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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6) 후회 없는 선택
게시물ID : readers_312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윤인석
추천 : 4
조회수 : 345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8/03/01 11: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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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피우는 사람은 티가 난다.

 스마트 폰을 잠금 설정하지 않아도, 같이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지 않아도 티가 난다.

 예나는 애인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음식점에서 거침없이 소금을 집어주던 손길이 설탕과 소금 사이에서 잠시 주춤한 게 그러했고, 평소와 다르게 조합한 옷차림이 그러했고, 마주 바라보다가 허공을 훑는 시선이 그러했고, 안았을 때 체온이 다른 것이 그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속을 간질이던 체취가 머릿속 촉을 간질일 때 예나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중해야 했다. 예나는 스스로 한번 정하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자기 성격을 알고 있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 전에 확실한 증거를 찾기로 했다.

 '어디 흥신소 같은 곳에라도 연락해 봐야겠어.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될까?'

 예나가 결심을 한 순간이었다. 한 신사가 불쑥 나타나 예나 앞을 막아섰다.

 "실례합니다."

 앞을 막아선 신사는 길거리에 어울리지 않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 연미복을 차려입고, 검은 정장 모자와 검은색 지팡이까지 들고 있어서 신사 외에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옆에는 똑같은 연미복 차림의 꼬마가 서 있었다.

 "예? 저 말씀이세요?"

 "혹시 해결사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괜찮으시면 차 한잔하시면서 상담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사가 마침 바로 옆에 있는 카페를 가르키며 말했다.

 "왜 제가 해결사를 찾는다고 생각하세요?"

 "하하. 이 업계도 경쟁이 치열한 데다가 신사 숙녀 여러분들은 어두운 구석에 있는 사무실까지 오시는 걸 꺼리시는 경향이 있어서요. 가끔 얼굴에 수심이 보이는 분을을 보면 실례 불구하고 이렇게 여쭤보기도 한답니다. 찾아가는 서비스인 셈이지요. 어떠신가요? 관심 있으십니까?"

 신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콧수염이 멋들어지게 휘었다.

 "......그러죠."

 예나는 잠시 고민하다 신사와 함께 카페에 들어갔다. 차림새도 그렇고 갑자기 나타난 점도 수상했지만 마침 흥신소를 찾아볼 생각을 하고 있었고, 구석진 공간이 아니라 대로변 카페라는 점도 안심이 되었다. 정 이상하면 돌아 나오면 될 일이었다.

 예나와 신사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꼬마는 조각 케이크 하나를 주문했다.

 "저 아이는..."

 "아. 우리 꼬마. 잔심부름 같은 걸 해주고는 한답니다. 이렇게 보여도 경력이 상당한 유능한 친구입니다. 인사드리렴."

"잘 부탁드립니다."

 꼬마가 아랫배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볼살이 통통한 귀여운 꼬마였다. 학교는 안 가니? 라고 물으려다 말을 삼켰다. 저런 귀여운 꼬마가 있다면 의심받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일을 부탁할지도 모르는데 유능하다면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복장이 특이하시네요. 흥신소 하시면 잠복 같은 것도 하시고 그래야 하지 않나요?"

 잠시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예나가 물었다.

 "덕분에 이렇게 숙녀분과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점퍼 차림도 해봤습니다만 별로 효과가 좋지 않더군요. 위험해 보이거나 평범해 보이는 것보다야 이편이 효과적이죠."

 예나가 다시 한번 신사의 차림새를 돌아보았다. 살랑대는 연미복 꼬리와 지팡이 끝에 장식된 은색 해골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냥 취향인 것 같은데.'

 하지만 일만 잘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예나는 특이한 차림의 신사 일행과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에 앉았다.

 "애인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 같아요."

 예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하하. 마침 제가 그쪽 전문입니다. 여기 메뉴판을 봐주시겠습니까?"

 신사의 말에 꼬마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모를 메뉴판 하나를 예나에게 건네주었다. 해골 문양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검은색 메뉴판이었다.

 '취향이 맞네.'

 예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메뉴판을 살펴보았다.

 ***
1. 애인이 바람 핀 증거를 찾아 드립니다.
2. 애인이 바람 핀 상대가 바람나게 해드립니다.
3. 애인이 바람 핀 상대를 제거해 드립니다.
4. 애인을 제거해 드립니다.
5. 애인이 다시 본인을 뜨겁게 사랑하게 해드립니다.
6. 애인과 헤어지게 해드립니다.
***

 메뉴판을 살펴본 예나가 다시 신사를 바라보았다.

