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군에 의해 서안으로 쫓겨간 청제국의 황실과 조정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채 부패와 사치의 나락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홍장이 죽은 후 자신이 지휘하던 신식 육군을 배경으로 군권을 장악한 원세개는 대한제국과의 전쟁에서, 자신의 군사력을 온전히 보전하는 데만 급급하여 조정의 다급한 참전 명령을 무시한 채 북경을 버리고 자신의 고향인 하남으로 철수하여 중국 대륙의 남부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원세개는 본래 진사시에 급제하지도 못할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었던 인물이었으나 오로지 조부가 이홍장의 친구였다는 인연으로 이홍장의 휘하에 들어가 출세가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권력의 향배를 쫓는데는 동물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어 배신을 밥먹듯 하면서 기민한 처신으로 마침내 중국 대륙의 최고 실력자의 반열에 오르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서안으로 피신해 있던 황실과 조정의 중신들은 원세개의 이러한 야심찬 행보에 적잖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서태후는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원세개 밖에 없음을 알고는 적극적으로 원세개를 옹호하고 나섰다.
원세개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서태후의 죽음이었다. 노쇠한 서태후가 죽으면 황제인 광서제의 친정체제가 들어설 것인데, 광서제는 자신의 정적인 강유위 등 입헌파들과 친밀하였으며 자신의 배반으로 광서제와 입헌파들이 추진하던 변법운동이 결국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보복을 당할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서안으로 피신해 있던 서태후가 결국 노환으로 죽게 되는데 원래 병약하던 광서제가 곧 이어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어, 서태후의 카리스마로 그나마 근근히 유지해 오던 권력에 큰 공백이 생기며 쇠퇴일로에 내몰리던 청황실은 그야 말로 풍전등화의 신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구나 광서제에게는 황실을 이을 후사가 없었기에 친동생인 순친왕(醇親王) 재풍의 큰아들 부의(溥儀)가 겨우 세 살의 나이에 황위를 잇게 되어 황실의 권위는 더욱 급전직하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세 살의 나이에 용상에 오른 부의는 바로 태조 누르하치로부터 12대째인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이다.
선통제가 즉위하자 아버지인 순친왕 재풍이 섭정을 맡게 되었는데, 재풍은 입헌을 통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여 청 황실의 위엄을 되찾고자 제일 먼저 군벌의 우두머리인 원세개를 처형하고자 하나, 청조 타도를 외치는 혁명세력들이 도처에서 봉기하는 마당에 황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무장 세력인 원세개를 처형해 버리면 군부가 강력히 반발할 것이 뻔하고 그렇게 되면 사태를 도저히 수습할 수 없다는 중신들의 여론에 밀려 일단 원세개의 군통수권의 직책을 빼앗아 버리나 군부의 실질적인 통수권은 여전히 원세개의 절대적인 영향력 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당시 서울에 망명해 있던 손문(孫文)은 중국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흥중회(興中會)라는 혁명 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 그룹은 사민당의 소장층 의원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중국혁명 계획을 착실히 수립해 나가게 되고, 향후 중국에서의 상권확보를 원하는 일부 재벌들의 금전적 지원도 확보하게 되었다. 손문은 흥중회를 기반으로 중국 대륙의 각 혁명 조직과 연락하여 비밀리에 홍콩에서 '중국혁명 동맹회'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으로 무장봉기의 착수에 돌입하였다.
마침내 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 봉기한 혁명군은 내쳐 한구까지 점령하여 장강(양자강)의 요충지인 무한삼진 일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하고 중화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음을 천하에 선언하였다. 공화국은 전국에 혁명이 일어났음을 알리고 각지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청군에 소속되어 있는 한족 출신의 장병들에게 투항을 권고하고 나섰다.
