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연예인?!그들을 말한다 이사건은 1950년 한국전쟁때 일어났는데 1994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후에야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애도의 뜻을 우리나라 정부에 보냈다고 하네요.. 그것도 우리나라가 항의 요구해서 애도의 뜻을 전한게 아니라 미국방송에서 노근리 학살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다루면서 미국인들에게 전해졌고 미국대학생들의 시위로 이어져서 그제서야 클린턴대통령이 애도의 뜻을 보냈답니다. 근데 더 웃긴건요. 이 사건에 대한 보상으로 기념비를 세워주겠다고 했답니다. 우습지 않나요? 이사건을 단지 기념비로 무마 시킬려고 하다니 근데 기념비 조차도 아직 설립이 되지 않았다고 하니 더 기가 막히죠. 1994년일인데 벌써 2006년입니다 지금이 -_ -;;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사건을 거의 작년에 접한걸로 알고 있구요....ㅜㅜ 그리고 아셔야 할것은, 미군이 6.25때 우리 민족들의 학살을 행한 사건이 이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너무 잔인합니다 ㅜㅜ.... 암튼 오늘 수업시간에 알게된 이야기 이지만, 많은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아셔야 할것 같아서 올립니다. 압박이 심해도 잘읽어주세요~ㅜㅜ ---------------------------------------------------------------------------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피해자 증언 **출처 : 오연호의 노근리 그후(출판 월간 말) 미군, "안전한 곳으로 피란시켜 주겠다"고 주민들 끌고 가 "뒷산 금굴(광산 갱)에 동네사람들과 함께 피해 있는데 동네에 남아 있던 아버님이 올라오시더니 '미군들이 와서 피란 시켜 준다고 모두 내려오라고 한다'고 해요. 동네에 내려오니 미군들이 서너 명씩 한 조가 되어 집들을 수색하고 있더라고요. 우리 집에도 미군 3명이 군화를 신은 채 방에 들어가 골방까지 플래시를 비추면서 누가 숨어 있는지를 조사했어요. 사람 자는 방에 군홧발로 들어갈때부터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수색해 가면서 전부 모이라고 하니 걸을 수 없는 노인네들 빼고 거의 모든 동네사람들이 모였지요. 미군들은 일본인 통역을 데리고 있더군요. 그가 일본말로 '미군이 안전한 곳으로 피란시켜 줄 것이니 지금부터 남쪽으로 출발한다'고 했어요. 일본말을 알아들은 어른들이 의논 끝에 '미군을 믿고 따라가 보자'고 했어요." "미군들이 우리를 강변으로 내몰고 모두 엎드리라고, 만약 고개를 들면 총을 쏜다고 했어요. 인민군과 미군이 가까운 곳에서 교전을 하는지 총알이 머리 위로 날아가고 포격소리도 요란했어요. 그런데다 한여름이라 덥기도 하고 모기떼들이 물고... 그래도 오늘밤만 무사히 새면 미군이 안전한 곳으로 피란시켜 주겠지 하는 기대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감이 이상해요. 내 옆에서 억소리가 나더니 별명이 노랭이라는 사람하고 그 아들이 미군이 있는 곳에서 날아온 총을 맞고 쓰러지더라고요. 다음날 아침에 보니 아들은 곧 죽고 노랭이는 목숨이 붙어 있었어요. 그런데 미군이 '다시 출발'하는 거예요. 부인이 울고불고 하면서 남편을 데려가려 했지만 남편은 '나는 이미 죽을 몸이니 살 사람이나 빨리 가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살 사람이라던 그 부인도 다다음날 미군한테 총 맞아 죽게 되지요." 철로 위로 올라가게 하더니 폭격으로 폭탄살인 강변에서 도로로 올라온 피란행렬이 4킬로미터 남짓 전진했을때 미군들은 탱크로 도로를 차단하고 '스톱'명령을 내렸다. 미군들의 대검 꽂은 총구가 철로쪽을 가리켰다. 도로와 인접한 철로로 모두 올라가라는 것이었다. 피란민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미군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7, 8명의 미군은 철길위로 올라온 7백여명의 피란민들의 짐을 앞쪽에서 부터 검사하기 시작했다. 전날 저녁부터 밥을 못 먹은 피란민들은 검사차례를 기다리면서 가족끼리 둘러앉아 미숫가루 등으로 허기를 달랬다. "피란민들의 짐보따리에서 나온 것들은 이불이나 보리쌀 같은 것뿐이었어요. 