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씁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므로. 글 쓰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현실에 절망하면서. 그나마도 여기에 담을 저의 지혜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괴하면서.
저는 한나라당을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입니다. 2002년 3월부터 꼭 2년 동안 한나라당만 전담해 왔습니다. 하여 먼저 머리 숙여 가슴을 치며 사죄를 구합니다. 국민의 이익을 좇아 정치권을 감시하는 기자로서 저는 제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쿠데타를 펜의 힘으로 어찌해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을 예견해 경고하지도, 끝내 이런 거대한 야만이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사태를 앞서 막아내지도 못했습니다.
지난 2년간, 세상물정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정치권의 생리따윈 난생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란 가당찮은 핑계로 저는 그들에게 저의 ‘몸’을 주었습니다. 그들과 악수하고 인사하고 웃음을 나눴습니다. 호사스런 밥상에 마주앉아 저의 귀와 눈을 그들에게 내주었고, 그 기름진 음식으로 제 배를 채웠습니다. 해가 지면 그들이 내미는 술잔도 받았고, 짐짓 그들과 어깨동무한 채 시시껄렁한 유행가도 불렀습니다.
몸을 맡긴 대가로 그들로부터 돈을 받지는 않았지만, 돈을 주려는 유혹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입 다물었습니다. 그들이 언뜻언뜻 내비치는 거대한 음모에 대해 애매하고 어정쩡한 필설로 설 건드렸을 뿐, 끝내 그 실체를 온전히 폭로하진 않았습니다. 저는 단 한가지 핑계를 들어 이 모든 유보와 침묵을 스스로 정당화 했습니다.
그들과 좀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조중동 기자들만큼의 ‘깊숙한 취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하여 언젠가 어느 날에는 그들의 머리 속에 들어가 자유자재로 기사를 쓰는 순간을 위해, 저는 지금까지 기꺼이 내 몸을 넘겨주고 침묵했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저 내키지 않는 몸만 준 게 아니라, 제 영혼의 일부도 주었습니다. 그들이 건넨 값비싼 양주 술잔에 더러운 정치자금이 담겨져 있고, 그들이 들려준 협잡의 구상에는 그 자리에서 대노하고 치받아야할 음모가 있음을 진작에 알았음에도, 저는 양심과 영혼까지도 내던졌습니다.
하여 저를 아는 모든 이 앞에서, 모든 벗들 앞에서, 오늘 저는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고개를 땅에 쳐박고 웁니다. 그들이 온갖 불법과 탈법을 동원해 찬탈한 국회의원의 권능을 제 마음대로 휘두를 때, 합법을 가장한 그 권능에 또다시 불법의 완력과 금권과 폭력을 더해 무소불위의 야만을 저지를 때,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민주주의의 힘을 저들 마음대로 능욕하고 욕보일때, 저는 저에게 주어진 기자로서의 권능을, 의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국민의 알 권리’에서 비롯된 무한대의 책무를 그저 그들의 술잔을 건네 받을 수 있는 특권으로 바꿔치기 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그것만이 지난 2년간 더렵혀진 몸과 마음을 그나마 정화시키고 속죄할 길입니다. 다시 국민의 눈높이에 서서 그들을 징죄하고자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과 추정과 소문 전부를 드립니다. 속죄의 마음으로 성심을 다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따라 이제 여러분과 함께 옳은 길을 가겠습니다.
3월12일, 최후를 향해 달리는 한나라당이 그 마지막 야만의 불꽃을 태웠습니다. 저는 그 최후를 이미 오래 전부터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한나라당의 최후’ 이후를 준비하는 우리 모두의 시간입니다.
한나라당의 최후 2
한나라당과 관련해 지금까지 나는 중대한 ‘오판’을 세번 저질렀다. 정치부 기자로서의 미숙함을 그대로 드러낸 경우이기도 하다.
그 첫번째는 지난 2002년 대선이었다. 당시 나는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각오’하고 있었다. 물론 11월로 접어들면서 이 판단을 유보하기도 했지만, 여튼 상당 기간 동안 이회창의 당선은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이 오판은 내가 ‘한나라당의 시각’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한나라당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보면, 시민사회는 보이지 않는다. (이 대목은 다음 글에서 설명하겠다) 나는 그때 거대하게 역동하는 시민사회의 흐름을 놓쳤다.
두번째는 지난해 3월부터 시작해 6월에 끝난 한나라당 대표경선이었다. 나는 서청원 전 대표가 재집권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데, 역시 다음 기회에 첨언하기로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한나라당의 근저에 깔려있는 ‘민정당’이라는 변수를 가볍게 봤다. 대신 한나라당의 본질을 ‘이회창당’이라고 판단했다. 이회창당이긴 했지만, 사실은 민정당의 정서가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막판에서야 깨달았다. 당원직선제로 실시된 대표경선에서 민정당 때부터 당을 지켜온 한나라당원의 대다수는 민주계이자 ‘근본’이 불분명한 서청원 대신, 보수재집결을 주창한 원조 민정당원 출신의 최병렬을 선택했다.
