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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humorstory_1345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스메★
추천 : 0
조회수 : 25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07/03/10 14:01:40
13.
"내가 대학교를 아직 안 가봐서 잘 모르겠는데 대학생 친구들은 남녀끼리도 주먹다짐하고
그러나 보지?"
"그게 아니구요."
"아아, 언니! 뭐 쓸데없는 얘기는 됐고, 나랑도 한 번 떠볼까?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게. 난 강자를 좋아하거든."
시진이가 말을 마치고 자세를 잡으려 들자, 미유코는 난감했다. 이유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무도의 기본 예의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는 싸움을 막을 수는 없
는 노릇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어쨌든 오해는 풀어야 해.'
어쨌든 순수하게 실력 대결을 하는 쪽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미유코도 자세를 가다듬
었다.
'저건 무슨 무술 자세지?'
시진이도 그제야 수호가 그냥 아무 방어 없이 단순히 맞은 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 수
호가 싸움을 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체격이 있고, 남자인데 여자
랑 직접 싸우다가 다쳤다고 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유코가 수호를 이길 만한 실력을 가지고 직접 대련
을 해서 그런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 싸움을
멈출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오빠가 다친 건 사실이야. 그거 하나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어!'
둘은 서로 서서 노려보기만 했다. 미유코의 입장에서는 오해로 빚어진 싸움을 하려니 먼
저 공격하기가 망설여졌고, 시진이는 미유코를 잘 모르는 상태니 섣불리 다가설 수가 없
었다. 확실히 시진이는 보는 눈이 있었다.
"언제까지 노려보기만 할 거야? 내가 먼저 시작해줘?"
"그게...그냥 내 말 좀 들어주면 안 될까?"
"칫, 시끄럽군."
시진이는 빠른 몸놀림을 이용해 잽싸게 파고들어 오른쪽 주먹을 살짝 휘둘렀다. 미유코
가 왼팔을 들어 방어하는 순간에 오른손에 힘을 빼서 멈추고는 다시 왼주먹으로 턱을 겨
냥해서 올렸다. 그러나 그 순간에 미유코는 뒤로 한발짝 물러서서 피했다.
일단 시진이는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였기 때문에 숨을 골라야 했다. 미유코도 뒤로 물러
선 후 다시 자세만 잡았다.
"언니, 물론 싸움은 내가 화나서 내가 건 것이지만 그렇다고 봐줄 필요까지는 없어. 그
게 더 기분 나빠!"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달려와서 공중에 살짝 뜬 상태에서 발차기를 시도했다. 공중에 발
과 함께 교복치마도 펄럭였다. 미유코는 팔로 막았지만 욱신거렸다. 아무리 무술을 배우
고 단련을 했어도 공격과 방어에 능숙해지는 것이지, 맺집이 쎄 질 수는 없었다.
'이 여자. 생각보다 훨씬 강하네. 도대체 뭘 하는 고등학생이지? 공격방향이 전혀 예측
되지가 않아. 이렇게 방어만 해서는 안 되겠어.'
드디어 미유코는 제대로 마음을 먹고, 시진이의 공격을 막아내며 반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뻑, 하고 미유코의 주먹이 정확하게 시진이의 오른쪽 볼을 강타했다. 시진이는 뒤로 힘없
이 나가 떨어졌다. 힘겹게 다시 일어나며 입 주위의 피를 쓰윽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퉷, 후우. 잘만 때릴 수 있으면서, 그것도 이렇게 쎄면서 왜 이렇게 내숭을 떨고 그래?
이제야 제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나 보지?"
"일단은 시작했으니 시합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고 끝나고 나서 해명하도록 하지."
"아니, 해명할 기회 따윈 없어. 조금 있으면 뻗어 있을 테니까..."
'이거 결과를 장담하지는 못하겠군...'
시진이는 빨리 끝내야 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틈
도 안 주고 몰아붙이자 미유코는 슬슬 막으면서 피하고 있었다. 피하는 척하면서 돌아서
면서 날린 주먹에 시진이는 옆구리를 맞았다.
그와 동시에 앞발차기로 배쪽을 맞고 뒤로 물러섰다. 갑작스럽게 미유코의 파상공격이
시작됐다. 계속적으로 막고, 맞고가 반복되었다. 서서히 시진이는 지쳐가고 있었다.
'젠장...싸움은 많이 해 봤지만 이렇게 체력으로나 머리로나 밀리는 건 처음이네.'
