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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경고] 911테러 ㅈㅈㄱ인지 아시는분만 읽으세요.
게시물ID : sewol_329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싸움은기싸움
추천 : 6
조회수 : 169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7/22 22:47:14
911 ㅈㅈㄱ인지 모르시는분은 백스페이스를 누르거나,
소설로 읽어보시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에 직면 할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이하 글 내용은 "모르는게 약"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는게 힘" 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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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도 벌써 3달이 넘었군요..
첫날에 사건 터진거 보고.. 오유 눈팅하다가..
국회 예산 통과 보면서.. 뭔가 큰게 개입 된걸 느끼고..
쭉 지켜보고 있었는데.. 엉망이더군요..
엉망인걸 느낀 후에는 언젠가부터
이 사건이 911이랑 비슷한걸 느끼게 되더군요..

그리고 오늘 다른 사람도 이렇게 느끼고 있나 검색을 해보다가
하나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이 글의 마무리글이..
제가 911 때 느낀바와 너무나도 닮아.. 
그냥 보고 지나 칠 수 없어 
저 또한 이렇게 하나의 글로
큰 물결에 작은 흐름을 만들어 보려 합니다.
(최근 영화 엑스맨에 나온 대사같은건데.. 표현이 잘 안 되는거 같군요..)

도대체 그들이 작은 것을 희생시키며
큰 것을 이룰려는게 도대체 무엇인지
앞으로 우리는 똑똑히 지켜봐야 할 것이며

우리들이 쫄지 않고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는게
이유도 모른체 희생당한 망자에 대한 예의이며

또한 그들을 응시해야
살아남은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지리라 생각합니다

이하 내용은 제가 읽은 글을 그대로 퍼왔어요.

복사 붙이기 했는데 읽기 좀 불편할거 같네요.
링크 가신 후 읽는게 좀 더 편할할거 같네요.
http://blog.naver.com/acec808/220062529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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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비교분석법으로 본 911 vs 세월호 

911 테러와 세월호 참사의 유의미한 12가지 유사성 정리

序 - 사례비교분석법이란?

어떤 어려운 문제를 풀 때 그것이 자연적 현상이든 사회적 현상이든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가 구조-연역적 해석이고 둘째가 개별-귀납적 분석이죠. 저는 지난 세월호 관련 분석글들에서 주로 전자의 방법에 의거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논자들은 주로 후자의 방법으로 퍼즐의 조각을 모아 전체 그림을 맞추어 나가고 있습니다.

다들 잘 아시리라 보기에 이 두 가지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고 또 하나의 방법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주로 복잡한 사회적 문제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사건의 주체와 동기를 과거의 유사한 사례와 비교해서 추론하는 방법을 ‘사례비교분석방법’이라고 합니다. 이 방법은 사건의 유력한 단서를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드러난 사실들을 토대로 유사 사례의 그것들과 비교해서 나머지 숨겨진 진상들을 비교된 사례의 밝혀진 진상들로 유추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번 글에서 이 방법론을 가지고 세월호의 진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자 합니다.

여러 사례들을 검토했지만 그 중에서 2000년 9월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준 9.11 사건을 선정했습니다. 선정기준은 그 예측 불가능성, 일반 상식을 철저히 깨는 충격성, 국가기구의 무능과 대조되는 조직적인 가공 정보의 범람이라는 공통점이 세월호 사건의 경우와 유사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유의미한 유사성을 찾았고 이를 이제 공개합니다. (이하 평어)

1. 부정선거로 당선된 부시와 박그네

* 2000년 제 43대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부시는 본선에서 진보적이면서도 강한 포용력을 보여주었던 현직 부통령인 미국 민주당의 앨 고어와 격돌하게 된다. 이 선거에서 부시는 유권자 득표에서 앨 고어에게 50만 표(0.5%) 이상 뒤졌으나 선거인단 확보에서 277 대 266으로 앞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조지 부시의 동생인 젭 부시가 주지사로 재직 중이던 플로리다에서 무효표가 대량으로 발생하는 문제와 수많은 흑인 유권자에 대한 조직적인 투표 방해 등의 문제가 있었고, 이에 따라 실시된 재검표가 연방대법원에 의해 중단되었던 것이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이었기 때문에 반대자로부터 ‘부정선거로 당선된 대통령’ 이라는 오명을 집권기간 내내 뒤집어 써야했다. 어쨌든 부시가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 父子 대통령 가문이 되었다.

