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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Pun한자) 영웅호색
게시물ID : readers_312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섬집아이
추천 : 2
조회수 : 1267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8/03/05 14:58:31
오늘의 문제: 『영웅호색』

英雄好色은 「영웅은 색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색色은 화려하고 눈에 띄는 것, 남자인 영웅은 미인인 여색女色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여성 영웅은 없는가? 여권 운동이 시작되던 무렵엔 잠시 영자英雌란 말도 쓰였습니다. 영자도 색을 좋아할 것입니다. 이 색이 굳이 남색男色일 필요는 없습니다. 돈을 사랑한 영자(송애령宋靄齡)도 있었고, 나라를 사랑한 영자(송경령宋慶齡)도 있었습니다. 권력을 사랑한 영자(송미령宋美齡)도 있었고요. 송 씨 집안의 이 세 영웅은 중국이 지금의 중국이 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송미령은 장개석의 아내면서 그 자신이 대단한 정치적 역할을 했습니다. 역시 중국이 지금의 중국이 되는데 큰 영향을 준 장학량이란 사람과도 인연이 있고요.

자고영웅다호색自古英雄多好色 예부터 영웅은 색을 좋아함 많았네
미필호색진영웅未必好色盡英雄 색을 좋아함이 반드시 영웅에 다함은 아니겠으나
아수평비영웅한我雖竝非英雄漢 나는 비록 영웅도 (좋은) 사내도 아울러 아니지만
유유호색사영웅唯有好色似英雄 다만 색을 좋아함 있어 영웅과 닮았을 뿐

장학량이 아흔세 살에 지었다는 시입니다. 다르게 전하는 것도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네요. 내용은 비슷(?)합니다. 느낌이 조금(?) 다릅니다.

자고영웅개호색自古英雄皆好色 예부터 영웅은 모두 색을 좋아했네
약불호색비영웅若不好色非英雄 색을 좋아하지 않으면 영웅이 아니지
아수불시영웅한我雖不是英雄漢 나는 비록 영웅도 (좋은) 사내도 아니지만
각야호색사영웅卻也好色似英雄 되려 색을 좋아하여 영웅을 닮았네

장학량 자신이 이렇게 인정하듯 그는 대단한 바람둥이 었습니다. 장학량이 나중에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정부情婦(더 노골적인 말도 있지만 이익을 나누는 친구 friends with benefits 정도로 해두죠)가 열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한 말이고 또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부인이 있어서 그런지 어떤 부분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 명의 여자 친구가 있었고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사귀었던 사람이 열한 명이고 잠깐 스쳐 지나간 사람은 셀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 명이 누구인지 장학량이 말하지 않았으니 알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의 부인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장학량은 장작림의 아들입니다. 장작림은 만주 일대를 장악한 군벌로, 그 지역에서 거의 임금님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세력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장학량은 그 아들이며 후계자이니 말하자면 왕자님과 비슷한 존재였습니다. 교육도 잘 받아서 중국의 고전 뿐 아니라 외국어도 잘했습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춤도 잘 췄습니다. 그 아버지의 군대 중 일부를 지휘하고 있었으니 자신의 세력도 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재벌 집안 후계자로 도피성 유학이 아닌 진지하게 공부한 후 계열사를 맡게 된 젊은 사장님이 사교계에 데뷔한 것입니다. (당시의 F4가 누구인가에 대해선 여러 말이 있지만, 장학량은 꼭 포함됩니다.) 여자 친구 한 둘은 문제도 아니죠. 젊은 여자들이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송미령도 그러했을지 모릅니다. 이 두 사람은 공공연히 연애를 했습니다(1925년 6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장학량은 이미 아내가 있었습니다. 장학량은 열다섯 살 때(1916년 4월) 우봉지于鳳至라는 열여덟 살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송미령과 사귄 것은 송미령이 스물일곱 이고 장학량이 스물네 살 때 일입니다. 우봉지의 아버지는 장학량의 아버지인 장작림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합니다. 미리 그 딸과 아들을 결혼시키기로 했는데, 우봉지가 결혼할 때는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양해를 구할 수도 없으니 장작림이 아들의 결혼을 더 강권했을지도 모릅니다. 장작림은 무슨 구시대적 발상이냐고 반발했고요.

