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조급하다고 합니다. 냄비근성’이라고도 하고. ‘빨리빨리’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물론 이로운 점에 대한 고찰도 있습니다. 모든 사안이란 것이 극단(極端)의 경우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찾아보면 ‘조급함’이 가져다주는 이로운 점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우리들 모두가 조급함을 버리고,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우리들이 꿈꾸는 이상을 실현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글을 시작해 봅니다.
사례1. 저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성어를 좋아합니다. 우공은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세대를 뛰어넘어 옮기려는 ‘끈기’와 ‘신념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이야기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공은 결코 자기 자신이 그 일의 끝(또는 성공)을 이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개척해 놓은 길을 자기의 후손들이 끊임없이 걸어가길 바랄뿐이죠.
사례2. 오유 시사게시판뿐만 아니라 온 나라사람들이 논쟁을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논쟁 자체로 보면 그것은 분명 의미 있는 행동일 것입니다. 그런데 논쟁의 방법이 너무 ‘조급’한 것 같습니다. ‘오른쪽’과 ‘왼쪽’이 걸어온 길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형성된 가치관 역시 그리 무의미한 것도 아니구요. 그러한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당장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상대에게 날을 세우곤 합니다. 그리고 결국 어느 쪽이 먼저 날을 세웠으며, 어느 쪽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소모적 논쟁을 이어갑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끝나지 않은 싸움처럼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오늘이 아닌 내일을 기다릴 수만 있다면, 우리 세대가 아닌 다음세대를 기약할 수만 있다면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더 너그러워 질 태고 더욱 이성적이며 냉철해 지지 않을까요? 그러다보면 오히려 상대방을 설득하기가 쉬워질지도 모릅니다.
사례3.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논쟁을 합니다. 누가 더 많은 업적을 이루었느냐에 대한 논쟁입니다. 아니 말싸움입니다. 그래서 대통령들마다 국민정서에 부응(?)하기 위한 업적을 쌓기에 혈안입니다. 5년이라는 짧은(?)기간 동안 이루어내지 않으면, 결국 비판의 칼날을 피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국민들이 그러니까요. 단기간에 업적을 이루려다보니 긴 호흡이 필요한 정책마저도 땜질식 처방이 되기 일쑤입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교육과, 세금과, 군대와, 여러 제도가 바뀝니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는 정책의 변화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책이 변화한다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정책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100년을 유지하는 정책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00년을 기다리는 국민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지는 이제 반세기를 조금 넘었구요.
사례4. 잘못된 언론에 대한 질타가 있습니다. 잘못된 언론에 대한 옹호도 있습니다. 문제는 양측모두 기득권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기득권이 되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기득권들이 양산하는 정보에 대해 한 편에선 옳다고 하고, 한편에선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옳고 그름의 문제로 판단하기보단 어느 쪽에 유리한가 아닌가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누구나 기득권자가 되고 싶은 욕망은 품을 수 있고, 그러한 쪽에 유리한 제도와 정보를 옹호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어찌 보면 기득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일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가진 권력과 재물을 쉽게 내 놓으려고 하겠습니까. 기원전 고대국가에서부터 이어져온 역사를 찾아봐도 기득권들이 자신의 권력과 재물을 평화적으로 다수의 민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수의 민중을 위한 제도를 만드는 것은 역사적으로 봐도 그리 간단하고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가면서 하나하나씩 고쳐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고대국가에서 분명 제도적으로 앞서있던 동양(이란 표현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 근대에 와서 서구의 침탈에 의해 급진적으로 변하면서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동양 스스로 자기만의 속도로 변화를 이끌어 냈더라면 지금의 모습보다 더 성숙한 모습이 되어 있을 수 있었을 거라는 가정을 해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합리적인 시민사회의 정착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은 서구사회에서 있었던 다양한 이념적 실험들이 배제된 채 정신적인 성숙 없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쫒다보니 세대 간, 계층 간 많은 이념적 충돌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점이 박정희시대를 비판하는 진보세력의 요점인지도 모릅니다. 물질적인 성장 이면에 숨어있는 정신적 미숙함이 말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성숙한 시민사회를 위한 보다 나은 정보를 만들고 접할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친 기득권이 아닌 매체가 등장한지는 이제 20년 여 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엔 인터넷이라는 열린 공간으로 인해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죠.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여전히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어쩌면 우리세대에서 이루어내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보다 먼저 올바른 시민사회의 건설을 시작한 서구사회조차도 만족스러울 만한 성과를 이루어낸 곳은 손에 꼽히니까요. (물론 늦게 시작한 사회가 그만큼 늦으라는 법은 없겠죠.)
사례5.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좋아합니다. 전혀 조급함이 없는 저항이였죠. 그의 저항은 당시에는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내진 못했을지라도 그의 저항정신과 방법은 시대를 뛰어넘어 이어지고 계승되고 있습니다. 때론 극렬한 저항과 희생이 사회의 변화를 빠르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저항과 희생이 시민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방법이 보편적인 방법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수의 민중들은 자신이 선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제 몫을 충분히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민중들이 해야 할 일은 거친 표현과 행동이 아니라 사소한 듯하지만 중요한, 일상에서의 합리적인 행동의 실천입니다. 아주 기초적인 도덕적 지침일 수 있겠지만, 약자를 위하는 마음, 소외계층에 대한 따뜻한 시선, 타인의 대한 배려, 그리고 법률적 테두리 안에서 행동하고자 하는 시민정신 등이 세상을 빠르진 않지만 천천히 바꾸어나가는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례6. 바뀌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제 눈으로 보지 못할 지도 모르겠구요. 하지만 언젠가는 변하리라는 믿음을 버리진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그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세상은 바뀔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닌 우리에 의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