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레닌그라드 포위전
전장
2차대전 동부전선(독소전쟁)
독일vs소련
날짜
1941년 9월 8일 ~ 1944년 1월 27일
장소
러시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참여한병력
독일: 약900일간 총 약 270만
소련: 약900일간 총 약 600만
결과
소련의 승리
레닌그라드 포위전또는 레닌그라드 봉쇄 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옛 이름인 레닌그라드에서 발발한 독일 북부 집단군의 장기간 군사 작전이다. 포위전은 1941년 9월 8일 마지막 육상 연결 통로가 끊어지면서 시작되었다. 비록 소비에트 연방이 1943년 1월 18일 도시로 연결되는 작은 회랑 부분을 해방하지만, 완전한 포위전 종료는 전투 시작 872일 만인 1944년 1월 27일 끝났다. 이 전투는 역사상 가장 길었고 파괴적인 포위전이었을 뿐 아니라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가생긴 전투로 꼽힌다. 레닌그라드 포위가 끝나고 한 시민이 말한
'트로이도 로마도 함락됬지만,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라는 말은 매우 유명하다.
약 900일간의 전투에서양 측 합해 약 400만명의 군인이 사망
4. 제2차 벨로루시 전투(바그라티온 작전)
전장
2차대전 동부전선(독소전쟁)
독일vs소련
날짜
1944년6월 22일– 10월 19일
장소
벨로루시 전역
참여한병력
독일:90만명, 전차800대, 전투기600대, 포7000문,
소련군:250만명, 전차3000대, 전투기6000대, 포25000문,
결과
소련의 승리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의 기갑전력,항공전력 괴멸 후
그나마 남아있던 보병전력,포병전력마저 괴멸
제 2차 밸로루시 전투는 그 유명한 바그라티온 작전(소련의 독일군 괴멸 계획)의 시작을 알린 전투이며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압도적인 인명피해가 나왔다.
이 작전의 이전에는 90만명에 달했던 독일 중앙집단군은 전 총 사망자 73만명, 25개 사단을 잃는 괴멸적인 타격을 받고 장성급 지휘관 47명중 31명이 전사, 실종, 포로가 되었으며 겨우 다시 모은 탱크 800대와, 중포 및 각종 차량과 소화기 5,700대를 잃는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은 이 작전에서 잡은 10만명이 넘는 독일군 포로를 모스크바 시내에서 행군시켜 자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영·미군에 과시하였다.
독일군은 애당초 바그라티온 작전 이전에 보유하고 있던 총 병력 숫자가 소련군의 반도 안 되었으며, 처음부터 소련군의 의도를 오판하여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소련군 공세의 와중인 7월 20일에 히틀러 암살 미수이 발생하기도 하여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약 120일간의 전투에서양 측 합해 약 90만명의 군인이 사망
3. 모스크바 공방전
전장
2차대전 동부전선(독소전쟁)
독일vs소련
날짜
1941년10월 2일– 1942년 1월 7일
장소
러시아 모스크바
참여한병력
독일:100만명, 전차1800대, 전투기1000대, 포2500문,
소련군:150만명, 전차1000대, 전투기800대, 포6000문,
결과
무승부
모스크바를 방어하는 데 성공하나 모스크바방어에만 집중하느라 다른 군단에 지원이 끊겨 다른 전선이 밀리게됨
모스크바 공방전 1941-1942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근방에서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발한다. 이 전투는 독일군의 공격에 대한 소련의 모스크바 방위와 이후 반격으로 이루어진다. 히틀러는 소련의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인 모스크바를 함락하는 것은 군사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련은 결국 모스크바를 방어해낸다.
하지만 남부방어군에 지원해야될 물자까지 모스크바 방위에 써버려서 석유수송로이자 중요 공업도시인 스탈린그라드가 위험하게 된다.
