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제: 『정저지와』
井底之蛙은 「우물 밑의 개구리」라는 뜻입니다. 흔히 말하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의 「견문이 좁고 세상 형편에 어두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거나 「견식이 좁아 저만 잘난 줄로 아는 사람」을 비꼬는 말이지만, 이 말도 사실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이 표현의 예문은 이렇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 세상을 모른다. 그가 일본 도처를 전전하며 보고 들은 경험을 유창한 말솜씨로 풀어먹으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바깥세상을 모르는 그 마을의 토박이 청장년들은 넋을 잃고 경청을 했다. 살다 보니 사람이 치사해지고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세상 보는 눈이 좁아지고 여러 가지로 김 형한테 부끄럽소.
이 말을 풀기 전에 우선 「제비나 참새가 어찌 기러기나 고니의 뜻을 알겠는가(연작燕雀안지安知공곡지지鴻鵠之志)?!」라는 말을 알아봅시다. 이 말은
사기라는 역사책의
진승이란 사람의 전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진승이 젊었을 때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고용되어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일용직 노동자 비슷한 사람이었습니다. "부귀해져도 서로 잊지 맙시다." 진승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니 이 말을 듣고 있던 사장님이 이렇게 비웃었다고 합니다. "너는 고용되어 밭을 가는데 어떻게 부귀해질 수 있겠니?" 진승이 한탄하며 한 말이 바로 연작안지공곡지지燕雀安知鴻鵠之志입니다. 이 말은 다시 「제비나 참새가 어찌 커다란 붕새의 뜻을 알겠는가(연작燕雀안지安知대붕지지大鵬之志)?!」로 바뀌어서 기억되기도 합니다.
연작안지대붕지지燕雀安知大鵬之志는
장자에 직접 나오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붕새는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새로 변한 것입니다. 원래는 작은 물고기라는데, 장자는 이 물고기의 크기가 몇 천리나 된다고 말합니다. 이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새로 변해 날아가는데, 물을 삼천리나 튀기고 하늘로 날아올라 구만리 높이까지 솟아오른다고 합니다. (역시 과장을 해도 이 정도까지는 해줘야 맛이 사는데...) 이렇게 솟아올라 여섯 달이 지나서야 크게 한번 숨을 쉰다고 합니다. 당연히 한번 날아오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미나 작은 비둘기가 붕새를 이해하지 못해 도대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비웃었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쉽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데 붕새는 얼마나 불편하냐고요. 장자는 다시 이 조그만 놈들을 안타까워하고요.
이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 진승의 말을 빌려와서 요약한 것이 아마 연작안지대붕지지燕雀安知大鵬之志일 것입니다. 진승은 나중에 진秦 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王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부귀해진 것인데, 비록 그 뒤에 전쟁이 패배해서 죽게 되지만 작은 밭에나 만족할 사장님과 비교하면 그래도 영웅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진승은 결국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말하자면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격인데, 무엇이 옳은지는 쉽게 말하기 힘듭니다.
장자의 추수秋水는 하백河伯(강물의 신)의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가을에 물이 불어 강이 물로 가득 찾습니다. 하백은 강물의 신이니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습니다. 이제 강물이 흐르고 흘러 드디어 바다에 이르렀습니다. 하백이 바다를 바라보니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백이 약若(바다의 신)을 보며, 자신이 그동안
공자나
백이처럼 흔히 위대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흔히 의롭다고 말하는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이 비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넓디 넓은 바다를 보게되니 그 비판하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깨알 같은
장자의 공자에 대한 디스 :-p .)
