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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스압주의] 나의 탈북 스토리1(꼭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게시물ID : humorstory_3089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파란거북이
추천 : 3
조회수 : 49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8/26 14:32:36



 




나의 탈북스토리 - 장진성 

 


1.

나는 한국에서 홀로 힘들 때마다 긴장과 공포로 숨 가빴던 탈북 순간들을 생각해보곤 한다. 국적을 버릴 자유까지 허용돼 있는 자유민주주의 사고로는 탈북이란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결단인지 가늠조차 힘들 것이다. 자기는 이미 목숨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탈출할 수 없는 것이 북한 땅이다. 아니 붙잡힐 경우 자기 뿐 아니라 가족은 물론 친척들의 운명까지도 위협하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다.내가 친구와 함께 국경연선에 도착한 시기는 오줌 싸면 얼어서 떨어진다는 2004년 북방의 추운 1월이었다. 초기 계획은 산 속 수림에 숨어 있다가 국경 경비대원들이 지나가고 나면 두만강을 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산은 높은데 몸을 숨길 나무가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다.


친구와 나는 평양 밖을 벗어나 본적 없기 때문에 수 천리 떨어진 국경지역에선 거의 눈 뜬 소경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맞춤한 탈북 장소와 기회를 노리며 두만강연선을 따라 온종일 걸은 길이 백리나 되었다. 밤 열시 경, 한치 앞도 헤아리지 못할 캄캄칠야는 우리를 대담하게 했다. 하여 마침내 강기슭으로 들어서는데 “손 들엇!”하며 풀숲에서 병사가 불쑥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때 반사적으로 내 팔을 꽉 잡는 친구의 손이 나를 더 전율케 했다. 때려눕힐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 그 병사가 이번엔 호각을 불었다. 그러자 의외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여럿의 손전등들이 켜지며 우릴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우리는 총구들에 떠밀려 국경경비총국 6중대 병실에 들어섰는데 가장 눈에 보이는 것이 쇠살창으로 가려진 작은 감옥과 매달린 수갑들이었다.

“어떻게 이 밤에 두만강으로 접근하신 겁니까? 신분증과 통행증을 봅시다.” 북한 특권층의 아들이었던 친구는 생전 처음 당해보는 총구 앞에서 누가 봐도 탈북 용의자로 확신할 만큼 온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우선 이 친구가 너무 추워하니깐 몸 좀 녹이게 해주시오.”

그러면서 나는 신분증을 꺼내려 안주머니 손을 넣었는데 쿵쿵 뛰는 심장이 만져졌다. 가죽 케이스에 당마크가 새겨진 나의 신분증을 받아 쥔 중대장은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국경 연선에서 오랜 중대장 경험을 가진 그 군관도 아마 당마크와 빨간 색깔의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도장이 박힌 신분증을 처음 보는 듯싶었다.

북한의 최고위 신분증은 금박으로 당마크가 새겨진 당 신분증과 국장이 새겨진 내각 신분증이 있다. 그 중에서도 당마크는 북한의 절대권력 기관인 조선노동당 신분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총구도 공손해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당 통전부는 대남공작이란 특수성이 부여되기 때문에 적화통일의 무기를 쥔 병사들에겐 신비감을 조성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왜 국경에 접근했습니까?”

중대장은 신분증의 무게와 달리 너무 어려보이는 내 나이를 의심하는지 아래위를 흩어보며 물어보았다.

“무산 시당에 간부사업 가던 중 너무 밤이 깊었고 춥기도 해서 군인병실이라도 찾아서 하루 밤 자고 가려했을 뿐인데”

“아닙니다, 강에 발을 짚었습니다!”

우리를 단속했던 그 재수 없는 병사가 막 소리 질렀다. 나는 이럴 땐 무엇보다 배짱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멍청한 놈! 너 어디 감히 총을 들이대고 그래? 아까 널 한 대 쥐어박으려다 참았어!”

중대장이 짧게 지시했다.

“무산시당에 전화해봐, 통전부에서 간부사업 약속 있었는지”

나는 온 몸이 무너져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난로 앞에서 손을 비비고 있던 친구도 나를 쳐다보는 눈이 끝장이라고 말하는 듯싶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이!

“중대장동지, 정전이어서 무산시당에 전화가 연결 안 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살수 있다는 희망이 내 발밑에서부터 머리까지 치달아 올랐다.

“그럼 내일 확인하기로 하고 일단 좀 자게 해줘! 어 중대장? 우린 피곤해!” 그때 순찰교대를 했는지 한 개 분대가 쓸어 들어왔다. 누군가고 서로 물어보던 병사들 중 소위 계급을 단 군인이 유심히 들여다보던 신분증을 흔들며 소리쳤다.

“어따, 여기 근무하면 혹시 오광일이라고 알아요?”

오광일? 기억을 애써 더듬는데 갑자기 친구가 말했다.

“김책시에 사는 오광일이? 아버지가 김책시당 책임비서 하는 그 애?”

소대장의 얼굴에 금시 화색이 돌았다.

“네 맞아요, 맞아요, 중대장동지 그 시당책임비서 아들이 내 친구예요”

중대장은 의심과 신뢰가 교차하는 얼굴로 소대장과 내 친구를 번갈아보았다. 나는 하늘이 준 기회다 싶어 큰 목청으로 말했다.

“그 오광일이가 정말 친구 맞어? 친구의 친구를 여기서 보다니, 그럼 우리 여기서 좀 재워줄 수 있어?”

나는 중대장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이 배낭에서 술과 담배를 꺼냈다. 그날 일부러 술을 세잔이나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고 소대장 이불을 쓰고 누웠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순찰근무 교대는 한 시간에 한 번씩 하였고 초소로 나갈 때마다 병사들은 실탄과 심지어는 수류탄으로 무장하곤 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소대장이 쓴 우정의 편지를 받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은밀한 어둠만을 믿었던 우리에게 병실에서 본 경계의 밤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친구가 불쑥 물었다.

“우리 다시 평양으로 들어갈까?”

우리는 두만강이 옆에서 흐르는 둔덕의 레일위에 맥없이 마주 앉았다.

“우리가 직장에 출근하지 않은지 벌써 3일이 됐어. 이 시간이면 벌써 평양에선 비상이 걸렸을 거야. 알잖아, 당 규정을! 이젠 돌아설 수 없어”

“방법은?” 친구는 마치도 포기하는 방법을 묻는 듯싶었다.

“방법은 기상천외야, 군인들이 우릴 보는 밤이 아니라 우리가 역으로 그들을 볼 수 있는 대낮이야, 지금 뛰자!”

우린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재빨리 본능적으로 나는 중국 땅을 살폈고 친구는 북한 땅을 흩었다.

“군인들이 안보이니 셋까지 세고 뛰자”

“하나, 둘, 셋!”

우린 서로를 마주보며 비장하게 셋을 합창했지만 일어서는 데는 똑같이 실패했다.

군인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문제라는 인식 앞에서 친구와 나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말없이 십 분이란 시간이 흐르자 국경의 고요로부터 서서히 충전되는 새로운 담력이 심장을 달구었다. 우린 마침내 말없이 손을 맞잡았다.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는 순간 운명의 끝에 함께 섰음을 느끼게 되었다. 아니 이미 더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린 동시에 힘 있게 솟구쳤다. 그리고 돌처럼 단단한 두만강 얼음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소원의 순간이었고 실행의 순간인 것이다. 뛰어가는 발걸음마다 운명을 두드리는 듯 요란했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저 놈들 봐라! 저 놈들 잡아라.”

본능적으로 돌아보던 나는 아연했다. 우리가 뛰어 온 그 몇 미터 굽이돌이에 바로 병사들 한 무리가 총 들고 서있는 곳이 아닌가. 격발장치를 당기며 총구를 겨누는 것까지 보고 뛰자니 갑자기 뒤통수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죽었구나! 아니 죽지 않으리라! 우리는 멀리 보이는 중국의 이름 모를 산만 노려보며 그곳을 향해 서로에게 의지한 채 뛰고 또 뛰었다.

한 발을 짚을 때마다 뼈 없는 살처럼 주저앉았고 또 다른 발을 내 밀어도 마찬가지였다. 산이 가까워질수록 따라오는 주먹들도 가까워지는 것만 같아 차마 돌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는 동안 이상하게도 나는 공포를 초월하는 분통함이 치솟았다. 이 몇 미터 강을 넘지 못해 이때껏 북한에서 짐승처럼 살았는가! 이 몇 미터가 그렇게 혹심한 인권의 차이였던가! 이 몇 미터를 달리는데 나는 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드디어 북한과 달리 수림으로 우거진 중국 산기슭에 엎어졌을 때는, 따라오는 북한병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살았다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쫓겨 온 남의 나라가 쫓아오는 자기 나라보다 더 은혜롭고 감사함에 억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선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떠나온 북한 땅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친구는 돌을 쥐고 힘껏 던지기도 하였다.

이어 친구는 나무가 울창한 산의 깊은 내면에서 안정감을 얻었는지 두 팔을 기껏 벌리고 눈 위에 덥석 드러눕기까지 했다.