약 100일간의 전투에서양 측 합해 약 100만명의 군인이 사망
전장
2차대전 동부전선(독소전쟁)
독일vs소련
날짜
1942년8월 21일– 1943년 2월 2일
장소
러시아 스탈린그라드
참여한병력
독일:70만(동맹군+40만 총 110만)
소련군:180만명
결과
소련의 승리
독일의 최정예 군단 6군의 전멸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처절한 전투였다. 이 전투는 199일간 지속되었다. 전투의 범위가 광대했고, 사상자 수가 지나치게 많을 것을 두려워 한 소련 정부의 금지 때문에 정확한 집계도 어려웠다. 전투 초기에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심한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소련군이 독일군의 측면(주로 루마니아군)을 돌파하여 독일 제6군의 나머지를 포위하기 전에도 독일 제6군은 이미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 어떤 때는 독일군이 시의 90%를 장악하기도 했으나 소련군 장병들은 독일군의 점령 지구 안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독일 제4기갑군의 일부도 스탈린그라드 주변의 소련군의 반격 때 심한 손실을 입었다.히틀러가 믿어 의심치 않던 독일 6군의 전멸로 독일의 기세가 꺾이게 된다.
약 200일간의 전투에서양 측 합해 약 230만명의 군인이 사망
1.쿠르스크 전투
전장
2차대전 동부전선(독소전쟁)
독일vs소련
날짜
1943년7월 4일~15일
장소
러시아 쿠르스크
참여한병력
독일:80만명, 전차3000대, 전투기2300대, 포10000문,
소련군:190만명, 전차6000대, 전투기2800대, 포26000문,
결과
소련의 승리
독일이 보유한 거의 대부분의 기갑전력,항공전력이 괴멸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확정
쿠르스크 전투또는 성채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에서 일어난 가장 주목할 만한 전투 중 하나이다.
이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였으며 하루 동안 벌어진 공중전으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도 꼽히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로 독일군은 지치기 시작한다. 독소전 초기 독일군보다도 장비가 우수했던 최정예 소련군이 스탈린의 지휘관 숙청으로 인해 각개격파된 후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승리를 확신했지만 소련의 인력은 독일의 생각을 훨씬 뛰어 넘고 있엇다. 예비 병력이 계속 보충되고 우랄산맥에 있는 무기공장들에서 무기가 계속 추가됬다.
생산력이 한계에 봉착했던 독일은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낀다. 또한 더 강한 주포를 단 신형 T-34의 양산 계획을 알게된 독일은 더욱 더 급해지게 된다.
신형 T-34가 양산되면 결국 독일은 패배할 거라는 생각으로 독일은 소련의 주력 병력을 또 다시 격파하기 위한 전투를 준비하는 데 이 전투가 바로 쿠르스크 대 전투다.
독일은 서부전선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기갑전력,항공전력을 쿠르스크로 보낸다.
독일의 보유한 기갑전력의 93%,항공전력이 87%를 쿠르스크에 집결했다.
만슈타인은 바로 소련을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소련은 방어하는 입장이였으며 개전 초기와 다르게 주코프란 훌룡한 지휘관이 존재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 끝 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히틀러는 더욱 더 소심해져 티거전차가 보급될 때 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그 기간 사이에 신형 T-34의 양산도 더욱 진행되었다.
신형 티거가 배치된 후 독일군은 선제공격을 가했지만, 소련군은 프로호로프카전투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 곧 반격을 개시하여 오룔,벨고로드,하르코프를 재탈환하였다. 이 전투는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여름에 승리한 전투로는 최초였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 전력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으며 모든 기갑전력과 모든 항공전력을 잃었다.
소련 역시 막대한 전력을 잃었지만 신형 T-34가 양산되고 신형 전투기 폭격기등이 양산되면서 4달만에 쿠르스크 전투의 피해를 복구했다.
그에 반해 독일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전혀 복구할 수가 없었다.따라서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 후 독일의 패배가 확정됬다.
쿠르스크 전투에 독일은 모든 기계화 전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쿠르스크 전투의 패배로 독일에게 남은 것은 보병들 뿐이였고 때문에
이후로 독일군은 두번 다시 공세로 전환하지 못하고, 소련의 공세에 동부 전선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11일간의 전투에서양 측 합해약 100만명의 군인이 사망
독소전의 위엄 ㄷㄷ..
소련의 위엄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