그러니 우리는 지루하다는 생각뿐 별 걱정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삽시간에 일이 벌어진 거예요. 등에 무전기 같은 것을 진 미군이 어디다 뭐라고 연락을 하더니 그들은 검사를 중간에 그만두고 우리를 놔둔채 달아나더군요. 우리가 왜 저러나 하고 있는데 갑자기 미군 폭격기가 날아오더니 우리를 향해 폭탄을 투하하는 거예요. 폭음이 천지를 진동해 나는 나도 모르게 일제 때 국민학교에서 배운대로 두눈과 귀를 손가락으로 가리며 엎드렸어요. 한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것 같아 손으로 쥐어 ?f더니...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요. 다시 정신을 차려 둘러보니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었고 여기저기서 사람과 소가 쓰러져 아비규환이었죠. 미군 폭격기는 약 20여분간 폭격을 해댔어요. 나중에는 폭격기에서 기총소사도 했고요." 정구식씨는 그날의 철로위를 다시 둘러보면서 치를 떨었다. 양해찬씨가 말을 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잇다가 폭격을 당했어요. 어머니가 나를 맨밑에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내 여동생을 얹고 당신 몸으로 우리를 감쌌어요. 폭격후 일어서니 어머니는 하복부와 발목에 파편을 맞아 피투성이고 여동생은 한쪽 눈이 피범벅 돼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지만 여동생 눈알이 빠져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라고요. 동생은 눈이 아파 견딜 수가 없으니까, 안보이니까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떼내 버렸어요. 어머니와 동생을 껴안고 주변을 보니 우리 집에 피란와 있다 함께 온 고종사촌 아주머니가, 만삭이었는데 즉사해 있더라고요. 할머니, 형님도 거기서 돌아가셨지요." 이 철로 위에서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 1백여 명 정도는 될 것이라는 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굴다리에 몰아넣고 양쪽에서 기관총 난사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격을 피해 철로 밑에 수로용으로 뚫어 놓은 조그마한 굴로 모여들었다. 자기 목숨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 피란민들은 '미군은 도대체 왜 우리를 철로 위에서 죽이려 했는가?'라고 서로에게 물었지만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다. 이 사건을 접하는 독자들 중에는 어떻게 피란 시켜 주겠다고 했으면서 대낮에 폭격살인을 할 수 있겠는가, 혹시 미군이 오폭을 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후의 전개과정은 더 이상 그런 질문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병주고 약주고하는 살인극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폭격이 멈추더니 폭격직전 어디론가 달아났던 미군 서너명이 그 굴을 향해 다시 걸어왔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일본말로 '이제 진짜 안전한 곳으로 피란시켜 주겠으니 모두 나오라'고 했어요. 총을 바수면서(겨누면서) 그러니 나올 수 밖에요. 그들 중에는 위생병이 한 사람 있었어요. 그가 내 팔뚝을 보더니 무슨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 주더라고요. 다른 몇몇 부상자도 그러게 해줬어요. 치료까지 해주니 아까는 뭔가 잘못돼서 폭격을 했고 이제는 정말로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려나보다 하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살인극을 연장하기 위한 술수였다. 미군은 이굴에서 나온 피란민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란을 간 것이 아니었다. 바로 1백여 미터 떨어진 쌍굴다리로 피란민을 몰아넣었다. 