“우리 이 산에서 며칠 푹 쉬자. 난 이젠 이 산에서 얼어 죽어도 좋아”

나도 그러고만 싶었다. 수령제일주의도, 집체주의도, 국가보위부도 없는 이곳에서의 죽음이라면 해방만세였다. 그러나 목숨 걸고 온 길이어서 이제부터의 자신이 더 소중했고 그래서 이제부터 정말 탈출이라는 생각이 나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아니야, 우리 이 지역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돼, 북한에서 중국 변방대에 연락할거고, 그럼 여기서 어물거리다간 우린 잡혀, 그러니 조금만 더 뛰자, 시내로 들어가자”

“어떻게? 시내가 어딘 줄 알고?”

주변을 둘러보던 나의 시야에 마을이 보였다.

처음엔 그 인적이 당황스러웠지만 총구 앞에서도 탈출했다는 자신감이 머리를 쳐들었다.

“꼼짝 말고 여기 숨어있어, 내가 만약 마을에서 붙잡히면 소리칠게, 그러면 즉시 산 속 깊이 뛰어!”

나는 지금의 상황에선 이 선택밖에 없다고 설득했고 그래도 계속되는 친구의 만류를 뿌리치며 마을로 내려갔다.

처음 만난 사람은 아줌마였는데 “말 좀 물어봅시다!”하는 내 말에 대꾸도 없이 무작정 어느 집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가 중국인이고 그가 가리킨 곳이 조선족이 사는 집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흰 개가 짖어대는 소리에 나는 식은땀이 날 정도로 놀랐다. 친구도 뒷산에서 틀림없이 듣고 있으리라. 이 생각이 나를 금시 안심시켰다.

“누구요?”

40대 중반의 남성이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중국 현지인을 기만하거나 설득하기엔 너무도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석에서 700달러를 꺼내 보였다.

집주인은 돈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신변 때문인지 맨 발로 달려 나왔다. 나를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힘이 황소 같았다.

연길시내까지만 데려달라는 내 말에는 안중에도 없이 장롱을 열어 가죽 잠바와 바지를 꺼내 던지며 함북 말투로 말했다.

“빨리 입으소.”

“괜찮아요, 이 옷은 일본 옷이에요, 관광객처럼 보이려면”

“안돼요, 여기사람 같아야지 초소에서 단속할 때 주목받을 수 있소, 잔말 말고 이 옷을 입으소.”

“잠시 만요, 저기 친구 하나가 더 있어요.”

“엥? 그럼 왜 그러고 섰어?, 빨리 데리고 오소.”

잠시 후 내가 친구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 집주인은 이미 나들이차림을 끝내고 난 뒤였다.

십분 후면 버스가 마을 앞에 도착할 시간이라며 서두르는 와중에 집주인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우선 말을 일체 하지 마소. 혹시 공안이 단속 할 때 말 시켜도 아픈 척 하고, 내가 옆에서 대신 말하겠으니 깐. 만약 단속 당해도 중국말 모른 척해요, 여긴 중국말 모르는 조선족들도 가끔 있으니깐? 그리고 주머니에 돈이 더 있으면 나한데 다 맡기소, 혹시 붙잡히면 내가 그 돈으로 공안과 사업 해볼 테니. 얼마나 있소?”

나는 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의 말대로 20분 후에 버스가 정확히 도착했다. 수도인 평양에서도 불가능한 버스통행 정상화가 중국의 시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혀를 차며 우리는 몸을 실었다. 두만강 기슭을 따라 한 시간쯤 달리는 동안 우리는 내내 북한 땅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벗어진 민둥산들의 모습이 곧 거기에서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헐벗고 굶주린 처지로 보였다. 그들에 비하면 쉼 없이 지껄이는 이 중국 시골사람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들인가. 선진국민의 자유로움과 풍요가 물씬 풍겼다. 갑자기 집주인이 우리 쪽을 돌아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앞을 보니 검문소가 보였고 무장한 군인들이 손 흔들어 차를 세우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뒤쫓아 왔고 그래서 차도 멈춰 세우는 것 같았다. 나는 공안들이 잡는 순간 어떻게 차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를 재빨리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친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척했다. 그 전에 친구의 감은 두 눈을 잠깐 살폈는데 눈썹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약간 코를 골았다. 차가 멈춰서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군화발이 올라오는 둔탁한 소리에서 총의 무게도 느껴졌다. 큰 목청의 중국말이 오갔는데 군인이 우리를 향해 부르는 것 같았다. 다가오는 군화발소리, 승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눈을 뜨면 지금 어떤 상황일까? 군인이 우리를 노려보는 것일까? 머리카락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숨을 세고 있는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차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눈을 떠보니 정말 차가 가고 있었다. 훗날 집주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해주었다.

“공안들은 일일이 검열하기 바쁘니깐 버스에 올라와 한번 쭉 흩어보오, 탈북자 색출이 목적이니깐, 탈북자 얼굴피부를 보면 우리랑 틀리오, 오랜 방랑생활 때문인지 새까맣고 때에 그을렸거든, 그런데 자네들 피부는 평양사람들이어선지 우리랑 비슷해서 그냥 넘어간 것 같소,”

그렇게 피 말리는 두 개의 검문초소를 지나고서야 우리가 탄 버스는 앞이 확 트인 연길시내로 들어섰다. 두만강을 넘을 때의 긴장보다 바로미터의 더 큰 순간들을 체험한 나의 온 몸은 땀에 푹 젖었다. 이제는 공안도 찾기 힘든 시내로 들어섰다. 이제는 13억 중국인의 품에 몸을 숨길 수 있다. 나는 격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친구의 살을 마구 꼬집었다. 그도 같은 심정인지 차창 밖을 내다보는 자신 넘친 시선에는 거침이 없었다. 볼거리를 즐기는 여유를 과시하기나 하려는 듯 어느 한 곳을 손으로 가리키기까지 했다. “연변은 세계로! 세계는 연변으로!”라는 한글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중국의 이 작은 마을도 세계를 지향하는데!” 하는 부러움의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자본주의 바람을 막기 위해 모기장을 치자! 쇠살창을 치자!”는 북한 구호에 익숙했던 나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 플랜카드가 충격이고 감동이었다. 더불어 폐쇄와 야만으로부터 탈출한 우리의 용단이 천만번 옳았다는 것을 다시금 자부했다.


2.

버스에서 내리자 집주인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연길까지 왔으니 이젠 헤어지기요, 몸조심하고 잘 가오.”

난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고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어떻게?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정말 죄송한데 우리랑 좀 더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같이 있으면서 여기 사정도 좀 설명해주고. 공안에게 안 잡힐 지혜도 주면 안 됩니까?”

“엥? 연길에 그럼 아무도 없다는 기요? 무작정 온 거요?”

친구가 한 발 나서며 말했다.

“친척이 있긴 한데 우린 거기로 갈 줄도 몰라요.”

난감해하던 집주인은 보기에도 딱했는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 전화했다.

“난데요, 창용인데요, 내가 이제 두 사람을 데리고 갈 테니깐 좀 신제지오, 네, 네……. 집에서 멀지 않소”

그가 세운 택시를 타고 우리는 연길시내 한 끝 외진 곳으로 갔다. 매우 어렵게 사는 장모집이라는데 정작 들어가 보니 평양 중산층 보다 나은 수준이었다.

그날 창용 아저씨가 사 갖고 들어간 쇠고기로 우리는 온종일 주린 배를 채우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김정일을 죽일 놈이라는 욕으로부터 시작한 그는 탈북자들의 처참한 방황실태와 북송참상, 공안들의 탈북자색출 광분 등에 대해 장시간 말해주었다. 왜 북한 군인들이 총을 쏘지 않았는가? 궁금해 하는 우리에게 중국 쪽을 향해 발포하면 국제 법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며, 대담하게 잘 뛰었다고 칭찬을 했다. 그는 탈북자를 많이 만나보았지만 700달러를 준 사람들은 당신들이 처음이라며 그 돈이면 견인기 한 대를 살 수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탈북자들에게 돈을 받으면 벌금을 20배로 물리니 만약 공안에 잡혀도 돈 이야기는 절대 해선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우린 그의 말들에서 여기가 탈북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기름진 음식도 제 맛을 변변히 느낄 수 없었다. 이 때 창용 아저씨의 핸드폰이 울렸다.

“오, 나 못 들어간다고 아까 말 했잖소 ……. 뭘? 뭘? 정말이야?”

핸드폰을 받는 창용 아저씨의 얼굴빛이 심상치 않았다.

핸드폰을 내려놨을 때는 우리를 마치 처음 보는 눈으로 보기까지 하였다.

“자네들 살인자나?”

뜬금없는 섬뜩한 그 질문에 친구와 나는 마주 보았다.

“살인자라뇨?”

“금방 마누라한데서 전화가 왔는데 변방대와 공안에서 마을을 수색했단 거요, 탈북시간, 복장, 키를 말하는데 당신들 찾는 게 맞소, 근데 문제는 북한에서 받은 통보에 의하면 당신들이 살인자라는데?, 무기도 휴대하고 탈북 했다며? 국경 연선에 지금 난리 났다잖소.”

