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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부부 만난 썰 - #10. 파비안, 그녀가 운다.
게시물ID : wedlock_35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언제꿀떡먹나
추천 : 11
조회수 : 92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7/31 14: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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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가는 길, 카미노에서 만난 우리 부부 이야기입니다. 

홀수는 여자, 짝수는 남자 시선을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1. 프롤로그 - 란의 비 (http://todayhumor.com/?freeboard_1276930)
#2. 프롤로그 - 파비안의 비 (http://todayhumor.com/?wedlock_1645)
#3. 란, 파비안의 첫인상 (http://todayhumor.com/?wedlock_2015)
#4. 파비안, 란의 첫인상 (http://todayhumor.com/?wedlock_2068)
#5. 란, 뜻밖의 동행 (http://todayhumor.com/?humorbest_1285762)
#6. 파비안, 뻔한 사람들의 흔한 이야기 (http://todayhumor.com/?humorbest_1286271)
#7. 란, 하나의 우연 조각 (http://todayhumor.com/?humorbest_1285545)
#8. 파비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http://todayhumor.com/?humorbest_1286615)
#9. 란, 동상이몽 (同床異夢) (http://todayhumor.com/?humorbest_1286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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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파비안, 그녀가 운다       


  첫인상은 이상했다. 그다음에는 웃는 모습보다 잔뜩 찌푸린 미간이 더 자주 눈에 들었다.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거나 불평을 자주 했던 그 모습은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불평이었기보다 원망이 섞인 설움에 가까웠다. 나처럼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나 얼굴 표정에 무관심한 사람도 한 눈에 보였다. 처마 끝에 한이 설여 아스라이 겨우 매달린 고드름 같은 그녀의 눈을 보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언젠가 이안도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동양인들은 참 신기해지나치게 겸손하고 예의 바르지. 

때론 그 겸손함이 지나쳐 짜증 날 때도 있을 정도야.”                    



  여러 차례 카미노를 걸으면서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사람을 만났던 이안도 그녀의 눈에서 나와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란이는 참 이상해.

지나치게 자주 딸꾹질을 하고 모퉁이를 돌다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지.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끝없이 생각하나 봐.

그러니 바로 옆에서 어깨를 살짝만 쳐도 자지러지게 놀라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 눈을 보면 그다지 행복한 상상은 아닌 것 같아.”                     



  당시 웃고 넘긴 이안의 말이 가끔씩 그녀와 마주친 눈빛 속에서 되살아났다. 이따금씩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면 이안의 안목엔 깊은 연륜의 나이테가 있었다. 고해하듯 그녀는 내게 자신의 아픈 조각을 하나씩 꺼내 보였지만, 나는 그녀에게 보여줄 조각이 없었다. 그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쭙잖은 위로로 공감하고 다 이해하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두 번이나 길을 걸으며 만났던 수많은 다른 이들의 아픔을 들려주었다. 그녀의 아픔과 고민이 그들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위로가 되길 기대하지도 않았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슴에 커다란 슬픔이 하나쯤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로 인해 아픔의 시간 속에 있는 그녀가 덜 외롭기 바랐다.         


  그 많은 순례자들 중에서 그녀와 나만이 프리미티보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을 아수투리아스 지역에 들어서고 알았다. 첫날 10시간을 걸어 도착한 숙소에는 숙소를 관리하던 봉사자도 없었다. 문 앞에서 창문을 깨고 침입하자고 그녀를 설득하는 동안 인근 마을의 농부가 와서 열쇠를 넘겨주고 돌아갔다.    

                 


“나흘 만에 처음 오는 순례자야.

이 동네에 슈퍼는 없고 레스토랑은...., 저기 저 언덕 아래 빨간 지붕 보이지?

거기에 바(bar)가 하나 있긴 해. 뭐, 걸어서 1시간이면 갈 거야.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뒷정리를 깔끔하게 하고 열쇠를 우편함에 넣어둬.

뒷정리를 하고 가는 거 절대 잊지 말라고. 나는 청소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아.”


                   

  여름이 아닌 비수기에 프리미티보를 찾는 이들이 얼마나 없는지 이 작은 마을엔 지정된 봉사자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열쇠를 맡아 보관하고 있다가 순례자가 알베르게로 향하는 걸 본 마을 사람들이 서로서로 연락해서 그 날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이 숙소로 와 열쇠를 건네주고 돌아가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사람이 없어 한적하니 좋기만 했는데 그녀는 어쩐지 불편해 보였다.   