공화국 수립의 소식이 대륙 각지에 퍼지자 혁명의 불길은 들불처럼 타올라 한달 사이에 전국의 15성이 청조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고 나서 청조는 사실상 급속도로 해체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혁명군은 남경과 상해를 차례로 접수하여 장강 이남 일대는 실질적으로 공화국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
서안의 조정은 각지에서 혁명의 소식이 끊이지 않고 올라오자 당황하여, 파면했던 원세개를 다시 기용하여 혁명을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원세개에게 다시금 군통수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간파한 원세개는 군권을 접수하고도 소극적인 군사행동으로 제한하고 혁명군과 은밀한 뒷거래를 시작했다.
원세개는 공화국 내부의 자신의 지지자들을 부추겨 자신을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한다는 결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정치공작에 착수하였다. 원세개는 청조 측의 입헌군주파를 설득하고 혁명파와의 강화교섭에 성공하게 되면 대총통의 자리가 자신에게 굴러 들어와 결국 천하의 대권을 움켜잡을 수 있다는 치밀한 계산을 해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혁명파 일각에서도 청 제정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수립을 위해서는 원세개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대총통에 추대해야 된다는 의견이 만만치 않게 개진되던 상황이었다.
중국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서울에서 혁명을 지휘하던 손문은 급거 귀국을 서둘렀다. 손문은 귀국에 앞서 서울에 주재하던 각국의 공사들과 만나 청조에 대한 정치, 군사적 지원을 중단하는 것은 물론 경제적 차관도 더 이상 제공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공화국 정부를 지원해 줄 것을 촉구하여 각 국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손문의 귀국은 임시정부 수립의 교착상태를 일거에 해결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여 마침내 상해에서 열린 17성 대표들로 구성된 전국 대표자회의에서 압도적 지지로 초대 임시 대총통에 뽑히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회의가 평화롭게 열릴 수 있도록 상해 일대에 함대를 파견하고 회의장과 각 성 대표들을 철저히 보호하는 한편 황하 이북의 북경 등 점령지 대표들도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등 새로운 공화국의 수립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마침내 1912년 1월 1일, 손문은 남경에서 중화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대내외에 선언하고 임시 대총통에 올랐다. 손문은 취임 선서에서 '민(民)의 공의를 취하고 중(衆)을 위해 복무한다.'고 서약하고 1912년을 민국 원년으로 정하였다. 이로써 유사이래 중국을 지배해 왔던 전제 군주 체제는 종지부를 찍게 되고 민의에 의한 정치와 민중을 위한 정치를 목적으로 하는 민주적인 공화정체가 실현되게 되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탄생이 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안에는 여전히 청제국의 황제가 존재해 있었고 하남에는 원세개가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구미열강들은 원세개에 의해 중국이 통일된다면 중화민국을 승인하겠지만 현재의 남경 임시정부는 승인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나, 대한제국은 청 제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중화민국을 즉각 승인하여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에 나서 중화민국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하고 나섰다.
손문은 원세개가 버티고 있는 한 완전한 천하통일이 힘들다고 보고, 청조를 퇴위시키면 원세개에게 대총통의 자리를 양보할 뜻이 있음을 밝히나 반면 청 조정은 원세개를 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전권을 부여 할 테니 공화국을 진압해 달라고 애걸하고 나서, 원세개는 양쪽에서 실리를 챙기기 위한 꽃놀이 패를 즐기며 타산에 골몰하였다.
마침내 계산을 끝낸 원세개는 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려 황제의 퇴위를 촉구하고 나섰다. ' ....... 남경의 공화국을 부정하고 서안의 제정을 유지하려 든다면 결국 내전이 불가피할 것이고, 만약 내전이 장기화되면 외국의 간섭을 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혁명군의 감정 또한 악화되어 어떠한 유혈사태가 발생할지 모르니 하루속히 민의에 따르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신이 판단하건대 민심이 원하는 정체는 결코 군주제가 아니고 공화제라고 사료되옵니다. 하루속히 대세를 살피시어 민심에 따르시기 바라옵나이다.'