그의 말에 나는 분통이 터졌다. 우리가 살인자라니! 죄라면 탈북 한 죄밖에 없는 우리에게 사람을 죽인 죄를 들씌우다니!

창용 아저씨가 가까이 다가앉으며 조용히 물었다.

“살인자로 수배하고 찾는걸 보니 내 보기엔 당신들이 그냥 탈북자가 아닌 것 같소, 돈도 있고 얼굴 피부도 그렇고 평양사람들인 것을 보니 분명 먼 일을 하던 사람들인 것 같은데 대체 직업이 뭐였소?”

공안의 시선이 우리를 노리는 이 시점에서 현지인에게 의존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았다.

나는 중앙기관에서 근무했고 친구 같은 경우 김정일 가까이서 10년을 근무했다는 점, 체제를 비관하고 남조선으로 갈려고 한다는 것까지 솔직히 말했다. 친구가 색 낡은 편지 봉투를 보여주었다.

“우리 친척주소인데 일 년 전에 보내온 것입니다. 이 집까지만 데려다 줘도 감사하겠습니다.”

창용 아저씨는 주소를 유심히 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친척이 엄청 부자인거네요, 이 주소는 여기 동북지방에서도 다 아는 부자촌인데요.”

우리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는지 창용 아저씨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한국 갈려면 나한데 맡기오, 내 조카가 전문 그 일을 하는데 당신들 정도면 편하게 보내줄 수 있소, 그 조카애는 한국 국정원이랑 직접 통화하는 애거든,”

그 때 벨 소리가 울렸다.

“뭐? 뭐야? 그 말을 왜 했어. 이 바보야. 모른다고 할 거지! 알고 있었다고?”

창용 아저씨는 이번엔 얼굴이 창백해졌고 통화가 끝나기 바쁘게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다.

“빨리 일어섯! 공안이 이쪽으로 오고 있소. 장모집주소를 물어 봤대”

새벽 두 시에 우린 다시 밖으로 나왔다. 창용 아저씨는 내가 처음 만났던 중국 여자를 개년이라며 화를 냈다. 그러더니 돈을 받지 말아야 하는데, 다시는 탈북자를 돕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문제는 정작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장모 집에서 멀리 떨어져 우두커니 서있는 창용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니 우리의 미래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우리는 붙잡히면 자살할 각오라도 있지만 그에게는 불안과 후회의 고통밖에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맞다. 거기로 가자!”창용 아저씨가 문득 소리쳤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장모집 건너편에 빈 집이 하나 있는데 밖으로 자물쇠를 채우고 들어가 있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위험근처로 가기 싫다고 했지만 창용 아저씨는 공안이 수시로 순찰하는 이 밤에 거리를 방황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며 장담했다.

“등잔불 밑이 어둡다잖소, 그리고 공안이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빈집에 어떻게 들어가오?”

우리는 그 빈집에서 삼일을 보냈다. 한국 들어간 조카가 낼 온다며 무조건 자기를 기다리라 했다는 것이다. 음식은 창용 아저씨가 어둔 밤에 한 번씩 세끼 빵을 넣어주었다. 차라리 부잣집 친척집에 가 있는 것이 더 편하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우리는 결단코 반대했다. 우리 신분이 이미 단속됐던 6중대에서 노출이 됐고, 3일이라는 시간 안에 공안은 북한으로부터 우리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받았을 것이다. 안내 용의자에 불과한 창용 아저씨의 장모집도 알아낸 공안이 추적범의 친척집을 수사선상에서 빼놓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설명했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 날도 북한이야기와 조금 엿 본 중국 시골의 발전모습에 대해 장시간 이야기하다 잠들었을 때였다. 시끄러운 중국말과 군화발소리에 눈을 뜬 나는 급히 친구를 깨웠다. 숨죽이고 밖의 동정을 살피던 우리는 동시에 방 한 구석으로 뒷걸음쳤다. 손전등을 켠 누군가 우리가 숨어있는 집을 기웃거리더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물쇠를 거칠게 흔들 때에는 가슴을 마구 헤집는 것 같았다. 문이 열렸다. 거구의 한 사나이가 불쑥 들어오다가 우리를 보고 흠칫했다. 보기에도 두려운 군복 입은 공안이었다. 그는 우리가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나는 방바닥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는 친구의 등을 세차게 때렸다. “뭘 해?!”

나는 낮에 내다보군했던 높은 울타리를 어떻게 날아 넘었는지 모른다. 앞에서 달려가는 형체를 쫓아 정신없이 뛰면서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이렇게 계속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친구인줄로만 알았던 앞의 그림자가 송아지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 돌아섰다.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면서도 우리가 숨어있던 빈집 근처를 어지럽게 비치는 12개의 손전등을 빠짐없이 세었다. 저 12개 불빛 중 하나라도 놓치지 말아야 나의 은밀한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친구가 처음 뛸 때와 추정방향을 추적해보려 애쓰며 허리를 굽히고 이리저리 헤맸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손전등 불빛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오고 있었다. 허둥거리던 나는 마침 앞에서 서성거리던 황소 뒤로 몸을 숨겼다. 공안과 나와의 거리는 불과 5미터도 안되었다. 황소 배 밑으로 뻗은 내 두 다리를 보지 않을까 숨이 컥컥 막혔다. 나를 의식해서인지 황소는 비실비실 피하다 못해 달렸고 나는 그 뒤에 숨어 어쩔 수 없이 가시나무에 찔리고 뜯기는 채로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찰나의 위험을 넘기는 동안 어느새 날이 푸름푸름 밝아왔고 공안 승합차가 가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그때야 쑤시다 못해 무감각해진 발이 양말도 안신은 맨발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발을 비비면서도 승합차에 친구가 실려 간 것만 같아 눈물이 났다. 나의 착한 친구가 반항도 못하고 짐승처럼 끌려가는 상상에 주먹으로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그런데 한참 후 어디선가 나를 찾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버쩍 들고 그 쪽을 바라보니 친구였다. 그것도 산 중턱 나무 뒤에 숨어 머리만 내밀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단숨에 달려 올라갔다. 친구의 앞에 섰을 때는 주먹으로 힘껏 얼굴과 가슴을 때리며 소리쳤다.

“웃음이 나와? 너 혼자만 살자고 이렇게 멀리 왔냐? 이 나쁜!”

어질기 짝이 없는 친구는 매를 그냥 맞아주었다. 내가 뒤에 따라 선 줄 알고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말도 다 맞고서야 꺼냈다. 우린 끝내 연인처럼 그러안고 소리 내어 엉 엉 울었다. 울면서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친구가 불의에 들이닥친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내가 북한에서부터 가져온 시집을 챙겨왔다는 것을 알았을 땐 더 미안하고 죄송했다. 그날의 아픔과 설음, 두려움의 때로 얼룩진 노트가 바로 2008년 12월 9일 일본 NHK가 9시 뉴스특보에서 카메라에 담았던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원본이다.


3.

공안이 없음을 분명히 확인한 우리는 날이 어두워질 무렵 마을로 내려갔다.

물론 둘 다 맨 발로 말이다. 창용 아저씨는 장모로부터 꾸중을 받았었는지 들어오라는 말 대신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는 우리가 무사함을 무척 기뻐해주는 그가 친삼촌처럼 느껴졌다.

"당신들 짐을 공안에서 다 가져갔소. 그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데?"

중국어 책과 속옷들이었다는 대답에 돈은 없었냐고 다시 물었다.

돈 소리에 창용 아저씨 등 뒤에 서있던 친구 얼굴이 갑자기 사색이 됐다.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돈은 있어요, 내가 갖고 있었어요."

친구가 정말이냐는 눈으로 날 쳐다볼 때 마침 장모의 목소리가 들렸고 창용 아저씨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돈을 갖고 있어? 외투 주머니에 있었던 거 아니야?"

친구가 기대 절반 의문 절반으로 물으며 다가왔다.

나는 그를 마당 한 구석으로 끌고 갔다.

"똑똑히 들어, 우린 지금 한 푼도 없어, 빈털터리라고, 그러나 있는 척 해야 돼, 저 사람은 가면 그만이지만 우린 저 사람을 잃으면 끝이야, 내 말 알겠지?"

창용 아저씨가 보따리 하나를 챙겨 나왔다.

우린 서둘러 대충 맞는 신발과 솜옷들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창용 아저씨는 절대 불을 피워선 안 된다며 조카가 이틀 더 늦는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만 부디 얼어 죽지 말라고 하였다. 공안이 탈북자들을 잡아들이는 이유 중 하나가 탈북자들 때문에 산불이 많이 나서라고 했다. 그러면서 장모 집에서 자기가 더 머물고 장모 속을 편하게 해주려면 돈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몹시 화가 난 척 하며 조카가 온 다음에 보자고 단호히 잘라 말했다.

친구와 나는 이렇게 창용 아저씨가 이틀 동안 날라 준 페트병의 뜨거운 물을 그러안고 산 속에서 모포 하나로 붙어살았다.

