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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대한제국200년사-(20)아시아해방전쟁과 제3차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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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2013년체제
추천 : 15
조회수 : 110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6/23 22:15:10
대한제국은 '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바로 지난 역사에 일어났던 모든 억압과 착취의 종결이자 자유와 평등이 도래하는 새로운 세상의 전기가 될 것'이라고 대내외에 천명하고, 대한제국은 이들 이상의 실현을 위한 해방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할 것'이라는 요지의 <김구선언>을 국제사회에 공포하였다. 

대한제국은 얄타회담의 정신에 부응하기 위하여 만주, 몽고, 대만, 일본, 알래스카 등 식민지들에 과도정부를 세운 후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총선을 거쳐 의회와 내각을 구성하는 등의 정치일정을 순조로이 진행하도록 하여 독립국가를 선포하게 하였다. 

100년 이상 대한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동화되어온 만주는 일부 독립을 주장하는 강경파들의 소요가 벌어졌으나 전 만주족이 참가한 독립찬반투표에서 독립이 부결되어, 만주의 영토는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니라 대한제국 영토의 일부가 되고, 만주인은 대한제국의 피식민인이 아닌 주권을 가진 동등한 대한제국 시민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 

일본과 몽고, 대만 등은, 국가의 정체를 내각책임제로 정하고 독립일정을 진행하나 국가원수는 따로 뽑지 않고 대한제국의 황제를 자국의 국가원수로 모시기로 결정하였다. 알래스카에는, 아우슈비츠에서 풀려난 유럽계 유태인들을 필두로 전 세계에서 새로 이주해 들어온 유태인들과 에스키모 원주민들이 합심하여 동등한 자격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매진하였다. 

1차 대전 이후 팔레스티나에 이주해 정착촌을 건설하고 독립국가의 수립을 원하고 있던 많은 유태인들도 아랍인들과의 충돌을 피해 속속 알래스카로 이주하여 왔다. 이들 국가는 전 세계에 자국이 주권과 영토와 인민을 가진 독립국임을 선포하는 것과는 별도로 새로 구성된 대한제국 연방의 일원으로 남게 되었다. 

김구 내각은 국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병행하여 변화된 세계질서에 모범을 보이고자 국내의 체제정비도 서둘러, 인종과 계급, 성별에 따른 모든 차별을 철폐하고 20세 이상의 모든 성인남녀에게 참정권을 주는 보통선거를 실시하도록 하는 한편 주당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하는 등의 일련의 혁명적인 정치, 사회적 개혁을 단행하여, 전 세계 모든 나라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과 자극을 주게 되었다. 

대한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 여러 국가들이 독립을 향한 정치일정을 순조로이 진행하고 있는 반면, 구미열강들이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에서는 식민 모국들이 이런 저런 핑계로 정치일정을 지연시키자 갈등과 충돌이 재현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와 말레이지아,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등에서는, 대전의 종전 이후 주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무장독립투쟁이 다시 재개되기 시작하였다. 

공산당의 공세가 나날이 거세 지자, 이들 지역에 공산정권이 수립될 것을 우려한 영국과 미국은 버마의 아웅산과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등 민족주의자들과의 협상에 나서 친서방 반공국가의 건설을 유도하려 들었다. 게다가 얄타회담에서의 합의의 조속한 이행을 촉구하는 대한제국의 압력이 점차 가중되자, 이들 국가에 대한 독립일정을 마지못해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통치 기간 중 버마의 민족주의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 왔는데, 민족적 종교인 불교를 수호한다거나 고대 왕국을 부활시킨다는 명분 등으로 산발적이고 지역적인 소규모의 반란이 빈번했으나 번번히 실패로 그치고 말았다. 버마는 1937년까지 사실상 인도의 한 주였기 때문에 버마의 민족주의운동은 때로는 인도로부터의 민족해방운동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인도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는 인도에서 분리를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과 반대파들간의 반목으로 영국에 대한 대규모의 저항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인도로부터 분리된 이후에도 버마의 민족해방운동은 인도의 네루(Jawaharlal Nehru)가 이끄는 인도 국민회의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는데, 차츰 운동의 주도권은 아웅 산(Aung San) 네 윈(Ne Win) 등 조선대 출신의 청년 유학파들에 의해 장악되어졌다. 이들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은 대한제국의 협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30명의 청년들을 모아 대한제국으로 밀파하여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은 독립군을 조직하여 울창한 밀림을 근거지로 삼아 버마 주둔 영국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며 점차 세력을 넓혀 나갔으나, 얄타회담의 결과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이후 독립을 보장받고 무장투쟁을 중지하고 영국에 협조하게 되었다.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는 본래 네덜란드 식민지였으나, 나폴레옹이 네덜란드 본국을 점령 하는 틈을 이용하여 영국이 잽싸게 이 땅을 차지해 버렸다. 

