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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3) 각자의 사정
게시물ID : readers_342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윤인석
추천 : 3
조회수 : 50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9/10/30 13:07:38



편의점 야간 알바 4개월 째다.

그동안 밀걸레 하나, 맥콜 캔 하나, 그리고 점장님과의 관계가 망가졌다.

밀걸레는 힘줘서 청소하다가 알루미늄으로 된 대가 부서졌고, 음료수는 떨어트려서 터트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확실하게 박살낸 것은 점장님과의 관계다.


처음 한 달간은 아주 좋았다.

편의점 일은 재밌었고 열심히 하다 보니 바닥이던 매상이 눈에 띄게 올랐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무거나 하나만 골라봐요.”

알바들이 속 썩여서 고생이 많았다고 하소연을 하던 점장님도 날 복덩이로 봤다.


그렇게 분위기 좋던 어느날 난 맘에 걸리던 것을 말했다.

“점장님. 교대 시간을 정해서 지키면 어떨까요?”

점장님과 맞교대를 했는데 교대 시간이 대중없었다.

난 눈치껏 20분에서 10분 전에 출근하고 있었고, 점장님은 나오는 시간이 점점 느려지더니 한 달쯤 되니 교대 시간 직전이나 넘어서 출근을 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한 달을 참다가 말을 꺼냈으니 많이 참은 셈이었고, 같이 일하는 ‘동료’로서 지킬 건 지켜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보는 눈높이가 다른 법.

내 생각보다 점장님의 눈은 한참 높은 곳에 있었다.

점장님은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딴 말을 해? 고작 5분, 10분 가지고?”

점장님은 ‘아랫것’의 하극상에 충격받고 분노했다.


“그렇게 하나 하나 따지고 들면 나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어.”

그날 이후로 폐기 바구니에 폐기 음식이 사라졌다. 컴퓨터에 십여 개가 넘게 폐기 기록이 찍혀 있었지만, 남은 건 없었다. 심지어 내 근무시간에 폐기 될 음식도 미리 폐기 처리된 후 사라졌다.

분노한 점장님에겐 몇 시간 동안 더 진열해서 물건 몇 개 더 파는 것보다, 내 입으로 음식이 안 들어가는 게 더 중요했다.


‘와. 이렇게까지 한다고? 하아.’

어이없고 치사했지만 원래 치사한 수단일수록 효과가 좋은 법이다.

신경전을 벌이다 결국 3일째 되는 날, 백기를 들었다.

솔직히 잘못한 건 손톱만큼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평소보다 더 일찍 출근해서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잘하겠습니다!”

“허.”

점장님은 코웃음 쳤지만, 그 후로 아량을 베푸사 가끔 아랫것을 위해 햄버거나 삼각 김밥 몇 개를 폐기 바구니에 떨궈 주셨다.

먹을게 랜덤으로 나왔다 안 나왔다 했다.

‘어떻게 일 시키고 밥을 안 주냐?’

폐기를 안 남겨준 날은 배가 고팠지만 내 돈 주고 편의점 음식을 팔아 주기 싫어서 굶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먹을 것을 싸 들고 다녔다.


그렇게 화기애애하던 관계는 깨졌지만, 그래도 내 사과로 대충 덮어두고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아니, 이렇게 찢어져 있는 돈을 받으면 어떻게 해요? ATM에 인식이 안 되잖아요.”

점장님이 귀퉁이가 손톱 반 크기만큼 찢어진 5만 원 권을 들고 화를 냈다.

“돈 내는데 안 팔 수도 없고 곤란하네요.”

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낮에 은행이나 다른 가게 가서 바꿔오세요. 낮에 시간 있죠?”

빈정이 상해 있던 난 내가 해야 하는 일 외에 조금도 도움이 되기 싫었다.

“낮에는 자야 해서요.”

점장님은 ‘아니 이 새끼가 또?’ 하는 눈으로 날 바라봤고,

내 얼굴에 ‘어쩌라고? 퇴근 후에 일 시키지 마.’라고 쓰여 있는 게 분명히 전달되었다.


기워 붙여 놓은 관계가 그 뒤로 완전 파탄 났다.


