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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humorstory_1343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스메★
추천 : 0
조회수 : 35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07/03/05 18:49:26
10.
그로부터 10일 정도가 흘렀고, 수호는 이제 미유코와 꽤나 가까워져 있었다. 같이 식사도
하고, 대화도 많이 했고, 놀러도 다녔다.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시진이는 다시 퇴원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그런 것은 신경쓰
이지 않았다. 다만 그 동안 연락하지 못해서 오빠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걱정하지는 않았을까? 바보...걱정했으면 나한테 전화해 봤었겠지. 참, 착각은 자유라더
니 이시진! 이 바보야...'
공부가 잘 되지 않아 대충 수업을 끝내고, 부랴부랴 가방을 들고, 수호가 있는 학교로 향
하였다. 수호의 학교로 갈 때는 거의 사복을 입고 갔었기 때문에, 모르긴 몰라도 그 학교
학생인 줄 알고, 마음에 품고 있는 남학생이 몇몇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또 지하철 사물함에 교복을 고이 넣어놓고 옷을 갈아입고 있다. 머리는 긴 생머리를 머리
핀으로 단정하게 모아서 어깨 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어깨 위로 조그마한 귀걸이가 반짝
거린다. 치마는 매끈한 다리선이 드러나는 청주름치마를 입고, 위에 입은 블라우스가 아
슬아슬하다.
정말 누가 봐도 반할만한 외모와 패션감각을 갖추고 있는 시진이.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
을 위한 것이다. 지하철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는 뭇 남정네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꼭 착각하는 사람들은 생기게 마련이다.
어김없이 사람이 많은 지하철을 타고 오빠가 다니는 학교를 향해 가는 시진이. 사람이 많
아서 부대끼고, 몸이 밀착될 수밖에 없는 상황은 항상 벌어지는 일이니 이해할 수밖에 없
다.
그러나 오늘처럼 나이 많은 아저씨가 그것도 변태같은 음향효과를 내뿜으며, 뒤에서 접근
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시진이다. 가까이 접근하자마자 예민한 시진이는 단번에 알
아챌 수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밀린 것인지, 의도적인 접근인지는 금방 알아챌 수가 있는 것이다. 주름진
치마를 자신의 몸으로 펴 보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찰싹 달라붙어서 열심히 몸과 손을
움직이는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아저씨.
'잘 걸렸다. 스트레스 좀 풀자.'
시진이는 잽싸게 오른발을 들었다가 사정없이 그 아저씨의 발등에 내리꽂았다. 시진이가
신고 있는 구두는 굽이 제법 뾰족해 보였다.
"아아아악."
"어머!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제가 그만 실수로..."
이렇게 말하는 시진이의 입가에는 장난스런 웃음이 가득 실려 있었다.
"읍...흠흠..."
신음 소리를 억지로 손으로 틀어막고서는 찔리는 게 있는 듯, 그냥 조용히 물러가는 아
저씨였다. 쉽게 물러나자 아쉬운 쪽은 시진이였다. 아마 그 아저씨가 되려 큰 소리를 쳤
다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줬을지도 모른다.
'그냥 가네. 그나저나 많이 아팠을 거다. 아마 멍쯤은 가볍게 들었을걸? 오늘 호신용 구
두를 신고 나오길 잘했네. 지하철은 참 위험한 교통수단이야..흐흐...'
시진이가 신고 있는 청록색 구두의 오른쪽 굽에는 쇠가 교묘하게 박혀 있었다. 뾰족하거
나 날카로워서 절창을 입힐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게 타박상을 제대로 입힐
수 있는 무기였다.
만족스러운 듯 자신의 구두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정해져 있다는 듯이 지하철에서 몸을
내렸다.
그렇게 학교를 향해 가는 시진이는 그 동안 갑갑하게 누워 있어서 굳었을지도 모를 몸을
풀려고 하는지 몸을 자꾸만 움직여줬다.
"아, 갑갑해 죽는 줄 알았네. 역시 몸은 움직여 줘야 돼."
지나가는 학생과 직장인들은 쫙 빠진 몸매의 여성이 그런 복장으로 몸을 자꾸 흔들어대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나 보다. 자꾸 힐끔힐끔거린다.
그런 남정네들을 신경 쓰는지, 안 쓰는지 앞만 보고 걷고 있다. 아마 생각도 한 가지로
통일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입구를 지나서 근 10일만에 보는 수호에 대한 기대감과 부푼 마음을 안고, 또각또
각 걷고 있다. 보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확 껴안아버리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때
마침 수호는 미유코와 밖으로 나가려고 내려오고 있다.
"미유코, 또 한국에 대해서 궁금한 것 없어?"
