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박정희 정권에 빼앗긴 아버지, 아들이 말한다
때: 2012년 9월 26일(수) 오전 10시
곳: 정동 프란체스코성당 1층
주최: 민주행동, 역사정의실천연대
주관: 장준하기념사업회, 최종길교수를추모하는모임, 49통일평화재단,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대담 박정희 정권에 빼앗긴 아버지, 아들이 말한다
-장호권(장준하 선생), 송철환(송상진 선생), 최광준(최종길 교수)
김형태(변호사, 의문사위 전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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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역사 속에 묻지 마라
70년대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보릿고개를 없애 줬다는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에 사람들은 어찌 살아야 했는지 궁금한가요.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으로 전 국민을 옥죄던 70년대에 살기 위해서는 훌륭해서도 안 되고, 똑똑해서도 안 되고, 바른 말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평범하다 해서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동네에서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다 불만을 터뜨리기라도 하면 어디론가 끌려가 반죽음이 되어서 나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막걸리 반공법이라 불렸는데, 그 수가 4만이 넘는다 합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 수시로 벌어졌습니다. 머리가 조금 길면 길거리에서 가위질로 잘려나갔고, 짧은 치마를 입어도 경범죄로 처벌받았습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는 글귀가 있으면 금서로 판매 중지되었고, 금지곡으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수류탄 모형을 던지는 교련이 수업이고, 학교․언론사 등에 정보기관원이 상주했습니다.
그래도 살 수는 있었습니다. 물가가 매년 20% 이상 올라가고, 새마을운동으로 포장된 시골에서 살 수 없어 수많은 사람이 서울로 몰려와 하층민을 이루어도, 청계천 낡은 건물 다락방에서 미싱을 돌려도 하루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난한 일상의 행복도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주위의 불행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민주주의를 염원하거나 생각을 나누어도 생명이 위험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는 학자여서도 곤란합니다. 거미줄처럼 감시망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유럽거점간첩단 사건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고, 국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최고의 민법학자가 간첩의 수괴가 되어 7층 화장실에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독립군, 박정희 독재정권과 맞서 재야 대통령으로 불리며 전 국민의 존경을 받던 장준하 선생이 거사를 앞두고 약사봉 계곡 절벽 아래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기자, 교사, 중소기업 회장, 대학생 등 민주인사가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기 위한 간첩 세력으로 몰려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집니다.
서울대 교수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둘러싸여 마석 모란공원에 묻혀야 했고, 서대문구치소에서 유족 몰래 빼돌려진 여덟 분의 사체는 벽제 화장장에서 백골이 되었습니다. 장준하 선생님은 천주교 공원 묘지에 묻힐 수 있었고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사라지게 되고, 간첩이 되어서 두 번 다시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집 밖에 놀러 나간 어린 아이가 간첩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당해야 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24시간 감시가 따르고, 먹고살 길도 막혀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습니다. 결국은 도망치듯 이사를 다녀야 했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고국을 등지고 먼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여기 세 사람이 있습니다. 박정희 유신시대에 아버지를 빼앗긴 채 빨갱이 혹은 간첩의 자식이 되어 40년을 살아내야 했던 세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옥 같은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그들이 바라보는 민주 국가는 어떤 나라일까요.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된 세 분들에게서 우리가 살아야 할 미래를 보고자 합니다.
최종길 교수 사건(1973. 10. 19) 당시 9살의 나이였던 최광준은 법학교수가 되어 있고, 인혁당재건위 사건1975. 4. 9) 당시 15살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송철환은 중년의 나이를 넘겼으며, 장준하 선생 사건(1975. 8. 17) 당시 27살의 장호권은 월간 사상계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부모를 잃고 고국에서 살 수조차 없어 장호권 선생은 싱가포르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고, 어린 최광준도 지인의 도움으로 독일에서 자라나, 성인이 되어서야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아버지의 죽음이 밝혀지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한 자의 처벌도, 양심고백도, 반성도 없는데, 그분들의 죽음을 역사에 맡기자고 합니다. 한 가족의 아버지를 죽이고, 가족을 파탄 냈으며,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았던 자의 딸이 심심한 위로를 표한다고 합니다. 5․16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고, 장준하 사건은 이미 끝난 사건 아니냐고 반문한 사람이, ‘두 개의 판결문’ 운운하며 인혁당은 유가족을 두 번 죽인 사람이 유족이 원한다면 등 두드려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누가 70년대를 과거라 합니까? 그때 그 처절한 삶과 죽음의 기록을 역사라 할 수 있습니까? 민주주의의 대장정에서 산화해 간 분들의 삶을 배우고 실천하는 가족 앞에서 누구도 감히 이제는 잊으라, 묻어두라 말할 수 없습니다. 70년대를 뜨겁게 살다 돌아가신 분들의 진실이 완전히 밝혀지고, 명예가 회복되지 않았는데, 사과를 받을 일도 화해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국가의 책임을 다할 때까지 가족은 가족의 몫을 다하려 합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고 깨우치는 일입니다. 37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장준하 선생의 유골에 참혹한 상흔을 보고 깨닫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잃은 아들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곧 저는 아버님으로부터 말씀을 하나 들었습니다. “내가 37년 만에 너희 앞에 나타난 것은 아직도 못 이룬 일이 있으니까 그것을 해결하라.” 하는 말씀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부터 다시 저의 분노와 한을 삭히고 아버님이 못하였던 일을 갔다가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작금 아직 미완이 됐고 정말 비참한 우리 과거의 역사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런 상황에서 또 다시 친일, 충일, 군사독재 박정희로부터 이어져서 전두환까지 오는 이 잔당들이 다시 한 번 이 나라를 농락해 보려고 꿈틀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제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장 선생님이 꿈꾸시던 모두가 고루 잘 사는 나라, 그리고 힘들어 하지 않는 나라, 진정한 민주주의가 안착되고 통일의 빛을 볼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과거에 많이 힘들어하시고 희생하시고 고통을 받았던 동지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서 부탁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올해 과거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새로운 나라를 만드느냐 하는 굉장히 중요한 기점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부디 국민이 사랑할 수 있는 나라, 국민이 의지할 수 있는 나라, 그리고 고루 잘 살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어 주실 것을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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