"우리 서로 여자라고 생각하자"

한번은 친구가 불쑥 던진 이 말이 어찌나 웃겼던지, 우린 정말 아주 오랜만에 웃어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짧은 웃음에서 삶이란 이리도 다양하고 그래서 생존만으로도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그 이틀 밤의 정취를 나는 죽을 때까지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밤이 점점 깊어지니 산 속의 신비가 태동했다. 언젠가 원산 밤바다 기슭에서 끊임없는 파도소리가 심경을 사로잡았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바다처럼 산도 밀림이 설레는 소리로 마치 생명이 숨 쉬는 듯 했다. 우리는 고난의 자신들이 뿌듯했다. 사람은 자연 속에 산다고 하지만 바람을 머금고 산 정상에서부터 밀려 내려오는 소리를 온 밤 듣는 경험자가 얼마나 되랴, 우리는 골짜기 따라 내려오는 1월의 찬바람을 피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두고 온 집이야기와 북한에서의 나날들을 옛말처럼 주고받았다. 그래선지 별들이 또렷한 밤하늘을 우러르며 두 손 모아 한국행의 소원을 빌 때는 눈시울이 젖기도 했다. 십년세월 이 고생해도 그 땅으로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에겐 그날의 대한민국이 별 만큼이나 아득히 멀었다. 다음날 창용 아저씨가 우리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신광용으로 자기 이름을 소개한 그는 대뜸 확인 차원이라며 신분증부터 요구했다. 신분증안의 날짜들과 도장이며 인쇄 질감에 이르기까지 전문가처럼 꼼꼼히 체크한 그는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산 중턱까지 닛산 지프차 한 대가 올라왔다. 듣던 바대로 견인기구입에 들떠있던 창용 아저씨와는 차원이 달라보였다. 우리는 창용 아저씨와 포옹으로 이별인사를 마치고 차에 올랐다. 한국 가면 은혜 갚으려 꼭 오겠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물론 돈은 주지 않았다. 다행히도 창용 아저씨가 자기에게 700달러를 준 사실을 조카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애원했기 때문이다.

차는 젊은 신광용 이처럼 힘 있고 멋쟁이였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노래가 한국가요여서인지 내친 기세로 한국까지 쭉 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차가 도착한 곳은 연길 시내 어느 번화가였다. 그동안 사람을 무서워했던 우리에겐 번잡함이 어마어마한 공포였다. 광용은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악몽 같은 사정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에서 빨리 내리라고 하였다. 좀 뒤떨어져 오면 "얼른 오소!"하고 소리쳤고, 공안들이 사방에서 얼른거리는 백화점에 들어서선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기까지 하였다. 안하무인인 그의 행동은 괴로운 정도가 아니라 고문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일단 백화점에서 옷과 신발들을 사주었다. 나는 그때 거울을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이 얼굴로 여기 서있단 말인가? 서둘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옷은 괜찮으니 선글라스를 사달라고 했다. 광용은 그게 더 의심스럽다고 했고 우리는 그냥 소원했다. 그 이후부터 친구와 나는 선글라스신사가 됐다. 검은 안경알 뒤에 자신들이 감쳐줬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펴졌다. 그 선글라스가 없었다면 광룡이가 내민 카메라 앞에도 감히 서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가 사용한 돈과 사준 상품들을 윗사람들에게 확인시켜줘야 한다며 광용은 사진을 찍어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찍고 보니 뒤에 공안들이 서있었다.

그날은 참으로 호의호식하는 날이었다. 비싸 보이는 식당에서 푸짐하게 먹었고 우리는 난생처음 남녀공용의 찜질방이란 곳에도 갔다.

역시 개혁개방은 달랐다. 어떻게 전혀 모르는 남녀들이 집체적으로, 그것도 속옷차림으로 한 공간에서 버젓이 잘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것이 바로 북한에서 말하던 자본주의 황색바람이었구나, 빈번히 놀라는 평양촌놈 우리에게 광용은 진짜 자본주의 맛을 보여주겠다며 "때밀이"란 사람을 불렀다. 돈만 주면 내 때도 벗겨주다니. 나는 "때밀이" 아저씨가 힘을 쓰는 동안 너무도 송구하고 크게 신세지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자정 무렵 우리가 간 곳은 신광용의 집이었다. 마중 나온 스물다섯 돼 보이는 여자를 자기 와이프라고 소개했는데 나는 그때 여자를 그렇게 가까이서 본 다는 것이 좀 별스러웠다. 우리가 무인도에서 인간세상으로 온 느낌이랄까, 폐가 같은 빈집도 아니고 산속도 아닌 바닥이 따뜻한 아파트에서 이불을 덮고 잔다는 것 또한 이상할 정도였다. 다음날 일어나니 신광용은 어디 나갔다 왔는지 금방 들어온 옷차림이었다. 전날과는 달리 한 마디도 안했고, 아침식사를 끝내고 난 후에는 우리에게 종이와 볼펜을 각각 주었다. 자기프로필과 가족관계, 한국 정부 앞으로 제공할 수 있는 북한의 비밀정보들, 그리고 탈북이유까지 한 치의 거짓 없이 적으라고 하였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비밀정보인데 그것은 자기도 다 알아서는 안 되니 간단하게 제목처럼 요약만하라고 하였다. 비밀이 뭘까? 어떤 게 정보일까? 아무튼 그의 요구는 국가조치처럼 무언가 숭엄한 감이 들었다. 나는 글을 배우고 난 후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곱게 써 본적이 없었다. 친구도 대한민국 대통령 앞으로 편지 쓰듯 정성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신광용은 우리의 자필서류들과 쇼핑사진, 그리고 신분증 복사사진을 우편봉투 안에 넣으며 한국에선 이럴 땐 파이팅! 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 때부터 수 없이 맘속으로 파이팅! 을 곱씹었다. 우리가 더 자신했었던 것은 신광용의 처가 함북출신 탈북자라는 것을 안 후부터였다. 오갈 데 없는 탈북자를 아내로 맞은 그의 인간성이 돋보였고 그 믿음만으로도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행복했다.

그러나 파이팅 10일이 지나도록 그가 장담하던 기적은 오지 않았다.

당신들을 더 숨겨주고 싶은데 돈이 떨어져간다는 광룡의 한숨도 점 점 커져갔다. 나는 우리가 왜 이 집에 계속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속 시원히 알아야 했다.

"오늘은 말 좀 합시다. 도대체 누굴 기다리는 것이고 어디까지 우리 문제가 진전 된 겁니까?"

신광용은 처에게 술심부름을 시키고 정색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잘 알던 한국사람이 있어요, 탈북자 문제에 관심이 많은 분인데 내 생각엔 국정원 같소, 돈도 몇 번 받았고, 평양출신 탈북자가 있으면 자기에게 바로 연락하라고 했고, 또 있느냐 자주 물어보기도 했소, 그래서 당신들 문제를 그에게 이야기했소, 서류도 그 사람에게 보낸 것이고, 처음엔 돈도 보내고 당신들의 안전을 잘 부탁한다고 하더니 지금은 연락이 안 되네요, 핸드폰 번호조차 바꿔버렸어요,"

나는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국정원 직원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람을 우리가 지금껏 구세주처럼 기다렸단 말인가?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의 기다림도 무의미할 것이라 생각하니 막막했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 신광용은 베트남이나 몽고, 혹은 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했지만 우리로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국경에서 연길까지 나오는 이 수 백리에서도 여러 번 생사를 넘었는데 그 먼 길을 또 어떻게?

결론은 돈이었다. 더 있자고 해도 돈이고 길을 떠나자고 해도 돈이었다.

친구가 친척 주소를 다시 꺼내왔다. 창용 아저씨와 똑같이 부자촌이라며 감탄하던 광용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국말이어서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기분 좋은 통화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통화 후 광용의 말은 거의 감격 수준이었다.

"이 친구가 기잔데 애 말로는 친척이 맞다면 한국 가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오. 그러고 보니 이 이름을 나도 아는데 항일열사로 중국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분이에요. 그 자녀들도 심양에 나가 한 자리씩 하고 있고, 정말 친척이 맞소?"

친구의 선친들 또한 항일투사로, 북한에서도 충신의 귀감으로 인민들에게 선전되고 있다는 말에 광용은 우리의 한국행을 백퍼센트 확신했다. 아니 확신을 넘어 자기 처도 이번 기회에 남한으로 함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탈북자의 남편으로 인정 될 경우 조선족의 한국국적 취득이 가능하다며 광용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아침이면 중국 공안의 매복감시에 적발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 밤에 당장 찾아가기로 하였다. 셋은 밖으로 달려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좋은 택시여야 공안이 설사 근처에서 지키고 있어도 의심 못한다며 비싼 택시를 골라 탔다. 30분 쯤 달려 도착해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궁궐 같은 집이었다. 주변이 너무 환해 어떤 문제가 생길 경우 탈출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의심스러운 승합차가 서있는 것도 보였다. 하여 나는 집근처를 두 바퀴 더 돌자고 했다. 앞 현관과 이어진 골목들과 담장 주변을 아무리 살펴도 차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불의의 정황에 대처하기 힘들어보였다.