"음, 뭘 좀 알아야 궁금한 게 생길 텐데. 너무 아는 게 없어서...그냥 수호군이 보여주고
싶은 거 보여주면 그게 가장 한국적인 게 되지 않을까?"
"그래? 좋아 내가 오늘은 특별하게 모시지. 기대하라고."
"응."
고개를 끄덕이는 미유코를 확 껴안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진땀을 빼는 수호의
눈에는 오늘따라 너무너무 예뻐보였다.
그런 두 사람을 발견한 시진이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옆길로 황급히
몸을 옮겼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그냥 단순히 친구나 선ㆍ후배일 수도 있는 건데 도대체 왜 숨은
거야? 게다가 이건 내 스타일이 아냐.'
다시 급히 길가로 나온 시진이. 그러나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수호를 평소에 잘 아는 사람이라면, 수호가
여자랑 저렇게 같이 다니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미유코의 미모도 한 몫
했으리라.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수호와 미유코를 향해서 당당히 걸어갔다. 그리고는 우연치 않게
본 것처럼 너스레를 떨며 인사를 건넨다.
"오빠! 어머 옆에 여자는 누구셔?"
"어? 시...시진아? 어떻게 된 거야? 이 시간엔 어쩐 일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수호를 보자, 시진이는 더욱더 불안해졌다. 하지만 화를 낼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기 혼자 시작하고, 자기 혼자 좋아하고 있는 단계
였다. 수호가 하는 일에 끼어들어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했다.
그것이 시진이를 더욱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되게 오랜만인 것 같다."
수호는 시진이가 입원한 사실을 모른다는 듯, 짐짓 모른 척 했다. 옆에서 미유코도 같이
들은 이름이었지만, 타국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을 한 번만 듣고 외울 정도로 천재적일 수
는 없었다. 다행히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다.
"누구야?"
답답했던지 미유코가 먼저 물어왔다.
"어? 아...내가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야. 그리고 이쪽은 내 일본인 친구 미유코...서...
서로 인사해."
수호는 서서히 머릿속으로 안정을 되찾아가며 말하고 있었지만, 당황스러운 상황과 말이
계속되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수호 입장에서 시진이가 친한 동생이라는 것과 미유코가
일본인 친구라는 것은 거짓말도 아닐 뿐더러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왠지 말하고 있는 수
호는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미유코는 특유의 살가운 웃음을 흘리며, 시진이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누구에게나 친
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예. 아...안녕하세요...한국말 잘하시네요?"
"네. 한국어학과라서요."
냉소적인 인사를 건넨 시진이는 수호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건넸다.
"오빠! 나 오늘 어때? 근사하지 않아? 오늘 오랜만에 오빠랑 놀려고 잔뜩 꾸미고 나왔는
데..."
"시진아 그...미안하다. 오늘은 이 친구랑 선약이 되어 있어서...다음에 놀면 안 될까?"
수호는 계속 코너에 몰려 있는 느낌이다.
"그래? 그럼 하는 수 없지. 그럼 다음에는 꼭이야."
'단순한 친구라...오빠가 여자를 친구로 두는 걸 본 적이 없었어. 뭔가 불안해...게다가
일본이라니. 방학 때 가서 만났다는 건가? 그렇다고 한국에까지 왔을 리는 없고. 훗 아
마도 오빠가 말하는 운명이란 것을 만난 건가?'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자리에 앉아 한참을 생각하고 있다.
'이제 오빠의 운명과 맞서 싸워야 하는 건가? 아 너무 힘드네. 자신이 없어."
시진이가 자신 없어 하는 것이 비단 운명의 탓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시진이의 눈에 들
어온 미유코는 같은 여자로서 샘이 날만큼 이뻤다. 청순가련하게 생겼고, 보호본능을 자
극하는 특유의 일본인의 냄새를 풍겼다.
'게다가 오빠가 말했던 그 콘셉트...긴 생머리에 인형같이 생긴...정말 기가 막힐 정도
로 딱 들어맞아. 재미있어지네..."
"이야, 되게 예쁘다."
"그...그래?"
"저렇게 예쁜 동생도 알고 있었어? 진작에 소개시켜주지. 난 예쁜 여자가 좋더라."
"취향 독특하네. 설마 여자를 좋아하는 건?"
"닥치세요."
"헉...너 욕은 언제 배웠냐?"
"너가 친구랑 말하는 거 들었어."
"미안."
안 좋은 건 뭐든지 빨리 배우기 마련이다. 거리를 걸으며 미유코는 시진이에 대해 말하
고 있었다.
오늘은 수호에게 특별한 날이 될 예정이었다. 드디어 미유코에게 고백을 하기로 한 것이
다. 미유코가 언제까지고 한국에 머무를 것도 아니었기에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서
두를 필요가 있었다.