 "아. 이일도 오래 하다 보니 결국 원하시는 것은 이 6가지 중에 있더군요. 선택하시기 쉽도록 준비해 놓았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죠? 찾아가는 서비스. 하하."

 시선을 느낀 신사가 말했다. 옆에 꼬마가 지당하신 말씀, 이라고 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끄떡였다. 어느새 입가에 케이크를 묻히고서 그러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가능할까 싶은 것들이 많네요. 그런데 비용은 안 적혀 있네요?"

 예나는 다시 사랑하게 해준다나 바람 핀 상대가 바람나게 해준다는 것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읽어보며 성의 없이 물었다. 복장도 이상하더니 아무래도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았다.

 "하하. 비용. 항상 그게 문제죠. 흠. 이렇게 하시죠? 첫 거래니까. 1번을 서비스로 해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명확한 증거를 드리면 나머지 메뉴 중에 숙녀분이 정말 원하시는 일을 반드시 저희에게 맡겨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신사가 눈에 한가득 기대를 담고 말했다. 꼬마도 케이크를 먹다 말고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예나를 바라보았다.

 '길거리에서 영업하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간절해 보이는 것도 그렇고 내용도 이상하고... 괜히 잘못 걸린 거 아닌가? 하지만 서비스라... 어차피 조사는 할 거였으니까....'

 예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뜸을 들였다. 꼬마가 침을 꿀꺽 삼켰다.

 "증거를 찾아주시고, 비용이 제가 감당할 정도면 맡길게요."

 예나가 말했다.

 "크크크크.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증거를 찾아드리죠."

 신사가 괴이하게 웃었다. 정중한 말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져 있었다. 음침하고 위험해 보였다.

 신사가 테이블에 있던 휴지를 꺼내 물을 묻혔다. 그리고 물이 묻은 휴지를 뭉쳐서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시는... 헉!"

 예나가 깜짝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신사가 닦은 부분 너머로 영상이 보였다. 마치 TV 화면 위에 그려 놓은 나무 무늬 그림을 지우자 화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화면에는 예나의 애인이 예나의 친구와 벌거벗고 한참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점차 높아지는 소리에도 카페에 있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들리고,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크크크크."

 신사가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릴 때마다 화면에 나오는 모습을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 허공에서 푱푱 나타났다. 꼬마가 그 사진을 모아서 예나에게 전해 주었다. 꼬마도 아주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이걸로 증거는 충분하시죠?"

 "......"

 애인이 바람 피우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대상이 친구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 배신감과 신사가 일으킨 괴상한 현상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예나가 신사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긴장된 시선으로 신사를 살폈다.

 신사와 꼬마는 만찬을 앞두고 즐거워하는 육식 동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반짝였다.

 '이건 위험해.'

 민감한 예나의 감이 어느 때보다 맹렬히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당장은 바람 핀 애인도, 친구도, 이들의 정체도 지금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도망가야 했다.

 예나가 대꾸도 없이 재빨리 일어서서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화르르륵!

 "꺅!"

 예나 앞쪽으로 불의 벽이 일어났다. 불의 벽은 빠르게 번져 예나가 있던 테이블을 둥글게 감쌌다. 천장도 어두컴컴해졌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카페가 아닌 아예 다른 공간에 와 있었다.

 "이런. 이런. 저희에게 나머지 일을 맡긴다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여전히 테이블에 앉은 신사가 말했다. 꼬마가 짐짓 예나가 앉았던 의자를 빼주는 시늉을 하며 앉기를 재촉했다.

 "......대체 당신들은 뭐죠?"

 불을 벽과 의자를 번갈아 보던 예나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손이 떨려왔지만 다행히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는 막을을 수 있었다.

 "정당한 대가를 받고 소원을 들어주는 선량한 악마입니다. 전 후회의 악마, 이 친구는 조수죠. 잘 부탁드립니다. 고객님."

 신사와 꼬마가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느새 둘 다 연미복 꼬리 사이로 붉은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고 염소처럼 말린 뿔이 돋아나 있었다.

 "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이 될 때 맡긴다고 했어요."