* 2012년 제18대 한국 대선에서 새누리 후보 박그네는 본선에서 진보적이면서도 강한 포용력을 보여주었던 노무현 정부에서 비서실장을 지낸 민주당의 문재인과 격돌하게 된다. 이 선거에서 박그네는 51.6%를 득표하여 문재인에 이겼으나 선거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등 국가기관의 광범위한 불법 여론조작과 선관위 중앙컴퓨터의 전산개표조작으로 ‘부정선거로 당선된 대통령’ 이라는 오명과 정권퇴진 요구를 집권초기부터 받았다. 어쨌든 박그네는 한국 대법원의 당선무효소송 기각으로 한국 역사상 최초로 아비에 이어 父女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

2. 집권 초기에 발생한 엄청난 대 재앙

* 부시 집권 1년 차인 2000년 9월11일 새벽 5시경 이륙한 아메리칸 AA11편과 유나이티드 항공의 UA175편 등 총4대의 항공기가 사우디와 이집트 출신의 알카에다 조직원들에 납치되었다. 그 중 위 두 비행기가 뉴욕의 국제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충돌하였다. 각각 8시 45분과 9시 3분이었다. 두 번째 충돌 후 56분 후에 남쪽 빌딩이 먼저 와르르 무너졌다. 그 직후인 오전 10시 28분, 먼저 테러가 일어났던 북쪽 타워도 수직낙하 하듯 9초 만에 무너졌다. 이 동시다발 테러로 인해, 무려 3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이 사건은 “21세기가 시작되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세계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의 현대사는, 2001년 9월 11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 박그네 취임 1년이 막 지난 2014년 4월 16일 아침.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는 시간에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원인으로 인천발 제주행 여객선 세월호가 한국 진도 앞바다에 침몰했다. 이 여객선에는 수학여행에 나선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4명과 교사 10명 등 승객 447명과 승무원 24명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탑승객 명단에 없는 사람까지 고려하면 500명이 넘을 수도 있다.) 이 사건으로 현재 탈출하여 목숨을 건진 172명 외에 3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정부의 구조방치로 희생당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을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완전히 나누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 국민들은 물론 세계인들에 에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다. “국가에 의한 학살이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3.전조(前兆)

* 부시 대통령의 가까운 동료들이 갑자기 그리고 불가사의하게, "테러리스트" 공격들이 있기 단 며칠 전에 그들의 모든 항공사 주식들을 팔았다. 또한 항공기 충돌 테러가 벌어지기 직전 무역센터 내부에 입주한 금융회사와 민간 항공사 사이에는 주식을 팔고 사는 대량거래가 있었다. 수많은 거래 회사 중에 유독 항공사 주식으로는 테러로 피해를 당한 2개의 항공사인 유나이티드와 아메리칸 항공 뿐이었다. (CBS 60 Minutes, 2001.9.17.)

블룸버그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9.11 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아메리칸 항공사의 주식거래량은 통상 거래량의 5배 정도로 폭증했고, 유나이티드 항공사의 주식거래량도 9.11 사건이 일어나기 3일 전에 폭증했다. 또한 세계무역센터에 입주해 있었던 금융회사 모건 스탠리와 사건 현장 부근에 있는 금융회사 메릴린치의 주식거래량도 최고 25배나 폭등했다.

미국 증시감독위원회의 조사를 인용한 『월 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 2001년 10월 2일자 보도에 따르면, 9.11 사건으로 폭락할 주식들, 예를 들면 항공사의 주식, 보험사의 주식, 여행사의 주식을 미리 내다 팔고, 그 대신 불경기에 가장 잘 나가는 5년 만기 국채를 사들여서 50억 달러의 이익을 챙겨간 세력이 있다고 하였다.