                  

“너랑 나랑 둘 뿐이니까, 화장실 가는 것 까지 신경 쓰여서 정말 불편해.”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면 항상 세면대의 물을 오래도록 틀어 놓았다. 들어서자마자 시작되는 물줄기 소리는 신통치 않았다. 세면기의 물 흐르는 소리로 그 사이에 흐르는 다른 잡음을 덮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녀에게 이 사실을 굳이 알리지 않았다. 신경 쓰이고 불편하다던 그녀에게 어떤 것들이 그렇게 불편했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부단히 노력하는 그녀를 위해서 나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태우거나 세계 제일의 록 재즈 기타리스트로 분해 더 큰 소리로 기타를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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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없는 이 한적함이 나는 너무도 좋았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술 한 잔씩 나누며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지만, 적막하고 차분한 이 공기에는 또 다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나와 다르게 그녀는 시종일관 편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 때문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녀를 불편하게 한 행동은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딱딱해진 바게트와, 햄, 치즈 쪼가리로 점심 저녁을 모두 해결했다. 맘에 드는 레스토랑을 찾았을 때는 잔돈이 없거나 시간이 안 되거나 하여 먹을 수 없었고 슈퍼를 찾을 때마다 씨에스타 시간이나 휴일에 걸려 늘 닫혀 있었다. 제대로 된 끼니에 몹시 굶주려있던 우리에게 오늘 짐을 푼 이곳은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음식점과 카페에 선택권이 있다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작지만 아담한 곳을 골라 식사를 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식사 후에는 술이 약하다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포도주를 계속 권하기도 했다. 포도주처럼 약한 술 한두 잔에 취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 말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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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와인 한두 잔에 취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여기 있었다. 포도주 한두 잔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취하는 사람.

  다행히도 주사는 거의 없었다. 다만, 중간에 영어 단어를 섞어 한국어로 중얼중얼하느라 그녀의 말을 눈치로 알아차려야 했다. 너무 추워하던 그녀에게 히터 옆쪽의 침대를 양보했고 그녀는 곧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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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 추워.”                    



  잠꼬대하듯 계속 중얼거리는 이 단어, 이것이 내가 배운 첫 한국어였다. 쉴 새 없이 반복했던 그녀 탓에 뜻도 모르고 발음부터 외워졌고 나중에야 그 뜻을 배웠다. 춥다는 말을 주문처럼 웅얼거리는 그녀에게 내 침낭까지 펼쳐서 덮어주고 옆에서 나는 손전등에 의지해 방명록을 읽고 있었다. 아까 그녀가 무어라 끄적였는지 궁금했지만, 방명록 가장 최근 글은 내가 본 적 없던 그림뿐이었다. 그림이지만 글씨인 척하는 걸로 보아 이것이 한국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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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나 삽화 같은 진짜 그림과 함께 남겨진 글들 위주로 몇 개를 더 읽고 방명록을 덮었다. 불을 끄고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갑자기 그녀가 울었다.           


  그녀가 운다.

  아니 그녀가 흐느낀다. 다급히 손전등을 다시 켜고 그녀의 얼굴을 비춰보니 질끈 감긴 두 눈으로 눈물방울들이 잇따라 흘러내렸다. 너무도 낯선 이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 몹시 당황스러웠다. 더욱 난감한 것은 울면서 웅얼거리는 그녀의 말들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다급하여 나도 모르게 침대로 다가가 그녀 옆을 비집고 들어갔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는 우는 아이를 엄마들이 안아주고 토닥여주면 곧 잠이 들었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지금 내게 그녀는 어린 아기와 다를 바 없었다. 한쪽 팔로 살포시 그녀를 안고 조심히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It's Ok. Baby. You're the most strong baby in the world. Just it was a bad dream.”                     



  타이르듯 나오는 대로 말했다. 잠결에 그녀가 내 영어를 알아들을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걸 그랬다. 영화에서처럼 로맨틱하게 흘러갈 것으로 예상했는데, 어설픈 내 위로는 허세가 되어 기억 곳곳에 산재되어 있던 지뢰 하나를 건드리고 말았다.      



“No. I'm not a strong girl, You guys always say like that anyway. why..

I'm not. I'm not. Not at all. Don't leave me alone.”                     



