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태평양 전쟁의 주역은 명백히 미국입니다만, 1945년도 갑자기 등장한 소련의 등판은 소련의 위엄과 공포를 서방세계가 뼈저리게 느끼게 할만한 대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우익쟁이들은 소련을 마치 배신자! 더러운 놈들! 뒤를 치다니! 하는 둥 매도하는 맛이 없잖아 있긴 한데, 사실 소-일간 정전협정은 당시 양국이 서로 필요성을 느껴 취하고 있었을 뿐, 일본이 마치 소련에게 자비를 베풀어준 듯한 인상을 남기기엔 일본이 소련을 치지엔 상당히 부실한 상태였습니다.
물론 일본이 투자를 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할힌골 전투 이후 나름대로 긴장빨고 소련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며, 만주 괴뢰국을 세우고 탄생한 관동군들은 컨트롤 아웃이 되어 허구헌날 소련이 언제 처들어올지 몰라! 하면서 미국에게 털리던 와중에도 일본군 신병들을 꾸준히 주입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름 신경써준겁니다. 그리고 대미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관동군의 작계는 소련에 대한 공세적 작전도 나름 기획될정도였고 소련이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고있던 1941년도엔 나름 백만 대군을 무력시위하며 소련을 도발하기도 했습니다. 이 1941년도는 독일이 소련에게 거칠게 싸대기를 처버린 바르바로사 작전이 벌어진 해이기도 하죠.
소련의 뒷통수를 거하게 후려버린 독일의 한방, 바르바로사. 사실 히틀러는 일본이 참전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만, 일본으로서는 다소 반응이 뜨드 미지근했고, 일본은 독일이 모스크바는 점령해야 움직일 생각이었다. 사실 이러한 일본은 소련 공격에 대한 문젠 이후 스탈린그라드에서도 스탈린그라드가 넘어갈시엔 일본이 참전하네마네 하기도 했지만, 소련은 이 두 도시를 방어해내는데 성공하면서 일본의 소련공격은 영원히 안녕하게된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세계 제일 넘버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련 스파이'인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군 물자 대부분이 남쪽으로 향함을 보고하며 극동지방에서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통보하면서 소련군은 안심하고 극동 지역에 배치한 병력을 빼서 모스크바 방어에 모조리 때려박고 독일을 막아내는데 성공하죠. 사실 이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전에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한 것도 스탈린에게 보고했었으나, 스탈린은 'ㅎㅎ 지금 독일 영국이랑 피터지게 싸우는데 개소리 ㄴㄴ!'하고 씹었다가 지옥행 열차를 탄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엔 철썩같이 믿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소련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 바르바로사에 대한 정보와 일본의 남방작전에 대한 정보를 소련에게 전파하면서 맹활약했으나, 일본에게 붙잡히면서 처형당한다.
사실 이때 일본이 소련을 공격했다면 독소전쟁이 조금은 더 길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역사에 가정법따윈 필요없죠. 그 이후로 소련과 일본은 계속해서 정전을 유지합니다. 이들 사이는 불편했지만 그래도 서로 대사를 파견해둘정도로 꽉 막힌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양국은 서로의 적에게 좀더 집중할 수 있게 되는데 일본은 1941년 이후 독일의 공세가 실패로 두들어짐에 따라 중국으로 병력을 돌리기 시작했고, 소련 역시 독일을 조지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므로 시베리아는 최소한의 병력으로 유지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만주군의 전력도 상당히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백만이 넘던 만주군 병력은 75만까지 떨어지게 됩니다만, 이 선을 지키려고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고, 덕분에 하는 짓이 정예 병력은 죄다 중국이던 남방전선이던 돌려버리고 물자보급도 제대로 못받고 인원수만 유지되는 허약한 군대가 되어버렸죠. 일본인들의 희망이자 호프던 최강 정예 관동군은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이미 죄다 쓸려나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일본 축구에서 언제나 언급되는 '베스트 일레븐'의 포지션이 그때 당시의 관동군과 같았으나, 관동군은 이미 뼈는 쏙 빠진 지방과 단백질로 흐물거리는 존재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러한 관동군의 열악한 상황과는 무관하게 본토에서는 헛된 망상을 꿈꾸고 있었는데, 1945년 미국이 일본을 잿더미로 만들고 있을 무렵, 소련을 이용해서 미국과의 정전협정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나름 '조건부'협상을 꿈꾼 것이죠. 물론 소련 입장에선 그저 개소리였던 것이 이미 베를린에 거의 다달은 4월달에 소련은 넌즈시 '정전협정 깰거임'하고 통보를 했고, 일본은 놀래서 자빠졌으나 소련을 붙잡고 허세까지 부리면서 소련이 도와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 중 '야! 니들이 바르바로사로 개고생할때, 우린 니네 안쳤잖아! 니들 이러기임!'하면서까지 소련의 참전만큼은 막으려고 애원을 하죠. 그러거나 말거나 소련은 일단 침착하게 독일을 조져버리고 있었고요
Ура!!!!!