부시는 공격이 실행되기 바로 전날 밤인 9월10일에 뉴욕으로 연방비상관리국(FEMA)의 도시검사 및 구호팀을 보냈다.

팀장 톰 케네디의 9월 11일 인터뷰다.

“우리는 현재 이 재앙에 있어서 뉴욕 시를 지원하고자 배치되었던 최초의 팀 중 하나이다. 우리는 월요일 밤(9.10) 늦게 도착하였고 화요일 아침(9.11)에 작업에 바로 착수했다.”

* 한국에선

가. 2014년 4월 15일 (사고 하루 전)

1) 남재준 국정원장의 간첩조작사건에 대한 대국민 사과, 사퇴는 거부.

2)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원으로 임명. (국가안전보장회의는 국가의 ‘재난위기상황관리팀장’을 맡게 되어 있음.)

3) 선장 대신 1등 항해사가 선장대행 가능한 법이 개정발효.

4) 단원고와 계약된 선박이 오하나마호에서 세월호로 바뀜.

5) 세월호에 승선하기로 한 서울 면목고 학생들과의 계약이 취소됨.

6) 세월호 선장이 갑자기 휴가로 교체됨.

7) 일등항해사 신정훈이 입사함.

8) 세월호 안전담당 조기장 입사함.

9) 짙은 밤안개 속에서 인천항을 출항한 배는 오직 세월호 뿐. 이날 출항 예정이었던 여객선 모두 10척이었으나, 모두 취소.

10) 사고 당일, 세월호 운항 항로에 ‘사격훈련 항행경보’ 발령.

나. 2014년 4월 16일 당일 오전

1) 오전 7시20여분 경, 여러 방송사 TV 화면과 언론사 게시판에 ‘인천발 제주행 여객선 구조요청’ 자막 떴다 사라짐.

2) 오전 8시경 청와대에서 국가안전보장 회의 소집되어 관련자 참석 중.

4. 의심스런 붕괴와 침몰 원인

* 미 수사당국은 충돌한 비행기의 항공유가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어 쌍둥이 빌딩의 철골 빔이 녹아내려 급작스런 붕괴가 일어났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의 생존자와 911 소방관의 숱한 증언과 동영상 분석가에 따르면 빌딩 내부에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루스 체인지(Loose Change) 다큐멘터리에서는 철골로 된 세계무역센터 빌딩은 어떻게 자유낙하속도로 무너졌나? 붕괴된 층보다 20~30층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편들은 대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심지어 미리 설치된 폭발물로 빌딩폭파공법에 의해 붕괴된 것이라는 주장까지 하였다.

* 한국의 검찰은 세월호의 침몰원인으로 세월호 자체의 무리한 증축과 화물 선적, 그리고 고박불량에다 급변침으로 복원력이 상실해서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생존자의 여러 증언과 희생된 아이들의 동영상 그리고 해경의 기록 영상과 승무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전날 밤 세월호에 1차 충격이 있었고 당일 아침식사 시간에 2차 충격으로 배가 급격히 기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심지어 선체 내부에 폭발로 추정되는 여러 정보와 자료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수사 당국은 전혀 함구하고 있다. 심지어 초당 0.3도 밖에 회전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도 무시하고 급변침의 선행원인으로 제 3항해사가 법정에서 진술한 제3의 선박에 대해서는 모두 다 모르쇠다.

끝으로 박수현군의 아버지의 최근 인터뷰 내용이다.

상상해 보았는가? ▲ (사인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부검을 하고 싶을 정도로) 잠자는 것처럼 웃는 모습으로 올라온 아이 ▲ 눈, 귀, 코에서 피가 나온 모습으로 올라온 아이 ▲ 머리카락이 없고 치아가 없는 아이 ▲ 얼굴에 화상자국이 남아 있는 아이… 그리고 저 차디찬 바다 속 어딘가에는 찾지 못한 사랑하는 우리의 가족 11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 사건이 '왜 발생했으며, 그간 구조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처리되는 것이 맞는지'를 이성을 가지고 판단해 주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최소 내 이웃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 정도로는 기억해줄 것을 부탁드린다. -오마이뉴스 7.13

5. 목숨을 건진 사람들

* 이스라엘의 일간지 『하레츠(Haretz)』 2001년 9월 26일자 보도에 의하면,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서비스회사인 ‘오디고’의 이스라엘 지사에 9.11 사건 발생 두 시간 전에 누군가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긴급연락을 받고 본사 직원들이 미리 대피했다.