장학량이 우봉지를 처음 만난 것은 장학량이 열두 살 그리고 우봉지가 열다섯 살 때 일입니다. "정가둔에 온 한경漢卿(장학량)은 무슨 마을이 눈 위에 온통 말똥투성이냐며 불평을 해댔다. 그런 한경이 나는 싫었다. 며칠 지나자 내 말을 잘 들었다. 나를 의지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 하루는 영원히 내 말만 듣겠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변심하지 않겠다고 하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두 사람 사이가 아주 나빴다고 할 것은 못됩니다. 우봉림은 장작림의 좋은 며느리로 그리고 장학량의 좋은 아내로 집안을 잘 다스렸고, 장학량이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크게 탓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사람, 장학량의 마지막 부인이 되는 조일적趙一荻에 대해서만은 달랐는데 그것은 조금 뒤에 설명하겠습니다. 장학량도 항상 부인을 공경하고 누님(!)이라 불렀습니다.

송미령도 대단한 아가씨였습니다. 장학량은 비유하여 재벌집 아드님이 되는 군벌의 아들이였지만, 송미령은 당시 재벌이라고 할 큰 부자집 따님이었습니다. 큰 언니는 은행가(공상희孔祥熙)와 결혼하였고 작은 언니는 정치가(손문孫文)와 결혼했습니다. 이제 군대라는 실제적 무력만 가지면 그 집안이 어떤 힘을 쓸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송미령과 장학량이 잘 되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장학량이 우봉지와 헤어질 수 없다고 하여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맺어지지 못합니다. 송미령은 나중에 장개석과 결혼합니다(1927년 12월). 장개석도 이미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개석은 장학량과 달리, 자신의 종교도 바꾸고 아내와 두 명의 첩도 버렸습니다(부인과 이혼하고 첩과 관계를 끊는 것을 신문에 광고로 냅니다). "이 짓이 전쟁보다 더 힘들다!" 장개석은 오 년이나 공을 들여 (이 오 년의 중간에 송미령이 장학량과 사귀었습니다) 드디어 송미령과 결혼하게 됩니다.

장학량이 우봉지를 버릴 수 없다고 하여 두 사람이 맺어지지 못한 것이지만, 이러면 장학량이 너무 멋져 보일 수도 있으니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실, 장학량은 우봉지 말고도 다른 아내가 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장학량은 대단한 바람둥이입니다. 송미령과 결혼하기 전 장개석이 아내와 두 명의 첩이 있었던 것처럼 장학량도 아내와 한 명의 첩이 있었습니다. 송미령은 감리교 목사의 딸입니다. 남편에게 여러 부인이 있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밖에 애인이 있는 것은 당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결혼은 한 명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봉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편에게 애인이 있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결혼까지 한 첩이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장학량이 스물한 살 때 열여덟 살 곡단옥谷瑞玉을 만나(1922년 4월)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이년 뒤 두 사람은 결혼합니다(1924년 10월). 장학량이 스물일곱 살 때 동북역치東北易幟(1928년 12월)라는 큰 정치적 결정을 했습니다. 동북역치를 준비하던 무렵부터 곡옥단과 오해가 생기고 사이가 나빠져 장학량이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이혼합니다(1931년 1월).

조일적과는 장학량이 스물여섯 살 때 무도회에서 열다섯 살의 이 아가씨를 만난것이 처음이라고 합니다(1927년 5월). 장학량이 스물일곱 살 때 아버지인 장작림이 죽습니다. 이 일은 일본군이 설치해둔 폭탄에 장작림이 탄 기차가 폭발한 암살사건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일본군은 이 일이 다른 이의 소행이라고 꾸몄습니다. "나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동으로도 갈 수 있고 서로도 갈 수 있는데 아침에는 이쪽으로 기울고 저녁에는 저쪽으로 기운다." 장작림이 장악하고 있던 동북지역(만주 일대)은 하나의 나라로 볼 만큼 독립적이었습니다. 경제력도 상당히 있었고요. 장개석의 군대와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동 쪽에는 이전의 적이었던 장개석이 있고 서 쪽에는 아버지를 죽인 일본(조선)이 있습니다. 결국, 동북지역의 독립을 포기하고 일정한 자치권을 인정받으며 남경 정부 아래로 들어간 것이 동북역치 입니다.

