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창작) 마지막 대본 이후의 대본은 오지 않았다
게시물ID : readers_313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ainworks
추천 : 4
조회수 : 22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8/03/22 12:44:26
옵션
  • 창작글
촬영 스케줄과 겹치지 않아
방영시간에 맞춰 모니터링을 했다.

끝을 향해 가는 이야기들.

나의 분량은 많지 않았고
이야기에도 힘은 없었다.


지난주에 받은 마지막 회 대본이 생각났다.

펜을 들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체크하고 연습해보아야 할 대사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웃고만 있으면 끝나는,
끝에 어울리는 인사를 주고받는, 
그런 전형적인 연기들만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까지 날을 세우는
그런 이야기는 쓸 수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에는 기승전결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어쩔 수는 없겠으나

이런 힘 빠지는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은
어쩐지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번 작품에서
내 생애 최고의 연기를 해냈다.

대본을 처음 받아봤을 때부터,
동료 배우들과 리딩을 할 때부터,
첫 신을 촬영했을 때부터,

그리고 그 결과를 
화면에서 확인했을 때부터

나는 이번 작품이 
내 최고의 연기가 될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사는 내 것처럼 입에 붙었고
캐릭터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맞아떨어졌다.

당연히 카메라 앞에서 표현해야할 것들은
현장의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연기에,
그리고 대본에는 없던 나의 대사와 행동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내가 하는 연기에 확신을 할 수 없어
스탭들의 눈치를 봐야 했으니까.

내가 하는 것들은 틀리다고 
핀잔을 듣기만 했었으니까.

대본을 아무리 읽고 외워도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대사들은
뻣뻣하게 나오기만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전 나의 작품들과 비교 해봐도

이번 작품에서 나의 모습은
어떤 작품에서보다도 자유롭고 또 아름다웠다.

그래서 매 회가 소중했다.

아무리 끝을 향해 가는 이야기라고 해도
이렇게 힘 빠지는 연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조금 더 캐릭터에 어울리는,
캐릭터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내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연기를 하고 싶었다.


더 긴 이야기였어야 했는데.
지금보다 두 배는 더 긴 이야기였어도
나는 잘 해낼 수 있었을 텐데.

이제 다시 이런 캐릭터는
만날 수도, 연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다른 작품에서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너무나 초라한 일이었다.

인기 있었던 캐릭터를 반복하는 건
배우로서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일이란 걸
사라진 배우들을 지켜보아 알고 있었다.

대본이 없어도
카메라만 있다면
혼자서라도 이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모두 헛된 이야기이겠지.

이 캐릭터는 이것으로 끝을 내야 했다.



오늘 이야기는 슬프지만
역시 지루했다.

몇 번 울었지만
지쳐있는 울음이었다.

나는 소속사에게 전화를 걸어
오디션을 볼 수 있는 대본이 들어와 있다면
보내줄 수 없는지 물었다.

이번 작품과 겹치지 않는다면
어떤 캐릭터도 상관없으니
가능한 빨리 오디션을 볼 수 있는 대본으로 
보내달라고 그렇게 말했다.


보내기 아까운 캐릭터였지만
영원할 수 없다면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와야 했다.


이번화의 마지막은
나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면서 끝이 난다.

대본에는
이별을 말하는 상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라고 만 나와 있었지만,

나는 그때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웃음을 짓는
그런 연기를 했다.


바보처럼 울고만 있지는 않아.
그 캐릭터는
보내주어야 하는 상대를
그리고 앞으로 혼자 나아가야 하는 나 자신을
불쌍하게만 생각하고 울고만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혼자서라도 씩씩하게
걸어 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야.

그런 생각으로 웃음을 지었다.


나의 연기에
연출가는
대본과 다르다고 조금 곤란해하며
다시 연기하도록 지시했고,
나는 대본대로의 연기도 촬영했지만,

방송에는 웃음을 짓는 
나의 첫 연기가 나왔다.


평소에는 못생겼다고 생각한 얼굴이었지만
마지막 장면은 내가 봐도 정말 아름다웠다.

어쩌면 슬픈 말이지만
나이를 먹어가는 여배우로서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을 만큼,
이제는 아름다움을 잃어갈 일만 남았다고
확신이 들만큼.

나의 모습은 가장 빛났다.


방송이 끝나고
외울 것 없는 마지막 대본을 
다시 읽고 또 외웠다.


오늘은 새로운 대본이 오는 날이었지만

당연하게도 
마지막 대본 이후의 대본은 오지 않았다.


그 당연한 사실에 
나는 조금 눈물을 흘렸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