9월11일 오전 비행기 탑승 예정이던 여러 명의 미군 장성과 주요 각료들 탑승금지 명령으로 승선하지 않았다. 펜타곤의 주요 간부들도 여행계획 취소.

그리고 수만의 쌍둥이 빌딩에 있던 사람들은 목숨을 건 생사의 탈출 시도 끝에 간신히 붕괴 전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트라우마로 지금도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

* 세월호에 최초로 접근한 둘라에이스호 문 선장은 해경의 123정이 세월호에 다다를 무렵 보트하나가 탈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 선장과 선원보다 먼저 세월호 침몰을 예상하고 보트를 타고 탈출한 인간들은? 그리고 청해진 해운의 직원에 의하면 선원들이 무섭다며 선장에게 출항하지 말자고 애원했다던데 왜? 그리고 진도 관제 센터가 밝힌 교신내용엔 반복해서 배를 탈출하면 구조될 수 있느냐고 선장(?)이 묻던데 왜? 그런데 결과적으로 해경이 구조의지를 가지고 구조한 사람은 기관실 선원들과 미처 탈출하지 못한 정체불명의 오렌지맨 뿐이었다.

그리고 바깥 상황을 주시하며 자력으로 탈출을 시도해서 민간어선에 의해 구조된 승객들 160여명이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트라우마로 지금도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

6. 광범위한 정보조작

* 미국의 수사당국과 주류 언론은 비주류 인터넷 언론 기자와 미국시민들, 그리고 양식 있는 세계의 지식인들이 제기하는 각종의혹에 대해 터무니없는 음모론이라 반박하며 각종 증거자료를 내놓았다. 대표적인 게 오사마 빈라덴이 911테러를 자신의 짓으로 인정하는 내용의 조잡한 비디오 영상이었다. 그러나 화면조작이었다. 도무지 동일인물로 확인키 어려운 화질에 왼손잡이인 빈 라덴이 오른손잡이로 나오는가 하면 그 영어 번역마저도 전혀 엉뚱한 것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사고 이틀 뒤에 자살 테러범들의 명단과 국적, 행적을 밝히고 일주일 후엔 사진까지 공개했는데 웃긴 건 사고기의 탑승자 명단에는 이들이 없었고 몇 명은 나는 관계없다며 인터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인 쌍둥이 빌딩에 충돌한 비행기의 블랙박스가 녹아서 없다고 공개를 거부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미 교통안전국에선 비행기 사고 역사상 블랙박스가 사라진 최초의 사건이라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개탄했다. 또한 비행기 승객과 승무원들의 통화기록이 사라지는 가하면 의문을 제기하던 전문가들은 어느 순간 입을 다물거나 정부 발표를 두둔하는 이상 행동을 보였다.

* 한국의 국방부는 세월호 참사사건 초기부터 터져 나온 잠수함 충돌설에 대해 사고해역은 수심이 낮아 불가능하고 한미 합동군사 훈련과 무관하다며 유언비어 유포자 처벌을 협박했다. 그러나 이는 천안함 당시 북한 잠수정에 의한 어뢰 피격설을 유포한 국방부의 입장과 모순된다. 해경은 한 술 더 떠서 없다던 진도 관제센터의 교신기록을 일부 편집해 공개했다.

그 외에도 두 달이 다되어서 제출한 세월호 관련 항해도와 VTS 자료나 레이더 영상조차도 그 팩트의 사실성을 의심케 하는 마사지된 의혹이 넘친다. 심지어 세월호 탑승자와 부모 등 관련자와의 통화기록이 통째로 사라지는 일이 벌어지고 휴대폰의 카톡과 대화나 영상 기록등도 압수되었다. 정부기관들이 국회가 요청한 자료에 대해 늑장, 거부, 편집하는 것은 이제 아주 일반적 현상이 되었다. 국정원에 의한 토목, 선박 관련 교수들의 입막음도 확인된 사실이다.