  내 말에 잠이 깬 그녀는 여전히 비몽사몽 간에 내 말에 대답을 했고 원망도 했다. 그 소리가 희미하여 정확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원망 섞인 설움이 느껴졌다. 누군가 그녀를 떠날 때 비겁한 변명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도 같은 변명을 했던 것일까. 누군지 알 수 없는 그들은 그녀와 이기적인 이별을 했고, 그 이별로 그녀가 무너지지 않길 바랐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들은 모두 그들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분명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힘들어할 것을 알았기에 무너지지 않고 잘 지내 주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강한 여자이길 강요하다니, 비겁했다. 돌아선 자신이 홀가분해질 수 있도록, 또는  그녀에게 덜 미안하고 싶었을 그 마음, 그들에게 과분한 이 눈물들이 몹시 아까웠다. 긴 재킷 소매를 손바닥까지 끌어올려 그녀의 미련함을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카락과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녀가 다시 잠들 수 있도록 이마와 볼에 입을 맞추고 어깨를 토닥였다. 미세하게 들썩이던 그녀의 어깨는 옅은 흐느낌과 함께 곧 잦아들었고 그때까지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했다. 엄마와 같은 포근함을 느낄 순 없었겠지만 조금이라도, 순간일지라도 그녀가 편안해지길 바랐다. 그 뿐이었다.                     



“나 정말 오랜 시간 불면증에 시달렸거든.

마지막으로 깊은 잠을 잔 게 언젠지 기억도 안나.

그래서 말인데, 네 품을 내가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무서운 상상인가? 그래도 진심 가지고 싶다.

옆구리에 끼고 있다가 잠이 안올때마다 꺼내 베면 참 좋을 거 같아.



  그 후로도 잠든 동안 그녀는 두 번 더 울었다. 첫 날을 제외하고 나머지 날에 그녀는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던 날이었다. 처음 그녀가 울며 잠든 다음 날 나는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굴었다.                     


“파비안!”          


“응?”          


“너 간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왜 묻질 않아?”          


“왜인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처음엔 비몽사몽 간에 깨지만, 천천히 의식은 돌아와.”          


“도대체 어떤 을 꾸는 거야?”          


“그때마다 항상 달라. 어떤 밤엔 거대한 독수리에게 쫓기다 물어 뜯기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울며 떼쓰기도 해.

언젠가는 아껴두었던 빵을 누가 먹어치워서 대성통곡을 하는가 하면, 밥통에 밥이 한톨도 없어서 서럽게 운 적도 있어. ”          


“음.. 끝까지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          


대부분은 모르지만, 가끔은 꿈속에서 꿈인 걸 인지할 때도 있어.

그런데 꿈에서도 감정은 내 맘대로 할 수 없더라. 어떤 상황이었든 가끔은 설명하기 힘든 깊은 설움이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서서히 끌어 오르다 용암처럼 뜨겁게 뿜어져 나와. 꿈속에서.


“꿈은 그냥 꿈이야. 설명이 필요 없는 판타지. ”      


“넌 그렇게 생각해?

참 신기한 게, 가끔 그렇게 울다 잠에서 깨면 신기하게도 꿈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도

폭발한 감정은 생생하게 살아있던데...... 그런 걸 보면 정말 꿈은 그냥 꿈일 뿐일까?”           


“위로를 해야 하는 건지 걱정을 해줘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너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잠에서 그렇게 깨었을 때 바로 정신이 번쩍 드든 게  힘들어서 그때마다 누군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 같아. 그래서 고마워. ”



  그녀는 내 품에선 깊은 잠을 잘 수 있다고 했다. 그녀가 울기 시작하면 잠귀가 밝은 나는 곧바로 잠에서 깼고 불편하고 좁은 침대를 사이좋게 누워 그녀를 품에 안았다. 나도 모르게 한 번 그녀의 지뢰밭을 헤집어 놓게 된 이후로 그녀에게 다가가는 세치의 혀도 어설픈 손길도 조심스러웠다. 너무 예쁜 커다란 비누 방울처럼 여린 그 어깨가  혹시나 터져버리고 사라질까 조심히 감쌌고 토닥이는 손은 수없이 망설였다. 그래도 내 품에서 곧 쌔근쌔근 잠드는 그녀를 보면 내 마음도 묘하게 편안해졌다. 그녀가 곧 잠이 들면 다시 내 침대로 돌아가 눕는데 그 뒤로는 이상하게 내가 한동안 잠에 들지 못했다. 머릿속에 세포들이 뒤엉켜 복잡해지는데 무엇 때문인지를 스스로 알아낼 수는 없었다.