독립을 포기한다는 것에 대한 반발도 많았고 일본의 방해공작도 있었습니다. 곡옥단과 생긴 오해도 이러한 면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갑자기 큰 임무를 맡게 된 데다 집안도 화목하지 못하니 병이 생기지 않을 리 없습니다. 장학량이 스물여덟 살 때 쓰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열일곱 살의 맹랑한 아가씨가 쪽지 한 장 남기고 가출합니다(1929년 9월). 조일적(조기하)의 아버지는 신문에 오 일간이나 광고를 냅니다. "우리 가족의 세조는 청헌공이다. 즉, 남송의 후예에 속한다.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정직했고, 집안도 가지런히 다스렸다. 가보에는 집안의 격언이 있고, 가사家祠(집안사당)에는 가규가 있다. 천여년동안 후손들은 이를 지켰고, 파괴한 적이 없다. 역대왕조의 황제가 내리 문련을 내렸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즉, 민국의 전대총통, 총리도 편액을 준 바 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그런데 넷째딸 기하가 최근들어 자유평등에 현혹되어, 감히 사사로이 도망을 쳐서 행방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집안의 가규 제19조에서 32조에 의하여 그녀를 족보에서 삭제하여야 한다. 본당은 가사의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써 당연히 가법을 따라야 한다. 이에 사장에게 보고하고 집행한다"

이제 조일적은 돌아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장학량이 그녀를 받아들이고 싶어 우봉지에게 상의하니, 우봉지가 말도 안되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 여자는 장학량의 다른 애인들과 다릅니다. 곡단옥을 첩으로 삼아 결혼했었던 것이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둘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면 장 씨 성을 따를 수 없다. 다음, 조기하는 우봉지가 있는 본가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리고, 어떠한 명분도 주지 않는다. 이러한 조건은 조일적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어떠한 명분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첩으로라도 결혼하지 말 것이며 다른 이에게 첩이라고도 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식이 태어나면 장 씨 성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식이 태어나도 장학량의 아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조일적은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물론, 나중에 결과적으로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지켜진 것은 아닙니다. 조일적의 아이가 어렸을 때 우봉지가 잠시 키운 일도 있습니다.

동북의 장학량을 부하로 거느리게 된 장개석은 더욱 공산당을 박멸하려 하였습니다. 나라의 안쪽을 안정시키고 바깥의 도적(일본)을 무찌르자는 전략입니다. 장학량에게도 일본의 도발에 응대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장학량은 일본에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사람입니다. 일본이 도발해온다면 즉각 응전하려 하겠죠. 그렇게 되면 장학량을 안은 중국도 일본과 크게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과 크게 싸우게 되면 안쪽의 도적이 더 날뛸 것입니다. 장학량은 장개석의 비밀 명령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일본의 도발에 응하지 않고 군대를 만리장성 안쪽으로 물렸습니다. 이 일로 장학량은 비겁한 매국노라는 오명을 얻었고요. 장개석은 비난이 가라앉도록 장학량에게 잠시 외국에 나가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장학량과 같이 유럽 여행을 하게 된 우봉지는 장개석의 비밀 명령을 은행 금고에 맡깁니다. 이 일이 나중에 장학량의 목숨을 살립니다. 송미령이 아무리 힘이 있었어도 남편인 장개석을 협박할만한 결정적인 무언가가 없었다면 장학량의 목숨을 구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장학량에게 장개석은 시안에서 공산군을 박멸할 임무를 맡깁니다. 장학량의 근거지는 동북입니다. 동북은 일본에 침략당한 상태입니다. 동북의 군인들을 이끌고 중국의 중부에서 중국인과 내전을 벌여야 합니다. 장학량은 이 명령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장학량은 시안에 도착한 후 공산군과 힘을 합쳐 일본에 대항하자는 협상을 합니다.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의 동북군과 시안의 원래 주둔했던 양호성의 서북군이 닷새 전 시안에 도착한 장개석을 체포합니다. 이 사건을 시안 사건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군사 반란인데, 당시 장개석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사람이 장학량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공산군과 협상을 했기 때문에 또한 일본의 침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여론도 강했기 때문에, 장학량이 다른 행동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지금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장학량은 장개석이 공산군과 협력하여 일본과 대항하겠다고 말하자 그를 풀어줍니다.

