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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받이 , 보쌈, 그리고 일본의 요바이 및 훈도시 이와이 v2 (수정됨)
게시물ID : history_305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EDRRR빨간달걀
추천 : 2
조회수 : 97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4/09/12 09:38:23

어제 조선의 씨받이에 대한 글이 올라왔는데, "근거가 없어도 없는 소리 하겠느냐" 라는 식의 발언이 종종 보여서 작성합니다.

https://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data&no=2024615

원래는 없었는데 후손들이 왜곡시킨 조선시대 풍습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라는 영화는 오로지 조선일보 주필 이규태가 쓴 기사 몇 줄에서 시작한 시나리오입니다.

https://namu.wiki/w/씨받이(영화)


그에 대해 임권택이 직접 "김진문이 아주 저급한 시나리오를 하나 가지고 왔다" 라고 할 정도로 근거고 뭐고 없었던 겁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25170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 이 책에서 그 내용이 언급됩니다.


씨받이가 있었을 것이라 주장한 기사는 이것 뿐입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3/01/22/1993012270503.html

씨받이와 씨내리(이규태코너)
조선일보 1993.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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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반에 직업적으로 아이를 낳아주고 다니는 씨받이 부인을 보쌈으로 싸들고 와서 눈을 가린채 씨를 받고서 다시 보쌈으로 싸들고 나감으로써 씨받는 집이나 씨를
내린 사람의 정체를 모르게끔 진행이 된다. 이렇게 하여 열달 만에 낳은 아기가 아들일 때 그 씨받이 대가로 논 한마지기에서 서마지기를 주고 낳은 아기가 딸일 때는 찾아가지 않는 대신 양육비조로 논 서마지기 내지 다섯마지기를 주는 것이 한말까지의 관례가 돼있었다. 아무나 씨받이 부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친형제나 사촌의 남녀비율에 있어 남아가 우세해야 하며 친-외가의 조부모나 부모가 회갑을 넘겨 살아야 하고 몹쓸병에 걸려 있는 사등친이 없어야만 한다. 그만큼 유전질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씨받이와는 반대로 남편이 아이를 낳지 못할 때 뜨내기 소금장수나 땜장이 등 뜨내기 사나이를 매수,은밀히 아내와 동침시켜 수태시킴으로써 자기 자식인체 혈통을 잇는 습속도 있었다. 이를 씨내리 라 했다. 씨내리의 전통은 유구하다. 고려때 밀직사부사의 벼슬에 있던 허유는 아이를 낳을 수 없음을 고민하다 가문의 어른들과 의논한 끝에 아내의 허락을 얻고 건장하고 병이 없는 종 하나를 골라 자신의 아내와 동침시켜 아들을 낳고 있다. 그후 허유는 임포 콤플렉스
와 질투를 감당할 수 없어 씨내리를 한 아내의 양쪽 귀를 잘라내는가 하면 종의 코를 뚫어 고삐를 꿰는가 하면 국부를 잘라내기까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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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1012400239104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1-01-24&officeId=00023&pageNo=4&printNo=15318&publishType=00010

우리의 것을 아는 大連載(대연재) 奇俗(기속) ⑩ 「아들至上(지상)」이 낳은 悲劇(비극)「移動(이동) 人間(인간)공장」
조선일보 | 1971.01.24 기사(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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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읍내에 사는 박소사란 여인은 그곳 가문 높은 김씨 종가에 시집온 지 15년 만에야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이건 종사를 잇는 뜻에서 굉장한 경사였다. 한데 그 귀동자의 첫 이레가 지난 날 경사를 가져오게 한 어머니인 박소사가 대청마루 대들보에 목매어 죽은 것이다.

이 경사에 곁들인 비극을 풀이하는 데는 "씨내리" 라는 "씨받이의" 대칭된 기속의 설명없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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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천한 신분이거나 가난한 과부로서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미신적인 체모를 갖추었거나 또 아들을 많이 낳은 실적이 있는 여자가 아들을 낳는다는 일을 직업화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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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의 서술을 봐도 "실제 조선시대의 서술" 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근거라고 들고 온 건, "고려의 밀직사부사 허유" 의 사례 뿐인데, 이 또한 근거가 그렇게 탄탄한 게 아닙니다.