세번째는 탄핵정국과 관련된 것이다. 우선 한나라당이 설마 탄핵소추안을 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봤고, 박관용 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끝내 탄핵안을 강행통과시키는 게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상과 같이 ‘기사로 드러난 적은 한번도 없지만’ 나는 정치적 중대국면마다 종합적 판단에서 정반대의 결과를 예측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따라서 이런 띨띨한 기자가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내리는 판단을 신뢰할 수 없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이런 무수한 오류를 먼저 알려드린 뒤, 또한번 앞으로의 상황을 종합하면 이렇다. 탄핵정국에 대한 나의 ‘오판’은 한나라당이 ‘상식’의 범주 안에서 움직일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에서 비롯됐다. 2004년 한국 시민사회에 조응하는 하나의 정당으로서 민주주의의 기본원칙과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기대가 냉철한 판단에 섞여 들어간 것이다.
이미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 널리 공유되고 있는 것처럼, 한나라당이 선택하게 될 길은 총선 연기와 개헌이다.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최악의 길’이지만, 한나라당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는 ‘최선의 길’이다. 이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데 있어, 최대의 걸림돌은 시민사회의 거대한 비난여론이다.
그러나 3·12 쿠데타를 통해 목도했듯이, 한나라당에게 있어 여론이란, 민중이란, 그저 감안해야할 하나의 ‘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 변수는 충분히 ‘조작’되거나 ‘변조’할 수 있다. (그들이 시민사회 동향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 지도 다음에 자세히 다루겠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시라. 나는 이 글을 앞으로 매일 연재할테니) 설사 여론의 80%가 그들에게 등을 돌릴지라도 한나라당은 한다면 한다. 안되면 되게 하기도 한다.
전에 없는 시민사회의 분노와 비난 여론으로 포휘된 현재의 상황 그대로, 한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치른다는 것은 한나라당, 그리고 민주당에게는 ‘둠 시나리오’다. 민주당 최고 지도부가 공언했고, 사실은 한나라당 지도부도 공감하고 있을 “그냥 서서 죽지는 않겠다”는 결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잠시라도 한나라당의 입장에 서보자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대로 가면 총선 과반은 커녕, 영남지역의 수성도 불투명하다. 총선 승리를 위해 탄핵에 모든 것을 던졌는데도, 전망은 불투명하다. 어차피 여론은 나빠질대로 나빠졌다. 여론에 기대 선거를 치를 수는 없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랬듯이 ‘정치권 내부’에서 결판을 봐야 한다.
기만적인 87년 6·29 선언이 그랬고, 92년 민자당의 탄생이 그랬다. 그런 방식으로 상황을 돌파해 왔다. 지금은 주어진 ‘게임의 룰’에서 움직이는 국면이 아니라, 판 전체를 뒤집느냐 마느냐의 국면이다. 이미 한나라당은 상식을 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3당 대표가 고건 총리 체제에서 개헌은 없다고 공언했다지만, 정치의 담론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의 공언을 뒤집기 위해 정치인이 가장 손쉽게 꺼내드는 것이 이른바 ‘상황의 변화’다.
무슨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가. 연일 전국 도처에서 대규모 군중집회가 열리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보수세력들까지도 대규모 집회를 조직할 것이다. 현행 집시법에 따라 얼마든지 불법으로 몰고갈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무엇보다 ‘국론분열’이니 ‘이념대립’이니 해서, 고건 과도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일종의 ‘위기의식’ 유포가, 현재 예상되는 첫번째 수순이다. 보수 언론은 분명히 해방 직후의 좌우 이념 대립 양상을 꺼내들며, 오늘의 사태와 비교할 것이다. 그 논리의 끝에서 총선은 극심한 이념대립, 국론분열의 대 쟁투장이 될 것이다. 국론통합과 대한민국 헌정체제 수호를 위해 선거는 유보되어도 괜찮은 것이다! 현재 한나라당 지도부의 핵심에는 개헌론자와 탄핵론자들이 총집결해 있다. 최병렬 대표, 그는 재신임 카드를 덥석 물었을 정도로, 기본적으로 노무현 대통령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홍사덕 총무, 정치입문 자체를 분권형 개헌 주창으로 시작했다. 이강두 정책위의장, 당 대표 경선때부터 일찌감치 내각제 개헌론을 핵심 과제로 들고 나왔다. 홍준표 전략기획위원장, 대통령 하야를 목표로 최 대표를 측근 보좌했다. 그리고 이재오 전 사무총장. 자신이 지금 ‘반독재 투쟁’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는 당무심사 문건 유출 파동으로 ‘실각’했다가 최근 다시 화려하게 복귀했다. 3월11일 최병렬 대표의 기자회견 때,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는 탄핵 정국을 통해 사실상의 ‘브레인’ 자격을 복권받은 것으로 보인다.
3월11과 12일 비공개 의총에서 이른바 ‘단상 점거 전략’을 마련한 것도 이재오 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12일 본회의장에서는 홍사덕 총무 등을 제쳐놓고 이재오 의원이 최 대표와 상의해가며, ‘현장 반장’ 노릇을 했다. 그는 대통령 탄핵과 하야를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그는 무조건 ‘끝까지 간다’ 이 지도부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행여 소장파니, 국민여론이니, 상식이니를 이 판단에 섞어버리면 바로 나처럼 된다. 가장 중대한 국면에서 가장 치명적인 오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한나라당은 그런 전제를 깡그리 무시하고 돌진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국은 헌법, 법률, 국회, 정당, 민주주의 등 적어도 10여년 동안 불변의 기본으로 존재했던 어떤 준거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한나라당이 그 싸움을 먼저 시작했다.
이런 판단이 또다시 ‘오판’으로 판명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아마도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국민 여론이 한나라당이 단순히 ‘사소한 변수’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움직일 때나 가능할 것이다.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가 아니라, 이를 넘어서는 거대한 역동이 이미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