또 한편 미국은 소련에게 빨랑 일본을 조지라고 독촉하고 있었습니다. 이오지마부터 어째 일본의 상태가 영 심상치 않음을 느낀 미국이었지만, 이정도로 미쳐버린 줄은 몰랐던 상황이기도 했고, 예상보다 희생자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몰락작전만 봐도 엄청난 공세를 퍼붓지만, 미군은 자신들 역시 엄청난 사상자가 생길 것으로 예상할만큼 일본과의 싸움이 쉽지만은 않다고 여기고 있었고 빨리 소련에게 처들어와달라고 부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이는 1945년 2월에 개최된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ㅇㅇ 까짓거 베를린 접수하고 3개월 뒤에 때려드림 걱정 ㄴㄴ. 대신에 동유럽에서 우리가 먹은 땅은 우리꺼 ㅇㅋ?'하면서 루즈벨트와 쑈부를 치면서 사실상 소련의 공격은 약속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왼쪽부터 처칠-루즈벨트-스탈린 순이다. 사실 이때부터 미-소간 양대 세력의 시대, 즉 냉전시대가 열렸다고 확인된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사실 이때 루즈벨트는 아직 소련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대일전 참전 약속을 댓가로 동유럽을 소련에게 넘겨주게 된다. 뭐 훗날 베를린만큼은 주기 싫었던 건지 베를린은 또 기어이 짤라먹는 짓을 하게 되지만, 그건 이미 루즈벨트가 죽고 처칠이 선거에서 패배하며, 스탈린이 치매로 고통받던 시기의 일이라.
어찌되었던 이러한 일본의 희망은 무참히 짖밟히고 이후 포츠담 선언에서도 연합국은 일본에게 '니들이 원하는 조건부 협상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거임 ㅇㅋ?'하면서 재확인 했기 때문에 일본은 사실상 노퓨처상황이 됩니다. 따라서 나름대로 관동군 입장에서도 소련의 침략에 대비해 5~6월을 기점으로 병력을 재배치하면서 효율적인 방어선을 구성하기 시작했고, 만주일대를 철저히 요새화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다소 제약적이었던 것이 일본은 이미 중국전선-본토에 이르는 모든 전선을 케어해야했기 때문에 배치는 효율적일진 몰라도 상태는 영 아니올시다였습니다.
그러나 소련 입장에서는 만주 공격이 나름 부담되는 계획인건 명백한 사실이었는데, 만주크기만 해도 이미 상당히 넓을 뿐더러 만주엔 벌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맥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산림 지형은 소련군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또한 아무리 누가 뭐라해도 75만에 이르는 병력은 애들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현 대한민국 국군의 현역 숫자가 60만인것을 감안하면 75만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님을 알수있죠.
그렇다고 안팰 것도 아니고 어차피 팰거면 시원하게 한방 먹여줘야 하는 법이었습니다. 소련군은 극동군의 지휘관을 싸그리 교체해버리는데, 이 라인업이 모조리 독소전쟁의 영웅들로만 구성되었고 병력 배치도 독소전쟁에서 살아남은 말그대로 잔뼈굵은 배테랑들이 대거 포진됩니다. 또한 소련에선 금기의 언어로 여겨지던 스탈린이 숙청시켜버린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만든 종심전투교리는 이미 독소전쟁때부터 은근슬쩍 쓰여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종심전투교리의 제파식 전술에 대해서 소련군은 미국이 일본 상대로 원자폭탄 실험하듯이 자신들은 이 종심전투교리의 발전과 완성을 시험해보고자 하게 됩니다. 따라서 대대적인 병력개편을 통해 보병사단에 독립전차여단..을 배치하고 포병연대를 배치하는 둥 현대전에서 강조되는 제병협동공격의 완성을 시험해보고자 한 것이죠.
이러한 소련군의 계획은 스탈린은 본래 7월 25일까지로 기한을 잡았으나, 다소 늦어져 8월 7일날 준비가 끝나는데, 이때는 이미 히로시마가 작은 소년에 의해서 잿더미가 된 무렵이었습니다. 어찌됬던 소련은 자신들이 나름 공들여 준비해온 공세를 시작하게 됩니다.
만주작전계획, 자세히보면 한반도도 포함되어있는데, 이는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여 관동군이 추가적인 보급을 받지 못하게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때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로 진군하게 된 것은 이후 미국이 소련과의 무장해체 분할에 대해 38선을 부르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이때 일본군은 말그대로 죽창에 맞은 것마냥 관통됩니다. 소련군은 하루 평균 300~400km를 진군했는데, 이는 서울에서 부산만큼 매일매일 적을 밀어내고 있었다는 뜻이죠. 소련군은 이러한 빠른 진격속도를 맞추기 위해 항공보급을 끊임없이 추진하면서 이러한 진격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이는 훗날 서방세계가 바크라티온 작전과 더불어 이 만주공세를 보고 '소련=탱크웨이브'라는 공식을 떠올리게 만들어버릴만큼 충격적인 공세였습니다. 이 만주공세는 소련이 지난 3년간 독일군에게 수많은 인민들을 죽이고 죽여서 배우게 된 전술의 정점이었고 말 그대로 '완성된' 소련군 그 자체였습니다. 이 완성된 소련군 앞에 일본 관동군은 말그대로 애송이였죠.
소련군은 8월 9일부터 시작된 공세에서 15일 일본이 항복했으나 20일까지 버티던 만주국은 20일 항복하면서 이 소련의 무자비한 공세는 끝을 맞이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여러분도 아시다싶이 지독한 냉전의 시대가 열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