  한 동안 누구의 방해도 없이 가까이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세상에 모든 시계는 멈추어 있고 우리는 그 시간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때때로 이렇게 계속 멈추어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지만 이 시간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따금씩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그 시간이 오고 말았다.                     



“이것 봐. 이 선을 넘으면 갈리시아로 접어드나 봐.”          


“정말 그러네. 프랑스 길에선 이런 표식을 본 적이 없었는데, 넌?”          


“나도 프랑스 길에서 본 기억이 없어. 북쪽 길에는 이런 표식도 있고 신기하네.”          


“곧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오겠군.”          


“그래, 정말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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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리시아 지역은 스페인에서 수시로 비가 내리는 지역으로 정평이 나있는 곳이다. 갈리시아에서는 해가 드는 날보다 비가 내리는 날이 훨씬 많으며, 간혹 온종일 해가 비출 것 같아도 굵은 소나기가 내리는 일도 잦았다. 거의 매일 비를 맞아야 하기에 성수기가 지나 우기로 접어들었을 때 우비가 필수였다. 산티아고가 갈리시아에 있기 때문에 산티아고로 향하는 수많은 길도 결국은 갈리시아를 거치지 않고는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없다. 지역의 경계 표식 앞에서 그녀는 크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솔직히 자신은 없어.”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해봐.”          


그게 되면 내가 이렇게 10년이 넘도록 그 지긋지긋한 과거에 머물러 있진 않았겠지.”                    


  그녀는 한국에서 비가 오는 날에는 꼭 필요한 날이 아니면 외출하지 않았다고 했다. 2년 전 프랑스 길을 걸었을 땐, 비가 오는 날이 운 좋게도 몇 번 되지 않아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했다. 지금 스페인도 10월이 훌쩍 지나 갈리시아에도 곧 우기 같은 날씨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갈리시아도 아닌데 이미 몇 번에 폭우를 만나기도 했다. 그 날에 그녀를 기억해서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느 때 보다 그녀의 감정을 이해하고 싶지만, 그녀와 같은 삶을 살아보지 않은 내게 이렇게 오랜 시간 시달리고 있는 감정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여 어떤 위로도 자신 없었다.


  그때였다. 멀리서부터 왁자지껄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소리의 출처는 그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떠드는 통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선명하게 들렸다.                     


“야, 저기 사람이 있다!”          


“야호! 드디어 인간을 만나다니, 정말 감격스러워!”          


“야, 거기 여자도 보이냐?”          


“예~에!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고, 두 명이나 있어!”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던 그 무리는 금세 우리 앞에 난리법석을 떨며 존재를 드러냈다. 다섯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로 이루어진 그룹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우리를 에워쌌고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폭탄처럼 던져대는 질문보다 귀청이 찢어져라 소리치며 말하는 그들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고요한 이 시간을 방해받는 것이 그들에 대한 반가운 마음보다 짜증이 앞섰다. 이런 내 속도 모르고 란이는 오래도록 기다려 온 사람 마냥 스페인식 볼 키스 인사까지 나누며 환영했다.                     



“나는 란이고, 이쪽은 파비안. 나는 한국, 파비안은 독일 사람이야.”                    



  눈치 없는 그녀는 굳이 내 이름과 나라까지 알려 주고 있었다. 웃음기 사라진 내 표정에도 그녀는 아랑곳 않고 어디서 출발하여 얼마나 걸었는지, 어제 어디에서 출발했는지까지 시시콜콜 나누고 있었다. 온전히 우리에게만 허락되었던 시간을 방해받는 것이 란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전혀 관심도 없는 그들은 떠날 줄 모르고 우리와 함께 발걸음을 맞추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여섯 중 두 녀석은 지칠 줄 모르고 소리를 지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소리를 지르며 이야기하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런 두 녀석을 다른 사람들은 그저 웃으며 바라보고 심지어 호응해주고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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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서서 물을 마시고 풀리지도 않은 등산화 끈을 고쳐 묶고 화장실을 가야 한다며 딴청을 피우며 걸음을 늦추었다. 선두에 있던 녀석들부터 하나씩, 둘씩 먼저 보내며 겨우 다섯 명을 먼저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옆에 있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웃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내 말투를 보고도 그 남자는 구태여 내 옆에 붙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란과 내 사이에 꼭 끼어 있었다.                     