바다의 신이 강물의 신에게 이제야 너와 더불어 커다란 이치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시작하는 말이 『우물의 개구리에게(또는 개구리가) 바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은 사는 곳(또는 헛된 것)에 잡혀있기 때문이다(정와井鼃불가不可이어어해자以語於海者구어허야拘於虛也)』입니다. 그 뒤에 큰 것과 작은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바다의 신(실제로는 장자)의 주장이 이어집니다. 이 주장도 재미있습니다만,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개구리와 바다의 관계입니다. 바다의 신의 저 말은 문장구조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여러 개 문장을 겹치고 포개놓으면 저렇게 됩니다. 이런 것이 또 현대적 문장과 다른 고전 한문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이 문장에서 주어는 우물의 개구리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말하다의 목적어나 목적보어로 보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말을 풀어보면 이렇게 길게도 됩니다. 개구리와 바다(커다란 이치)에 대해 대화할 수 없다.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해줄 수 없다(불가不可). 개구리가 바다를 말할 수 없다(불가不可). 그러므로, 개구리와 바다에 대해 대화할 수 없다. 개구리와 바다에 대해 대화할 수 없는 것은 개구리가 사는 곳(허虛)에 잡혀있기 있기 때문이다. (허虛는 흔하게 쓰지는 않지만 거주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또, 허虛는 빈 틈이나 구멍의 뜻도 있고요. 개구리가 사는 우물井은 구멍입니다. 허虛는 뒤에 나온 글자인 허墟와도 통합니다. 허墟는 폐허나 언덕 또는 움푹 패인 땅을 뜻합니다. 개구리는 이런 움푹 패인 땅에 삽니다. 구덩이-감埳-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개구리가 구속되어 있는 것은 헛된 것(허虛)이다. 개구리는 헛된 것에 구속되면 안된다(불가不可). 이런 말들을 겹치고 포개놓으면 저렇게 됩니다. 아주 재미있죠.
바다의 신의 주장 이후로도 재미난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공손룡의 일을 빌려 감정지와埳井之鼃(구덩이와 우물에 사는 개구리)의 이야기를 합니다. 공손룡이 장자의 말을 듣고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위魏 나라의 모牟라는 공자(귀족의 아들; 장자와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물어봤다고 합니다. 위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고요. 『그대는 어찌 우물 구덩이의 개구리를 듣지 못했구나 라는 게요(자子독獨불문不聞부夫감정지와호埳井之鼃乎)?!
동해의 자라에게 일러 말하기를(위謂동해지별東海之鱉왈曰) 「우린 즐겁구나(오吾락여樂與)! 우린 우물 난간 위로 뛰어 올랐다가 깨진 벽돌 모서리에 들어와 쉰다네(오吾도량호정간지상跳梁乎井幹之上입휴호결추지애入休乎缺甃之崖)! 헤엄치자면 겨드랑이를 붙여 턱을 버티고 수렁을 차자면 발을 빠트려 발등이 잠기지(부수즉赴水則접액지이接腋持頤궐니즉蹶泥則몰족멸부沒足滅跗). 장구벌레나 게 같은 비슷한 놈들과 겨루어 돌아보면 우리 만한 놈이 없다네(환간해여과투還虷蟹與科斗막오능약야莫吾能若也). 우선 한 구렁의 물을 멋대로 하여 우물 구덩이를 우리 것으로 두는 즐거움이 이 또한 지극할 뿐(차且부夫천일학지수擅一壑之水이而고치감정지락跨跱埳井之樂차역지의此亦至矣)! 선생님이 어찌 아무 때나 와서 들어와 구경하지 않으시려오(부자夫子해奚불시래不時來입관호入觀乎)?!」
동해의 자라가 왼발을 아직 넣지 못했는데 오른쪽 무릎이 이미 끼어버렸다네(동해지별東海之鱉좌족미입左足未入이而우슬이칩의右膝已縶矣). 이러해서(어시於是) 우물쭈물 하다가 물러나서 그에게 바다를 알려 말하기를(준순이각逡巡而却고지해告之海왈曰 「천 리나 되는 먼 거리로도 그 커다람을 들추어내는 것이 부족하고 천 길이나 되는 긴 높이로도 그 깊음을 다다르는 것에 부족하다네(부夫천리지원千里之遠부족不足이거기대以擧其大천인지고千仞之高부족不足이극기심以極其深)! 우 임금님 때 십 년에 아홉 번 큰비가 왔지만 물이 더하여짐 이루지 않았고 탕 임금님 때 팔 년에 일곱 번 가물었지만 물의 가장자리가 줄어들음을 이루지 않았네(우지시禹之時십년구료十年九潦이而수水불위가익弗爲加益탕지시湯之時팔년칠한八年七旱이而애崖불위가손不爲加損). 잠시와 오래로 변화함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과 많음과 적음으로 머물고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 또한 동해의 커다란 즐거움이라네(부夫불위경구이추不爲頃久推移불이다소진퇴자不以多少進退者차역동해지대락야此亦東海之大樂也)!」
이러해서(어시於是) 우물 구덩이의 개구리가 이를 듣고 마침 뜻밖에 저절로 놀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얼이 빠져버렸다네(감정지와埳井之鼃문지聞之적적연適適然경驚규규연規規然자실야自失也).』