원세개의 상주문을 받아든 조정은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꼴이 되어 금새 초상집으로 변하고 말았다. 일부 만주족의 황족과 중신들은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나 해는 서산에 기운지 오래고 대세가 기울었음을 누구나 부인할 수 없었던 터라 결국 융유 황태후(隆裕 皇太后)는 황제의 퇴위를 결심하고 원세개에게 협상 전권을 위임하여 공화국과 황제 퇴위 후 황실의 처우 문제를 논의하고 나섰다.
마침내 일곱 살에 불과한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가 퇴위 조서에 옥새를 찍어 청제국은 세조 순치제(順治帝)가 북경을 점령한 이래 300여 년만에 역사 속에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12년)
손문의 양보로 대총통에 취임한 원세개는 자신의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새로 소집된 의회를 강제로 해산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손문 등 혁명 지도자들은 사태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악화되자 '토원군(討袁軍)'을 구성하여 다시 혁명의 불길을 되살리려 애썼으나 상황은 이미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막강한 원세개 휘하의 군대에 의해 연거푸 패퇴하고 말았다.
손문 등 혁명 지도부는 대한제국의 도움으로 다시 서울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결국 혁명은 중국의 권력을 청조에서 원세개로 넘기는 걸로 만족한 채 참담한 실패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청조 몰락 이후 구미열강의 침략야욕은 더욱 노골화되어 영국은 티베트에, 러시아는 몽고에 독립을 부추겨 각자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쟁에만 골몰하던 원세개 정권은 이미 중앙정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을 지배할 능력도 의지도 없던 터라 이들의 행위를 묵인하고 말았다. 원세개는 나아가 구미 열강에 협조하는 대가로 제정을 부활하여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촌극을 연출해 내었다.
원세개 정권의 일련의 기행 중에서 대한제국을 가장 긴장하게 만든 것은 복건성에 미국의 군사항 설치를 허가한 사실이었다. 이 일로 미국과의 긴장관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대한제국은 심각한 군사적 위협을 느끼게 되고, 원세개가 구미 제국주의 열강에 아부하는 반대급부로 자신의 정권유지를 담보 받으려는 태도로 일관하자 마침내 원세개 군벌을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다시 전쟁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대한제국의 최종 결정에는 서울로 망명한 손문이 오랜 지기이던 김옥균 총리를 찾아가 지원을 읍소한 배경도 한 몫 거들었다.
유럽에서 선.후발 제국주의국가들 사이에 대전이 발발하자 대한제국 정부는 아시아에서 구미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일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하고, '아시아는 아시아 인민들의 의지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결정할 수 있고 이를 방해하는 어떠한 세력의 침략행위도 아시아 인민들의 단합된 힘에 의해 단호히 응징 받을 것'이라는 요지의 <김옥균선언>을 발표하였다.
대한제국의 반제국주의적 동향으로 구미열강은 잔뜩 긴장하게 되고 강대국으로 성장한 아시아의 새로운 열강을 공포의 대상으로 경계하나, 유럽대륙에서 자국들간에 전쟁이 치열한 상태라 멀리 떨어져 있는 식민지에까지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던 터였다.
대한제국은 참전의 구실로 연합국에 가담하기로 하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내린 직후 독일의 해군기지가 있는 청도를 공격하여 독일 함대를 격멸 시킨 뒤 해병대를 상륙시켜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까지 단숨에 점령해 버렸다.
느닺 없이 대한제국군의 공격을 받은 원세개 정권은 즉각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하고 교전지역을 독일 조차지로 제한해 줄 것을 대한제국과 독일 양국에 촉구하나, 대한제국 정부는 원세개의 남경 정권을 중화민주공화국을 쿠데타로 뒤엎은 일개 군벌로 규정하여 무력으로 타도할 것을 공식 선언하고 총공격 명령을 발동하였다.
