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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노출 논란, 인문학으로 읽기(후방주의/장문주의)
게시물ID : star_3080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인정투쟁
추천 : 14
조회수 : 2659회
댓글수 : 49개
등록시간 : 2015/07/24 12:5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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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저께 <벗는 스텔라가 문제라고?>라는 기사를 한 편 쓰고, 오유에 공유했더니 많은 의견들을 주셨더군요. 감사한 마음으로, 댓글을 하나하나 다 읽어봤답니다.
 
기사 내용은 최근 걸그룹의 경쟁적 노출 논란을 스텔라를 예시로 들어서 풀어보는 것이었습니다.
 
① 언론의 탐욕, 노출 일면만 부각시켜 논란만 재생산하는 행태 비판
② '벗는 개인'이 아닌, '벗기는 구조'를 간파하는 시선 강조
③ 잘못된 구조에 저항할 수 있는 강한 팬덤 형성의 필요성
 
이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됩니다. 그러나 기사 특성 상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없고, 제가 미숙해 오해를 불러 일으킨 부분도 있어 이렇게 글을 추가합니다(일종의 애프터 서비스랄까요).
 
저는 기본적으로 걸그룹 노출 논란을 좀 이질적인 각도에서 분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선배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인정투쟁과 부르디외.jpg
 
왼쪽에 있는 <인정투쟁>은 독일 비판이론 3세대 철학자 악셀 호네트(A. Honneth)의 책입니다. 비판이론은 초기엔 맑스주의 입장에 서있다가, 2차 대전과 냉전을 겪으면서 맑스주의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되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해, 독창적인 사회비판이론을 개척했습니다.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하버마스 등 세계적인 철학자들을 배출했고, 지금도 사회학이나 미학 전문가들에게 많이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 편, 오른쪽에 있는 <구별짓기>는 프랑스 최고 학술기관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 교수였던 피에르 부르디외(P. Bourdieu)의 책입니다. 부르디외는 사회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리기 급급하고, '이게 다 노오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식의 일베 논리를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논적들은 신자유주의자들이고, 이에 대항해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 구조의 영향력을 강조합니다. 부르디외도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긴 하는데, 아시다시피 맑스주의가 물질적 생산 토대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면... 부르디외는 '문화'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문화를 자생적으로 생산할 수 있어야만 사회 구조를 진보시켜나갈 수 있다고 생각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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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존재한다" ―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
 
다시 호네트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혹시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십니까? 권위주의 산업화 박정희 시대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신 분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호네트가 말하는, 사회를 진보시켜나가는 인간상입니다. 몸에 시너를 끼얹고 자신을 산화시킬 정도로, 인간은 동물과 다른 차원의 무엇이 있다는 점입니다.
 
동물은 자기보존욕구(생존욕/식욕/성욕/수면욕 등) 만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이것들을 거스를 수도 있다는 거죠. 호네트는 바로 이 존엄성을 무시 당할 때 오는 울분이 사회 진보의 동력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엄연히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에서(현존성 인정), 또 동등한 인격을 갖췄다는 점에서(동등성 인정), 각자 고유한 정체성을 가졌다는 점에서(특수성 인정) '인정 받아야할 존재'이며, 또 그것을 지향하는 '인정 욕구'가 있다고 봤습니다. 이 인정을 확대시켜나가는 노력, 즉 저항을 그는 인정투쟁이라고 봤습니다. 그에게 도덕적인 사회는 진보적이어야 하며, 진보적인 사회는 도덕적이어야 하는 셈입니다.
 
가영.jpg
 
스텔라 가영이
 
제가 스텔라의 노출을 옹호하는 건, 바로 이 윤리적인 이유에서 입니다. 대중들의 익숙하지 않은 눈에는 스텔라의 노출이, 잘못된 마케팅 전략적 선택에 의한 '노오력이 부족한 죄(실제로 네이버 댓글에서 봤던 말)' 정도로만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걸 마케팅 측면에서 보질 않고, 윤리적 측면에서 보려고 해봤습니다. 언론은 단지 마케팅 측면만 부각해 실시간 검색어를 만들고, 클릭을 유도하며, 광고 수익에 음흉한 미소를 짓는 것입니다.
 
앞에서 두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겠습니다. 사회의 도덕적 진보를 이루려면, '인정투쟁(저항)'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투쟁은 현실사회의 왜곡된 '구조'를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구조는 이 사회의 지배권력(여기서는 언론과 연예 시장)이 재생산하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소비자로만 머무르지 않고 자생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을 때 저항할 수 있습니다.
 
