 당당히 당도한 나는 어제
외운 최불안 시리즈를 안절부절 외워대고 있었다.
"K씨 맞으시죠?"
이... 이랏샤이마세. 우당탕탕 인사를 허겁지겁했다.
심장은 소개팅을 주선한 자에게 금은보화를 하사하라며 쿵쾅거리며 컨트롤
비트를 던지고 풍악을 울리고 있었고 머리는 어딜가야 혼인신고서를 작성할
수 있는지 검색을 제멋대로 컨트롤 하고 있었다.
그 어렵다는 고준희 머리가 제대로 어울리는 그녀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는데 그 모습을 보고 어디 불편하시냐고 상냥하게 걱정을 해줬다.
마음은 웃는건데 얼굴이 썩어서 썩소가 나오는 거라고 당장 외치고 싶었지만
아 의자가 굉장히 불편하다며 괜스레 불편함을 호소해서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그녀 덕분에 전형적인 소개팅이 식순에 의거
진행이 되고 있었다. 보통 의례적인 응답이 끝나면 침묵도 관례처럼 진행되어
왔는데 이례적으로 그런 공백이 없었다.
굳이 네이버 지식인처럼 두 번째 소개팅 질문으로 뭘 해야 할까요 내공 겁니다
검색할 필요없이 나무위키처럼 대화를 물고 물어 자연스럽게 화제가 이동됐다.
그동안 어두운 새벽 약수터에서 홀로 배드민턴을 치는 기분이었는데
돌아오지 않던 셔틀콕이 아침 햇살을 등지며 하늘 위로 두둥실 떠 올라 되돌아왔다.
신나게 떠들다 보니 대화는 과거 연애담으로 흘러왔다.
그딴건 없다고 버럭 화를 내고 싶었지만 무수한 경험을 해서 하나를 꼭 집어 얘기
할 수 없다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넘겼다. 식은땀이 흘렀지만 그래도 믿어주는
그녀는 천사임에 분명하다. 그녀는 왜 소개팅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인지 본인도
모르겠다며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고등학교 때 같은 학교 같은 동아리 남자애와 공부를 했는데 그는 재수를 했다고 한다.
그는 화가 나서 군대를 갔고 그녀는 망부석처럼 기다렸지만 제대 후에 유학을 가버
렸다고했다. 그에 비관한 그녀는 다신 사랑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했다.
어쩐지 재수가 없더라니, 거기가 어느 나라요 라며 리암 니슨 빙의가 되고 싶었지만
다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맹세치고는 빠르게 벌써 그녀의 두 번째 남자 얘기가 진행되
고 있었다.
대학 다닐 때 미팅 갔다 잠시 스친 플레이보이를 만나 학을 뗐다고.
역시 남자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그녀가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걸 당최 믿을 수 없게도 또다시 세 번째 남자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같은 직장 같은 기수에 남자 동료를 만났는데 첫눈에 반해 버렸고 매일
집을 바래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 집에서 둘의 사이를 반대를 했고 심각한
마마보이였던 남자와 헤어졌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선을 보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여자와 양다리를 걸쳤다는 스토리였다.
혹시 직업이 아침드라마 주인공이시냐고 묻고 싶었다.
당최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혹시 아이가 있는건 아니냐고 묻는다.
왠지 시선이 불룩한 내 배를 보고 있길래 너무나도 불쾌해서 흉부에 힘을 주고 배에
힘을 줬더니
갑자기 흐릿흐릿 주변에 몽롱해지고 초점이 흐려졌다.
오랜 잿빛의 유행가가 라디오에서 점점 선명해진다.
그 순간 누군가 날 흔들며 깨운다.
"K씨 소개팅 해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