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베일것같은 선명함을 자랑하는 모노리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가장 중요한 메타포이자 초월적 문명과 지적생명체의 상징으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치이죠. 그 의미의 중요성과 신비감을 이보다 더욱 절묘하게 표현해낸
디자인이 있을 수 있을까요.
붉은색 모노아이로 상징되는 공포의 인공지능 HAL 9000
286컴퓨터 조차 존재하지 않던 컴퓨터라는것이 거대한 계산기라는 개념만으로 인식되던
인공지능은 그저 SF소설속에만 존재하던 60년대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가장 큰 업적은 인류를 적대시 하는 인공지능의 등장일것입니다.
HAL의 등장이 이후의 SF영화 들에 끼친 영향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스스로 사고할줄알고 인류를 지배하고자 드는 인공지능
어찌보면 매트릭스의 아버지라고도 할수있는 영화가 바로 스페이스 오딧세이입니다.
그리고 정말 대놓고 오마쥬 했다고 볼수밖에 없는 TARS
사실 실용성이라는 측면을 따지고 본다면 TARS같은 디자인의 로봇은 참 효용이 떨어집니다.
군사용이라고 하기엔 너무 억지스럽죠 다양한 지형지물을 통과하며 전투를 수행하기엔 너무나 비효율적인 디자인입니다.
너무 커서 표적이 되기 쉽고 바퀴가 없기때문에 차량보다도 기동성이 떨어지고 다양한 무기를 수납하고있는것 같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디자인의 인공지능 로봇이 나온 이유는 명백한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대한 오마쥬입니다.
쿠퍼가 '이번엔 조명이 안들어오는군' 이라고 놀리던 장면에서 밝혀지던 파란색의 모노아이 조명을 기억하시죠.
명백한 모노리스와 HAL 9000을 떠올리게끔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디자인입니다.
이렇듯 인터스텔라는 수많은 부분에서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닮은 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 SF영화들중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영향을 받지 않은 영화가 얼마나 있겠느냐만은
크리스토퍼 놀란은 자칫 아류작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창작력이 고갈된 감독이라는 비난에 직면할수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서사와 미쟝센을 적극적으로 차용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에 대한 후배로써의 존경과 찬사의 의미만이 담겨있는 것이었을까요?
오늘 인터스텔라를 두번째로 보고난 이후 저는 정말 크리스토퍼 놀란 이라는 인간에게 경탄을 금치않을수가 없었습니다.
인터스텔라는 큐브릭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도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놀란은 큐브릭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차용함과 동시에 큐브릭의 유산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어떤점에서 그러한지 한번 살펴볼까요.
1.미래예측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는 2001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2001년의 미래를 1960년대의 시야에서 예측한 공상과학 영화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2001년 인류는 목성은 커녕 화성유인탐사 조차 이뤄내지 못하였고
여전히 우주공간은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류에게 닿을수 없는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있죠.
큐브릭은 분명 위대하지만 그가 예측한만큼의 발전을 40년후의 인류는 이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속해있던 60년대는하루가 다르게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인류의 생활양식이 변화해가며 수십년안에
공상과학의 영역에 속해있던것이 현실이 될것만 같았던 그런 낭만적인 미래예측이 가능하던 시대였죠.
인터스텔라속 머피 할아버지의 대사가 그것을 상징합니다
'내가 어렸을적엔 매일같이 새로운것이 쏟아져 나왔지 하루하루가 크리스마스 같았어'
인터스텔라속 미래는 이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핵전쟁도 외계인이 침략도 아닌
고작 농작물을 먹어 치우는 '병충해'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인류는 그것에 완벽하게 패배했습니다.
놀란은 군대도 대학도 천문학자들도 남아있지 않은채 농경사회로 회귀해버린 인류의 미래상을 그려냈습니다.
인류의 과학발전에 브레이크가 없을것이라 생각했던 큐브릭과는 달리 놀란은 인류가 지닌 한계를 명확히 그려냅니다.