 

어디에서 그런 걸 들은 적이 있다 라는 내용, 즉 카더라 수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교차 검증 가능한 녹음 같은 것조차 남아 있는 게 없습니다.

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다시피 오로지 "어디서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밖에 없죠.


이에 대해서 반박해보자면.

 

1.

"어디서 ~~~한 것을 들었다" 라는 것 자체가 사실이며, 씨받이 라는 것이 암암리에 실재했을 것이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 "~~~라고 말하던 (카더라)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다" 라고 하는.

아주 흔한 소문의 전파 형태 "카더라의 카더라" 라도 나와야 정상 아닐까요?

애초에 그걸 들었다고 하는 동네는 찾아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조선일보 주필 이규태의 생전에 씨받이에 대한 근거 제시를 요구했을 때도 그러했고, 사후에도 그런 동네가 발견되었다는 정황조차 검색되지 않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겠냐" 라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씨받이 라는 영화가 뉴스에 나오는 등 난리가 났었을 때 제보라도 있어야 되는 거 아닐까요?


씨받이 라는 영화의 주연이었던 강수연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것 자체가 그 당시 아주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202179085Y

[한국영화 세계 3대 영화제 역대 수상 사례]

 

애초에 이렇게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저영화가 엄청난 화제가 되면서 씨받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마냥 기정사실화된 것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저 영화가 화제가 된 시점에서 제보가 나와야 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역사학자, 민속학자 들이 나름대로 연구를 해봐도 나오는 게 "그런 거 없더라" 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실제로 기록이 없기 때문이었다는 거죠.


1987년대는 "조선 = 야만" 라는 식의 서술이 거의 무조건 먹히던 시기였기도 합니다.

심지어 임진왜란 등에 대해서 무조건 조선 잘못 이라는 궤변이 먹히던 시기니까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문이 자멸 테크 -> 멸문 당한 거 홀랑 빼먹고, 마치 토쿠가와에 양위라도 한 것처럼 인식되던 수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흔한 제보 하나 안 들어오고 검증이 하나도 안 되었는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2.

근거로 든 사례 또한 그저 몰아가기에 불과한 수준입니다.

확증 편향 또는 모호성에 근거한 부적절한 결론에 불과하거든요.

 

 

조선일보 1971년 1월 24일 기사의 언급에서 이러한 오류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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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읍내에  사는 박소사란 여인은 그곳 가문 높은 김씨 종가에 시집온 지 15년 만에야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이건 종사를 잇는 뜻에서 굉장한  경사였다. 한데 그 귀동자의 첫 이레가 지난 날 경사를 가져오게 한 어머니인 박소사가 대청마루 대들보에 목매어 죽은 것이다.

이 경사에 곁들인 비극을 풀이하는 데는 "씨내리" 라는 "씨받이의" 대칭된 기속의 설명없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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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의 근원인 며느리가 아들을 낳고 자/살한 것을 두고 "씨받이의 근거다!" 라고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귀한 아이를 낳고 자/살했으니, 씨받이의 중압감을 못 이긴 것이라고 하는 수준이죠.


단적으로 말해, "산후 우울증" 에 대해서 그 당시에는 정의가 애매하거나 그저 "정신력 만능론" 으로 찍어누르던 시기였던 것을 악용했을 뿐입니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216XXXH003185

산후 우울증 - 다음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7187&cid=51007&categoryId=51007

산후 우울증 - 네이버 백과

http://www.snuh.org/health/nMedInfo/nView.do?category=DIS&medid=AA000617

산후 우울증
[postpartum depression]

- 서울대학교 의학정보

 

https://ko.wikipedia.org/wiki/산후우울증

 

1970년대는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에 대한 문제 제기 및 논의 제기를 죄다 "정신력 만능론" 으로 찍어누르던 시기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람보" 같은 영화에서 대두된 참전 용사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 입니다.