황하 이북에 대기하고 있던 대한제국 육군 10개 사단 30만 병력은 전격적으로 황하를 도하하여 원세개의 주요 근거지인 하남성의 성도 개봉을 점령하고 남진을 계속했다. 또 대한제국 해군과 해병대 5만 병력은 먼저 대만을 점령하고 치열한 교전 끝에 상해에 상륙하여 곧장 남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대한제국군의 남벌에 호응하여, 광동성의 성도 광주에 다시 근거지를 확보한 손문의 혁명군도 북벌에 나서 광서성의 성도인 계림과 복건성의 성도인 복주를 차례로 점령하고 남경정권을 압박해 들어갔다. 남북 양면으로 협공을 당한 원세개는 부하들에게 배반까지 당하자 결국 화병으로 졸도하여 급사하고 말았다. 천부적으로 강철같은 체질을 타고난 그는 15명의 첩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인삼 . 녹용으로 담금 술을 밤낮으로 복용하면서 정력을 길렀으나, 권력욕에 눈이 뒤집혀 결국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원세개가 죽자 군벌세력은 급속히 분열되어 와해되면서 마침내 대한제국군과 중국혁명군에 항복하게 되고 손문은 남경에서 다시 대총통의 자리에 오르며 일단 황하 이남의 중국의 통일을 성사시켜 내었다. (1915년)
중국혁명군에게 남경을 넘겨주고 다시 황하 이북으로 철수한 대한제국군은 전격적으로 몽고로 진격해 들어갔다. 몽고에 괴뢰정부를 수립했던 러시아군은 갑작스런 대한제군군의 공격을 받자 별 저항도 못하고 몽고에서 허급지급 도주하고 말았다. 서부전선에서 독일과 대치해 있었던 이유 뿐 아니라 국내상황도 폭발 직전이라 대한제국과 맞서 싸울 기력이 없었던 터였다.
유럽전선에서 전쟁에 여념이 없었던 구미열강은 대한제국의 신속한 군사행동에 속수무책일 따름이었다. 만주군과 일본군까지 포함된 100만 병력의 대한제국군은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잘 훈련되어 있는데다가 충성스럽기까지 하여, 이때까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불과 수천 내지 수만의 병력만으로 식민지를 개척해오던 구미열강으로서는 도저히 대적하기 힘든 상대로 성장해 버린 것이었다.
더구나 본국에서 함대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바로 배후에 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는 대한제국군의 기동력을 감당하기는 힘든 상태였다. 영국은 초기에는 러시아와 독일의 아시아 진출을 저지한 대한제국의 군사행동을 묵인했으나 반제국주의적이고 친대한제국적인 손문 정부가 들어서자, 중국에서 자국의 권익이 위축될까봐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달리 방안을 모색하지 못하고 대한제국 의회내 친영파의원들을 동원하여 중국내 자국의 기존의 경제적 이익들을 보장받기 바쁜 처지가 되어 버렸다.
중국통일 전쟁 후, 김옥균과 손문은 북경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대한제국은 지난 청조와의 전쟁에서 점령한, 북경을 포함한 황하 이북의 영토를 중화민국에 되돌려 줄 것을 약속하는 대신 만주일대의 주권은 여전히 대한제국에 있음을 상호 인정하게 하였다.
이로써 랴오허강(遼河)을 경계로 하는 양국 국경이 다시 확인되었다. 또 중국은 청조가 구미제국과 맺은 모든 불평등조약을 파기하고 어느 나라의 선박도 무장한 채 중국해역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하였으며, 양국이 제 3국으로부터 군사적 침탈을 받았을 경우 자동적으로 군사 개입을 하는 상호 방위조약도 아울러 체결하였다.