“3주 동안 아까 그 아이들과 함께 했어.”          


“와! 원래 알던 사이였어?”          


“아니, 다들 길에서 만났어. 조금 늦게 출발해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지.

그나마 있던 몇몇은 북쪽 길이 힘들거나 사람이 없어 심심하다며 프랑스 길로 떠났고

남은 사람들이 며칠 동안 계속 숙소에서 만나 졌지.

그러다 보니 이렇게 그룹이 형성되었고, 늘 함께 걷거나 같은 숙소에 머물며 시간을 보냈어.  

다른 사람들은 거의 만나질 못해서 아까 그 친구들이 꽤 흥분했던 것 같아.”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미친 사람처럼 정말 이상해 보였어.”          


“나도 이제야 겨우 적응했으니 이해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너는 제일 조용했는데 무슨 사과를 해. 괜찮아.

그런데, 그 키 큰 두 명은 평소에도 항상 소리 지르면서 대화해?”          


“어. 나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그녀는 이미 내 기분 따윈 안중에도 없었고 그는 좀처럼 우리 사이에서 떠날 생각을 안 했다. 눈치 없는 건 그 남자뿐이 아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 남자가 독일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그 남자와 내게 독일어로 아무런 대화나 해보라는 멍청한 요구를 했다. 독일어 단어라고는 사랑한다는 말 밖에 모르면서 끈질기게 졸랐다. 나와는 달리 그는 준비된 사람처럼 독일어로 이야기를 했다.                     


“둘이 무슨 이야기 한 거야?”          


“그냥, 어디 살고 직업이 뭐고, 그런 이야기 했어.”                    



  그녀의 바보 같은 질문에 그는 신이 나서 대답했고 단답형으로 대답한 나를 그녀는 나무랐다. 표준 독일어를 구사하는 그와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에 대해 조금도 알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녀의 요구에 마지못해 억지로 응했을 뿐이었다.                     


“파비안, 난 네가 독일어로 말하는 걸 정말 듣고 싶었는데.....”                    



  내가 독일어로 말하는 것이 듣고 싶다면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굳이 지금 이 남자와 대화를 시키는 것인지 얄궂어 화까지 났다. 그 남자와 즐겁게 대화 나누는 것도 서운했고 눈치 없이 머물고 있는 그에게 호의적인 것도 섭섭했다. 나와 함께 했던 시간이 그녀는 즐겁지 않았던 것일까,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섭섭한 마음은 자꾸만 커지고 부풀어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위태로웠다. 지금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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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룹의 여섯은 흩어져 우리의 앞과 뒤를 엄호하는 병사처럼 걸었다. 그보다 사방에 감시 카메라가 우리를 따라 움직이며 감시하는 느낌이 들어 거북했다. 특히, 그 독일 남자는 우리 사이에 끼어 걷는 것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싱글벙글 뭐가 그리 좋은지 웃는 모습이 얼빠진 사람처럼 어리멍청해 보였다. 넓은 길이 좁아져도 내 뒤로는 물러나도 그녀의 옆 자리는 사수하고 있었다. 지난 3주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 그에게는 새로운 사람이 그저 흥미로웠을 뿐인데, 그것도 모르는 그녀는 뭐가 좋은지 내내 웃어 보이며 주거니 받거니 대화에 끝이 없었다.           


  섭섭했다. 그녀에게.

  아직 우리도 서로를 알아가기에 부족한 이 시간에 난데없이 초파리 같은  불청객이 날아들었는데 그녀는 오히려 더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섭섭함을 표현할 수 없었다. 섭섭한 이유를 말하자니 유치한 감정들로 치부될 것 같아 두려웠고 가슴으로 삼키자니 그녀가 야속했다. 눈치 없고 바보 같은 그녀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씩 거칠게 변해갔다.                     



“뭐해? 벌써 쉬려고?”          


“응. 난 두통이 심해서 여기서 카페인 충전을 하면서 쉬어가야겠어.”          


“뭐야? 커피 마신지 1시간도 안됐잖아.”          


“어. 그래서 화장실도 가야 해. 넌 저들을 따라 먼저 가도 돼.”          


“어떻게 그래.”          