우리는 논의 끝에 택시를 뒷골목에 세워두고 광용이를 우선 보내기로 했다. 광용이가 친척을 만나 시간과 약속을 따로 정하고 믿지 못할 경우 택시 있는 곳까지 직접 데려오기로 했다. 그렇게 광용이가 가고 나서부터 나와 친구는 손에 땀을 쥐고 기다렸다. 한초 한초가 일 년 같았다. 친구도 조바심이 났는지 한 바퀴 더 돌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 둘 중 누구도 그 말을 중국택시기사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30분쯤 됐을 때 광용이가 쫓기듯 달려왔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빨리 출발하자고 두 팔을 마구 흔들었다. 좀 전의 그 어떤 긴장 때문인지 계속 뒤를 돌아보며 숨을 헐떡였다.

예전 같으면 자기 집 앞에 세웠을 택시도 훨씬 멀리 지나쳐 세우게 했다.

그리고 들려주는 그의 말은 전율, 그 자체였다.

"그 집 아들이라고 나왔는데 자긴 사촌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대, 아버지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더 상관없다면서 뭐라는 줄 아오? 그 놈이 살인했다며? 살인자가 어떻게 이 집에 오냐고! 공안에서 24시간 지키고 있으니 잡히지 않겠으면 두 번 다신 나타나지 말라고 하는 거요. 그래서 설득하려는데 아까 승합차 봤지요? 거기서 두 놈이 내려오더니 나에게 달려오는 거요,"

나는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했지만 친구는 한 쪽에 쭈그리고 앉아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4.

집에 들어가니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김광선의 처가 특별히 불고기상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우리는 더 할 말을 잃었다. 더욱이 친구가 자꾸 눈물을 흘리자 남자가 우는 것을 처음 봐서인지 광용의 처는 세운 두 무릎 안에 이마를 쑤셔 박고 있었다. 고기가 까맣게 타자 광용이가 술병을 들었다.

"자, 자 남자들이 뭐 고만한 일을 가지고,그 배짱으로 탈북은 어떻게 했소?"

난 친구의 손에 술잔을 쥐어줬고 광용은 술을 채웠다. 우리는 연거푸 세 잔을 마셨다. 네 번째 잔을 비운 광용이가 "근데, 난 정말 이것만은 궁금한데 우리 처 같은 경우는 배고파서 왔어요, 쌀 가지고 다시 들어가겠다고 처음엔 난리쳤다니깐, 근데 당신들은 평양사람들이잖소, 내 보기엔 직업도 괜찮았던 것 같고, 살인할 사람들도 절대 아닌 것 같고, 탈북 한 이유, 그 이유가 도대체 뭐요?"

"쾅!"

친구가 식탁을 내려친 주먹에 머리를 버쩍 쳐든 광용의 처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친구의 그런 눈빛과 목청이 처음이여서 특히 나의 놀램은 더 했다.

"이유? 무슨 이유를 알고 싶은데? 북한에 무슨 이유가 있는데? 이유가 있어서 사람들이 굶어죽었냐고? 이유가 있어서 당에 충성했던 사람들이 숙청됐냐고? 그럼 김일성이 제 아들놈에게 권력을 준 이유가 뭔데? 김정일이가 계속 독재를 하는 이유가 뭔데?"
그 말 앞에서 우리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 친구와 나만이 아니라 과연 모든 탈북자들에게 자신들의 탈북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으랴. 배고파서 살자고 왔든, 핍박으로부터 도망쳐왔든, 그 정권이 싫어서 버리고 왔든, 그것이 어떻게 자기 친부모형제들과 처자, 고향을 버리고 온 인간의 이유로 될 수 있는가. 그 모든 이유를 생각할 자유마저 철저히 박탈당한 몹쓸 나라가 아닌가!

나는 그날 심화조에 의해 간첩혐의로 숙청된 친구의 장인에 대해서, 남한 서적들을 친구들에게 몰래 돌린 혐의로 국가보위부의 엄격한 조사를 받았던 자신에 대해서 김광선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온 밤 탈북동기를 말 하고나니 한국행 결심과 용기가 두만강 기슭에서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다음날 우리는 김광선과 작별했다. 우리가 친구의 친척집으로 접근할 것을 예상하고 공안과 북한 국가보위부 해외반탐과 시선이 연길에 집중됐으리라 판단해서였다. 속히 연길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탈북여성과 사는 김광선의 처지도 불안한데 우리까지 얹혀있을 순 없었다. 김광선은 한국 사람이 연락 올 수도 있으니 자주 통화를 하자며 자기 연락처를 주었다. 그리고 떠나는 내 손에 중국 돈 100원을 주었다. 그는 작은 돈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겐 천만금과도 같았다.

훗날 처와 함께 한국입국에 성공한 김광선을 만나 그 백 원에 대한 보답을 했더니 그는 그날의 우리보다 더 고마워했다. 그러한 인품을 만나지 못했다면 장담컨대 나는 한국으로 절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제도 노원구에 사는 그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끔찍했던 탈북과정의 회고에 스스로 혀를 찼다…….

연길시를 벗어나 친구와 내가 밖을 나와 정처 없이 찾아다닌 곳은 십자가였다. 광용의 말에 의하면 성당이나 교회들에서 탈북자들에게 돈과 먹을 것을 주고 간혹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한국에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주의할 것은 배고파서 탈북한 사람들로 말해야지 살인자로 수배된 상황에서 자기 신분을 노출시킬 경우 신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목사나 선교사들 중 공안과 연결 된 사람들도 많으니 그 점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

우리는 돈과 먹을 것을 공짜로 주는 종교도 있다는 사실에 사람은 다 살게 돼 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붕이 뾰족한 건물들과 십자가를 찾아 온 종일 헤맸지만 매 번마다 허사였다. 대부분 문이 잠겨있거나 건물을 지키는 노인들이 나와 개처럼 쫓았다. 북한에서 말하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김정일 민족이란 것이 이 정도로 형편없는 줄 몰랐다. 그때마다 친구와 나는 우리를, 아니 북한 주민들을 세상이 이렇듯 멸시하고 천시하게 만든 김정일 정권에 대해 치를 떨었다.

그렇게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배는 고팠지만 워낙 밝은 낮을 무서워했기 때문인지 밤의 어둠 속으로 기분이 풍선처럼 둥 둥 떴다. 항상 숨어 살고 갇혀 살다 넓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이야기도 하며 나란히 걸으니 즐겁기까지 했다. 칼날 같은 눈바람이 무슨 대수이랴. 이대로 가다 벌판에서 쭈그리고 잔들 어떠랴, 우리는 이미 산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모진 생명들이 아닌가. 끝도 없이 무연한 중국의 농촌 길에서 우리는 밤하늘에 대고 와! 와! 고함치기도 했다.

그날 밤 연길에서 멀리 떨어진 용정리 어느 집 소외양간에 나란히 누운 우리는 백 원을 들여다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솔직히 300만 아사의 나라에서 왔지만 친구나 나는 배고픔이란 것을 남의 나라 일로만 여겼었다. 때로 지방 출장길에서 거리의 시체를 보면 왜 저 사람들에겐 먹을 것이 없었을까? 왜 사람이면서도 굶어죽을까? 왜 훔쳐서도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생사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의문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그 백 원 앞에서는 우리 눈에도 사람이 가진 목숨의 한계란 것이 보였다. 당장 이 돈마저 없다면, 그래서 하루 이틀 먹지 못하고 방황하다나면 이렇게 굶어죽겠구나! 이렇게 초라해지겠구나! 하는 절망으로 초조해졌다. 그러자 배고픔과 그 결말의 두려움이 육신을 파고들며 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전 같았으면 온 밤 못 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겠지만 그 날만은 공안의 추격 따위는! 하고 체념한 채 잠들고 말았다. 아마도 공안의 존재를 하얗게 잊어 본 것은 그 밤이 처음인 것 같다.

다음날 소 울음소리에 깨어난 우리는 돈 백 원이 품에 있음을 먼저 확인하고서야 자리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서로 마주보던 친구와 나는 소 외양간 밖으로 절대 나갈 수 없음을 알았다. 언젠가 창용 아저씨가 말하던 방황자의 증표가 얼굴과 옷차림에 역역했던 것이다. 이 꼴로 그냥 밖으로 나가면 누구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배고픔도 잊고 도망치듯 가장 가까운 집 앞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노인 한분이 나오셨는데 척 보기에도 우리 꼴이 탈북자 같았는지 바로 문을 닫을 기세였다. 나는 최대한 허리 깊이 숙여 인사했다.

"할아버지, 세수 좀 하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문을 반쯤 닫던 노인은 무슨 영문인지 온 몸을 밖으로 내밀고 유심히 쳐다보았다.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 중국인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노인이 "들어오소."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노인은 큰 놋대야에 김이 물물 오르는 더운 물을 들고 나오셨다. 우리는 황급히 달려가 대야를 받아 마당 한 구석으로 가져갔다. 혹시 누가 볼세라 말이다. 먼저 씻으라고 서로 양보하던 우리를 지켜보시던 노인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강 넘어 왔소?"

