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也靑靑은「홀로 푸르르다」는 뜻입니다. 남들이 모두 절개를 꺾는 상황에 홀로 절개를 굳세게 지키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고요. 오늘도 날씨가 춥니다. 추워서 견딜 수 없군요. 으슬으슬 감기가 오려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제처럼 오늘도 추위에 관한 표현(그런가?)을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제도 추위에 관한 표현이라더니 엉뚱한 말을 했잖아요!) 아아... 진정, 진정. 오늘 표현은 쉬워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라니까요. 설명도 그리 필요 없을 거로 생각하는데요.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대한민국에서 학교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성삼문의 시조입니다. 흰 눈(백설白雪)이 하늘 땅(건곤乾坤)을 가득 채울(만滿) 때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 봐요. 얼마나 추운지. 이 높은 산 위에서 박대기 기자처럼 눈을 맞아봐요. 추워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추운 날에도 소나무는 푸릅니다. 온 세상이 하얗기에 그 푸름이 눈에 귀합니다.
이렇듯 소나무는 바람과 서리에도 변하지 않음으로 중요한 상징이 됩니다. 역시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을 우리의 노래에도 이 상징이 나옵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이러한 상징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을까? 사람이 자연을 관찰하면서부터 자연스레 쓰기 시작하지 않았을까요? 오래된 기록을 보자면 공자가 한 말이 있습니다. 『세월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된다(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세한歲寒은 설 전후의 추위 또는 몹시 추운 한 겨울의 추위를 뜻하는 말 입니다. 여기서 세월이 추워진다고 풀었습니다. 후조後彫는 후조後凋입니다. 가끔 옛글을 보면 지금 쓰는 글자와 다른 글자를 씁니다. 예를 들어 농단은 한자로 壟斷이라고 씁니다만 농단의 출처인 맹자에는 룡단龍斷이라고 되어있습니다. 한자도 새로운 글자가 자꾸 나와서 예전에 그 글자가 없었던 때 글을 보면 혼동이 될 수가 있습니다. 후조後凋는 늦게 시든다는 말 입니다. 다른 것들이 모두 시든 후에도 시들지 않는다는 뜻이죠.
공자의 세한연후歲寒然後지송백지후조야知松柏之後彫也란 말은 대단히 유명한 말 입니다. 위의 그림은 추사秋史(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입니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그린 그림이죠. 그림 자체는 단순합니다. (이것이 잘 그린 그림인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그리고 집을 그려놓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도 표면적으로는 대단히 단순합니다.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이후에도 제자가 잊지 않고 잘 돌봐준 것이 고마워서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닙니다.
추사의 제자(이상득; 중국어 통역관)는 지극정성으로 추사를 돌봤습니다. 중국에 갈 때마다 값비싼 중국 서책을 사 와서 선물하기도 하고 이 그림을 받은 후에는 중국에 가져가 유명한 사람들에게 보여줬습니다. (이 그림에는 당시 유명한 사람들의 감상문이 붙어있습니다.) 추사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림을 그린 종이도 일부러 작은 종이를 이어붙여서 빈곤함을 나타내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럼, 왜 그 유명한 사람들이 이 그림을 그렇게 칭찬했는가? 추사가 원래 유명한 사람이었던 면도 있지만, 이 그림이 상징을 잘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사의 당시 어려운 상황과 이 그림의 제목 그리고 단출하게 처리한 기법이 알만한 사람이면 무엇을 말하려는지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고요.
이 그림을 지금 사람들이 앰네스티에 탄원서를 보내는 것처럼 당시의 정치가가 외국에 자신의 처지를 알리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단순한 탄원서라면 감상문이 그렇게 길었을까?) 이 그림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제 다른분의 시를 감상하며 때론 글 쓰는 사람이 치사해지기도 한다는 댓글을 썼습니다. 글의 재료가 되는 것에 자신의 경험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경험이 글로 되어 나올 때, 그것이 조금이라도 기뿐 마음이 들 때, 참 구차하고 치사하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글은 그 글을 쓴 사람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글은 좋은데 삶이 그렇지 않다면 때론 그 사람의 글을 버리고 싶은 마음조차 듭니다. 버리기 힘든 사람이라도 칭찬하고 싶어지진 않죠. 육당六堂(최남선) 같은 사람도 참 글이 좋습니다. 추사의 이 그림은 겉은 그림이지만 속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징을 알게되면 감탄하고 감상문을 붙여주고 싶어지겠죠.
다시 독야청청獨也靑靑으로 돌아와서, 독야청청과 비슷한 표현으로 「동하청청冬夏靑靑(언제나 푸르르다)」이 있습니다. 독야청청을 조사하며 비슷한 표현을 찾아봤는데, 제가 과문寡聞(들은 것이 적다; 아는 것이 적다)해서 그런지 동하청청을 지적하는 글이 없더군요. 동하冬夏는 겨울과 여름입니다. 그래서, 언제나란 뜻을 가집니다. 이 말은 장자라는 사람이 쓴 글에 나옵니다. 장자가 마치 공자가 이런 말을 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땅에서 생명을 받은(수명어지受命於地) 것에 오로지 소나무와 측백나무만 홀로 올바르니(유송백독야정唯松柏獨也正) 겨울과 여름에 푸르르다(재동하청청在冬夏靑靑).』
독야정獨也正과 독야청청獨也靑靑은 같은 문장 구조입니다. 유송백독야정唯松柏獨也正재동하청청在冬夏靑靑은 세한연후歲寒然後지송백지후조야知松柏之後彫也와 통하고요. 성삼문도 장자를 읽었을 테니 혹시 영향을 받은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조심스럽게 듭니다. (독야재동하청청獨也在冬夏靑靑으로 正이 빠진 사본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 글에서 말하는 인물은 목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뭔가 공통점이 많은 것 같은데 어쩌면 너무도 당연해서 국어과에서 지적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네요. (괜히 설레발치는 건가?)
암튼, 날씨가 추워서 세한歲寒 (아! 실수. 세한이 아니라) 독야청청獨也靑靑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규칙1. 제출한 표현은 읽는 법과 의미를 설명한다. 예) 가화만사성 - 家和萬事成(집안이 화목하고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규칙2. 제시된 소리가 모두 들어간 표현을 만든다. 예) 가화만사성 - 加禍謾詐盛(재앙을 더해 속임수가 왕성하다)
규칙3.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표현은 제출할 수 없다. 예) 家和萬事成(X) 加禍謾詐盛(O)
규칙4. 제시된 소리의 순서는 바꿀 수 있다. 예) 성사만화가 - 成事滿華家(화려함을 채우는 일에 성공한 집 또는 成事滿華于家로부터 집에 화려함을 채우는 일에 성공하였다) 예) 성사만화가 - 性事漫畫家... 다들 아실 것이라 믿고 설명은 생략합니다.
규칙5. 한자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예) 性事漫畫家(O) 性事畫家만(X)
규칙6. 고유명사는 다른 곳에서 인용할 수 있는 것을 쓴다. 단,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도 허용한다. 예) 사성만가화 - 師誠謾可化(사성이 가화를 속였다)에서 師誠은 조선 말기 승려(1836년생1910년몰)의 법명이고 可化는 1870년에 진사가 된 원숙교(1828년생)의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