“몰라. 난 여기서 쉬어야겠어.” 

              


   바보 같은 그녀보다 더 미련한 내 감정을 다스리고 싶었다. 그녀가 나와 함께 쉬어줄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녀가 먼저 가버린대도 곧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내 맞은편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았다. 그리고 그 독일 남자도 그녀와 내 사이에 한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유치하게도 그녀와 그 남자의 질문에 퉁명스럽게 단답형으로만 대답을 일관하며 연신 담배만 꺼내 물었다.                     



“막스! 아무래도 우리는 여기서 오래 쉬어 갈 것 같아.

파비안은 머리가 많이 아픈 것 같고, 나는 밀린 엽서나 몇 장 쓰려고.

넌 언제든 먼저 가도 괜찮아. 우리 다음 숙소에서 곧 다시 볼 테니까.”                    



  독일판 시계 토끼처럼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던 그도 란의 말에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 숙소가 있는 다음 마을까지 길어야 6km 정도만 걸으면 될 거야. 곧 다시 보자.”                    


  그가 떠나고도 그녀와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심통을 부린 내 모습이 계면쩍어 더 피울 생각도 없던 담배 연기만 연달아 들이켰다. 그 사이에 그녀는 엽서를 4장이나 썼다. 그리고 그때쯤 카페 아주머니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너희는 안가? 아까 그 시끄러운 친구들은 한참 전에 떠났잖아.

서두르지 않으면 곧 해가 질 텐데..... 나도 이제 카페 문을 닫을 거야.”          


“우리 걔네들하고 친구 아니에요!”                    



  카페 주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정색을 하고 화를 내버렸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카페 주인과 그녀의 눈도 보지 못하고 재주껏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카페 주인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건넸다.                     


“아유! 다행이네. 난 또 너희가 걔들이랑 친군 줄 알았지.

카페 문 지금 안 닫아. 더 쉬었다 가도 돼.

아까 뉴스 봤는데 해 떨어지려면 아직 두어 시간 더 남았어. 편히 쉬어.”                    



  화색을 띈 주인아주머니의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당장이라고 호통을 칠 것처럼 험상궂은 그 인상은 순식간에 세상 둘도 없이 훈훈한 아우라를 뿜어대는 시골 아주머니가 되어있었다.                     



“혹시, 방 필요하면 말해. 내가 여기에 개인 알베르게(순례자 숙소)를 운영하는데, 아까 걔들이 나한테 여기 숙소 있냐고 물어봤었거든. 얘들이 너무 시끄럽고 지저분해서 소중한 내 침대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밤새도록 떠들 것이 너무 뻔해서 무조건 없다고 잡아뗐거든.

내가 장사 한 두 번 해보나. 그런데, 너네는 기꺼이 내 숙소에 묵어도 좋아.

둘이 묵으면 할인도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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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제야 카페 맞은편에 있는 숙소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나 혼자 굳이 이 숙소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늦더라도 숙소로 가서 새로 만난 그들과 함께 하고 싶어 할 것에 의심할 바 없었고 아무리 그들이 불편하고 싫어도 나는 그녀와 함께 숙소로 가야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 오늘은 여기에 짐을 풀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의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순간의 망설임 따윈 필요 없었기에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 주인은 우리가 맘에 들어 깨끗하고 하얀 수건까지 서비스로 제공하며 환대했다.



“네가 그 아이들을 너무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여기 숙소에 짐을 풀긴 했는데.....”  


“나도 이 작은 마을에 개인 알베르게가 있을 거라곤 상상 못했어.


“사막에 '짠'하고 나타난 신기루처럼 신기하게도 마침 여기에 숙소가 있네.


“나는 숙소에서 그들과 어울려야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어. 내 마음이 결코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알아. 그래서 내가 결정한 거였잖아.

오늘 처음 본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것보다 지금 너와 어색해지는 것이 그냥 더 싫었어.”     


“그렇다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과연, 그랬을까?

결정은 내가 했지만, 또다시 이 커다란 알베르게에 너와 단둘이 남게 된 지금 나는,

너와 어색해지는 것만큼 두렵고 걱정스러워.”              


“또 그런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부터 하지 마.

네가 염려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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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지나온 안개 숲처럼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가늠되지가 않았다. 다만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고드름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듯 불안한 그녀의 낯빛이 새로운 걱정을 시작했다는 것만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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