김명호 씨가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글을 모아 책으로 낸 것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을 읽어보면 재미있는 글이 많습니다. (링크된 것을 따라가 다른 글도 읽어보세요.) 그중 몇 개의 제목입니다. 장제스 부인 쑹메이링, 남편 감금한 장쉐량과 연인 사이. “쑹메이링을 과부 만들 순 없다” … 장제스 살려준 장쉐량. “장쉐량 죽을 병 걸렸다” … 장제스, 부인 앞에서 싱글벙글. 장학량은 장개석을 "모시고" 같이 비행기를 타서 장개석의 근거지인 난징으로 갑니다. 결국 국공합작이 이뤄져서 공산군은 내전을 일으킨 반군에서 중국의 정식 군대가 됩니다. 이때 힘을 모아 장개석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중국을 차지하게 되지만 이것은 뒤의 일입니다. 난징에 도착한 장학량은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습니다. 장학량도 어느 정도 각오한 바였겠지만 장개석이 그렇게까지 하리라곤 상상도 못 하였을 것입니다. 장개석은 장학량을 가둬두고 자신이 죽은 후에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장학량은 장개석이 죽은 뒤 십육 년 후, 자신이 아흔 살이 되어서야 풀려났습니다.

반란을 일으켰으니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학량의 관점에선 이것이 반란이 아닙니다. 장학량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을 죽인 일본의 도발에도 응대하지 않아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같은 나라 사람끼리 싸우지 말고 외세(일본)을 물리치자는 여론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장개석은 이런 여론을 무시하거나 탄압했습니다. 장학량은 자신의 행동이 천하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정정당당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장학량은 장개석이 생각을 바꾸겠다는 말만 듣고도 그를 풀어줬습니다. 장개석의 아랫사람으로써 윗사람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 것이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그러니, 자신은 군대를 이용하여 장개석에게 건의를 한 것이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윗사람을 욕되게 하였으니 (장개석은 잠옷바람에 맨발로 도망가다 체포되었습니다) 자신도 비슷한 치욕을 겪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군대를 빼앗기고 오십 년이 넘는 기간동안 갇치게 될 것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은 삼국지나 수호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습니다.

장학량은 순진했다 치고 실제로 그를 구한 것은 송미령입니다. 송미령 자신이 능력과 권력이 있는 여자였고 또 앞서 말한 장개석의 비밀 명령이 있었습니다. 장학량의 행동은 군사 반란으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학량의 대의를 송미령 같은 사람이 주장하고 거기에 일본군에 대항하지 말라는 장개석의 명령까지 밝혀진다면 장개석도 대단히 큰 정치적 타격을 받습니다. 미리 짐작하고 이를 숨겨 은행에 맡긴 우봉지가 장학량을 살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봉지는 갇혀있는 장학량을 돌보다 1940년 미국으로 병을 고치러 떠납니다. 유선암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치료하였으나 다시 재발하여, 결국 미국에서 살기로 합니다. 큰 상인이었던 아버지의 피를 이었는지 사업에도 성공하여 재산을 모았습니다. 조일적을 위해 장학량과 1964년 이혼합니다. 장학량이 아직 대만에 갇혀있는 동안 죽었습니다. 자신의 집 옆에 따로 장학량과 조일적을 위한 집을 지어두었다고 합니다. 몇 년만 더 살았다면 장학량이 풀려나서 미국에 방문할 수 있었을텐데. 유언으로 자신의 무덤 옆에 장학량이 묻힐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했답니다. "평생무감사平生無憾事유일애여인惟一愛女人." 장학량이 우봉지의 무덤에서 쓴 말이라고 합니다. 평생무감사平生無憾事는 평생 후회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유일애여인惟一愛女人은 앞의 말을 받아, 후회는 없지만 단 한가지가 후회된다는 말입니다. 애여인愛女人을 어떻게 푸는가에 따라 뜻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장학량이 우봉지에게 미안해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미안하지 않다면 사람도 아닙니다.