 "아.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저희는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고 해드릴 테니 비용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다른 걸 받죠. 영혼같이 돈 들지 않는 것이요. 크크크크. 자 어서 앉으셔서 이야기를 마저 들으시죠."

 신사였던 악마가 말했다.

 "......서비스를 해주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이게 진짜인지 어떻게 믿죠? 하시는 걸 보니, 이거 환영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예나가 테이블을 가르키며 말했다. 예나가 가르킨 화면에서 애인과 친구가 나른한 여운을 즐기며 껴안고 있었다.

 "실시간이니까 전화라도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예나가 말없이 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화면 너머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안 받아?"

 친구가 말했다.

 "예나네. 어휴. 지겨워. 이따가 다시 하지 뭐. 자기랑 있는 시간 방해받고 싶지 않아."

 예나의 애인이었던 남자가 스마트 폰 화면을 슬쩍 보고 스마트 폰을 저만치 던져 버렸다.

 "그래. 그럼. 그런데 대체 언제 헤어질 거야?"

 "곧 헤어져야지. 그런데 그럼 애들 있을 때 너랑 만나기 좀 뭐해지는데 괜찮아?"

 "후후. 나야 자기만 있으면 되지. 다 꺼지라 그래!"

 "아유. 이 이쁜이. 어디 그사이 얼마나 더 예뻐졌는지 볼까?"

 "꺅! 간지러워."

 다시 불붙는 둘을 보며 예나가 통화 종료를 눌렀다. 하는 행동과 말투가 애인과 친구가 분명해 보였다.

 예나는 분노로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빨갛게 달궈진 돌을 삼킨 것 같았다.

 -톡

 악마가 테이블을 한번 두드리자 화면이 사라지고 다시 평범한 테이블이 되었다.

 "서비스는 확실히 해드렸습니다. 저희는 계약을 명확히 준수하니 그 점에서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크크. 게다가 무조건 영혼을 가져가는 것도 아니니 진정하시고 이야기를 더 들어보시죠?"

 "...그러죠."

 예나가 말했다. 더 이상 따지는 것은 의미 없어 보였다. 예나는 애인과 친구에 대한 분로를 애써 누르고 악마에게 집중했다.

 "크크. 침착한 태도가 좋군요. 아주 숙녀 다워요. 울고불고 하는 무례한 손님 덕분에 저희도 고충이 많았답니다. 손님 같은 숙녀분만 계시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크크. 사실 저희도 인정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방금 계약은 완전하지 않지요. 대가가 영혼인지 모르고 계약을 했다는 거 인정합니다. 비둘기 날개 달린 녀석들도 불완전 계약이다 함정계약이다 영 시끄러웠지요. 그래서 이제는 저희도 한 500년 전부터는 이 계약이 가계약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진짜 계약을 말씀드리죠. 일단 저희에게 일을 맡기기로 하신 것은 분명하니 메뉴판에 있는 2번부터 6번까지 중에 한 가지를 저희에게 맡겨 주세요."

 "그리고 영혼을 가져가는 건가요?"

 "후후. 아니요. 저는 후회의 악마입니다. 지금 선택을 하시고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 그 선택을 후회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습니다. 대신 잠깐이라도 후회를 하면 영혼을 가져가겠습니다. 아까와 달리 규칙이 명확한 승부지요."

 예나는 빙글거리는 악마를 바라보며 여전히 노려보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살아날 길이 있다! 하지만 후회를 하지 않으면 된다니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주 쉽지 않습니까? 2번부터 6번까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고 후회하시지 않으면 됩니다. 그럼 그냥 공짜 서비스를 받은 셈 치시면 되는 거죠."

 "...한가지라고 했지요?"

 "네. 이미 서비스를 한번 해드렸습니다만, 영혼도 하나. 소원도 하나죠. 저희가 일은 정말 완벽하게 합니다. 2번을 선택하시면 아까 그 신음 소리가 매력적인 친구분에게 이상형의 남자가 나타날 것입니다. 만나는 순간 사랑에 빠져서 바람을 피우게 될 것을 100% 보장하지요. 애인분도 사랑하는 사람이 바람피우면 얼마나 괴로운지 절절히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럼 3번이나 4번. 제거는요? 어떤 식으로 하지요?"