하필 오늘 만난 시진이가 눈에 밟히긴 했지만, 그래도 감행하기로 했다. 자신의 감정에
일단은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 대학로에서 소규모 콘서트를 보고, 근사한 분위기의 레스
토랑은 아니지만 다분히 한국적인 음식인 불닭을 먹으러 갔다.
"뭐 먹으러 온 거야?"
"응. 닭."
"닭? 닭은 일본에도 많은데..."
"훗. 그런 거랑 차원이 다를걸? 한국에서밖에 맛 볼 수 없는 맛을 보게 될 테니까."
"그래? 기대해도 되는 거지?"
약간은 골탕먹이는 심보지만, 그래서인지 더 수호는 즐거운 심정으로 음식이 나오기를 기
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음식이 나오고 미유코의 눈의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도 빨갛게 나
와서 처음 먹어보는 사람이 봐도 너무 맵게 보였다.
"이거 매운 거 아냐? 나 매운 거 잘 못 먹는데..."
"아냐. 매콤하긴 해도 맛있어."
"매콤하다는 게 뭐야?
"에, 그러니까 매콤하다라는 것은 어느 정도 맵고 고소하다정도랄까?"
"그래? 맛있겠다. 먹자."
그렇게 한 입을 떠서 입에 넣은 순간 미유코의 동공이 커지고, 심동박수가 증가하는 것이
느껴졌다. 미유코는 기겁을 했다.
"으악! 매워."
미유코는 눈물을 글썽이며 매워했고, 결국 닭을 물에 하나하나 헹궈서 먹을 수밖에 없었
다.
"잉, 수호군 나빴어. 그렇게 매운 걸 맵지 않다고 하다니..."
"아하하, 미안미안. 너가 그렇게 매워할 줄 몰랐어."
그렇게 매워하고 앙탈부리는 미유코가 수호의 눈에는 한없이 사랑스럽고, 귀엽게만 느껴
졌다. 이미 수호는 미유코에게 푹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쨌든 오늘 즐거웠어."
"아직 그렇게 즐거워하기는 이르지. 오늘의 하이라이트!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여줄 게
남았는데."
"뭔데?"
미유코는 눈을 초롱거리며 수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후훗. 잠깐만..."
그때 둘이 서 있는 바로 옆에 있던 가로수가 갑자기 환하게 불이 켜졌다. 크리스마스도
아닌 날에 갑작스럽게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전구들에 불이 들어온 것이다. 나뭇
가지만 앙상한 나무에 전구가 매달려 있는 모양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이제 가을로
접어드는 시점이라 나뭇잎이 많이 달려 있는 나무는 나뭇잎 사이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이
흡사 멋진 무대 조명을 연상케 했다.
미유코는 놀란 눈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지만 전구가 매달려 있는 곳도, 불이 들어온
곳도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유일했다.
갑자기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서기 시작했다. 모두 전구 불빛이 환한 곳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본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하는 눈초리다.
"어...어떻게 된 거야?"
수호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준비해둔 장미꽃 백송이를 앞으로 내밀며 멋진 멘트를 날렸
다.
"이게 오늘의 하이라이트. 가장 한국적인 이벤트 고백이야. 나랑 사귀어줄래?"
"뭐?! 나랑? 사귀자고?"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던 미유코의 의외의 반응에 수호는 침을 꿀꺽 삼켰
다. 어차피 결과에 상관없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어느 새 주위에는 구경꾼들이 꽤 몰려들었고, 다들 박수를 치면서 외치기 시작했다.
"와아, 와 받아라! 받아라!"
이제 미유코의 답변만이 남아 있었다. 수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훗 그래? 좋아."
"저...정말?"
"단, 조건이 있어."
"조...조건이라니 무슨 조건?"
수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랑 사귀고 싶으면 날 이겨야 돼."
"이기다니? 어떤 걸로?"
수호는 승부라면 자신 있었다. 공부라면 공부, 운동이라면 운동, 게임이라면 게임 이런
것들은 승부사적 기질을 타고난 수호에게는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고 생각
했다.
그것보다는 도대체 미유코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게임을 즐겨보려는 건
지 알 수 없었다.
"싸움으로."
"싸움? 뭘로 싸우는 건데? 종목이 뭐야?"
설마하는 생각으로 수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뭐긴? 주먹으로 싸우는 거 말야. 맞짱...맞나?"
"뭐?"
'얘가 한국말을 잘 몰라서 다른 것을 잘못 알고 말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네 말은 치고박고 싸우는 그거 말하는 거지? 다칠 수도 있고 피나고 그거?"
"웅."
주위 사람들은 미유코의 어색한 발음과 발설한 말에 의아해하며 웅성대고 있었다. 그 사
람들 틈 사이에서 시원이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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