이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하면 최소한 패튼까지 치고 올라가야 됩니다만, 몇 가지 근거만 제시하겠습니다.

 

http://yonseiwell.kr/board02/771

'아직도 우울증은 의지의 문제라고 말하는 분들께'

 

불과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의지 드립" 으로 찍어누르기 바빴다는 근거가 의학 쪽에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논의 자체는 최소한 1900년대 중후반 언저리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며, 그에 대한 정황 중 하나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이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1971년에 "산모가 자살한 것이 씨받이의 실재 근거다!" 라고 주장한 게 바로 이규태입니다.

1971년, 그러니까 논의가 제기되고 있는 언론에서 이렇게 몰아버린 겁니다.

이게 빼액질이 아니면 도대체 뭘까요?

 

https://www.google.com/search?q=산후+우울증+자살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40108/122950520/1

“아이는 예쁜데 자꾸 눈물이 나요”…엄마의 산후우울증 극복기[죽고 싶은 당신에게]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2910

자살까지 부른 ‘산후 우울증’

https://www.seoul.co.kr/news/society/2021/07/11/20210711500031

[단독]엄마는 신생아를 안고 몸을 던졌다…위험한 ‘산후우울증’

https://www.cwmhc.or.kr/bbs/board.php?bo_table=data1&wr_id=78

'산후우울증', 죽음까지 부른다

 

산후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까지 이어지는 사례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로지 "자/살했다" 하나 만으로 씨받이라고 정의하는 건 매우 위험합니다.

이러면 위에 첨부한 사례 전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간통의 결과로 낳은 아이라서 죄책감을 못 이기고 자/살한 거다" 라고 해야 할까요?

 

3.

또다른 근거라고 언급되는 허유의 사례 또한 "간통에 대한 처벌" 이라는 부분을 왜곡한 것으로 보입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3/01/22/1993012270503.html

씨받이와 씨내리(이규태코너)
조선일보 1993.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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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반에 직업적으로 아이를 낳아주고 다니는 씨받이 부인을 보쌈으로 싸들고 와서 눈을 가린채 씨를 받고서 다시 보쌈으로 싸들고 나감으로써 씨받는 집이나 씨를
  내린 사람의 정체를 모르게끔 진행이 된다. 이렇게 하여 열달 만에 낳은 아기가 아들일 때 그 씨받이 대가로 논 한마지기에서  서마지기를 주고 낳은 아기가 딸일 때는 찾아가지 않는 대신 양육비조로 논 서마지기 내지 다섯마지기를 주는 것이 한말까지의 관례가  돼있었다. 아무나 씨받이 부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친형제나 사촌의 남녀비율에 있어 남아가 우세해야 하며 친-외가의 조부모나  부모가 회갑을 넘겨 살아야 하고 몹쓸병에 걸려 있는 사등친이 없어야만 한다. 그만큼 유전질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씨받이와는 반대로 남편이 아이를 낳지 못할 때 뜨내기 소금장수나 땜장이 등 뜨내기 사나이를 매수,은밀히 아내와 동침시켜  수태시킴으로써 자기 자식인체 혈통을 잇는 습속도 있었다. 이를 씨내리 라 했다. 씨내리의 전통은 유구하다. 고려때 밀직사부사의  벼슬에 있던 허유는 아이를 낳을 수 없음을 고민하다 가문의 어른들과 의논한 끝에 아내의 허락을 얻고 건장하고 병이 없는 종 하나를  골라 자신의 아내와 동침시켜 아들을 낳고 있다. 그후 허유는 임포 콤플렉스
와 질투를 감당할 수 없어 씨내리를 한 아내의 양쪽 귀를 잘라내는가 하면 종의 코를 뚫어 고삐를 꿰는가 하면 국부를 잘라내기까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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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유가 임포 콤플렉스를 감당할 수 없었다 라는 것에 대한 서술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만, "아내를 고문하고 학대했다" 라는 부분에 대한 서술이 존재합니다.