 "오! 크크크. 이거 정말 아주 취향이 훌륭하시군요. 갈수록 마음에 드는 고객님이시군요. 크크. 저희가 자신하는 메뉴입니다. 자살? 사고? 타살? 불치병? 뭐든 말만 하세요. 원하는 데로 해드립니다. 아주 깔끔하고 증거도 하나도 없지요. 크크크. 사실 최대의 고통을 원한다면 그냥 저희에게 알아서 하라고 맡겨주시면 됩니다. 기대하시는 것 이상으로 해결해 드리죠. 애인을 처리해 드릴까요? 친구를 처리해 드릴까요? 크크크. 아쉽게도 둘 모두는 안됩니다."

 악마가 흥에 겨워 콧노래를 부르듯이 말했다. 눈이 반짝거리는 게 이 일을 정말 즐기는 것이 보였다.

 "자신이 넘치시는군요."

 "크크크. 아무래도 경력이 경력이다 보니. 크크. 저희가 추천하는 것은 3번이나 4번이지만 나머지도 설명해 드려야겠죠. 바람 핀 애인이 다시 숙녀분을 사랑하게 만들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평생 한눈팔지 않고 열렬히 사랑하게 될 것을 약속하죠. 오직 우리 고객님을 볼 때만 행복에 관련된 호르몬들이 분비되게 만들어 드립니다. 그 남자에게 세상에 즐거운 것은 오직 고객님뿐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그저 밋밋하고 짜증 나는 일들뿐이겠죠. 음식도 고객님과 함께 먹을 때만 맛있고, 어떤 취미도 고객님과 함께해야만 즐거울 것입니다. 이성으로서 매력도 물론 고객님에게만 느껴지고요. 크크. 성적 쾌감? 그것도 물론이지요. 솔직히 완전 저희 적성에 맞는 일은 아닙니다만. 크크. 솔직히 이쪽도 재밌기는 합니다. 무슨 짓을 해도 배신하지 않는 노예를 가지고 싶다면 5번을 선택하세요."

 악마가 음침한 눈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꼬마도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아까의 귀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6번은 그냥 깔끔하고 단순하죠. 즉시 헤어지게 만들어 드립니다. 별로 힘든 일은 아니지만 의외로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기 힘들어하시는 분들도 많아서 이용하시는 분들도 가끔 있습니다. 어떤 걸로 고르시겠습니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네. 크크크. 중요한 결정이니 심사숙고하셔도 됩니다. 아! 크크. 선택을 돕기 위해 이전 고객님들의 예시를 보여 드리죠."

 악마가 다시 테이블을 휴지로 닦았다. 이번에 나타난 화면에는 낯선 남성이 보였다. 남자는 처참하게 죽은 여자 시체를 보고 있었다.

 "아니야. 이 정도까지 바란 건 아니었어. 헉!"

 남자의 눈앞에 꼬마 악마가 불쑥 나타나서 가슴 속에 양손을 박아넣었다가 뺐다. 가벼운 손놀림이었지만 꼬마 악마의 한 손에는 심장을 한 손에는 빛나는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꼬마 악마가 히죽 웃었다.

 거기서 화면이 끊기고 다른 화면으로 전환 되었다.

 "X새끼. 그렇게 잘 나간다고? 차라리 그때...꺅!"
 
 다음
 
 "그게 아니야. 어차피 넌 악마 때문에 억지로 날 좋아하고 있는 거야. 인형이랑 같이 사는 것 같아. 차라리 혼자...컥!"

 다음.

 "그놈이 바람피운 정도로 자살을 해? 그러면서 나를 버리고 바람을 피웠단 말이야? 바보야. 네가 그러면 내가 죽인 것 같잖아. 흑흑. 헉! 뭐야! 으아아악!"

 "에휴. 내 젊었을 적에 그놈을 놓치지 않았지만 지금 이렇게 살지는...으악!"

 다음. 다음. 다음. 다음.....

 -톡

 악마가 테이블을 두드려 화면을 테이블로 되돌렸다.

 "충분히 이해가 되셨나요? 참 쉽죠?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럼 후회할 일도 없죠. 다만 인간은 어중간한 생물이라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더군요.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하는데 말이죠. 우리 숙녀분께서는 어떨까 자못 궁금해지는군요. 평생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시면 됩니다. 크크크."

 예나는 약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 표정을 풀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의 최후가 너무나 비참했다. 예나의 시선이 꼬마 악마에게로 향했다. 처음엔 그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연미복을 차려입은 귀여운 꼬마였고, 뿔과 꼬리가 돋아난 후에도 제법 귀여운 구석이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끔찍한 괴물로 보였다.