개구리와 자라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는 글입니다. 흔히 개구리 헤엄이라고 하죠?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수영하는 것. 개구리가 이렇게 헤엄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라는 느릿느릿합니다. 개구리가 사는 우물 구덩이에 들어가려다 무릎이 꽉 끼어서 우물쭈물 뒤로 물러납니다. 감정埳井을 우물 구덩이로 풀은 것은 개구리가 흔히 말하는 우물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물에서도 살고 연못이나 구덩이 같은 물이 고여있는 곳에서도 삽니다. 수렁의 진흙을 차는 모습에서 깨끗한 우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부夫는 모두 감탄형을 만드는 용도로 읽어 특별히 번역하지는 않았습니다. 가加는 다음의 일의 효과가 생긴다는 뜻으로 풀었고요.
환간해여과투還虷蟹與科斗에서 저는 여과與科와 투斗로 읽었지만, 다른 해석에서는 여與와 과두科斗로 읽었습니다. 발음부터 차이가 나죠? 두斗는 두 또는 투로 읽습니다. 저는 겨루다는 투斗로 읽은 것이고요, 과두科斗는 올챙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올챙이가 변해 개구리가 되는 것인데,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한다지만 그래도 올챙이보다 자기가 낫다고 자랑할 것까지야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구리와 비슷한 다른 놈들과 자신의 장점을 겨루어 생각해본 것으로 풀었습니다. 적적연適適然과 규규연規規然이 조금 문제인데, 다른 해석에는 적적適適과 규규規規가 모두 깜짝 놀라서(경驚) 얼이 빠진 모양(자실自失)이라고 합니다. 저는 조금 다르게 보는데, 개구리가 자라의 말을 듣고 반드시 깜짝 놀라야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구리가 놀란 것은 뜻밖의 일(적연適然; 우연偶然)이지 필연必然이 아닙니다. 뒤의 규규연規規然과 모양을 맞추고 뜻을 강조하기 위해 적적연適適然이라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규규연規規然도 그렇습니다. 개구리가 얼이 빠진 것은 잘 모르는 일에 대해 자질구레하게 얽매어(규규規規) 자기 자신을 읽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적적연適適然과 모양도 맞추고요.
물론, 큰 바다라는 자신을 압도하는 거대한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라고 얼이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본 적 없는 개구리가 어찌 바다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자라의 말을 듣고 그 경지를 헤아려보려다 알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은 지경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마치 공손룡이 장자의 말을 듣고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처럼. 공손룡이 장자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면 이런 지경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모두 알아듣고 자신이 여태까지 가졌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마음으로 인정할 수 있었어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고요. 이런 것들은 우연한 것이지 필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필연적으로 놀라야 한다면 그것을 다 알아들었다는 말과 비슷해집니다. 그렇다면, 놀라서 깨달음을 얻어야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위모의 말은 계속됩니다.
장자가 이야기꾼인지 장자의 제자가 이야기꾼인지 모르겠지만, 이 장자라는 책은 때론 판타지 소설 같다가 또 때론 장자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였다가 장자기 싫어하는 공자가 주인공일 때도 있고 이제 장자의 친구가 전하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위모는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따로 번역하지는 않고 이야기만 전하면 이렇습니다.
전국시대에 연燕 나라는 조趙 나라보다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나라였습니다. 지금도 잘 사는 나라에 자식을 유학 보내잖아요. 당시에도 그러했던 모양입니다. 연 나라의 시골인 수릉壽陵의 어떤 젊은이가 조 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한단에서 걸어다니는 것을 다 배우기 전에 수릉에서 걸어다니던 것을 잊어버렸답니다. 그래서,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갈 때 기어서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재미있나요? 요즘도 이런 것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한국말도 못 하고 미국말도 못 하는 사람. 말이야 어찌 눈치로 한다지만 제대로 된 글은 쓰지 못하는 사람.