https://db.history.go.kr/id/kr_105r_0010_0020_0070

허유 -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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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유는 성격이 혹독하고 포악하여 첩이 가노(家奴)와 간통하였다며, 첩의 두 귀를 베고 두 눈을 상하게 하였으며, 또 그 노비의 두  눈을 뽑고 덧붙여 귀·코·발꿈치를 베었으며 또 그의 생식기를 베어 첩에게 먹게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이 몸을 움츠렸다. 그에게는  이러한 종류의 일이 많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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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두고, 씨내리를 하고 콤플렉스를 감당 못 해 고문과 학대를 저지른 다음 "간통죄를 뒤집어 씌운 거다" 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간통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정황을 증명할 수 있는 정황 증거라도 제시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근거 제시는 찾기 어렵습니다.


https://ncms.nculture.org/ceremonial/story/1611

씨내리

https://ncms.nculture.org/ceremonial/story/1500

씨받이

 

그러나, 이러한 왜곡이 무한정 되먹임 (피드백)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씨내리, 씨받이 모두 근거자료는 오로지 이규태의 서술 뿐입니다.

현재 한국 민속학 관련 자료에서 오로지 이규태의 서술이라는 "권위" 하나에 의지해서, 최소한의 교차 검증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포함시키고 있는 상황이며, 이런 악순환조차도 일종의 권위화되어서 "설마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냐" 라는 잘못된 인식이라는 불에 기름을 자꾸 끼얹고 있는 겁니다.

 

4.

이규태의 "천한 신분" 관련 언급에서도 오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씨받이라는 것이 실제로 가능했을지 어떨지에 대한 검토는 이 링크를 확인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https://esendial.tistory.com/9638

231102_씨받이: 없는 전통을 진짜로 만드는 법


---- 여기서부터 첨부한 링크의 트위터 논의 발췌 첨부 ----

https://x.com/hanbok_duckjil/status/1718660551524733322

사실 전혀 유서깊은 문화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에서나 들어와서 잠깐 생긴 악습이지 조선시대만 해도 민간의 어염집은 물론 왕실에서도 씨받이를 들였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실록에서도 정사에서도 소설에서도 야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https://x.com/woochick2/status/1718880725586600241

일단 양자 쪽이 훨씬 당연하고 씨받이 개념은 진짜 최후의 수단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낳아도 백일 못 버티고 죽는 아기가 몇이며 산모가 산달까지 못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인데 차라리 돌까지 버틴 건강한 아이를 입양하는 게 훨씬 신뢰도가 높단 말입니다.


https://x.com/HanbokPantry/status/1718771987873661320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게 조선초부터 적서차별이 엄격해서 100%자기씨인 첩자식도 자식취급을 못했던 문화가 소설로 그대로 남아있는데... 씨받이 문화가 있을리가 없었음...

 

https://x.com/EfTrpg/status/1718798261413429261

왜 머스크 멜론을 좋아하는 인간들은 이렇게 쥐뿔도 아는 게 없으면 당당한 걸까 조선시대에는 모친의 신분이 자식에게 그대로 넘어가는 사회였음 그러니까 부친의 아무리 양반이어도 모친이 평민이나 노비면 그 신분으로 라벨링 되는 것

 

https://x.com/HanbokPantry/status/1718771987873661320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게 조선초부터 적서차별이 엄격해서 100%자기씨인 첩자식도 자식취급을 못했던 문화가 소설로 그대로 남아있는데... 씨받이 문화가 있을리가 없었음...


https://bsky.app/profile/esendial.bsky.social/post/3kczzhqovsn2e

그쵸? 특히 씨내리의 경우 남의 집안 씨앗이 들어오는 걸 양반들이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고요. 씨받이는, 적서차별을 뒤늦게서야  떠올렸습니다. 그러니 있을리가 없죠. 있었을거라 확신(..)했던 이유도 20세기 들어서의 처첩에서는 첩의 자식을 본처 자식  아래의 동일 호적에 두고 같이 대우했기 때문에 당연히 있었을 거라 생각했던 것도 있었고요. 차별이 없/덜했으니 조선도 그랬을거라는  착각에서. 덤으로, 씨내리와 씨받이 관련 이규태 칼럼을 붙여 둡니다. 이게 아마도 착각의 원인..