 "크크크."

 꼬마 악마가 예나를 보며 낮게 웃었다. 혀를 살짝 핥는 모습에 소름이 끼친 예나가 눈을 돌렸다.

 '안돼. 정신 차려! 이예나. 지금 정신 차리지 않으면 죽어! 정신 차려야 해. 눈에 힘줘! 정신 차려!'

 예나는 흐트러지는 정신을 모아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 고객들의 말로들이 너무 비참했다. 다양한 선택을 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결국 모두 후회를 하고 말았다.

 벌을 줘서 후회하고, 벌을 주지 않아서 후회했다.

 헤어져서 후회를 하고 헤어지지 않아서 후회했다.

 단 한 순간의 후회. 아무리 조심해도 아주 잠깐. 문득 찾아오는 후회를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고민하던 예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가계약이라고 했죠? 제가 아무것도 선택 안 한다면요?"

 "영혼이 뺏길 일은 없지요. 하지만 저희에게 한가지는 반드시 맡긴다고 하셨으니까 선택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여기서요. 10년이고 100년이고 얼마든지요. 크크크."

 악마가 좌우로 두 팔을 펼쳐 보였다. 불의 벽이 여전히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

 예나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선택을 피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문제는 생각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한순간 방심하면 끝이다. 예시로 나온 화면 중에는 70은 되어보이는 할머니도 있었다.

 불현듯 찾아오는 이랬더라면 좋았을 텐데 같은 그런 짧은 후회도 안된다. 평생 단 한 점 후회도 남지 않는 선택이 되어야 했다.

 예나는 평생 이런 적이 있나 싶었을 정도로 집중했다.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을 스스로 물어보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해서 가슴 속 아주 깊숙이 있는 진짜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평생 사랑하겠다고 했지만 배신하고 바람을 피운 애인. 그리고 진짜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가장 절친했던 친구.

 예나는 자꾸만 아까의 둘이 함께하던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뭐지? 어떤 가식도 필요 없어. 어떻게 해야 후회를 하지 않지?'

 예나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악마와 꼬마 악마는 예의 있게 침묵을 지키며 기다려 주었다.

***
1. 애인이 바람 핀 증거를 찾아 드립니다.
2. 애인이 바람 핀 상대가 바람 나게 해드립니다.
3. 애인이 바람 핀 상대를 제거해 드립니다.
4. 애인을 제거해 드립니다.
5. 애인이 다시 본인을 뜨겁게 사랑하게 해드립니다.
6. 애인과 헤어지게 해드립니다.
***

 "후회 없는 선택..."

 예나가 중얼거렸다.

 "크크. 선택하셨습니까?"

 "네."

 "오! 정말 맘에 드는 고객님이시군요. 여기에서 굶어 죽기 직전까지 고민하시는 분들도 심심치 않게 있는데 이렇게 빨리 결정해 주시니 기쁘군요. 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원래라면 3번이나 4번을 선택하려고 했었어요."

 "...아쉽군요. 저희가 제일 자신 있는 분야인데요. 크.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 보시지요. 인간은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주며 고객님을 배신했던 자기 자신을 저주하며 죽어가게 해드릴 수 있어요. 그런 복수를 하지 않고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뇨. 처음엔 그럴 것 같았어요. 하지만 오히려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반드시 후회할 것 같아요. 살다가 가끔. 문득. 아! 그러지 말았어야지 할 것 같네요. 분명히 전 후회할 거예요."

 예나는 생명의 위기 속에서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던 진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내었다.

 어쩌면 이런 극적인 상황이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르는 가슴 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희미한 목소리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나는 여기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크으. 아쉽네요. 하지만 고객님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찾아가는 서비스. 선택 존중. 제 영업 신조이지요. 크크크. 그럼 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상대가 바람 피는 고통을 느끼게 해드릴까요? 고객님만을 바라보는 사랑의 노예로 만들어 드릴까요?"

 "아뇨. 그건 1초도 되지 않아서 후회할 거예요. 특히 날 배신한 사람과 함께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6번으로 하죠."

 "...뭐? 미쳤어?"

 가만히 있던 꼬마 악마가 깜짝 놀라 말했다.

 "크흠. 죄송합니다. 고객님. 아직 고객님이신데 예의 없게. 이놈!"