결국 스텔라를 옹호하는 이유는 스텔라가 단순히 불쌍해서만도 아니고, 하필 꼭 '스텔라'의 팬카페에 가입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대중들의 선택입니다. 단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스텔라 뿐 아니라 걸그룹 전반의 노출을 자꾸 마케팅적인 측면에서만 해석하는 습관과, 이를 부추기는 언론의 교활함에 넘어가지 말아주셨으면 한다는 점입니다. 사회 진보는 항상 '다르게 생각하기'에서 온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벤야민이라는 철학자도, 나쁜 정치가 예술의 탈을 쓰고 등장하는 것에 저항해, 예술이 좋은 정치로 등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요. 그래서 "정치의 심미화, 예술의 정치화"를 말했습니다. 저는 스텔라가 싱글을 내면서, '예술의 정치화' 경향이 점점 짙어져간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래서 스텔라를 지지합니다. 이제 스텔라의 뮤비를 좀 해설해 보면서 이야기할까요?
 
 
 
보다시피 초반 두 싱글(로켓걸/UFO)은 망테크를 탄 작품들입니다. 별들의(스텔라, Stellar) 세계에 '로켓걸'처럼 출격해, 'UFO'처럼 호기심을 끌겠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좋았습니다. 스타의 삶이 팬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아 생명력을 얻는 방식이라면, 자신들의 인정욕구를 드러내는 건 당연하고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윤리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가?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마케팅적인 면이나 퍼포먼스에서는 냉정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막 데뷔한 스타가 꼭 성공해야 하는 건 아니죠. 항상 문제는 걸그룹의 인정투쟁에 편승하는, 소속사의 상업적 욕구라는 변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소속사 대표의 경제적 어려움일 것입니다. 스텔라의 소속사 대표 최모씨가 10억 짜리 전세에 살다가 스텔라 한 번 띄워 보는 걸 숙원으로 삼고, 돈 거의 다쓰고 월세로 옮겼다는 뉴스가 2013년에 보도됐습니다. 이미 대기업화 된 경쟁 소속사들(SM/JYP) 사이에서, 영세한 중소 규모 소속사들이 살아남기 힘든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이 시장 독점 구조에 저항할 필요가 있다는 봅니다.
 
일단 스텔라는 초반에는 2NE1같은 좀 '센 척'하는 느낌의 펑키함이 남아 있었는데, 이게 츤데레로 바뀝니다.
 
 
마치 팬들과 썸타는 듯하며, 츤데레하게 굴며 세 번째 싱글부터 자신들의 마음을 공부 "해보겠니?' 하고 물어봅니다. 정중한 제안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후반부 가사가 중요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스텔라의 철학이 태동할 가능성을 봅니다. 이렇게 애교를 부리든 말든, "사실 처음부터 난 니꺼야"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팬들이 인정을 안 해줘도, 우리는 팬들을 멀리서 사랑하겠다는 말입니다. 일종의 자기 신념이자, 짝사랑 같은 거죠.
 
만약, 우리를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우리는 얼마든지 연락을 받을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습니다. 팬들이 연락을 안 받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음원을 구매하지도 않고 뮤직비디오도 안 보며, 기사를 클릭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 전지적 권한이 팬들에게 있습니다. 현실 연애에서는 '차단'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죠. 그런데 악플러들은 참 이상합니다. 마음을 줄 것도 아니면서, 왜 계속 그 연락은 꼬박고박 확인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치 미드에서 몸매 좋은 여자를 보면 습관적으로 욕설을 내뱉는 마초 남성처럼, 'Oh My God, Moth*** Fu****'하듯이 여성혐오 발언을 내뱉습니다. 그건 쓰레기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 혐오 발언을 정중하게(?) 바꾸면 마케팅적 측면만 부각하고, 거기에 함의된 문화정치적 내용을 가려버리는 언론의 태도가 됩니다. 이건 폭력이죠.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여자의 애교와 몸매는 꼬박꼬박 관음하면서, 마치 농락하듯 혐오 발언을 뱉을 건 뭐냐는 거죠.