확실히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미유코는 타고난 감각으로 시진이의 공격을 어느 정
도 예측하기 시작했고, 그 후로는 속수무책이었다.
계속적으로 맞던 시진이는 울분이 터지고,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지 무리하게 미
유코를 끌어안고 같이 넘어졌다. 시진이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나마 나은 판단이었다.
그렇게 넘어뜨리고 주먹으로 미유코의 얼굴을 한 대 가격했을 때였을까?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시진!"
시진이는 조용히 그 자리에서 옆을 돌아보고 힘없이 일어나야만 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보면 몰라? 오빠 아프게 한 사람한테 내가 벌하는 거잖아!"
"너 도대체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는 거야? 그리고 내가 언제 너보고 내 복수같은
거 해달라고 그랬어?"
"나는 그냥 오빠가 아픈 게 싫어! 그래서 오빠 아프게 하는 사람도 싫고..."
수호는 괜히 더 화가 났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사람을 패는 거야? 내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맞고 다닐 녀석으로 보이냐? 너의 눈에는? 아니잖아?"
"그럼, 그 이유가 도대체 뭔데!"
"그...그건..."
수호는 또 말문이 막혔다. 참 곤혹스런 상황이었다. 그 이유를 말해줬다가는 시진이가
어떻게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진아, 이유는 나중에 말해줄게. 어쨌든 지금 이 행동은 니가 잘못한 거야. 어서 사과
해."
"못해!"
"사과해. 어서!"
시진이는 입술을 깨물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서러운 듯 눈물을 흘리며 뛰어갔다. 수호가
처음으로 보는 시진이의 눈물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은 듯 빠르게 시야에서 벗어
나고 있었다.
맞기는 실컷 다 맞고 결정적인 순간에 한 대 때렸다고 깡패 취급받는 것도 그랬고, 오빠
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도 그랬고 모든 것이 싫고 미웠다.
집으로 뛰어들어간 시진이는 또 싸우고 들어왔냐고 싫은 소리하는 어머니도 없는 집안
으로 들어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궈 버렸다. 서럽게 내리던 눈물은 이내 멈춰
있었다.
부모님은 항상 늦은 시각에 일자리에서 돌아오시곤 했다. 형제나 자매도 없는 시진이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 노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이렇게 아픈 몸을 끌고 집을 들어설 때
면 외로움을 극대화된다.
눈물이라는 것은 그것을 봐주는 사람이 없는 이상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혼자
청승맞게 울고 있을 이유도 없고, 어느 새 시진이답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다.
방안의 거울을 보고 서서 옷을 살며시 벗어 보았다. 고등학생이라고는 믿기 힘든 봉긋
한 가슴이 드러났다. 하얀 속옷 사이로 푸른색 멍 자국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얼굴은
거의 상처가 없었지만 몸에는 무수한 멍들로 가득했다.
'젠장...정말 무서운 년이네. 게다가 오빠한테 안 들킬려고 얼굴은 안 건드린 건가? 훗..
어쨌든 오랜만에 두들겨 맞으니 기분이 좀 좋네. 그나저나 이놈의 집구석은 왜 이렇게
맨날 조용해...아랫집에서 우리집에 누가 사는지 안 사는지도 모르겠네.'
수호는 미유코 앞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
"미...미유코 괜찮아? 쟤가 좀 오바를 잘해서...그나저나 많이 아팠지?"
"아냐. 나보다는 걔가 더 아팠을 텐데. 물론 오는 싸움이라 막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
히 싸운 것 같아 미안하네. 이유도 없이..."
"아니야. 잘 알아보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한 게 잘못이지."
"시진이라고 했나? 보아하니 걔는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너는 상당히 안 좋게 말하네."
갑자기 수호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질문이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시
진이에게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결과야 어찌 됐든 자신을 위한답시고 그렇게 난리
를 친 건데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걔는 그냥 좋은 동생일 뿐이야."
"그래? 그러면 다행이구..."
'다행이라고? 무슨 의미지? 나는 이미 끝난 게 아니였나?'
"어쨌든 학교나 가자. 늦었다."
미유코는 앞장서서 걸었다. 수호는 뒤따라 걸어가며 한참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는 마주치기 싫은 상대였어. 뭐가 그렇게 필사적인 거지?'
그렇게 같이 들어가서 먼저 들어가 있던 시원이와 합류해서 셋은 같이 수업을 들을 수 있
었다. 분명히 수호는 미유코와의 시합에서 졌고, 고백을 했던 사이였지만 어색한 기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웃으면서 얘기를 들어줬고, 전혀 시선을 피하거나 하지
않았다.