우리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

"네"

노인은 머리를 끄덕이시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때껏 밥 달라고 문 두드리던 애들은 많이 봤어도 씻겠다는 사람은 자네들이 처음인 것 같소, 그래 끼니는 해결했소?"

우린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물쭈물 하는 우리를 보던 노인은 "다 씻고 좀 들어오소."하는 말을 남기시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을 땐 노인이 부엌에서 밥을 푸는 중이었다. 그때의 밥 냄새를 나는 자부심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쌀밥냄새를 맡고 있는 생존의 자부심이었고, 앞으로도 목숨이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의 자부심이었고, 세상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의 자부심이었다.

노인은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 오랜 중국 공산당원의 눈으로 본 김정일을 격앙된 어조로 저주하시였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인민 전체를 굶길 수 있냐며 배를 보니 양심도 없는 놈이라고 했다. 중학교 교사였다는 노인은 단둥과 신의주가 개방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하셨다. 우리는 북한이 절대 개방할 수 없는 체제의 속성을 장시간 설명 해드렸다. 한동안 듣고 계시던 노인이 가까이 다가앉으시며 물었다.

"말하는 걸 보니 자네들 배운 사람들 같은데 왜 떠돌아다니오?"

남한으로 갈려고 한다는 친구의 대답에 노인은 자기가 잘 아는 한국 교회가 있으니 거기 목사를 만나면 성사될 것이라며 편지와 약도를 만들어 주셨다.

우리는 노인이 주신 편지를 한국으로 가는 여권마냥 소중히 품고 다시 연길로 들어갔다. 정성껏 그려주신 약도 때문인지 시외버스 정류장들이 밀집된 연길시장 근처 "연길교회" 간판도 의외로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세 명의 중년 남성이 있었다. 그 중 안경 낀 사람이 우리를 먼저 보고 반색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목사를 만나고 싶어서요."

우리는 님 자를 말할 줄 모른다. 북한에서 님은 오직 김정일의 존칭어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에겐 목사가 목사님이 아니었다.

"어디서 오셨는데요?'

"목사에게만 말 할 수 있는데요."

"목사님은 지금 한국 들어가시고 없는데요. 내가 목사님을 대리하고 있으니 나에게 말해도 됩니다."

우린 편지를 꺼냈다. 그가 편지를 읽는 동안 우리는 책상 위의 십자가와 성경책을 이상한 물건처럼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큰 목청이 울렸다.

"탈북자야? 나가!"
"?"
"야, 이것들 내보내 탈북자야!"

나는 뜻밖의 상황에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앉아있던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우리를 방안에서 밀어내려고까지 했다. 그 기세에 문까지 힘없이 뒷걸음쳤을 때 갑자기 친구가 무릎을 끊었다.

"우린 한국교회라고해서 찾아왔습니다. 우린 한국에 갈려고 목숨 걸고 탈북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나가면 우린 죽습니다."

안경 낀 사람이 악을 쓰며 소리 질렀다.

"너희들 같은 놈들이 한 둘이야? 우리 목사님이 너희들 때문에 공안에도 잡혀갔었어, 교회가 문 닫게 생겼어! 일어나서 안 나가? 안 나가!"

나는 억이 막혔다. 이것이 우리가 갈려고 했던 대한민국이었단 말인가?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찾던 한 민족이었단 말인가? 친구의 머리까지 툭 툭 치는 그들의 행패를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안경 낀 사람의 면상을 후려치고 두 사람을 향해 옆에 있던 십자가를 흉기처럼 쳐들었다.

"공안 불러! 전화해!"

욕이라도 후련히 하고 싶었지만 그 소리에 나와 친구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안이 따라 올 것만 같은 착각에 미친 듯이 교회 멀리 뛰고 또 뛰었다. 한국입국 후 내가 한국기독교총연맹 세미나에서 그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그랬더니 모두가 믿지를 않았다. 아마도 연길 현지 사람들일 것이라며 한국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날의 우리에겐 그 교회가 난생 처음 가 본 한국교회였고 그래서 그들도 한국인일 것이란 생각뿐이었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숨을 고르며 도망쳐 온 교회 쪽을 바라보던 그때 우리의 가슴은 먹먹하기만 했다. 방랑자의 희망이란 밟힐 때마다 소멸되는 것이다. 주머니에 남아있던 교회약도를 천천히 찢던 친구가 돈 십 원만 달라고 하였다. 이유를 묻자 오늘만은 술 한 병 사먹자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무시한 채 숨어서 잘 곳이나 찾자고 했더니 친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데? 대한민국? 우린 거기 절대 못가! 금방 보고도 모르겠냐? 저 사람들이 공안에 신고한다잖아! 너나 나나 이젠 어느 민족도 아니야, 그냥 사람 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난 아무 대꾸도 못했다. 우린 태어난 조국을 버렸는데 찾아가고 싶은 조국은 우리를 버린 것만 같아 육신만 있고 삶은 없는 자신들을 보는 듯해서였다.


5.

우린 백 원을 들고 시장 한 끝 매장으로 갔다. 술병을 들고 매만지기도 했지만 무겁게 내려놓고 말았다. 대신 백 원을 50원으로 바꿨다. 교회에서 도망칠 때 공안보다 친구 등을 놓치면 어쩌나 했던 불안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50원은 내가, 다른 50원은 친구 손에 쥐어주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헤어지면 어디서 만나고, 만나도 사전에 자기의 안전신호는 무엇으로 보여줄지 구체적으로 약속했다.

가장 최선은 절대로 헤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교회에서 도망칠 때 상황을 되새기며 뛸 때는 골목마다 무조건 오른쪽으로만 가야 한다는 것까지 약속했다. 유사시 연락처라며 그때 외웠던 신광용의 핸드폰 번호를 나는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때부터 교회를 포기하고 한국기업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기업인을 직접 만나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고 그래도 통하지 않을 경우 그 회사가 한국에 보내는 컨테이너에 숨어가자고 계획했다. 그러자면 항구로 가야 했다. 가는 길을 물어보기 위해 신광용에게 전화를 했더니 차라리 연길에서 기업들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연길은 정말 싫었다. 싫어도 백 원밖에 없는 처지에서 다른 방법 또한 없었다. 우리는 먼저 백 원으로 비누 한 장을 샀다. 배고픈 것은 우리 속사정일 뿐 살자면 남들에게 보여 지는 겉모양부터 다듬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잠은 반드시 우물이나 공동수도, 혹은 시냇물이 있는 외진 농촌에서 잤고. 아침이면 시내로 걸어 들어와 한글 간판 기업들을 찾아다녔다. 물론 신광용이가 사 준 선글라스를 똑같이 끼고 말이다.

누구든 연길로 가보면 알겠지만 거의나 한글이다. 정작 회사를 찾아들어가 보면 한국 상품만 있지 사람은 없었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들인 SAMSUNG이나 現代, LG를 찾아 이틀 동안 헤맨 적도 있었다. 그렇게 4일이 지나는 동안 내 돈은 물론 친구 돈도 거의 바닥이 났다. 그날도 온 하루 굶주림을 참다나니 빈혈이 났다. 만두가게 앞에서 나는 친구에게 사정했다.

“죽을 땐 죽더라도 오늘 네 그 마지막 십 원 쓰자”
“무슨 십 원?”
“너 십 원 남았잖아. 없는 척 하지 말고 좀 먹자”
“정말 없는데?”

처음엔 장난치는 줄만 알았는데 친구가 화까지 내며 모든 주머니를 털어 보이기에 나는 한 구석으로 이끌고 가 그동안 먹고 썼던 돈을 일전도 빠짐없이 계산했다. 두 번 세 번 계산해 봐도 틀림없이 십 원이 남았다.

“너 이래도 발뺌할거야? 너 지금 나한데 십 원을 숨기려고 하는 거야? 왜 그러는데? 너 혹시 나 몰래 먹은 게 있어? 그랬어?”

내 듣기에도 나의 목소리는 크게 들렸다. 그러자 내 시선을 피해 불안하게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친구가 버럭 고함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 나 돈 썼다. 너 몰래 칼을 샀다!”

그러면서 허리춤에서 정말 손칼 하나를 꺼내 바닥에 내동이 쳤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한 끼도 달래기 힘든 우리 형편에 굳이 칼이 무슨 소용 있는가? 아니 친구에게 왜 나 몰래 칼이 필요했단 말인가?

고개를 쳐드는 친구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우리 한국 못 가, 너무 사정을 모르고 왔어. 한국 사람만 만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우린 지금 꽃제비야. 이러다 잡힐 건 뻔해, 잡히면 너나 나나 살 수 있을 것 같아? 3대멸족이라고! 그래서 차라리 잡힐 바엔. 죽으려고 샀다! 왜?”

바닥에 있는 그의 칼을 보니 내가 죽고 싶었다. 그동안 나의 유일한 위안이고 의지였던 친구가 이런 결심까지 품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잦아들었다. 돈 한 푼 없는 것보다 희망마저 잃는다는 것이 가장 두려운 상실감이었다. 나의 침묵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친구가 사정하기 시작했다.