영국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싱가포르와 말래카 해협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말레이 반도는 되돌려주지 않았다. 이후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말레이시아는 2차 대전 당시 영국에 협조하였으나, 종전 후 영국은 11개 부족의 연합으로 말레이시아 연방을 구성하여 여전히 총독부의 관할 하에 두려고 기도하였다. 본래 수 백년간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태평양의 주도권을 다툰 스페인과 미국과의 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였으나, 결국 미국의 배신으로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로 남게 되었다. 

필리핀은 1차 대전 이후 미국의 자치령이 되어 초대 대통령으로 케손(Quezon)이 선출되었고 2차 대전 이후에는 완전한 독립을 부여받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필리핀은 이후 공산 게릴라의 무장투쟁을 진압한 막사이사이(Magsaysay)에 의해 독립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식민지인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3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는,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와 사정이 달랐다. 

이들 식민지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얄타회담이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체결된 조약으로 자신들에게는 구속력이 없다는 점을 내세우며 인도차이나 3국과 인도네시아에 대한 식민지배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사를 강력히 표명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구미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아시아의 식민통치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이를 아시아 인민들과 무력으로 저지할 것을 공언하고 나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프랑스가 2차 대전이 끝나자 말자 베트남 왕족 바오 다이(保大)를 앞세워 사이공에 친불 괴뢰정권을 수립하자, 호치민(胡志明)의 영도 하에 하노이에 수도를 정하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으로 독립까지 선언한 베트남 독립동맹(越盟. Viet Minh)은 즉각적인 전쟁상태로 돌입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도 자바섬과 수마트라섬에 다시 침공하여, 수카르노(Sukarno)의 주도로 수립된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부정하고 식민지배 연장의 야욕을 감추지 않았다. 

이들 두 나라는 2차 대전으로 피폐해진 자국 경제의 회복을 위해서도 식민지의 풍부한 천연자원의 확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처지였기에, 대한제국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며 무리하게 군사행동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나라의 군사행동은 그 동안 아시아 민족해방전선(ANLF)에 의해 잘 훈련되고 무장된 독립군들의 즉각적이고도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구미열강의 아시아에 대한 식민지배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대한제국의 의지를 시험하는 파국적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대한제국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군대가 다시 아시아를 침공하자 즉각 유엔에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이들 두 나라의 침공을 규탄하는 한편 미국과 영국에게 전쟁에 개입하지 말 것을 강력히 경고하였다. 김구총리는 국가정보부장이던 윤봉길을 파견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베트남에 육군 최정예 특전사단인 맹호부대 등 5개 사단 10만의 병력을, 인도네시아에 해병대의 최정예 사단인 청룡부대 등 3개 사단 5만의 병력을 각각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대한제국 연방 전 국가 총 동원령을 발동하고 전시 상태에 돌입하였다. 

이로써 유럽에서 2차 대전이 끝난 지 불과 3년만에 아시아에서, 세계는 다시 큰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갔다. 대한제국의 경고가 단순히 말로 그치지 않고 대규모의 참전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해 지자, 프랑스와 인도네시아는 크게 당황하여 주한대사관을 통해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분단하여, 북쪽은 대한제국이 남쪽은 프랑스 두 나라가 각각 지배하자는 제안과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한 지배권도 두 나라가 각각 나누어 갖자는 제안을 동시에 해 왔다. 