악마가 꼬마 악마를 쥐어박았다. 가볍게 치는 것 같은데 단번에 단번에 뿔이 부러지고 피가 튀었다.

 "켁! 죄송합니다."

 머리를 감싸 안은 꼬마 악마가 사과했다. 뿔이 단면에서 연기가 나며 금세 피가 멎고 조금씩 재생되어가는 것이 보였다.

" 흠. 악마가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항상 말하는데도. 크크. 그래도 저도 놀라긴 했습니다. 아무 벌도 주지 않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으십니까?

 악마의 말에 예나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신중한 선택이 필요했다.

 내가 정말 이것을 원하는가? 예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예나는 결정하면 뒤로 물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네. 깔끔하게 헤어지게 해주세요."

 "네. 후회 없는 선택이 되셨길 바랍니다."

 -딱!

 악마가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띠링

 그러자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그래.

 애인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그 위로는 예나가 보내지도 않은 '헤어지자.'라는 메시지가 이미 보내져 있었다. 참 쉬운 결말이었다.

 주위를 감싸던 불길이 사그라들고 유황 냄새도 씻은 듯 사려졌다. 어두운 하늘이 밝아지는가 싶더니 문득 카페에 돌아와 있었다. 악마들의 꼬리와 뿔도 사라졌고 신사와 꼬마가 검은색 연미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이제 가면 되나요?"

 "네. 부디 후회 없는 선택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고객님."

 "걱정 마시죠."

 예나는 둘을 흘겨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은 다짐을 한 듯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신사와 꼬마가 카페를 나서는 예나에게 깊게 허리를 숙여 정중히 배웅했다.

 "바보 같은 고객님이셨네요. 딱 봐도 누굴 참아주는 성격이 아니던데. 자기도 모르게 문득 찾아올 양심이 무서웠었나 봐요? 있는지도 모르는 양심보다 저 새끼를 족쳐야 했었는데 하는 후회가 훨씬 빨리 찾아올걸요.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꼬마가 말했다. 귀여운 얼굴을 하고도 멀어져 가는 예나를 깔보는 표정이 자연스러웠다.

 "아니야. 망했어. 오늘은 첫 손님부터 영 운이 안 좋네."

 "네? 정말요? 성인군자도 아니고 어떻게 바람피운 걸 그냥 참아 넘길 수 있어요?"

 꼬마 악마가 놀라 물었다.

 "아직 네겐 안보이나 보군. 너 같은 경우야. 훌륭한 고객님인 줄 알았는데 훌륭한 악마 후보생이었어. 우리에겐 헤어지는 것만 부탁하고 직접 둘을 처리할 결심을 했군."

 "아....."

 꼬마가 그제야 고개를 끄떡였다. 아쉬운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나중에 지옥에서 만나면 조수로 스카우트 제의를 해봐야겠어. 당찬 게 일 잘할 것 같던데."

 "아쉽지만 후배가 생기는 것도 좋죠. 오랜만에 옛날 생각나네요."

 꼬마 악마가 말했다. 200년 전 꼬마도 악마의 고객이었다.

 그때 둘 중 하나만 벌을 주었다면, 남은 한 명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봤다면 꼬마 악마는 분명히 후회했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남의 손에 그 둘의 처리를 맡겼다면 자기 손으로 복수하지 못한 것을 분명히 후회했었을 것이다. 모름지기 자기 손으로 이룬 일이야말로 진정한 보람을 주는 법이다. 꼬마 악마는 그 사실을 알고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한 예나에게 동질감과 호감이 생겼다.

 "저 잠깐 휴가 써도 되나요?"

 "뭐? 다음 고객님 찾아가야지. 왜?"

 "예비 후배인 데다 옛 생각이 나서 조금 도와줄까 해서요. 원래 초보들이 덤벙대잖아요. 안될까요? 네?"

 꼬마가 신사의 연미복 자락을 살짝 잡고 졸랐다.

 "...하긴 네가 휴가 가본 지도 100여년 만인가. 다녀와. 나도 맘에 들긴 했으니까. 장사가 안돼도 저런 꿈나무를 보는 건 흐뭇하지."

 신사가 콧수염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야호~!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꼬마는 신사의 맘이 변할세라 후다닥 카페를 나서서 골목 그림자에 들어서더니 주변 시선에서 벗어나자 녹아들 듯이 사라졌다.

 예나의 완전 범죄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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