“이러지 말고 우리 큰 아버지 집으로 가보자. 다른 방법 없잖아. 어차피 매한가지야, 이러다 죽든, 거기 갔다가 죽든”

나는 그때야 친구의 머릿속에 아직도 친척집 미련이 남아있고, 그것이 그를 그토록 나약하게 만드는 원인임을 알았다. 나는 그가 새겨들으라고 마디마다 또박또박 말했다.

“너도 들었잖아. 너 같은 친척이 없다잖아”
“사촌형도 공안 때문에 당황했을 거야, 살인자가 아니라는 것을 직접 설명하면 다 이해해, 광용이도 말했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고 이 짓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나서면 한국 가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고. 가보자,”

나는 당장 그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이틀 시간을 두고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다. 아니 친구로서 이해해주리라 믿으며 농촌에 나가 일단 집을 잡고 생각해보자고 했다.

백 원이 있을 땐 어디든 괜찮았지만 무일푼 처지에선 우선 안정적인 숙식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다음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선결조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날이 점 점 어두워져서인지, 아니면 사내가 둘이라 위압감을 느껴서인지 어느 집이나 냉정하게 거절했다. 친구가 한숨 끝에 제안했다.

“우린 둘이잖아. 그러니 부담되기도 하고 한편 무섭기도 할 거야, 그러니 각자 집을 구하고 아침마다 이 나무 밑에서 만나자”
“만약 못 구하면?”
“그래도 내일 만나자, 혹시나 둘 중 한 명이 집을 못 구할 수도 있으니 낼 아침 나올 때 먹을 것을 가지고 오기!”

우린 이렇게 헤어졌다. 친구는 약속한 나무의 마을에서, 나는 고개 넘어 이웃 마을로 갔다. 손 흔드는 친구가 안심되지 않았지만 웃는 얼굴이 나를 끝내 가게 만들었다. 두만강을 넘은 후 처음으로 혼자 걷는 길이어선지 그동안의 일들을 정리해 볼 여유가 있었다.

한국 갈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을까? 지금껏 만났던 사람들과 사건들에서 잘 못한 것은 무엇이고 앞으로 활용할 경험 가치는 무엇인가? 아니, 우선 무슨 말로 친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 광용이와 짜고 확 겁을 줘볼까? 어느새 날은 어두워졌고 역시나 찾아간 마을에서도 나는 냉대를 받았다. 그 마을은 이상하게도 개들까지도 어찌나 사나웠던지 도저히 편치 않았다.

친구에게 칼이 마침 있으니 만약 함께 동행 했다면 한 마리 잡아먹었겠는데,이 생각에 친구가 갑자기 그리워졌고 그래서 나무마을로 발걸음이 돌아섰다. 그런데 친구는 다행히도 고마운 인정들을 만났는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나는 나무를 벗 삼아 홀로 보냈다. 아침이 되자 친구가 가져 올 고기만두 생각에 신바람 났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밤에도, 또 다음날 아침도,나는 꼬박 이틀을 굶은 채 그냥 나무를 지켰다.

3일째 되는 날, 필히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광용에게 당장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판단에 마을을 돌며 집 문들을 두드렸지만 그 소원마저도 쉽지 않았다. 정녕 방법이 없을까?

사람이란 애간장 탈 때에는 저절로 눈물이 나는 것 같다. 뿌옇게 김이 서리는 선글라스를 벗고 흰 눈 위에 주저앉았는데 그 때 옆을 지나던 한 할머니가 멍해있는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조선에서 왔으면 여기 있지 마. 3일전에도 공안이 이 마을을 다 뒤졌어”

이틀을 굶어서인지 아니면 친구의 행처를 전혀 알길 없는 허탈함 때문인지 할머니가 하신 그 말의 의미를 모두 깨닫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이곳을 떠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나는 일어서며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혀를 깨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아픔과 함께 순간 뇌리를 치는 곳이 있었다. 우리에게 세숫물과 함께 밥까지 주셨던 그 노인의 집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용정리까지 걸어갔고 근심했던 것과 달리 쉽게 중학교 교사를 했다는 그 노인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친구는 어디 갔소?”
“연길교회에서 전화로 공안을 부르기에 도망치다가 헤어졌습니다.”

나는 거짓말 했다. 노인이 소개해준 곳에서 봉변을 당했으니 책임지라는 식이었다. 방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그 집 전화로 광용을 찾았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광용의 첫 음성은 과연 어떨까? 혹시 친구가 받았으면…….하고 기원했다.

“지금 어디요?”

광용의 거친 질문에 나는 흠칫했다.

“나 지금 용정리인데 혹시 친구가 전화 안 왔었어요?”
“안 오긴 왜 안와, 이틀 전에 전화 왔었어요.”

나는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밖에 펴놓은 옥수수를 돌보고 있는 노인의 동정을 살피며 헤어지게 된 경위를 소곤소곤 말했다. 광용의 말에 의하면 급히 만나자고 해서 나갔는데 친구 주제가 말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손전등들이 무리로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뛰다나니 산을 넘게 되었고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이리저리 온 곳이 연길이었다는 곳이다. 그런데 문제는 친구가 친척집을 찾아가겠다고 고집했다는 것이다. 내가 전화 오면 자기가 친척을 데리고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잘 설득하라며 만약 잡히면 그때 도망치라했다는 것이다.

“안 된다고 했지요?”
“어떻게 그렇게 해요? 그 사람 혼자라도 갈 기세던데, 그러다 잡히면 나도 끝나겠는데,”

일단 친구를 집에 숨겨두고 광용이는 다른 사람을 내세워 친구의 작은 삼촌이라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다. 핏줄이 가까워서인지 작은 삼촌은 자기 조카가 절대 살인할 사람이 아니라며 무척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리려 집에 전화하니 친구가 목욕하고 밖에 나갔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몇 시간 연락이 두절 돼 자기도 지금 바늘방석에 앉은 것만 같다는 게 광용의 마지막 설명이었다. 나는 그동안의 방랑생활에서 자신감이 생겨 잠시 경솔해진 것이니 곧 들어올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노인의 집에서 잡일을 해주며 3일을 기다렸지만 친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3일 동안 나는 한 번도 심장이 조용히 뛴 적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용의 다급한 전화가 왔다.

“금방 창용 삼촌 아주머니한데서 전화가 왔는데 친구가 잡힌 것 같아요! 공안이 와서 탈북자들 한데 돈을 얼마 받았냐며 창용 아저씨를 싣고 갔대요. 나도 집을 옮길 테니 당신도 빨리 그 곳을 떠요.”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당혹감에 두 무릎이 떨렸다. 붙잡히면 죽을 것이라는 충만했던 각오도 그 순간에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더불어 나도 이제 곧 공안에서 덮칠 것만 같은 착각이 내 몸 안으로부터 세차게 요동쳤다.


6.

광용의 전화를 받고나서 나는 서둘러 옷을 입었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돈 한 푼도 없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땐 정말 노인네 집 머슴이라도 될 수 있다면! 눈 감고 이런 짧은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지! 눈이 번쩍 떠졌다. 창용 아저씨밖에 없다. 그는 내 돈 700달러씩이나 받지 않았는가. 주었던 걸 돌려달라면 비열한 짓인 줄 알았지만 내 처지에 무슨 인격을 돌보겠는가? 나는 전화를 들었다.

“광용이한데 전화번호를 알았는데요, 창용 아저씨 아직 안 들어왔어요?”
“그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헤어진 거야?”

창용 아저씨 처는 겁에 질려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그것을 안 그때의 나는 정말 몹쓸 인간이었다.

“내 말 똑바로 들으세요, 내 친구는 돈 준 사실을 전혀 몰라요, 내가 준 돈이었거든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러나 만약(나는 여기서 힘을 주었다.)내가 잡히는 경우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러니 내가 지금 당장 어디든 멀리 떠날 수 있게 광용이에게 전화해서 돈 100달러를 준다고 약속해요.”

창용 아저씨 처는 하늘에까지 맹세했다. 하여 나는 연길에서 신광용을 만나 300원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고(나머지는 만약 친구가 오면 주라고 남겨두었다.) 심양으로 가는 버스에도 오를 수 있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심양주재 한국 영사부가 있는데 거기를 걸쳐 한국 가는 탈북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버스에 올라 털썩 주저앉고 나니 너무도 엄청난 일들이 단 몇 초 사이에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에야 친구의 불행에 대해 돌이켜보게 되었다. 정말 잡혔을까? 잡혔다면 지금 그는? 그러나 나는 자신에게 놀랐다. 왜 친구 잃은 슬픔보다 자신을 잃을 공포부터 앞세웠던가? 생사를 약속하고도 나는 왜 자결까지 결심했던 친구를 뒤에 두고 허겁지겁 달아날 궁리부터 했단 말인가? 비겁하고 치사하고 가증스러운 나! 나! 나! 이렇게 되뇌이며 손톱으로 계속 내 살을 꼬집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되고 스스로에 대한 미움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광용의 말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의미해보고 싶어졌다. 창용 아저씨가 공안에 불려갔다. 친구가 잡힌 것 같다. 이것이 전부일 뿐 확실한 근거는 없지 않은가? 아니 창용 아저씨가 미워하던 그 중국여자가 신고하여 단순한 조사 차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친구는 살아있으리라. 이 미련으로 마음을 다잡으니 박동소리가 약해지며 조금 편해진 듯싶었다.