해외 원정에서의 연이은 승전보와 세계 체제 속에 그 위상이 한층 강화된 대한제국의 영광과 명예도, 국내 자본주의의 포화상태에 따른 사회적 불만과 잇따른 전쟁에 지친 민심의 동요를 해결해 주지 못한 채 급격히 우경화 되어 결국 전쟁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집권 사회민주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중국대륙의 식민지화를 줄기차게 촉구한 제국당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중국의 식민지화를 통한 자국의 배불리기를 주장한 파렴치한 제국당의 선동에 도취된 민심은 사민당의 세계질서의 정의로운 회복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었다. 총선의 결과 재벌들의 후견자 노릇을 하던 명성황후의 친족인 민씨 일파가, 자신들의 충복이자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인 이완용을 총리로 지지하여 새 내각이 수립되었다. (1915년)
이완용은 총리로 들어서자마자 지난 김옥균과 손문의 정상회담의 결과를 새로운 정권이 승계 하여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음을 분명히 밝히면서 북경 점령군을 철수시키지 않고 오히려 중국혁명군과 대치하고 있던 황하유역에 군대를 증원 배치하여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 갔다.
이러한 대한제국의 돌변한 태도에 중화민국 정부는 크게 당황해 강력한 유감을 표하고 일전을 불사한다는 결의로 황하를 경계로 대한제국군과 대치에 들어갔으나, 전직 총리이며 오랜 친구였던 김옥균이 서둘러 남경으로 가서, 대한제국 내부에서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니 자신을 믿고 기다려 달라고 간곡히 만류하여 즉각적인 군사행동은 일단 보류하게 되었다.
사실 신생 공화국으로는 여전히 자국내 각 정파와 군벌과의 대립관계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인데다가 더구나 군사적으로도 대한제국군과 전쟁을 치를 능력은 아직 갖추지 못한 처지였고, 국제적으로도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당분간 정세의 변화에 따른 외교적 해결을 기다리며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완용 내각도 비록 정권을 잡았다고는 하나 제국 의회 내 1당인 사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을 불사할 수도 없는 처지라서 협상을 통해 실리를 챙기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손문과 이완용은 김옥균의 주선으로 인천에서 은밀히 만나, 대한제국군이 북경에서 철수하는 대신에 중화민국은 만리장성 이북의 만주와 몽고, 그리고 대만 등에 대해서 더 이상 종주권을 요구하지 않고 만리장성이남의 漢族거주지에 대해서만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밀약을 맺게 되었다. 또 새로이 건설되는 중국 전역의 철도 부설권 등 각종의 막대한 이권을 개발을 명분으로 대한제국이 독점적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1916년)
손문도 현실적인 역학관계를 무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직도 도처에서 막강한 무장병력을 보유한 채 할거하고 있는 군벌 등의 반통일세력들을 감안할 때 정국의 시급한 안정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중화민주공화국이 현실적으로는 양자강 이남의 한족을 기반으로 성립된 정권으로, 청조 몰락 이후 당장 이민족인 만주와 몽고, 대만 등에 대해 재차 지배권을 행사하려 든다면 이들 민족의 저항이 분명 만만치 않을 것이고,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다시 대한제국과 러시아와의 분쟁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시급한 경제적 발전을 위해서는 현재로서는 완전한 자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약간의 국익이 유출된다고 하더라도 대한제국의 경제적 원조가 절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양국 정상들의 밀약으로 한중 양국의 국경은 만리장성을 경계로 하여 다시 확정되었으며, 이로써 13세기 말, 漢族의 宋을 멸망시킨 蒙古族이 元을 수립한 이후, 漢族의 明, 滿洲族의 淸으로 이어오며 한족과 북방민족의 단일 왕조가 번갈아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역사는, 600여 년만에 막을 내리게 되고 만리장성 이남의 漢族이 지배하는 중국과, 이북의 韓民族이 지배하는 대한제국으로 동아시아의 패권은 다시 나뉘게 되어 세계지도가 다시 그려지게 되었다.
