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글을 쓸 때 겪는 어려움 중 한 가지는 분량입니다. 단편 기준인 200자 원고지 기준 80매를 채워야 하는데, 완성도를 높이기가 어렵다는 느낌입니다.
엽편을 쓰는 능력은 얼추 늘어가고 있는데 단편은 어렵기만 하네요.
그런 의미에서 여태껏 써온 조각글ㅡ엽편을 빙자한ㅡ의 일부를 올려봅니다.
언젠가 단편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1. 메롱
아버지가 달아났다. 가상화폐가 몰락하고 있던 해였다. 사람들은 모두 '가자'를 변형시킨 '가즈아'를 연호했다. 아버지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돈의 맛을 보았기 때문에 투자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열렬한 연호에도 무색하고 가상화폐는 종국으로 치달았다. 농담처럼 떠돌던 가즈아가 끔찍한 희극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패한 사람들의 연호가 이어졌다. 한강으로 가즈아, 교통사고 가즈아, 장기매매 가즈아, 그런 우스갯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결국 지갑의 몰락이었다. 지갑의 몰락은 곧 가정의 몰락을 의미했으므로 아버지는 비교적 발 빠르게 대처했다. 대처 방안 중 한 가지는 아들을 계단에서 버리는 것이었다. 오래된 아파트의 입구로 아들을 인도한 아버지는 말했다. 신발 끈을 묶기에는 계단이 좋지. 아들이 신발 끈을 묶는 동안 아버지는 달아났다. 얄팍한 양심에서, 두꺼운 삶에서.
2. 제목없음
철이 들 무렵에는 시계를 차고 다녔다.
시간 약속이 중요하다는 고상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허세였다. 아버지는 말했다. 세상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건 허세라고. 아버지는 허세로 시계를 차고 허세로 차를 몰았다. 그 허세 덕에 아버지는 남의 등을 쳐먹을 수 있었다. 사기꾼이었던 아버지는 집에서는 겸손했다. 그 못브이 몹시 지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시계를 찼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허세를 부리지 않은 건 술이었다. 아버지는 인간은 술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술에 절어서 집으로 돌아온 날, 아버지는 경찰서 신세를 졌다. 아버지에게 사기를 당한 남자 한 명이 목숨을 끊었다고 햇다. 아버지는 교도소에 들어가면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었다. 시계도 차도 밖에 둔 채였다. 아버지가 아끼던 허세조차도 교도소까지 들고 갈 수는 없었다.
3. 제이의 연애사업
"이봐, 멍청이."
형사인 제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멍청이는 인상을 푹 쓰면서 대답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멍청아."
"너랑은 경우가 다르지."
제이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러면서 뒷좌석에서 모자를 꺼내 눌러썼다. 경찰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멍청이, 이에자와는 선글라스를 비스듬하게 내린 다음 중얼거렸다.
"준비는 다 됐겠지?"
"물론이지."
이에자와가 말한 준비란 개념이었다. 요즘 시대에는 얼마나 착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형사라도 예외는 아니었고 멍청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자와는 불신에 가득찬 목소리로 물었다.
"복장은?"
"방금 뽑은 턱시도."
"수염은?"
"당연히 밀었지. 쉐이빙 크림도 써서."
"흠."
두 사람의 연애 사업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정확히는 완전히 실패였다. 제이는 이에자와가 멍청하다는 것을 이유로 꼽았고, 이에자와는 제이가 개념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꼽았다. 소개팅에 실패한 지 딱 한 달 만에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너야말로 공부는 해왔겠지?"
"물론. 각 나라의 수도 정도는 완전히."
이에자와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딱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보다 말이야. 같은 경찰인데 숨을 필요가 있나?"
"경찰이니까 숨는 거지. 소개팅이 불법인 건 경찰에게도 적용이 되니까. 그리고 엄연히 말하면 경찰과 형사는 달라."
"엑셀이나 밟아."
이에자와가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제이는 인상을 구기고 차를 몰아 시 외곽으로 빠졌다. 슬슬 석양이 지고 있었다. 이런 시간대에 소개팅을 잡은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았다. 잘만 하면 첫 날에 모텔까지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리라. 같은 생각인지 기분이 좋아진 이에자와가 흥얼거렸다.
"후훗. 너와 오늘밤 성. 공. 적."
제이는 애써 이에자와를 무시하며 가속페달을 꾹 밟았다.
4. 하루키
인생이 즐겁지 않다는 것쯤, 하루키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우선 별명부터가 그랬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자위하는 것을 들킨 이후 하루키의 별명은 하루키가 되었다. 정액을 뿜어냈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루키는 마지못해 별명을 받아들였다. 다소 문학적이라는 점에서는 때때로 괜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위남’ 같은 노골적인 별명보다는 훨씬 나은 축에 속했다. 어쨌거나 일상의 범주 안에 둘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일상의 범주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됐다. 따돌림이나 폭력도 일상의 한 부분이라고 하면 용서할 만했다. 바라는 일만 일어나길 기도할 정도로 하루키는 무르지 않았다. 하루키가 입고 있던 팬티가 강제로 찢겨서 교실에 날아다닐 때도 침착했다. 일상의 범주에 있어서 평온했던 하루키가 무너지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