그것도 잠깐. 나는 이번엔 버스에 불안해졌다. 도 경계선은 물론 군을 하나하나 통과할 때마다 군인들이 올라와 통행증을 일일이 검열하는 북한처럼 이 버스가 검문소 앞에 멎으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6시간 넘게 달리는 동안 그렇게 나는 떨어야 했고 기도해야만 했다. 마침내 야경이 넘치는 도시가 보였다. 그 화려한 중심으로 버스가 당당하게 질주할 때는 친구를 좀 더 기다렸을걸! 저 불빛들을 함께 볼 수 있다면! 하는 후회와 희망이 썰물과 밀물처럼 혈관 속으로 오고갔다. 버스가 멈추기 바쁘게 승객들 중 가장 먼저 내린 나의 눈에 거대한 시계가 보였다. 1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의 시간은 그 때뿐, 공안들이 또 서있는 광경에 나는 그만 기겁하여 몸을 숨겨 찾아 들어간 곳이 PC방이었다. 물론 알아서 거기 눌러 앉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 중 다행으로 한 구석 의자에 앉아 밤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누군가 심하게 흔들어 깨웠다.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니 핑크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여자가 비명 지르며 뒷걸음 치고 있었다. 내가 몸을 솟구칠 때 떨어뜨린 만두 세 개 때문이었다. 나에겐 목숨 같은 식량인 그 만두들을 똥처럼 혐오스럽게 보던 핑크머리가 줍고 있는 내 등에 대고 욕을 했다. 그때 만두를 집으며 나는 속으로 욕했다. “북한 같았으면 네 머리 꼴만으로도 개년 돼!”

나는 그 PC방을 나올 때 간판을 익혀두었다. 훗날에도 또 가리라, 물론 핑크머리년이 없는 곳으로! 밝은 거리를 걷는 나는 연길에서와 달리 발걸음이 가벼웠다. 중국이 이렇게 생겼구나, 이런 곳이 외국이구나. 여권도 없는 공짜 관광이 흡족했다. 북한에서 볼 수 없는 광고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걷다나니 불안이 점 점 일어섰다. 한글들이 슬 슬 지워지더니 간판들이 모두가 중국어에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그 도시가 심양이 아닌 장춘이라는 곳을 알았을 때는 기가 막혔다. 심양은 또 어디란 말인가? 나는 일단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곳부터 찾아가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간 곳이 “고향밥”이란 한글간판 음식점이었다.

“심양 가려고 하는데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식당 아줌마는 골똘히 쳐다보더니 대답 대신 무언가 내밀었다. 한글로 된 관광 안내책자였다. 책이 그렇게 인간에게 필요한 물건인줄 그때 새삼 알았다. 그 책이 가리키는 곳으로 버스터미널을 찾아갔고 그 책 덕에 “썬양”하고 입을 열어 티켓도 구매할 수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김광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소식 없어요? 창용 아저씨는?”

광용은 달라진 것이 없다며 자기 사정을 더 길게 털어놓았다. 급하게 친구 집으로 짐을 옮기다나니 여간만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동안 나는 그가 잠시 미웠다.

“내 친구가 꼭 전화 올 겁니다. 절대로 핸드폰을 꺼 놓지 말아요. 내가 지금 심양으로 가고 있으니 만약 친구가 오면 바로 출발하라고 해요”

심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하마터면 환성을 지를 번했다. 관광안내 책자에 심양 주재 한국 영사관 전화번호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흥분됐다. 장춘 버스와 달리 심양버스는 느려 터진 것만 같아 발을 굴렀다. 빨리 가면 빨리 한국 갈 수 있는데, 심양에서 내리기 바쁘게 전화박스를 찾아 뛰었다. 두만강을 넘을 때부터 이렇게 줄곧 뛰었지만 언제 단 한 번 내 발이라고 느껴본 적 있었던가.

전화박스 안에서 번호를 돌릴 때에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호음이 울리던 끝에 “여보세요”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숨이 컥 막혔다.

“여보세요, 한국 영사관이지요?”
“네, 누구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한국 영사관이 내 전화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도 격정이 끊어 올라 정신없이 이 말부터 마구 해댔다.

“근데 누구세요?”

나는 크게 호흡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저 북한에서 왔습니다. 친구도 함께 왔습니다. 한국 가려고 합니다. 신분증도 가져왔고 정말 북한 사람 맞습니다.”

응답이 없었다. 기다렸지만 조용했다. 아니 전화가 끊어져 있었다. 망할 놈의 중국 전화! 나는 전화기를 주먹으로 쾅 쾅 쳤다. 고장 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뛰었다. 달리는 동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전화를 애타게 기다릴 한국 영사관 직원을 생각하니 그동안의 고생들이 한꺼번에 두 눈으로 주르르 흘러 내렸다.

“여보세요”

다른 전화박스 안에서 이번엔 내가 먼저 불렀다.

“네 누구세요?”
“금방 전화했던 사람입니다. 한국 망명을 신청하려고 합니다. 신분증도 가져왔습니다. 공안이 우리를 살인자로 지목하고 수배하고 있습니다. 우린 절대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여보세요, 다 알겠는데 내 말 잘 들으세요, 이 전화가 그렇게 안전하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 말에 나는 사방을 황황히 둘러보았다.

“여기 심양에서는 한국 가기 힘듭니다. 한국 갈려면 북경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찾아가십시오, 우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북경 대사관에는 어떻게 가는데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어요?”
“그건 탈북자들이 다 알아서 들어가요. 그것까지 우리가 어떻게 알려줘요?
전화 오래 못해서 그러는데 이만 끊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그냥 들고 서있었다. 해외공관들의 전화가 주재국 정보기관들의 도청에 노출돼 있고, 그래서 혹시나 공안이 이쪽으로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떤 시련을 넘으며 왔는데? 설명을 잘 하지 못한 내 탓인 것만 같아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엔 받지 조차 않았다.

마치도 그 침묵은 교회에서 중국인들이 우리를 쫒던 욕질 같았고 하루 밤만 재워달라고 애원하는 우리를 보고 쾅 닫아버리던 대문 같았다. 대한민국이 이다지도 먼 단 말인가? 대한민국이 우리 탈북자들을 구출할 권한이 이렇게까지 없었단 말인가? 전화박스 밖으로 나올 때 세상 끝으로 누가 날 밀어버리는 것만 같아 서러움이 확 북받쳤다. 스스로 알아서 가야 한다는 영사관 직원의 그 말에는 북한 주민인 내가 전혀 없었고 그래서 내 보기에도 나란 존재는 이국의 하늘 밑을 떠도는 작은 먼지 같았다.

나는 그날 주머니에 남아있는 마지막 돈으로 술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먹다나니 연길에서 친구가 술을 사자고 말했던 그 상황이 그때가 아니라 지금 같았다. 친구가 그리워졌다. 제발 살아서 나에게로 와주었으면, 제발 내일은 그와 함께 새롭게 시작했으면,아파트 옥상 위에서 그렇게 자고 일어난 나는 아침이어도 갈 데가 딱히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친구의 칼이 생각났다. 아직도 친구는 칼을 가지고 있을까? 만약 정말로 공안에 잡혔다면 그 칼을 원했던 것처럼 사용했을까? 이 생각까지 이르고 나니 나는 어디든 가야겠다는 결심이 서게 됐다. 그렇다. 북경으로 가자. 남들도 알아서 간다는 길을 내가 왜 못 가겠는가. 가자고 온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살아오지 않았는가.

나는 지붕 바닥 한쪽에 고여 있는 눈 녹은 물로 세수를 했고 옷도 툭툭 털었다. 그리고 시를 쓸 때와 같은 영감으로 사색했다. 사람도 땅도 모두 낯 설은 저 밑으로 내려가면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계단을 내려 현관까지 가는 동안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말부터 통하는 조선족을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중국말로 꽉 찬 이 심양에서! 그때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우선 조용한 골목길에 섰다. 그리고 행인들을 행해 조용히 불렀다. 남자가 지나가면 “아저씨!” 여자가 지나가면 “아가씨!”했다. 중국인이라면 그냥 지나갈 것이고 조선족이라면 틀림없이 반사적으로 돌아볼 것이리라. 그렇게 한 시간 또 한 시간,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세끼를 굶은 이 채로 또 하루가 지나면 어쩌나. 그 조바심에 애가 타는데 그때 저만치서 26살 돼 보이는 여자가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앞에서 부르면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목소리에 반응하기 때문에 그 여가 등을 보일 때쯤 불러보았다.

“아가씨!”

그러자 그 여가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섰다. 그러더니 말했다.

“저를 불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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