이완용의 제국당 내각이 전쟁의 성격을 중국에 대한 지원에서 침략으로 변질시키자 야당인 사회민주당과 지식인, 학생들은 강력히 제국당 내각을 비난하고 나섰으나 대다수 시민들이 전쟁이 자신들에게 가져다 줄 이득을 타산하고 냉소적 방관으로 일관하여 반전운동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유럽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던 1차 세계대전은 지루한 진지전에서 벗어나 급격히 마무리로 치닫고 있었다. 미국이 결국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유럽전선에 참전하게 되어 세력의 균형은 급속도로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전쟁의 와중에 인민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의 혁명정부와 강화조약을 맺은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반격을 시도하나 결국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1차 세계대전의 결과, 유럽에선 독일의 몰락과 오스트리아제국의 해체로 수많은 새로운 민족국가가 발생하고, 오토만 투르크제국도 붕괴되어 북아프리카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아랍세계는 구미열강에 의해 급속도로 분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1918년)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러시아의 국내 사정은 점점 더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짜르인 니콜라이 2세가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을 독려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군 총사령관이 되어 전선을 누비고 있는 동안 페테로그라드의 황궁은 라스푸틴이라는 사이비 성직자의 손에 농락을 당하고 있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 허덕이던 페테로그라드 인민들은 식량 기근까지 겹치자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혁명의 시동은 방직공장의 어린 여자 노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굶주림에 지친 노동자들이 빵을 달라며 공장 문을 박차고 나섰으나 경찰에 의해 평화적인 시위가 무자비하게 진압되자 시위의 양상은 점차 폭력적으로 확산되어 나갔으며 전제정치를 타도하자는 정치적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경찰력으로는 한계를 느낀 제정은 용맹한 코사크 기병대를 출동시켜 노동자들을 진압하려 들었으나 역시 가난한 농민의 아들들인 코사크 병사들도 애절하게 호소하는 노동자들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하여 진압에 적극성을 띠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점차 시위대에 동조하는 경향이 확산되어 나갔고 마침내 경찰과 교전을 벌이는 등 점차 혁명군의 주력으로 변모해 나갔다. 공포에 질린 페테로그라드의 귀족과 자본가들은 하루 빨리 짜르가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돌아와 혁명의 불길을 잠재워 주기를 간절히 고대하였으나 기다리던 짜르의 군대는 오지 않고 그나마 자신들을 보호하던 군대마저 탈영을 거듭하여 혁명군의 진영에 합류해 들어갔다.
페테로그라드의 소요가 심상치 않자 짜르는 서둘러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선에서 귀환하려 하였으나 이미 상황은 끝이 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짜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페테로그라드에 선포된 계엄령은 거리에 포고문 한 장 붙여지지 않았고 황궁의 황후가 다급히 전선에 있는 황제에게 보낸 전보는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되어 왔다. 심지어 전선에서 귀환하는 황제의 전용열차 마저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도중에 멈춰 서 버리는 등 정국은 한 마디로 무정부 상태로 치달았다. 결국 짜르 니콜라이 2세는 퇴위를 결정하여 로마노프 왕조는 300년 영화를 마감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가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1917년)
황제의 퇴위 소식이 페테로그라드에 전해지자 자유주의자들의 결사체인 멘셰비키의 지도자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전쟁에 지치고 굶주림에 시달리며 평화와 빵을 원하던 인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임시정부가 제일 처음 취한 조치는 독일이 완전히 패배할 때까지 전쟁을 완수해야 한다는 청천벽력같은 포고의 발표였다.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보내며 혁명을 지도해 오던,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인 볼셰비키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왔다. 스위스에서 혁명소식을 접한 그는 서둘러 귀국 길에 오르려 하였으나 서로 이해가 다른 각 국의 방해와 저지로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가, 러시아 임시정부가 전쟁을 계속하려 들자 독일은 레닌이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그의 귀국에 동의하여 길을 터 주어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레닌은 자신의 이념에 대한 의심과 갈등이 전혀 없었다. 그는 대중의 기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투철한 눈과, 충분히 연구한 원칙을 현실에 맞게 다양하게 적응시키는 명석한 두뇌와, 눈앞의 결과를 초월하여 그가 설정한 궤도를 견지하는 불요불굴의 의지의 소유자였다. 오랜 여행 끝에 페테로그라드 중앙역에 도착한 레닌은 환영하러 나온 수천 명의 노동자 .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장갑차 위로 올라가 사자후를 토하였다. 그의 연설은 잔잔한 감동과 뜨거운 용기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종소리와도 같았다. 레닌이 인민대중들 앞에서 최초로 공개적으로 행한 연설은 '사회주의 혁명 만세'로 마무리되어졌다. 혼란스러웠던 혁명이 마침내 지도자를 얻게 된 것이었다.