수호는 그러면 그럴수록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얘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네.'
"수호야 이따가 수업 끝나고 잠깐 나 좀 봐."
"응? 무슨 일인데?"
"이따가 얘기해줄게."
"또 나는 빼놓고 둘이 노네. 수호 이제 나한테 신경도 안 쓰지? 칫."
시원이답지 않게 투정부리는 모습을 보며 수호는 그저 나른한 미소를 날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미유코에게 모든 걸 걸어야만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왜 그런 시합을 했었는지를 말해주려는 건가?'
수호는 내심 궁금했던 차에 잘 됐다고 생각했다. 대화하는 김에 포기할 수 없다고, 다
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도 말해볼 참이었다. 그러나 일은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수호는 그 시합이 단순히 자신의 운명에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장애물 정도쯤으로밖에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끝났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고 있었다.
학교에서 약간 떨어진 공원은 평일에도 사람이 꽤 많은 편이었다. 새들도 암수 서로 쌍
을 지어 심어놓은 지 별로 되지 않아 지지대에 몸을 의지해야 하는 어린 나무들의 머리
쯤에 앉아 지저귀면서 솔로들을 약올리고, 어린 나무들은 머리가 휘청거리는 것이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다.
잘 정리된 보도블럭 길은 입구에서부터 동산 안쪽으로 쭉 이어져 있고, 그 길을 가족나
들이 나온 어린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가고 그 뒤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부부가 걸어
온다. 어린 아이들은 공원에 산책나온 개들이 마냥 귀엽고 신기한지, 주인의 허락도 없
이 열심히 머리를 쓰다듬는다. 개들도 아이들이 귀여운 건지, 귀찮은 건지 가만히 앉아
서 쓰다듬는 손길을 받아준다.
"애들 너무 귀엽다, 그치?"
"응? 으응 그러네."
"난 한국에 온 뒤로 이 공원을 되게 자주 온다. 가족끼리 나와서 저렇게 정답게 노는 모
습이 너무 부럽거든."
"너도 일본에 있을 때는 자주 가봤을 거 아냐?"
수호는 미유코가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건지 계속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잠자코 듣
기로 했다.
"아니, 나는 잘 그러지 못했어."
"왜? 집안에서 귀하게 자랐나 보네."
"귀하게 자라긴 귀하게 자랐지..."
수호는 농담삼아 던진 말에 미유코의 표정이 서글퍼지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귀하게 자랄 수밖에 없었고, 밖에 나올 수도 없었어. 아버지 때문에...우리 아버지는
야쿠자셨거든."
"뭐어?!"
수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전개였다. 게다가 앞으로의 상황을
생각해 보고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유코가 내뱉은 과거형에 그나
마 숨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야쿠자였다라...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어쨌든 첫번째 관문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시
련인걸.'
"좀 놀랐지? 하긴 뭐 어릴 때 내 친구들은 다들 놀래는 척조차 못하고 나를 피해다니기
에만 바빴으니까. 어릴 때부터 나는 거의 왕따에 가까웠어. 내가 아무리 성격이 밝아도
애들이 나를 상대해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만큼 우리 아버지는 무
서운 분이셨거든. 나도 그 애들을 지금에 와서는 이해해."
수호는 쥐죽은 듯이 침을 꼴깍 삼키며 듣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야쿠자라는 사실이 너무 싫었어. 정말 죽도록 싫었어. 사
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싫었고, 그런 이유로 인해 애들이 나를 피하는 것도 싫었
어. 맨날 아버지한테 화내고 사라져 버리라고 독설을 퍼부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
버지는 가족에게만큼은 정말 너그럽고 인자한 분이셨어.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시
든지 집안에서만큼은 티를 절대 내지 않으셨으니까...
그러다가 결국 사건이 터진 거야. 다른 야쿠자가 아버지에게 복수를 한답시고 어머니에
게 해를 가한 거지.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올려보내고 나면서부터
아버지는 하루하루를 술에 절어 사셨어. 나는 매일 울며 아버지의 팔에 매달렸지. 결국
아버지는 나를 잘 부탁한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야쿠자를 그만두기로 했
지.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결국 팔 하나를 내주고 지금은 조그마한 식
당을 운영하고 계셔."
"......"
수호는 자신이 영화 속 얘기를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무
지 자신 앞에 있는 이 가녀린 여자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현실감이 다가오지 않았
다.