수고했다는 말이 오가던 교대 시간엔

“본인이 하는 일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하죠?”

하는 비아냥이나

“쓰레기통 밑은 왜 안 닦은 거예요? 내가 닦았잖아요!”

같은 지적이 날아왔다.


대화는 거의 사라졌고, 간혹 무슨 말을 꺼내도 짜증을 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점장님. 시재(돈)가 틀렸습니다. 입력 실수인 것 같습니다.”

“왜? 분명히 맞춰놨는데 또 틀렸데!”

“보니까 동전 개수를 잘못 입력하셨네요. 플러스 상태로 마감 누르셔서 나중 기록에는 마이너스로 떴습니다.”

“아니, 뭐야? 그럼 단순 실수였다는 걸 알고서도 집에 가는 사람을 다시 부른 거예요? 진짜 사람 희한한 데가 있어. 다음 교대 때 말해도 되잖아요? 대체 왜 그래요?”


...

“어제 카드 놓고 가신 분 찾아가셨나요?”

“아니 그런 걸 왜 신경 써요? 놔두면 알아서 찾아가든 말든 우리가 더 신경 쓸 건 없는 거예요. 왜 자꾸 엉뚱한데 신경을 써요? 진짜.”


돈 계산 잘못했다고 말해도 화내고,

일상적인 질문에도 짜증이 날아왔다.


사실 대화가 이런 식으로 흐르는 데는 내 띠꺼운 표정 책임도 있다.

존경을 바라는 사람이 그런 표정을 보면 무슨 말인들 곱게 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띠꺼운데. 존경 받을 만하게 행동하던가.


이쯤 되면 내가 그만두거나 점장님이 날 자르지 않는 게 더 놀라운 일인데 그 상태로 3개월을 더 근무하고 있다.


양쪽 다 사정이 있는데, 

내 사정은 돈! 돈이다.


나는 사실 편의점 탈출을 위해 근방 다른 편의점을 많이 알아봤다.

그런데 주변에 지금 다니는 편의점보다 시급을 많이 주는 데가 없다....

최저 시급이 8,350원인 2019년. 난 지금 7,500원을 받고 있지만, 지금까지 내가 찾아본 곳 중에 이 동네 편의점 시급은 이게 최고다.

7,000원, 6,700원, 5,500원, 심지어 5,000원도 있었다.


주변 알바 몸값이 이 지경이니, 점장님 입장에서는 ‘무려’ 7,500원 씩이나 주는 데도 감사함을 모르는 알바가 괘씸했으리라.


최저 시급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법이야 다들 안 지키고 있으니 고려대상이 아니다.

...ㅅㅂ!


어쨌건 자르고 싶을 텐데 내 목이 아직 붙어 있는 이유는,

추측건대 점장님이 욕하던 다른 알바들 덕분이다.

그중에서 내가 그나마 나은 편인가 보다.

어쨌든 시키는 일 다 하고 있고. 일 자체는 여전히 재밌어서 열심히 하니까.


서로 맘에 안 들지만 ‘그나마....’ 하면서 참고 있다.


아! 그리고 내가 가진 사정이 또 하나 있다.

교대 시간에 서로를 긁다가 집에 돌아오면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잘 쓰지 못한 내 죄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글을 재밌게 잘 썼으면 진즉에 글로 돈을 벌어서 탈출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잘 쓰지 못한 내 죄다 싶고, 점장님과 아웅다웅하는 데 신경 쓰느니 그 힘으로 글 한 자 더 쓰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든다.


지금 이 글도 글 쓰다가 막혀서 뭐라도 써야 해! 하고 쓴 글이다.


여기서 이 수필의 탈을 쓴 잡문을 결론 없이 흐지부지 끝낼 핑계가 생겼다.

어서 다시 글을 쓰러 가야지 이 수필의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만들 수 있다.

결론을 안 내고 가는 게 아니라 결론을 만들러 가는 게다.


쓰다가 보면 언젠가 알바비보다 인세를 더 받는 날이 오겠지.

...오겠지?


요즘 내 답은 항상 같다. 잘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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