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한번읽고 다신 못읽는 소설입니다.
꼴랑 한번 훑어본걸로 오만하게 소설에 대해 글까지 작성하는거냐 하시면...네...면목없게도 그렇습니다...ㅇㅅㅇ;;;;
영화는 본 적이 없어서 이쪽으론 아예 할 말이 없...습..니다...
소설 롤리타는 첫 문장이 아름다운 작품을 논할때에 거의 한번도 빠짐없이 거론되는 이름입니다.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 my soul. Lo-Lee-ta.
이 첫 문장은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보신 분들이 많을겁니다.
저는 도서관에서 꽤 예전에 읽었는데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해석이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좋지 않은 기억력을 되짚어 적어보자면 이랬거든요.
그러나 아시다 싶이 loins는...보통...음...경...을 말합니다.
작가 나보코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다 싶이 러시아 출신인데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 이 삼개국어 전부로 유려한 문장을 뽑아낼 수 있는 미친 존잘님개 사기캐 살아있는 치트키였습니다.
소설은 처음에 프랑스어로 쓰였으나 금서판정을 받게되고... 나보코프는 다시 영어로 써서 미국에서 출판합니다.
때문에 소설 롤리타는 영문학 카테고리에 속하게 됩니다.
출간 이후 평론가들은 영문학의 표현력을 한단계 높였다고 할 정도로 극찬했죠.
그러나 이게 소아성애를 미화하는 작품이냐 하면 아마 나보코프가 관을 뛰쳐나올겁니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험버트-이후부턴 혐버트라 부르겠습니다.-의 관점에서 진행됩니다. 소아성애자들이 보이는 역겨운 자기합리화와 아동성폭력 피해자에대한 매도로 가득차있죠. 근데 작가 나보코프가 존잘님이라 문장이 아름다워서 독자가 이 합리화에 홀려버린다는게 좀 함정이죠.
쨌든 혐버트 이 개자식은 10대 돌로레스에게 성애의 감정을 갖고 애를 님펫이니 남자를 홀리는 소녀니 이딴 소리를 해대며 '요망한' 아이로 묘사합니다.
사실 소설에서 돌로레스는 자신과 사이가 소원한 어머니 대신에 자길 자상하게 대해주는 이 개자식 혐버트에게 애정을 구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돌로레스는 성적인 표현을 쓰게 되는데 제제가 야한 노래를 아버지 앞에서 부른 것 처럼 돌로레스도 그저 다른사람을 따라하는 것뿐입니다.
돌로레스는 퍽 장난기가 있는 사춘기 소녀인데 그 나잇대의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성인 남성에 대한 애정... 사실 동경에 가깝죠. 그런 감정을 험버트에게 느끼기는 합니다.
게다가 돌로레스는 편모가정이라 조금은 아버지로서의 모습도 험버트에게 투영하죠.
근데 애가 자기한테 성적인 표현을 한다고 해서 혐버트는 애를 팜므파탈 취급하며 그짓거리 할 생각을 합니다.
어른이 애한테... 논란의 여지 없이 혐버트는 제정신인 사람이 아닙니다.
소설이 혐버트의 관점에서 서술됨에도 나보코프는 곳곳에 혐버트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아동성범죄자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곳곳에 많은 장치를 넣어둡니다.
이 소설은 따지자면 '고발'의 성격을 지니는 작품입니다. 작가또한 혐버트 같은 부류를 제일 혐오한다고도 했고요.
혐버트가 자기 합리화를 하다하다 차마 이것만큼은 부정하지 못하고 내뱉은 독백으로 인해 그 의도가 확실해지죠.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 때가 있었고 그때는 지옥이었다.
로(돌로레스의 별명)는 밤마다 잠이 들 때까지 울었다.
그러니까 시종일관 돌로레스가 '요망한' 아이라 자기와의 성관계를 즐긴다고 개구라를 쳐댔던 혐버트 이자식이
'사실 나는 돌로레스가 나와의 관계를 끔찍히 여기는걸 알고 있었고 그걸 느낄 때마다 나도 그렇게 아팠다.'
'이 관계가 싫어 돌로레스가 밤마다 우는것도 알고 있었다.' 이따위 망발을 날립니다.
한마디로 혐버트는 애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면서도 돌로레스한테 요망한 아이 운운하며 초지일관 애를 제 성욕으로 찍어누른거죠.
소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돌로레스가 감기에 걸려 아픈데도 애한테 그짓거리 하려는 놈이라 저 대목에서 분노가 승천하게 됩니다.
싫어하는 돌로레스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애를...네...그렇습니다...
돌로레스는 결국 20살의 나이로 아이를 낳다가 죽고 정작 죽어 마땅한 혐버트는 살아서 자기 수기 '롤리타'를 써서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혐버트는 자기 변명을 글로남겨 돌로레스를 부관참시하고 제 사랑이 얼마나 진실된 것이었는지에 대해 별 같잖은 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저도 제 자신이 롤리타 이미지 차용에 굉장히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재고해 볼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소설 롤리타를 구성하는 많은 아름다운 문장들 그 이상의 비참함 속에서 살아야 했던 돌로레스를 동정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제 잣대를 적용시켰을 겁니다. 비단 아이유 양 뿐만이 아니라 롤리타 이미지를 차용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요.
요번 앨범에서 아이유양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대충 짐작은 갑니다.
헌데 이중적인 이미지만을 가져오고 싶었다면 왜 하필 아동성폭력피해자였던 '롤리타'나 아동학대피해자인 '제제'나 '마틸다'였어야 하냐는게 제 논지입니다.
아이유가 페도필리아라는게 아닙니다... 제발...
피해자들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상업적으로 팔아먹는게 납득이 안돼서 그럽니다. 그것도 하필 사회 최약층을요.
차라리 요번 컨셉이 지젤이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발레에 관심이 없어도 누구나 알법한 작품이기도 하고.
물론 지젤은 배신을 당하고도 알브레히트에게 미련이 남아 죽어 윌리가 된 후에도 차마 그를 죽이지는 못했던 캐릭터지만 어떻게 재해석을 해서 우겨넣으면 납득 못할 정도는 아닌 작품이지 않나 싶습니다.
중요한건 지젤은 순진한 처녀로 묘사되니 나잇대도 롤리타나 제제보다는 23살의 아이유양에게 더 설득력이 있겠죠. 범죄의 피해자도 아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