꼭 하필 '스텔라'의 팬덤에 참여함으로써, 이런 인정투쟁에 연대하길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각자가 선택할 짐을 선택해, 짊어질 수 있는 무게만큼만 짊어지면 됩니다. 그런데 호네트가 비윤리적이라고 지적하는 건, 바로 이 남의 인정투쟁을 '발목 잡는' 행위일 뿐입니다. 사회는 진보해야 도덕적인데, 이걸 가로막으니까요. 스텔라가 인정투쟁하는 일에 관심이 없으면 '그냥 좀 놔두면 된다'고 봅니다. 그걸 비난할 윤리적 이유는 도무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스텔라에 대해 비난을 하는 좋은 '빌미'가 되는 게 바로 마리오네트의 노출부터일 것입니다. 연이어 죽을 쑨 소속사가 마침내 승부수를 던진 것입니다. 이것은 스텔라가 어쩔 수 없는 '주어진' 상황입니다. 계약을 해서, 소속사에 묶여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스텔라가 주어진 조건을 역이용했다고 읽었습니다. [어차피 벗어야 하는 게 우리 현실이라면, 좋다 시원하게 벗겠다. 대신에 우리는 이 노출을 연예 시장 구조에 대한 비판의 계기로 활용하겠다]는 정신으로요. 자신들의 처지가 마치 '끈에 조종당하는 인형(마리오네트)'처럼 됐다는 걸 보여주면서, [봐라 연예 시장이 이렇게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없다]고 풍자하는 것처럼 읽혔습니다.
 
이것 역시도 부조리한 구조에 대한 하나의 인정투쟁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누군가가 스텔라에게 뜨려고하는 방법이 잘못 됐다고 욕할 때, 저는 "오히려 그 전략이야말로 현재 맥락에서 아주 적절하게 정치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건 '뜨기 위한' 문제(마케팅)가 아니라, '인정 받고자 하는 문제'로(윤리) 읽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여성의 노출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의 보수적 담론은 시험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길어지니까, 논외로 해둡시다.
 
어쨌든 마리오네트로 마녀사냥, 매장 당하고 스텔라도 자신들의 표현 방식이 과한 것 아닌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됏을 것입니다. "노출만 주목하지 말아주세요(마케팅적 측면만 주목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말은 했지만, 연달아 발표된 두 싱글을 보면 주눅 든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마스크의 경우엔, 강한 척하지만 사실 가면 속에서 약해빠진 자신들의 모습이 들킬까 두렵다고 합니다. 그게 아니면, 이제야 노출 때문에 팬들이 자신들을 봐주긴 하지만 이미 가면 속 자신들의 모습은 잃어가고 있다고 자조합니다.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려는 뮤지션의 정체성에 대한 용기가 약해지거나,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반면 멍청이부터는 조금 기운을 낸 것 같은 모습입니다. 악플(이 악플에 일베를 은유하는 듯한, '바퀴벌레'가 나오는 듯 보입니다)을 보고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는 걸 멀찌감치, 듬직한 고릴라 팬이 보고 눈물을 그렁거립니다. 싱글 제목이 '멍청이'인 이유는, 뭘해도 욕을 먹는 게 자신들인데 그럼에도 언제 생길지도 모르는 팬들의 인정을 받고자 연습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릴라 팬(삼촌팬)은 이걸 보고, 밤에 찾아와 악플들을 말끔히 해결해주고 스텔라와 함께 무대 의상을 고르는 등 콘서트 준비를 하죠. 그리고 즐겁게 스텔라는 팬들을 위해 기쁘게 노래 부릅니다. 그 때 무대 의상은 별로 노출도 없고, 매력적이기만 합니다. 결국, 여기서의 메시지는 문화를 단지 소비하는 수동적인 팬이 아니라. 문화를 함께 생산하는 능동적인 팬문화가 있다면, 걸그룹이 '벗겨질 일'도 없다는 것으로 읽힙니다. 여기서 저는 부르디외가 강조하는 구조에 저항하는 문화 생산자들의 가능성을 봅니다.
 
부르디외는 문화에도 자본이나 생산도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게시판에서 글쓰는 걸 예로들면. 학력, 글쓰기 능력, 인터넷 커뮤니티 이용경력 등... 이 '밑천'이 생산도구가 됩니다. 그 생산도구를 가지고, 사람들은 문화를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화 생산도구를 독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당연히 언론이나 논객들이죠.
 