---- 여기까지 첨부한 링크의 트위터 논의 정리 발췌 첨부 ----


요약하면.

조선에는 "일천즉천" 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이규태가 언급하고 있는 천민 중에서 골라온 "아들 잘 낳을 것 같은 여인" 이라는 명제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겁니다.


4 - (1) 

천민 또는 몸종을 씨받이로 삼고 "은폐했다" 는 것 자체를, 홍길동이라는 조선시대 소설의 설정 및 실제 사회 규칙 등을 통해 반박할 수 있습니다.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465308

[역사 속 전라도]홍길동, 장성서 태어난 실존인물

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21/07/28/2021072802464.html

홍길동 실존 인물은 '노인 도적'... 소설 속 '청년 의적' 과 달라

 

https://namu.wiki/w/홍길동

https://namu.wiki/w/홍길동(조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994

주인공 홍길동은 조선조 세종 때 서울에 사는 홍 판서의 시비(侍婢) 춘섬이 낳은 서자이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道術)을 익히고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기상(氣像)을 보였으나, 첩의 자식[賤生]이었기 때문에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恨)을 품는다.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非凡)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禍根)이 될까 두려워하여 자객(刺客)을 시켜 길동을 없애려고  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홍길동_(조선)

조부는 밀직부사 홍징(洪徵)[3]이며, 이복형은 홍귀동(洪貴童)·홍일동(洪逸童)이라 한다.[4] 

그는 조선 연산군때 도적떼의 우두머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존 인물이며, 선조허균이 지은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실제 모델로 알려지고 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그를 임꺽정(林巪正)·장길산(張吉山)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으로 꼽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홍길동은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존재하는 외척 출신 도둑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탐관오리를 징치(懲治)하고, 핍박받는 서민들을 위해 싸운 의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홍길동이라는 캐릭터는 "몸종 춘섬" 의 아들로 태어난 얼자 (서자와는 다릅니다.) 입니다.

아들이 없어서도 아니었으며, 귀한 아들이 태어날 것 같아서 부인과 동침하려 했으나 "대낮부터" 라며 거부당해서 몸종과 동침해 얻은 아들이 홍길동이라는 거죠.


그리고 홍길동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 하는 설움" 이며, 서얼의 문제 자체를 제기하는 겁니다.

애초에

몸종 춘섬이 홍길동을 낳은 것을 은폐하고, "본부인의 자식" 으로 위장되는 것과 확실한 경계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4 - (2)

천민에게서 태어난 자식 자체를 무조건 은폐했느냐 자체도 반박 가능합니다.

 

https://namu.wiki/w/서얼

천민에 해당하는 종노비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은폐" 하는 게 아니라, 서얼로 분류했습니다.

양천즉천의 원칙에 의해서 서얼 자녀는 천민이 되어야 하나, 대구속신 등의 방법을 동원해 천민이 되는 것은 막았던 경우가 많았다고 하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056

대구(代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wordrow.kr/대구속신

노비를 대신 세워서 자신의 신역을 속하는 일.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hm/view.do?levelId=hm_107_0080

노비의 신분 상승-속량


종노비에게서 태어난 자녀를, 은폐 공작을 통해서 본부인의 자녀인 것처럼 할 필요성 자체가 없었다는 겁니다.


또한, "아들이 없는 집안" 에서는 양자를 들이면 그만이었습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10

양자 (養子) - 아들이 없는 집에서 자신의 대를 잇기 위한 목적으로 동성동본(同姓同本) 구성원 중에 항렬이 맞는 남자를 자식으로 맞아들이는 제도.