네덜란드는 자바와 수마트라를 제외한 보르네오와 뉴 기니 등 여타 도서를 대한제국에게 할양하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하였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이러한 타협안이 국내에 알려지자, 동남아의 풍부한 천연자원에 군침을 흘리고 있던 독점자본가들과 이들의 충실한 대변자 노릇을 해오던 야당인 보수당은, 이승만 총재의 제국의회의 대표 연설을 통해 전쟁을 반대한다는 구실로 이들 국가의 제안을 수락하여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 

김구총리와 집권여당인 사회민주당은 이번 전쟁이 자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있지 않음을 명백히 밝히고, 세계의 평화와 아시아 인민의 안녕을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라는 것을 대한제국 연방의 인민들에게 직접 호소하고 야당의 이러한 주장을 일축해 버렸다. 대한제국은 2차 세계대전 중, 건조한 최신예 항공모함 단군호를 앞세워 베트남의 다낭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의 극동함대를 격파하고 남지나해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일단 성공하였다. 

제해권의 상실로 더 이상 본국에서의 군수지원이 어렵게 되고 육전에서도 대한제국군의 막강한 군사력과 현지 독립군의 게릴라 공격으로 프랑스군과 네덜란드군은 고전을 면치 못한 채 고립되어 갔다. (1948년) 

동남아시아에서의 전쟁이 거의 막바지로 접어든 1949년 6월, 초여름의 나른한 오후의 적막을 깨는 두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리 관저에서 김구총리가 경호실 소속의 안두희라는 장교의 총격을 받고 서거하고 마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암살범 안두희의 취조를 맡은 특무대장 이봉창이 사건의 전모를 발표하자 세계는 일순간 경악 속에 빠져들어 가고 말았다. 

김구 총리에 대한 이번 저격사건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정보기관이 대한제국군의 일부 장성들을 사주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이들의 배후에는 동남아 천연자원을 관리해 오던 다국적 기업의 막대한 검은 돈이 개입되어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건은 보수당 총재인 이승만의 연루 혐의였다. 

이승만은 김구총리의 암살 직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신이 권력을 잡겠다는 망상을 꾸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아온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를 동경하는 골수 친미주의자로, 자신이 황실의 먼 종친임을 내세워 입헌군주제하의 명목상의 황제가 아닌 전제황제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시대착오적인 돈키호테 같은 인물이었다. 김구 총리 암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자 대한제국 인민들은 분노와 슬픔으로 피의 복수를 부르짖었고 연방 내 공화국뿐만 아니라 교전 중인 아시아 각국은 물론 전 세계의 비난이 당사자들에게 빗발치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사건이 진상이 드러나자 곤혹감을 감추지 못하였고, 이번 사건은 일부 정보기관 관계자들의 개인적 이해에서 비롯한 우발적 사건임을 애써 변명하며 진상조사를 통한 책임자의 처벌을 약속하는 선에서 사건을 서둘러 무마하려 들었다. 김구 총리의 서거로 총리직을 수행하게 된 여운형 부총리가 이끄는 대한제국 정부는, 대한제국군 총사령부에 적들의 도발로 이미 교전상태로 돌입했다고 보고 별도의 선전포고 없이 이들 국가의 군대와 함선에게 즉각적인 공격을 개시할 것을 명령하였다. 

공격 명령을 하달 받은 항공모함 단군호를 위시한 대한제국 함대는 마침 북태평양의 미드웨이 인근 해역을 항해하던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을 비롯한 미국의 태평양 함대에 대해 기습공격을 감행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단군호에서 발진한 폭격기 편대는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 기지를 급습해 정박 중이던 함정 수십 척과 활주로를 대파하였다. 제해권과 제공권을 선점하는데 성공하자 한일 연합 해병 선발대 1개 여단이 하와이에 상륙하여 하와이제도를 완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대한제국의 미처 예상치 못했던 신속하고 강력한 군사행동에 미국정부는 크게 당황하여, 지중해에 머물러 있던 니미츠 항공모함 등 미국해군의 주력인 대서양 함대를 서둘러 태평양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항공모함 왕검호 등 대한제국 함대가 파나마 운하 입구를 막고 강력한 방어에 나서자, 미국의 대서양 함대는 좁은 운하를 통과하는 것을 포기하고 결국 남미 대륙을 빙 돌아 마젤란해협을 거쳐 태평양으로 항해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미국과의 개전 초기 선제 공격에 성공한 대한제국군은, 알래스카에 만주군 50만을 포함한 100만의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켜 본격적인 미국 본토 공격을 준비하여 들어갔다. 또 하와이에서 발진한 폭격기들은 미국 공군과 공중전을 벌이며 미 서부 해안의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등 연안 도시들에 대해 연일 맹폭을 퍼부었다. 