달표면에 우주선을 쏴보낼수도 있는것이 인류지만 한낱 병충해에 생존을 위협받을수도 있는
그러한 나약한 존재로써의 인류를 그려냄으로써 한계라는 장치를 명확히 합니다.
2.인공지능의 묘사
HAL 9000의 무미건조한 전자음 그리고 그 음성보다 더욱 무미건조하게 이루어지는 인간에 대한 반란과 살해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인공지능의 모습은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으로 묘사되고
이는 이후 수많은 SF영화의 클리셰로 자리잡았습니다.
놀란은 그야말로 놀라운 방식으로 그러한 클리셰를 박살냅니다. A.I나 바이센테이얼 맨처럼 감성적이고 인간에게 친근한
인공지능에 대한 묘사를 보여준 영화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다수의 영화들은 결국 인간형 로봇이라는 프레임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놀란은 더없이 무기질적인 외양을 지닌 더없이 인간적이고 유머러스한 인공지능을 창조해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 누구도 이 영양갱 스러운 검은 직육면체 덩어리들이 영화의 거의 유일한 개그지분을 담당할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에 입힌 감성이 시리라는 친근한 인공지능으로 탄생했듯
놀란이 예측한 미래의 인공지능은 인류에게 적대적인 반란자도 무조건 복종하는 하인도 아닌 더없이 인간적인 파트너의 모습입니다.
놀란은 HAL 9000과 정 반대되는 성격의 인공지능을 HAL 9000보다 훨씬 무미건조한 외양으로 표현해냅니다.
3.초월적 존재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분명 위대한 영화이지만 보우먼이 목성의 모노리스와 접촉한 이후의 묘사는
과학보다는 일종의 신비주의에 가깝다고 볼수있습니다.
원작자인 아서클라크의 작품 중 많은수가 그러한 초월적 존재로 인해 한단계 진화하는 인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위대한 영화이지만 문제는 많은 부분을 과학적 실증이 아닌
'우리보다 훨씬 앞서간 초월적인 어떤 존재의 미지의능력'에 의해 인류는 그저 선도도는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국 인류는 원시단계에서 우주시대까지 그저 가이드를 받았을뿐 스스로 이룩한 진화가 아니라는거죠.
인터스텔라가 놀란이 큐브릭에게 던지는 도전장이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답을 찾아낼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라는 쿠퍼의 대사로 상징되는 인터스텔라의 주제의식
결국 인류의 진화는 저 너머에 있는 높은존재에게 빚진것이 아닌 시련과 실패와 고난
이 모든 과정을 거친 끝에 값지게 스스로 이루어낸 성과 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줄 초월적 존재가에게서가 아닌
비록 병충해조차도 구제하지 못할정도로 약하고 어리석으나
결국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차원의 장벽까지 정복해버릴 정도로 한단계 높은 존재로써의 발돋움을
스스로 이룩해낼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이 인류에게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놀란은 큐브릭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약하고 부족하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더 높은 존재로 진화할수있다'
라고 말이죠.
결국 인터스텔라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전세대의 거장이 남긴 유산을 가지고 전혀 반대되는 주제의식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말을 남겼죠.
뉴턴 용서하시오. 당신은 가장 고결한 사고와 창조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의 시대에 국한된 일입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지난 50년가까운 세월 그 누구도 넘을수 없는
SF영화의 최고의 걸작 자리를 고수해왔습니다. 그러나 놀란은 인터스텔라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듯합니다.
큐브릭 당신이 지닌 상상력과 창조력은 나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에게 넘치는 영감을 주었소.
그러나 그것은 오늘까지만이오 앞으로 50년간 SF영화의 이정표는 나의 것이 될것입니다.
그리고 나 또한 50년후 내가 이룩하고 예측했던 모든것을 부정당할 날이 올것이고.
또한 그것을 즐겁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