7. 마녀사냥

* 부시 행정부는 회교 수니파 테러조직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라덴을 911 테러의 주범으로 규정하고 빈라덴을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아프카니스탄에 이어 이라크까지 전쟁을 확대했다. 그러나 잡으려던 오사마 빈라덴은 대규모 폭격에도 토라보라 협곡에 숨어 살아남고 이후에도 반미성전을 선포하며 중동과 유럽에 테러협박을 공언해서 증오와 공포의 화신이 되었다. 이후 오바마 집권 시에 파키스탄 접경에 은신한 오사마 빈라덴의 거처를 습격하여 그를 사살했다고 발표했으나 아직도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그가 죽지 않고 성형수술을 받고 살아있다고 믿고 있다.

* 세월호 둘째 날부터 정부와 언론은 과거 오대양 사건과 세모 유람선 침몰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학생들을 학살한 주범이 구원파와 그 교주 유병언이라고 여론몰이 했다. 박그네의 반드시 붙잡으라는 명령에 한국 검찰은 금수원에 두 차례 쳐들어가고 경찰과 군대가 동원되어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유병언은 현재 오리무중이다. 이에 구원파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세월호 침몰의 원인과 책임은 정부에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더 나아가 검찰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실명으로 거론하며 갈 데 까지 막 가보자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최근엔 5억 현상금과 진상규명 포럼을 열어 수사당국을 곤욕스럽게 하고 있다. 시중엔 이미 오래전에 유병언 부자가 재산을 빼돌리고 해외로 잠적했을 것이라는 설이 파다하다. 심지어 못 잡는 게 아니라 안 잡는 거라는 설도 유력하다.

8. 극적반전-은밀한 관계

* 그러나 부시가문과 빈 라덴 가문은 오랫동안 동업을 해온 막역한 사이였음이 밝혀졌다.부시 시니어는 세계 최대의 상업은행으로 방위산업과 항공 산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는 칼라일 그룹의 아시아·중동 담당 상담고문직을 맡고 있었다. 사우디의 라덴그룹은 칼라일 그룹을 통해 미국의 국방산업에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시 대통령이 오사마 빈라덴을 체포한다며 벌인 아프카니스탄-이라크 전쟁으로 부시 일가와 라덴 일가는 사이좋게 막대한 수익을 누리게 되었다. 또한 빈 라덴 가문은 사우디에서 성전 건축으로 돈을 번 회사로 1500억 달러에 이르는 사우디 미군기지 건설을 도맡아한 바도 있다.

아버지 부시는 빈 라덴과도 여러 차례 직접 만나 밥도 함께 한 사이였다. 심지어 빈 라덴이 2001년 7월 4일부터 14일까지 아랍 에미레이트 두바이의 미국 병원에 신장병 치료차 입원했을 때 입원하고 있는 동안 미국의 고위 인사들과 CIA 요원 등이 방문한 일도 밝혀졌다. 이 때는 비록 911이전이지만 코소보 사테 개입으로 빈 라덴이 국제적으로 수배되고 난 이후의 일이다.

그 뿐인가 파키스탄을 통해 대소 저항세력으로 알카에다를 조직하고 지원하며 훈련시킨 세력은 사실상 미국의 군부와 CIA이었다. 소련이 아프카니스탄에 침공한 1980년대 이후에 벌어진 史實이다.