각종 보수언론들은 걸그룹 노출에 대해서, 자신들의 밑천을 앞세워 여론몰이를 합니다. 반면에, 여기에 편승하는 저널리즘을 상실한 논객들은 쓰레기 같은 칼럼이나 써내면서 '성상품화' 운운하고 껄떡 댑니다. 그런데 이건 문제를 절반만 파악한 해석일 뿐이죠. 오직 마케팅적 측면만 봐야 가능한 해석입니다. 좀 배웠다는 지식인이라면, 이런 식으로 대중들을 현혹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문화 생산을 좀 '민주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기업 독점을 깨듯, 팬들이 스타의 모습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점이 바로 '대중' 문화의 최대 강점입니다. 즉 대중 문화가 대중이 소비한다고 대중 문화가 아니라, 대중이 생산에 참여하기 때문에 대중 문화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텔라가 자신들을 '멍청이'라고 하잖습니까? 자신들에겐 문화자본이 빈약하다는 겁니다. 비단 스텔라 뿐이 아니라, 많은 걸그룹에게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문화자본이 있는 똑똑한 팬들이 고릴라 삼촌 팬처럼, 생산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거죠. 결국, 걸그룹이 무엇을 입을지 결정하는 권한이 팬들에게도 있다는 겁니다.
 
어떤 분이 댓글에 현아는 소비자를 지배할 줄 아는데, 스텔라는 그런 노력이 부족해서 못 뜨는 거라고 하셨더군요. 네, 그런데 그건 절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대중을 '소비자'로 볼 때만 가능한 답변이죠. 대중은 소비자와 생산자의 역할을 모두 가집니다. 스텔라가 현아와는 다른 측면의 강점을 가진 것이지, 열등한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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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떨려요' 싱글부터는 저널리즘의 행태를 비판하는 모습이 담겨있더군요. TV나 모니터 속의 그녀들의 모습을 언론은 몸만 찍어서 포털로 퍼나르기 바쁘죠. 이때 스텔라 멤버들에겐 아무런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다가오는 팬이 가끔 있고, 그 때 스텔라 멤버들의 마음은 '떨리는' 것입니다.
 
뮤비에서 핸드백이 서서히 열리는 등의 모습이 여성의 성기를 연상시킨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그건 역시 노출만 볼 때 가능한 해석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부분이 어떻게 사람이 몸과 마음을 다해 다른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고 읽었습니다.
 
어떤 분이 댓글에 스텔라의 일련의 행보들이 '구걸'처럼 느껴진다고 하셨더군요. 근데 그건 마케팅적 측면, 즉 스텔라에 편승하는 상업적 이해만 주목하고 곧바로 노출로 의식의 흐름이 넘어가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중 문화를 생산자의 관점에서 보고, 윤리와 정치적 시각에서 분석하기 시작하면. 스텔라의 행보는 구걸이라기보다는 '투쟁'으로 재해석 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꼭 스텔라를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텔라가 과잉대표 됐을 뿐, 현재 연예 시장이 걸그룹 노출 경쟁으로 과열된 것도 사실이고... 언론의 보도 행태가 상당히 얄팍하며, 누리꾼들의 논란을 부추기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이 현실에만 머물러서는 아무 것도 해결되는 게 없습니다. 결국 누군가는 벗고 나올 것이고, 또 악플이 달릴 것이고, 또 언론과 연예 시장만 신이 날 것입니다. 해결 방법은 팬덤에 참여해 소비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생산자로서도 참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스텔라를 선택해도 좋고, 걸스데이를 선택해도 좋고, 에이핑크를 선택해도 좋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의 철학을 사랑하세요. 그리고 그들의 인정투쟁과 연대하시고, 문화를 생산합시다.
 
그동안 남성 아이돌 팬문화가 '빠순이'하는 식으로 비하 당하고, 부정적인 면만 부각됐지만. '팬아트'같은 자생적 문화 생산에 참여한 기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2009년 동방신기가 SM과 전속계약을 해지할 때 '부당 계약 철폐'등을 주장하며 사회적 운동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스타에게 자신들이 소비할 만한 코드를 주지 못했다고 비판은 만연하지만, 정작 그 코드를 생산하는데 참여는 제대로 해봤는지가 이미 고민 됐어야할 문제입니다.
 
제겐 걸스데이 혜리의 '맑스돌' 이미지가 전위적으로 느껴지고, 현아의 아우라가 멋지게 느껴지듯, 스텔라의 인정투쟁도 용기있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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