2차 대전의 종결 이후, 미국과 영국은 경제 재건을 위해 군수산업에서 민간경제로의 전환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함정과 비행기, 전차 등 재래식 무기들도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던 반면, 대한제국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고 국력을 온존이 보존 할 수 있던 상황이었던 데다가 연합국에 대한 군수품의 수출로 오히려 경제력을 배가 시켜 놓은 상태여서 경제력에는 대한제국이 여유가 있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대한제국은 아시아에서 발생할 지도 모를 분쟁에 대비해 신무기를 개발하고 군대를 실전 훈련시키는 등 꾸준히 군사력을 향상시켜 놓은 터였고, 2차 대전 이후 별다른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던 미국은 대한제국과의 개전 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대한제국은 또 아시아에서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 국한되어 있던 전선을 확대해, 얄타회담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버마와 말레이시아에 계속 주둔해 있던 영국군에게도 공격을 개시하였다. 

아시아 전선에는 일본군 20만까지 새로이 참전하여 대한제국 연방군의 병력은 도합 50만으로 증강되었다. 연방군은 먼저 아직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홍콩을 저항 없이 점령해 영국 총독의 항복을 받아내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서 총공격을 벌이는 한편 싱가포르에 해병대를 상륙시켜 말레이시아의 영국 주둔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호주와 뉴질랜드가 영국군에 대해 군수품을 지원하자 뉴 기니에 진주해 있던 대한제국 해병대가 호주 북부의 다아윈에 상륙하여 전선은 대양주까지 확대되어 나갔다. 대한제국 연방군의 총공세로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군에 이어 베트남의 프랑스군도 차례로 항복하게 되고, 말레이시아에서 패주한 영국군은 버마로 퇴각하여 인도의 네루 총리에게 도움을 청하나 인도는 엄정한 중립을 선언하였다. 

호주와 뉴질랜드도 본국 영토가 전쟁터로 변하는 것이 두려워 대한제국에 쉽게 항복하고, 결국 버마 주둔 영국군도 북부 밀림 속에 고립되어 있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에 나섰다. 아시아에 대한 구미 제국주의의 300년간의 식민지배는 이로써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1950년) 

대한제국군은 영국군 20만 명, 프랑스군 15만 명, 네덜란드군 5만 명 등 모두 40만 명을 전쟁포로로 잡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장면 외상과 유럽 3개국 정부 외상, 그리고 베트남의 호치민,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버마의 아웅 산,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등 아시아 각국의 독립 지도자들은 싱가포르에 모여 종전회담을 벌이게 되었다. 

유럽 3국은, 아시아 각국에 대한 식민지배에 대해 공식 사죄하고 이들 국가의 경제 발전을 위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는 한편 대한제국에게도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철저히 중립을 지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40만 명에 달하는 전쟁포로의 석방은 미국과의 전쟁 이후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연방에서 탈퇴하도록 하여 중립국으로 남게 하였다. 패전의 영향으로 종전 이후 유럽 각국에서는, 제국주의 성향의 보수당 정권들에서 진보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정권이 속속 교체되는 대대적인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툰드라의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아시아에서 철수한 최정예부대를 대폭 증강시켜 알래스카에 진주해 있던 200만의 대한제국, 만주, 일본 등 대한제국 연방군은 드디어 미국 본토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먼저 대한제국 정부는 영연방에 속해 있는 모든 국가를 적으로 규정하고 캐나다에게 영연방을 탈퇴할 것을 종용하는 한편 미국 진격을 위해 이동로를 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캐나다 정부가 거절의 의사를 전달해 오자 마침내 대한제국군은 국경을 넘어 캐나다 영토로 진격해 들어갔다. 캐나다 서부의 거대한 툰드라에는 주민들이 거의 살지 않아 캐나다군은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대한제국군은 별 저항 없이 남진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군이 남진을 거듭하자 미국군도 캐나다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영토로 북진하여, 양국군은 마침내 캐나다 서부에서 조우하고 교전에 돌입하였다. 아시아 전선에서 오랜 실전경험을 보유한 특전사 백호부대와 해병대 청룡부대를 앞세운 대한제국군은, 급조된 신병 위주의 미국군의 방어선을 격전 끝에 돌파하고 캐나다의 태평양 연안의 거점 도시인 벤쿠버를 점령하여 미국국경에 도달하게 되었다. 