* 유병언은 그러나 역대 한국의 집권세력과 아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가 신흥종교세력의 교주에서 재벌급 세모그룹의 오너로 성공한데는 신도들의 돈을 이용한 정치권 로비에 있었다. 물론 일본 교토 출신으로 대구서 성장한 이력, 최태민 계열의 영생교와 교리의 친연성이 있었다는 점 등도 정치권에 줄을 대는 데 아주 유리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그를 키워준 이는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다. 그를 통해 TK 출신 핵심 정치실세들과 다방면의 교류를 했고 미국과도 선을 댔다. 레이건 방한 시 유병언의 경호원들이 근거리 경호를 수행한 적도 있다. 그 와중에 터진 오대양 살인사건도 세모 유람선 침몰 사고도 유병언은 이러한 탄탄한 인맥과 금력 로비를 통해 무사히 벗어나서-이 때 김기춘과 연을 맺는다 - 오히려 더 크게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출소이후 한 동안 공개적인 활동을 피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2000년대 이후 아들들과 함께 다종의 사업을 확장하던 중 (주) 아해를 설립한다.

박그네가 세월호 참사 34일 만에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뒤 서둘러 떠났던 UAE 원전설치 행사와 관련해 이 원전 폐기물업체로 선정돼 지난해부터 납품을 시작한 업체가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일가의 관계사인 (주)아해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업체는 특히 이명박 정부 5년과 박그네 정부 1년 등 모두 6년 간 매출액이 57%(288억 원)나 늘어나는 등 회사규모가 커졌으며, 2009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국고보조금도 수억 원 씩 받고 있는 것으로 6월 26일 감사보고서 분석결과 밝혀졌다. 그 뿐인가 세간에는 4대강 대운하 사업이 원안대로 되었다면 그 운하에 유람선을 세모가 띄울 계획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심지어 이명박은 여러 차례 유병언과 직접 만나 밥도 먹은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다. 둘은 출생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둘 다 1941년생 동갑이고 아주 친한 기독교도다. 얼마 전 마우스 리는 교토 류의 아들이 운영하는 고급 레스토랑을 방문했다. 그날은 세월호가 침몰하기 2주전인 4월 2일이었다. 거기서 누구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하다.

9. VIP(?)의 수상한 행적

* 9.11날 아침 초등학교 책읽기 행사에 참석했던 부시는 세계무역센터가 두 번째 비행기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도 전혀 표정의 변화도 없이 10여분이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부시는 대통령전용기인 Air Force1에 올라타고 1시간 반 동안 전투기의 호위도 없이 뉴욕상공을 비행했다. 그 후 5시간 동안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9/11 당시 백악관의 테러담당보좌관 이었던 리처드 클라크는 청문회에서 2000년 초부터 알카에다의 테러위협을 부시에게 경고했지만 계속해서 묵살 당했다고 증언했다.

* 박그네의 4월16일 오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김기춘도 몰랐다고 한다. 분명 청와대에서 오전 8시경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열리고 있었다고 보도되었다. 이 NSC는 대통령 직속 기구로 대통령이 의장이 되어 주재한다. (혹시 진짜 대통령이 따로 있는가?)

이후 완전히 침몰이 된 이후 노란 구호복을 입고 벙커에 나타나 마치 전혀 몰랐다는 듯이 구명복을 입은 사람을 찾기가 힘드냐고 질문한다. 그리고 다음날 구조에 큰 지장을 주면서 진도를 방문해 1시간 반 동안 구조대와 유가족을 위로한다. 그때 실종자 어머니가 우리 애가 살아있다고 들어보라고 핸드폰을 건네자 전혀 표정의 변화도 없이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박그네는 TV 연설에서 모든 책임은 자신에 있다고 눈물을 흘리며 대국민 사죄를 했다.얼마 후 희생자 유가족을 불러서 유가족도 참여하는 진상조사와 특별법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시간 현재 국회에서는 희생자 부모들이 유가족의 참여와 수사권을 요구하는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새누리와 박그네는 계속해서 묵살하고 있다.

10. 사후대처

* 첫 번째 납치된 비행기가 관제탑과 교신이 두절되고 항로를 이탈한 뒤 여승무원이 조종실과 연락이 안 된다는 정보까지 보내왔는데도 그 25분 동안 연방항공관리국과 북미 방공사령부는 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항공기가 납치되어 뉴욕으로 향하는 사실을 안 항공관리국이 북미 방공사령부에 알렸으나 그 후 20분 동안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결국 그 비행기는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충돌했다.