위모는 공손룡이 장자를 이해할 깊이가 되지 않는다며 괜히 장자 근처에 어슬렁대다간 장자의 깊은 경지를 배우지도 못할 뿐 아니라 기존에 그가 가지고 있던 지식도 다 잃어버릴 것이라 합니다. 「정저지와井底之蛙(≒ 우물 안 개구리)」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를 떠올린 이유입니다. 사실 공손룡은 대단히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장자는 공자처럼 보통 사람은 건드릴 수도 없는 인물도 까대는 사람인데 그깟 공손룡이 무엇이라고 비웃지 않을까요? 즉, 이 이야기는 사실일 수도 있지만 소설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소설에서 공손룡은 장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위모의 말을 듣고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칩니다.
그렇게 도망칠 필요까지 있었을까요? 장자야 제 자랑하느라 그리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 일이 실제 벌어진 일이라면 도망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우는 것이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면 됩니다. 공손룡이 도망간 것은 어쩌면 장자(와 그 제자들)의 저 잘난척에 질려서 그랬을 수는 있습니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데요.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모른다고 쉽게 그 사람을 우물 안 개구리라 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요.
사실은, 오늘 다른 고사성어를 풀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것을 알게되어 이 정저지와井底之蛙로 급하게 바꿨습니다. 설날,
송구영신送舊迎新을 풀면서 「送舊年 迎新歲 動用不離光影內 澄輝湛湛夜堂寒 借問諸人會不會 若也會 增瑕纇 若不會 依前昧 與君指箇截流機 白雲更在青山外」을 도저히 번역해낼 수 없었습니다. 차문제인借問諸人회會불회不會는 '여러분께 물어보겠습니다, 모일까요 모이지 않을까요'정도의 뜻이 있습니다. 이건 알겠는데, 도데체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여서 공부하자는 말인지 법당도 춥고 그러니까 모이지 말자는 이야기인지. 그러다가 오늘, 학인불회學人不會라는 표현을 봤습니다. 역시 불교쪽 이야기인데, 스승이 어떤 말을 하니 그 대답이 학인불회입니다. 다시 어떤 말을 하니 또 학인불회라 답합니다. 이런 문답이 계속 이어지니 아무리 둔한 저라도 아, 이건 모르겠다는 말이구나 싶더군요. 그러고보니 저 윗 문장이 다시 보입니다. 모여서 공부할지 아니면 모이지 말지를 물어본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한 경지를 깨달았는지(만났는지) 아닌지 묻고 있구나.
새롭게 보니 또 다시 새롭습니다. 정저지와井底之蛙가 아직 바다를 보지는 못했지만 우물가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 같았습니다. 하여, 오늘은 정저지와를 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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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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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1. 제출한 표현은 읽는 법과 의미를 설명한다.예) 가화만사성 - 家和萬事成(집안이 화목하고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규칙2. 제시된 소리가 모두 들어간 표현을 만든다.예) 가화만사성 - 加禍謾詐盛(재앙을 더해 속임수가 왕성하다)
규칙3.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표현은 제출할 수 없다.예) 家和萬事成(X) 加禍謾詐盛(O)
규칙4. 제시된 소리의 순서는 바꿀 수 있다.예) 성사만화가 - 成事滿華家(화려함을 채우는 일에 성공한 집 또는 成事滿華于家로부터 집에 화려함을 채우는 일에 성공하였다)
예) 성사만화가 - 性事漫畫家... 다들 아실 것이라 믿고 설명은 생략합니다.
규칙5. 한자로 쓸 수 있어야 한다.예) 性事漫畫家(O) 性事畫家만(X)
규칙6. 고유명사는 다른 곳에서 인용할 수 있는 것을 쓴다. 단,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도 허용한다.
예) 사성만가화 - 師誠謾可化(사성이 가화를 속였다)에서
師誠은 조선 말기 승려(1836년생1910년몰)의 법명이고 可化는 1870년에 진사가 된 원숙교(1828년생)의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