철로 밑에 나란히 뚫린 두 개의 굴다리 밑에 약 4백여 명을 발디딜 틈도 없이 쳐박아 넣은 것이다. 그리고 미군은 굴다리가 내려다 보이는 양쪽 야산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굴다리에서 한 발자국만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살해 버렸다. 박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여름 한철이라, 폭격에 놀라 허둥댔는지라 사람들이 얼마나 목이 말랐겠어요. 굴다리 바로 밑 웅덩이에 물이 좀 고여 있었지요. 몇 사람이 목마름을 못 참아 슬금슬금 기어가 웅덩이 물을 마시려 했는데 나간 족족 다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어요. 그런데 미군은 밖으로 나간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굴다리 안으로도 무차별 사격을 해왔어요. 시체가 쌓이기 시작하고 총에 맞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더 안쪽으로 밀착하고... 내 두살난 딸아이는 총소리에 놀라고 더위에 질식해 울어 댔어요. 함께 있던 시어머니가 하도 딱해 그 애를 업고 굴다리 밖으로 잠시 바람쏘여 준다고 나갔는데, 그 아이에게 미군이 총을 쏴 버렸어요. 즉사했어요." 미군, "의심나면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이다" "이것 보세요. 벌집같이 총탄자국이 여기저기 있쟎아요." 시멘트벽을 손가락으로 들어갈 정도로 깊숙이 파고들어간 총탄자국들을 만지는 살아남은 자들의 눈은 울분으로 가득했다. 정구식 씨의 말이다. "하루 종일 총질을 해대더니 다음날 아침 미군 두셋이 위생병을 앞세우고 굴다리로 오더라고요. 부상자를 나오라더니 철로 위에서의 폭격 직후처럼 또 치료를 해줘요. 미군 두셋은 굴다리 안으로 들어와 상황을 살피고요. 그들에게 국민학교 처녀 여교사였던 정구임(당시 20세)이 일본어로 애원했어요. '우리를 제발 여기에서 나가게 해 남쪽으로 피란시켜 달라.' 그랬더니 미군은 '여기가 안전하다'고 하더군요. 그 정구임이도 그날 밤 죽었지만......." 현재 경북 영양고등학교 교감인 정구헌씨(61)도 굴다리에서의 생지옥을 경험했다. 정 교감은 당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고등학생이었다. 그는 굴다리에서 연희전문 (지금의 연세대학교)사학과 2학년에 다니고 있던 사촌형 정구일과 함께 있었다. 정구일은 굴다리에 갇힌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미군과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을에서 피란 오기 직전 약 일주일간 마을 근처에 진지를 구축한 미군들의 통역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정 교감은 굴다리에서 사촌형과 미군 사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오갔다고 기억하고 있다. "형이 굴다리 근처에 온 미군에게 '왜 아무 죄 없는 우리를 아무 이유없이 죽이는지 그 이유나 알고 싶다.'고 했지요. 그 미군의 답은 '피란민이라 할지라도 의심나는 사람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래 형이 다시 '아니 우리는 총은 커녕 칼 한 자루도 가진 것 없는 양민들인데 무엇이 의심스럽기에 죽이려는가'라고 되물었더니 미군은 그냥 냉랭한 표정만 짓더니 가 버렸어요. 형이 '나는 일주일이나 당신 나라 부대의 통역을 해줬던 사람이다'라고 말해도 소용없었어요." 정 교감의 이 증언은 미군이 왜 양민을 학살했는지를 밝히는 데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정 교감은 "사람들이 그때서야 미군들이 우리를 상부의 명령에 따라 작전상 죽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면서 "그것을 확인한 그날 밤부터 남자들을 중심으로 필사의 탈출이 시작됐다"고 했다. 그러나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 중에 절반 가량이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 여기가 그 장소인데요. 하얀색으로 표시된 곳이 보이시나요? -_-; 이게 다 총 자국이래요 ........ㅜㅜ 정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