그 후 세 번째 항공기가 워싱턴 펜타곤(국방부)에 충돌했고 그 뒤 네 번째 항공기가 펜실바니아에 추락했다. 처음 비행기의 납치사실을 알고도 그 뒤 두 시간 동안 납치된 4대의 비행기에 대해 왜 미군 전투기가 출동하지 않았는가? 미국은 24시간 내내 전투기가 출동할 태세가 갖춰져 있고 그 빠른 전투기로 단 10분 이내에 항공기를 추적할 수 있었다. 즉 납치가 의심되는 상황이 발생되면 즉시 전투기가 출동하는 표준행동절차가 유독 이날만은 지켜지지 않았다.

(SBS 2001.9.9. 그것이 알고 싶다 < 911 미스터리 - 테러인가, 거대한 음모인가? > 발췌)

급기야 펜타곤이 피격 당한 후에야 최초로 비행기 납치이후 2시간이 지나서 첫 출격한 전투기는 어떠한 무기 즉 미사일나 로켓도 장착하지 않고서 비무장 상태로 날아 다녔다.

* 세월호가 침몰하는데 한국의 구조책임자인 해경은 부작위를 넘어 적극적 구조방해를 했다.

- 해경은 왜 구조를 방해했나?

- 해경은 왜 해군 UDT, SSU 대원들의 투입을 저지했나?

- 해경은 왜 다이빙벨 투입을 방해했나?

- 해경은 왜 119 구조대의 투입을 저지했나?

- 해군 소장은 왜 다이빙벨 바지선의 철수를 종용했나?

- 왜 3함대 사령부는 즉각적인 전투함, 고속정 투입을 하지 않았나?

- 해군참모총장의 통영함 투입지시를 2번이나 저지시킨 세력은 누구인가?

- 해경이 최초 선미로 가지 않고 선수로 간 배경

- 해경은 선장과 선원들을 먼저 구하라는 지시 받았나?

- 해경이 선미에서 어선들의 구조 활동을 방해한 이유

- 해경의 선수 야간작업 후 선수 침몰한 배경 밝혀야 : 살인행위

(신상철님의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을 위한 Check Point - 240에서 발췌)

11. 무기력한 야당 지도부

* 911사건 1년 전인 1999년 말에 벌어진 미국 대선부정선거 문제로 민주당원등 많은 미국의 시민들이 대규모 항의 시위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당시 민주당 지도부는 국가의 안정을 위해 부정선거를 묵인했다. 앨 고어도 마지못해 부시의 승리를 인정했다.

911 사태에서 미국 민주당은 소수 하원의원을 제외하곤 부시정부의 알카에다에 의한 테러규정에 동조했다. 이후 청문회 과정에서 콘돌리자 라이스의 사전인지 사실이 밝혀졌고 부시의 모순된 진술이 나왔음에도 이를 공론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프카니스탄 침공에 이어 이라크에 대한 침공의 명분이 된 대량살상무기 정보에 대해서도 검증조차 없이 전쟁을 승인했다.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오바마가 이를 지적하고 전쟁에 반대했다. 그래서 이후 간택되었다.)

이후 부시는 재선에서 또 부정선거 논란을 일으키고 당선된다. 그 후 10년간 세계정세의 주도권은 부시가와 네오콘의 손아귀에 있었다.

* 2012년 대선에서 한국의 야당 민주당은 즉각 승복하고 대선패배 사죄를 순회 읍소하는 촌극을 벌인다. 이후 대선후보였던 문재인에 책임지고 정계은퇴를 요구하던 세력이 당권을 장악한다. 그 후 권은희 수사과장의 폭로와 검찰의 수사로 광범위한 국가기관의 불법적 선거개입이 밝혀지지만 천막농성과 몇 차례의 항의집회이후 손을 뗀다.