볼셰비키 진영의 세력이 날로 확대되어 나가자 위기를 느낀 케렌스키는 레닌을 독일의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고자 하였고 볼셰비키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을 일삼았다. 노동자 . 병사로 구성된 볼셰비키 소비에트는 그 해 10월 7일, 마침내 다시 봉기하여 정부청사, 두마 등 주요 전략적 거점을 점거하고 임시정부를 간단히 무너뜨렸다. 이미 민심이 등을 돌린 상태라 케렌스키가 이끄는 멘셰비키들의 임시정부는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피 한 방울 보지 않고 권력은 레닌이 지도하는 볼셰비키 소비에트로 넘어갔다. 레닌은 새 정부의 주석이 되었고 트로츠키가 외상을 맡게 되었다.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었으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독일과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고, 구 체제의 관료들은 새 정부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자본가들은 공장문을 닫고 돈을 싸든 채 외국으로 줄행랑치기 바빴다. 아직도 짜르에 충성하는 귀족들과 장성들은 도처에서 기회를 엿보며 차라리 독일 황제의 군대가 빨리 진격해 들어와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기를 고대하고 있을 정도였고 미국, 영국, 불란서 등 서구 열강들도 독일과 교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적국인 독일보다 소련에 더 적대감을 표시하였다. 볼셰비키 혁명을 둘러싼 대내외적 조건이 간단치 않음을 간파한 레닌은 독일과의 협상에 적극 나서 우크라이나 등 비옥하고 광활한 영토를 넘겨주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강화조약을 맺는다. 레닌은 어차피 독일이 곧 전쟁에 패배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잠시 내주었던 영토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주위의 오해를 무릅쓰고 의정서에 서명하였던 것이었다.
볼세비키 혁명 직후 소비에트 혁명 정부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과 반혁명세력의 준동으로 사면초가 상태에서 고립무원의 궁지에 빠져들게 되었다. 독일은 강화조약의 대가로 차지한 우크라이나에 괴뢰정권을 수립하여 호시탐탐 페테로그라드를 위협하였고 영국과 불란서 등은 자국내 노동계급의 동요가 두려워, 당시 교전 중이던 독일보다 더 한 적대감으로 소비에트 정권을 붕괴시키고자 획책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강화로 동부전선에서 군대를 철수시켜 서부전선으로 집중시킨 독일의 공세에 부딪혀 적극적인 군사개입이 힘들자, 옛 러시아 제정의 장군들을 매수하여 자금과 무기를 공급하여 내부에서 반혁명활동을 하도록 선동하고 나섰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노골적인 지원으로 러시아혁명 이후 페테로그라드에서 도망쳤던 일부 귀족들은 소비에트 혁명정권의 영향력이 아직 미치지 못하던 우랄산맥 동쪽지역에서 제정복고를 노리는 반혁명군을 조직하여 세력을 점차 확대시켜 나가게 되었다. 반혁명군은 소비에트 혁명정권의 군대인 적군(赤軍)을 의식하여 백군(白軍)으로 자칭하며 스스로 러시아 제국의 원수라 자처하던 콜차크 제독의 지휘하에 혁명에 우호적이던 농민들에 대해 무자비한 백색테러를 자행하며 돌아다녔다.