우봉지가 미국으로 떠날 당시 조일적은 홍콩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장학량이 장개석에게 저런 대우를 받게되자, 장학량은 장개석이 죽이지 않더라도 스스로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봉지가 이를 말리며 장학량이 군사법정에서 자신의 정정당당함을 밝힌 말을 다시 일깨워줬다고 합니다. 이제 자신이 병들어 미국으로 떠나면서, 우봉지는 조일적에게 장학량을 부탁합니다. 조일적은 자신의 아이를 다른 이에게 맡기고 달려와 그 뒤로 죽을 때까지 장학량을 떠나지 않았다 합니다. 1964년 우봉지가 장학량과 이혼한 것은 조일적이 장학량과 결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장학량의 나이 예순셋, 조일적의 나이 쉰두 살때 일입니다. 조일적이 가출한 뒤 삼십오 년 만입니다. 삼십오 년 전에 우봉지가 내걸었던 조건은 이로써 완전히 철회되었습니다. 조일적은 장학량보다 일찍 죽었습니다. 장학량은 조일적이 죽은 뒤 일 년 후에 백 살을 채우고 죽었고요. 우봉지의 바램과 달리 장학량은 조일적의 곁에 묻혔습니다.

장학량 스스로 인정하듯 호색한 사람인 것이 맞습니다. 난형난제難兄難弟를 풀면서 맹자의 일을 잠깐 언급했습니다. '임금님이 연못의 경치를 감상하다가 맹자에게 현명한 사람들도 이런 것을 즐기냐고 묻습니다. 맹자는 현명한 사람만이 이런 것을 즐길 수 있다고 대답하고요. 그리고 살짝 틀어, 백성들이 임금님을 미워한다면 이런 좋은 것들도 없어질 텐데 어떻게 즐길 수 있겠냐고 합니다.' 영웅에게 물어보면 자신은 색을 좋아한다 할 것입니다. 맹자라면 이렇게 말하겠죠. 영웅이라야 색을 좋아할 수 있다고. 그리고 살짝 틀을 것입니다. 색이 영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찌 즐길 수 있겠냐고. 장학량은 호색한 사람이나 자신이 먼저 쫒아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미국에 있고. (누군지 말하지 않으니 미국에 있던 사람은 마음이 떨리고. 모두들 추측하기로는 송미령입니다만 모르는 일입니다.)

장학량은 호색한 사람이나 여자들이 그가 살아있도록 합니다. 여자 때문에 죽고싶어질 사람들을 보며(그러나 목숨은 하나일 뿐이니 섣부른 생각은 말길. 그대의 살아온 날들이 그대를 증거할테니.), 그들의 위대했던 과거를 생각하며, 영웅호색英雄好色을 떠올렸습니다. 색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즐기면 안됩니다. 좋아지고 싫어지는 것은 마음이 시키는 것. 색이 반드시 자신을 좋아해야 할 필연적 이유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영웅이라 말하는 사람 중 진실로 영웅인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영웅이 호색하나 호색한 것이 영웅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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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기 문제: 『가화만사성』

규칙1. 제출한 표현은 읽는 법과 의미를 설명한다.
예) 가화만사성 - 家和萬事成(집안이 화목하고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규칙2. 제시된 소리가 모두 들어간 표현을 만든다.
예) 가화만사성 - 加禍謾詐盛(재앙을 더해 속임수가 왕성하다)

규칙3.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표현은 제출할 수 없다.
예) 家和萬事成(X) 加禍謾詐盛(O)

규칙4. 제시된 소리의 순서는 바꿀 수 있다.
예) 성사만화가 - 成事滿華家(화려함을 채우는 일에 성공한 집 또는 成事滿華于家로부터 집에 화려함을 채우는 일에 성공하였다)
예) 성사만화가 - 性事漫畫家... 다들 아실 것이라 믿고 설명은 생략합니다.

규칙5. 한자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예) 性事漫畫家(O) 性事畫家만(X)

규칙6. 고유명사는 다른 곳에서 인용할 수 있는 것을 쓴다. 단,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도 허용한다.
예) 사성만가화 - 師誠謾可化(사성이 가화를 속였다)에서
師誠은 조선 말기 승려(1836년생1910년몰)의 법명이고 可化는 1870년에 진사가 된 원숙교(1828년생)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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