그리고 1년 후 발생한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개별 의원들의 고군분투 이상의 당 차원의 적극적인 대응은 이 시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정부의 무능과 부실만을 문제 삼고 침몰 원인 규명에는 쏟아지는 숱한 의혹에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의석 과반수를 실현해서 진상규명의 힘을 키울 의지는 없이 공천분란을 자초해서 박그네와 새누리의 기를 살린다. 이후 투개표 절차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없을 때는 국민 과반수가 정권교체를 원해도 실현되기 어려울 거란 전망이 나온다.

12. 여파

* 911이후

a.단기

1. 대선 부정선거 논란 종식

2. 애국자법 제정으로 영장 없이 도청, 체포, 구금이 가능해짐.

3. 막강한 권한 가진 ‘국토 안보부’ 신설과 TIPS(테러 정보·예방 시스템) 도입으로 미국 민 과 전 세계인을 상대로 촘촘한 감시망 가동. 최근 스노든이 폭로한 바에 따르면 앵글로색 슨 5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 정부 도감청 당함. 독일 최근에 미국 스파이 추방.

4. 아프카니스탄 석유 파이프라인 건설. 카르자이 정권과 건설 계약한 유노칼 정유 회사는 죠지 슐츠와 헨리 키신저가 운영하고 있었다. 이라크 침공으로 세계 제2위의 양 질의 원유 보급처 확보.

5. 군비를 증강시켜 냉전 종식으로 위기에 빠진 군수업체 회생.

6.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의 정당화.(유색인종 특히 아랍인 혐오주의 확산) 샤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의 아이디어 실현.

b. 장기

1. 막대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로 급기야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시작. 그 여파가 유럽과 중남미를 거쳐 동아시아에 확산 중. 이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로 전화될 가능성이 점점 커짐.

2. 미국의 대외적 이미지가 폭력적 전쟁국가로 굳어져 문화 주도력 약화.

3. 결정적으로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안정화 실패로 인한 달러와 석유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 져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패권이 급격히 흔들리고 있음.

4. 부르주아 양당독재의 무능과 부패의 만연으로 유사 파시즘체제의 등장 가능성 농후. 이후 미국 내부 격한 혼란이 예상됨.

* 세월호 이후

대한민국이 헉슬리의 미친 신세계가 될 것인지 아니면 조지 오웰의 1984년의 동물농장이 될 것인지 아니면 사람 사는 세상으로 발전할 것인지 그 모든 것이 깨어있는 우리들 시민의 참여에 달렸다.

結-추론

지금은 소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지신 신상철 선생은 지난 천안함 사건에 대해 교통사고라고 자주 표현합니다. 그 교통사고를 엄청난 사건으로 확대해 국민들과 세계를 기만한 것이라는 것이죠.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천안함 침몰의 진상이 바뀌었다는 것이죠. 그 주장은 이제 어느덧 국민의 70%가 북의 소행이 아니라고 믿는다는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은 쌍팔 년도가 아니니까요.

저는 세월호 참사를 반전된 천안함 사건이자 911의 쌍둥이 사건이라고 추정합니다. 즉 교통사고로 가장하려다 실패하고 있는 기획된 사건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911테러에 대한 비주류의 강력한 주장인 부시와 알카에다가 공모한 자작극이라는 결론에 동의합니다.

이제 진상규명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가족을 핵으로 눈덩이처럼 국민여론을 키워나가는 거에 비례해서 빨라질 것입니다. 이는 우리 국민 모두의 문제로 이미 커졌습니다.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어떻게 막을까요? 저들은 개꿈을 꾸고 있습니다. 반드시 진상은 밝혀집니다.

자 이상으로 제법 긴 저의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어떤가요? 제법 두 사건이 닮아있지 않나요? 이러한 유사성을 여러분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들 짐작은 하고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다만 이런 중대한 문제에 서면 누구나 조심스럽고 발언과 표현에 신중하게 되지요. 일단 겁나는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괜히 틀린 것으로 밝혀지면 더 이상의 논객 질에 치명적인 흠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저도 숱한 고민과 망설임 끝에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내 새끼 같은 그리고 내 동생 같은 어린 목숨들의 억울함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

* 이 글을 세월호에서 비참하게 숨진 단원고 학생들과 이름 모를 희생자의 영전 앞에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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