짜르 니콜라이 2세와 황실의 가족들은 우랄산맥 근처에서 유폐 생활을 보내고 있었는데, 러시아 영토 깊숙이 반혁명활동을 지원하고 있던 체코여단이 이 지방으로 접근해 오자 이 지방의 치안 책임을 담당하고 있던 지역 소비에트는 체코여단이 짜르를 구출하러 오는 것으로 우려하여 독단적으로 짜르와 그의 가족들을 처형하고 말았다. 니콜라이 2세를 끝으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300년간의 영화도 막을 내렸고 유럽 절대왕정의 시대도 역사에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으로 처형된 찰스 1세와 프랑스 대혁명으로 처형된 루이 16세의 뒤를 따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비극의 왕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니콜라이 2세의 처형 소식이 서방에 알려지자, 혁명의 파급을 겁낸 제국주의 국가들은 직접적인 무력 개입을 결정하고 연합군을 결성하여 마침내 핀란드를 통하여 북러시아 아리한게리스크에 상륙하여 소비에트 적군(赤軍)과 교전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부전선에서 러시아와 교전에 들어간 구미 열강은, 독일과의 대전 이후 또 다시 전면적인 전쟁에 돌입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국내 노동계급의 반발로 자국 의회에서 전쟁비준이 통과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통한 전면전의 수행은 시도하지 않았다. 영국은 구미 연합군의 침공이 한계에 부딪히자 소비에트 정부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대한제국에게도 군사개입을 요청하여 시베리아를 침공해 줄 것을 희망하고 나섰다.
영국이 러시아혁명에 간섭해 줄 것을 공식으로 요청해오자, 이완용 총리가 이끌던 제국당 내각과 대자본가들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거대한 러시아의 사회주의 정권이 반가울 리 없었던 차에, 국내에서 점증되는 사회주의혁명의 기운도 잠재우고 한편으로 풍부한 자원이 있는 시베리아에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 파병을 고려하게 되었다. 제국의회에서 야당인 사회민주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비준을 통과시킨 이완용 내각은 마침내 몽고와 만주 주둔군 10개 사단 20만 명의 대병력으로 러시아 침공에 나섰다. 서부전선에서 소비에트 군대와 교전 중이던 구미 연합군이 각자의 내부 사정으로 소규모의 병력으로 소극적인 군사작전에 한정하고 있던 것에 반하면 동부전선에 투입된 대한제국의 원정군은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의 대한제국군은 백계 러시아군이라 불리던 반란군의 내응으로, 산재해 있던 볼셰비키 지방정부의 산발적인 저항을 쉽게 제압하고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광활한 영토를 장악하여 들어갔다. 이완용 내각은, 연이은 승리에 도취되어 소비에트 정권의 주력부대와 전면전을 불사하고 우랄산맥을 넘어 러시아의 중심부로 총진군을 촉구하는 강경파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의 이권을 확보하는 수준에서 종전하자는 온건파의 내부 대립이 격화되어 일단 확전을 위한 군사행동은 잠시 보류하게 되었다.
아직 혁명상황이 채 수습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폴레옹 이후 가장 강력한 침공군을 상대하게 된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정권은 혁명사수를 위한 총동원령을 내리고 구미 열강과 대한제국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에게 불복종운동과 파업투쟁을 선동하고 나섰다. 소비에트 적군(赤軍)을 총지휘하고 있던 트로츠키는, 구미열강과 대한제국과 교전 중이던 자신의 군대에게 보낸 포고문을 통하여 자신들과 교전 중에 있던 국가들과 인민들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우리가 연합국의 군대와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은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말기를 바란다. 돈과 피에 굶주린 세계와 더불어 노동과 이성과 국제적 연대를 원하는 숭고한 이상을 가진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들과 싸우고 있는 탐욕스럽고 호전적인 자본가들은 분명 우리들의 적이지만, 우리들을 지지하는 땀흘리고 노동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다수 인민들은 분명 우리들의 동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