"하지만 아버지는 불안하셨을 거야. 언제 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계속 아버지에게 정말 엄하고 강한 훈련을 받아야만 했어.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강조를 하셨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누군가가 다가오
려 하면 도망가게 했어. 아버지는 자신이 지켜줄 수가 없으니 내 몸은 내가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 결국은 어느 정도의 힘은 기를 수 있었지. 그런데 그렇게 치
열하게 살고 나니까 대인 기피증이 생겨버린 거야. 나 사실 나랑 같이 다니는 유우끼와
스미레가 유일한 친구였어. 다른 애들하고는 친하게 지낼 생각도, 접근조차 거의 못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너가 나타난 거야. 일본에서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나 되게 신기했다. 아무렇지
도 않게 너한테 말을 걸고, 너가 가고 나서야 나 깨달았어. 내가 처음으로 낯선 사람에
게 전혀 놀라지 않고, 경계심을 가지지 않고 말을 했었다는 걸...
그래서 너를 찾으려고 애썼어. 그런데 사실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지. 너는 이미 한
국에 와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한국어학과라서 교환학생으로 오게 되었고, 다시
너를 보게 되었어. 결국 아버지가 평소에 강조하시던 것을 처음으로 실험해 보게 되었어.
만약에 남자를 만나게 된다면 꼭 그 남자가 너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인지, 정말 배짱있
고, 배포 있는 남자인지 직접 시험해보라는 말 말야.
물론 지금까지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 따윈 없었어. 남자들이 가까이 오려고 시도만 해
도, 바로 주먹이 날라갔으니까. 너한테 처음으로 시합요청한 거였어. 이게 내가 너한테
그런 엉뚱한 제의를 한 이유야. 이해하겠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수호는 예기치 못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점점 더 자신에 운명에 대한 부담감이 커지고
있었다. 미유코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자신은 정말 턱없이 부족한 남자일 뿐이었다. 미
유코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물론 내 삶의 이야기를 남자에게 하는 것도 처음이야. 아무한테도 얘기해 본 적이 없
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나 너가 그렇게 좋아하는 운명...믿어보려고...
넌 테스트 합격이야."
"저...정말? 지금 그 말 진심으로 하는 거야?"
수호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억누르고 간신히 입을 열고 있었다. 미유코를 처음 만나면서
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응."
~쪽~
미유코는 쑥쓰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수호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새빨개
진 얼굴을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수호는 그런 미유코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기뻐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미유코는 남자의 손 한 번 잡아보지 않은 완벽한 국가차원에서 보호해야
하는 인간보호재 아냐?! 오 신이시여! 그 동안 저에게 내려준 고통을 이렇게 일순간에
역전시켜주시나이까?'
"그럼 우리 이제부터 사귀는 거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미유코의 손을 당당하게 잡고, 공원 안쪽을 천천히 거닐었다.
수호는 평소에 자주 와봤던 공원이 왜 오늘은 이리도 아름답고 찬란한지 눈을 여러 번
비비고 다시 보고 또 보았다.
"내가 정말 잘할게. 정말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할게. 너는 내가 지킨다."
분수대를 디딤돌 삼아 혹성탈출하듯, 뛰어오른 물 입자들은 피아노 연주곡 음에 맞춰
튀어오르는 전자파처럼 끊길 듯 끊길 듯하면서도 끝없이 이어져 바람에 흩날리며, 강렬
한 태양 에너지를 분해하듯 아름다운 빛깔로 나누고 있었다. 그 아래를 인라인 스케이트
를 탄 아이들이 무지개를 손으로 잡아보려는 듯 손을 하늘 높이 들어올리고 신나게 달리
고 있었다.
잠자리채를 든 아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하늘을 높게 나는 잠자
리들은 수만개의 시안으로 미유코와 수호를 내려다보고 있다. 온갖 풀벌레 소리들이 귀
를 간지럽힌다.
"미유코는 어떤 걸 좋아해?"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이 공원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다 신기하고 재
미있어. 자주 보지 못한 것들이니 그럴 수밖에."
"농담도 참. 이런 것들이라면 내가 앞으로 너랑 같이 다니면서 실컷 보여줄 수 있어.
뭐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쿡...기대할게. 배고픈데 뭐 맛있는 거 사줘."
"그래, 가자!"
사실 수호는 미유코의 얘기를 듣는 순간부터 배가 고프지 않았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는 느낌이 이런 것인지 처음으로 느껴봤다. 둘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이상하게 배가 안 고프네."
공원에서 나오는 시원이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나가던 개가 슬픈 눈으로 시원이를
지켜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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