마침내 대한제국군이 미 국경 수비대의 필사적인 저항을 뚫고 미국국경을 넘어 시애틀을 점령하자 워싱턴의 투르먼 대통령은 중대결심을 하게 되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미국 본토가 공격받게 되자 다급해진 투르먼은, 2차 대전 중 개발한 원자폭탄을 실전에 투입할 것을 결심하게 되고 알래스카의 공군기지와 하와이의 해군기지에 각각 한 발씩 투하하여 수 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원폭투하의 급전이 서울로 타전되자, 여운형 총리대행은 즉각 최고사령부에게 비밀지령 '살수대첩(薩水大捷)'을 하달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하와이에서 발진한 500대의 전투기가 서부 해안으로 출격하여 미국공군과 사투를 벌이는 사이, 알래스카 공군기지에서 발진한 봉황과 주작이라 명명된 대한제국 공군의 최신예 전폭기인 K-33 두 대는 각각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에 수소폭탄 한 발씩을 투하하였다. 

그 동안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소식을 접한 대한제국 정부가 몽고의 사막지역에서 극비리에 개발해 온 수소폭탄은 미국이 투하한 원자폭탄의 44배가 넘는 위력을 가진 핵폭탄이었다. 수소폭탄의 투하로 두 도시에서 수십만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인구 밀집지역인 동부까지 전쟁이 확대되어 피해가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미국 정부는 결국 항복을 결정하고 말았다. 

6월 27일, 전 미국 시민들이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라디오 방송을 통해 투르먼 대통령이 침통한 목소리로 대한제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대한제국군 총사령관 장준하는, 미국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네바다 사막의 라스베가스로 나오게 해 항복 조인을 받았다. 미국은 항복 협정에서, 로키산맥 동쪽의 태평양 연안 영토를 포기하여 캘리포니아주를 대한제국의 5년간에 걸친 신탁통치 후 중립적인 독립국으로 만들기로 하는 한편 하와이도 독립시키기로 합의하게 되었다. 

캐나다도 영연방을 탈퇴하고 중립국이 되기로 결정하여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던 대영제국의 위용도 그 역사적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1950년) 대한제국은 신탁통치 위임자로 조봉암을 파견하고 캘리포니아에 무제한적으로 이민을 허용하였다. 

신탁통치가 시작되자 다수의 조선인을 비롯한 만주, 몽고 일본 등 아시아계와 멕시코와 중남미에서 건너온 스페인계가 새로운 꿈을 안고 대거 이민을 건너와, 신탁통치 결정 후 미국 동부로 떠난 유럽계 백인들보다 수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5년 후 캘리포니아는 국호를 성림국(聖林國. Republic of Hollywood)으로 정하고, 수도를 나성(Los Angeles)으로 하는 한편 조선어, 영어,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하는 중립국가로 독립하게 되었다. 성림국의 초대 대통령에는 조선계인 서재필 박사가 당선되었다. 알래스카도 원주민인 에스키모족, 이주민인 유태인과 조선인들이 화합하여 백설국(白雪國. Republic of Snowland)이라는 국호로 독립하였고, 하와이 제도도 낙원국(樂園國. Republic of Paradise)이라는 국호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들 두 국가는 모두 국가원수를 대한제국 황제로 하는 대한제국 연방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다. (1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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