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0년 전 기후변화 사건(5.9 ka event, 5.9 천년 사건, 기원전 3900년경)은 홀로세 기간 동안 발생한 주요한 기후 변화 중 하나로, 사하라 지역의 급격한 건조화와 관련이 있다. 이 사건은 사하라 사막의 형성과 아프리카 습윤기(African Humid Period, AHP)의 종결을 초래하여, 당시 인간 사회의 생활 방식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하라의 건조화는 인근 지역의 인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지역에서의 인구 이동과 농업의 발달, 도시화의 촉진 등과 연관이 있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나일강 유역의 고대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형성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시기적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우바이드 시기 말기에서 우루크 시기 초입이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3900
다음은 이언 모리스(Ian Morris)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책에서의 관련 내용이다.
…… 기원전 4500년 이후에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따라 과거와 비교할 만한 변화가 분명히 일어났겠지만 기원전 3800년 이후 나타난 변화만이 고고학자들에게 뚜렷하게 가시화된다.
마을이 대체 왜 점점 더 커지고 복잡해졌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농부들이 최초로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한 기원전 6000년에 지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전궤도와 불안정한 자전궤도 가운데에서 가장 따뜻하고 습한 지점에 도달했지만 기원전 3800년이 되면 세계는 다시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메소포타미아 농부들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짐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틀렸다. 서늘한 여름은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비를 머금은 몬순(인도양에서 남아시아 전역으로 부는 계절풍)이 약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비가 불규칙적으로 이전보다 드문드문 내리면서 메소포타미아는 오늘날 우리가 CNN 뉴스에 보는 대로 바짝 마른 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여러 요인이 상호작용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봄철 비가 감소하자 작물이 생장하는 기간이 짧아졌고, 이는 다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매년 여름 범람하기 전에 작물이 여문다는 것을 의미했다. 2000년에 걸쳐 메소포타미아 농부들이 고생스럽게 구축한 시스템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기후변화는 메소포타미아인에게 어려운 선택을 강요했다. 모래가 경작지를 잠식해오는 가운데 그들은 현실을 외면한 채 지금껏 해오던 대로 할수도 있었지만 수수방관의 대가는 기근과 굶주림, 어쩌면 아사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몬순에 덜 의존하는 지역으로 이주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농부들이 잘 가꾼 땅을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측면구릉지대-그들이 갈 데가 확실한 곳-는 이미 마을로 차고 넘쳤다. 2006년 시리아 북동부 텔 브라크에서 고고학자들은 아무래도 학살의 희생자로 추정되는 젊은이들이 안장된 기원전 3800년 무렵의 거대한 무덤 두 기를 발굴했다. 인구가 밀집되고 폭력적인 측면구릉지대로 이주하는 것은 그리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충분한 수의 메소포타미아인이 그곳을 뜨거나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면 이 새로운 핵심부는 붕괴했으리라. 그러나 세 번째 대안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마을을 버릴 수도 있었지만 메소포타미아에 머무르면서 몇몇 대도시로 모여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선택 같다. 수확량이 떨어지고 있는데 더 좁은 공간으로 사람을 몰아넣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메소포타미아인은 더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일한다면 더 큰 관개시설을 운영할 수 있을 테고, 작물이 익는 시기까지 홍수로 불어난 물을 더 많이 저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들은 땅에서 구리를 파내는 더 많은 광부, 장신구와 무기, 도구를 만드는 더 많은 대장장이, 이러한 상품을 주변으로 나르는 더 많은 상인을 먹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인은 대단히 성공을 거두어서 기원전 3000년이 되자 청동(구리와 약간의 주석 합금)은 석기 무기와 대부분의 석기 도구를 대체했고 전사와 일꾼들의 효율성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했다. 해답은 중앙집권화였다. 기원전 3300년이 되자 사람들은 작은 점토판에 자신들의 활동을 매우 정교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이를 상징문자(비록 극소수의 서기 엘리트만이 읽을 줄 알았겠지만)라고 부른다. 그러한 고도로 복잡한 활동을 뒷받침할 수 없는 작은 마을들은 벽에 부딪힌 반면 우루크 같은 곳은 아마도 2만 명이 거주하는 진정한 도시로 탈바꿈했다.
메소포타미아인은 관리와 회의, 보고서를 발명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괴롭히는 골칫거리이자 인류의 원대한 위업에 관한 서사에 도통 어울리지 않는 소재들이다. 그러나 다음 몇 장에서 분명해지듯이, 그것들은 종종 사회발전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었다. 조직은 측면구릉지대와 황허 강 유역을 따라 있는 마을을 도시와 국가, 제국으로 변모시켰다. 조직의 실패는 몰락을 가져왔다. 관리자들은 우리의 이야기에서 영웅이자 악당들이다.
※ 발췌 : http://yellow.kr/blog/?p=7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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