적자녀가 없는 집안인데, "서얼 아들 - 얼자" 때문에 양자도 못 들이고 적장자가 없는 경우 씨받이를 들이는 은폐공작을 통해서 적장자를 만들어내지 않았겠느냐 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율곡 이이의 사례로 반박할 수 있습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8_0040_0020_0020_0020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주장한 이이는 서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는 슬하에 적자 없이 서자만 있었는데 후에 서자를 승중시켜서 가통을 잇게 하였다. 그런데 이이의 사후에 그의 직계 후손들은 명문가의 자녀들과 전혀 혼인할 수가 없었으며, 그래서 결국 명문가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https://www.google.com/search?q=이이+서자+승계


서얼허통 이라는 적자 - 서자 차별 완화 정책을 내세운 이유에는, 저런 개인적인 이유 또한 개입되어 있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합니다.

여튼간에, 실제로 거의 억지로 계승한 사례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고 해서 정부 차원에서의 처벌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정말 아들이 없다면 전술한 대로 양자를 들여버리면 장땡입니다.

씨받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은폐 공작이라는 위험 부담이 필요한 과정 자체가 필요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를 지나 후기가 되면 왕족에서는 아예 서얼이고 나발이고 따지지 않게 됩니다.

영조의 혈통 문제를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죠.


천민 출신으로 추정되는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의 소생에서 왕의 자리에 앉혀진 게 영조입니다.

 

https://kostma.aks.ac.kr/Contents/Dongyi/Default.aspx?Body=19

숙종의 후계자는 어떻게 결정되었나?


물론 숙빈 최씨가 정말 천민 출신이었나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완벽하게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https://kostma.aks.ac.kr/Contents/Dongyi/Default.aspx?Body=01

https://www.yna.co.kr/view/AKR20100408165000005

동이[숙빈최씨]는 천민 출신이었을까?


단, 이에 대한 근거가 오로지 "품계가 낮았다" 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구전과 야사에서 "숙빈 최씨는 천출이었다" 라는 부분을 찾을 수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천민 씨받이는 은폐 대상" 이라는 말이 반박되는 겁니다.


4 - (3)

면천에 대한 역사 기록 또한 "천민 출신 씨받이는 은폐 대상" 이라는 부분을 반박하는 근거가 됩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6256

면천 (免賤)

https://ko.wikipedia.org/wiki/면천_(조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2757

노비 (奴婢)


위에 어지간한 부분은 다 서술해서 간단하게 쓰자면.

대구속신 등의 방법도 있으며, 애초에 천민 출신 여인 자체를 면천 시켜서 양인으로 만든 다음 결혼해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게다가 영조 이후로는 종모법도 사라집니다. (이 또한 영조가 혈통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런데 굳이 씨받이라는, 은폐공작이 필요한 위험한 수단을????


게다가 씨받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합니다.

임신과 출산은 하루 아침에 가능한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태의 서술에서는 "야반" 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면서 야반도주와 같은 뉘앙스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초장문이며, 이건 상식이라고 생각하기에 임신 출산에 대한 근거자료 첨부까지는 생략하겠습니다.

적어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 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순도 100% 상식선에서 납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5.

씨받이가 암암리에 존재했을 것이라는 구전 또는 야사 기록 몇 줄 이라도 남아있으면 모를까.
근거라고는 오로지 "내가 어렸을 때 그런 경우를 봤다" 라고 하는 조선일보 주필 이규태의 카더라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규태의 "어렸을 때" 는 일제강점기 입니다.


https://namu.wiki/w/이규태

아무리 잘 쳐도, 이규태의 소학교 시절 광복을 맞았다고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이규태가 "내가 보고 들었다" 라는 시점은 무조건 일제 강점기에 해당한다고 봐야 됩니다.
그렇다면 이규태가 보고 들었다는 사례가 실존했다고 쳐줘도, 오히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인 쪽에서 건너온 악습을  쪽에서 강제로 이뤄진 사례를 보고 오해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암암리에 일어난 것이라고 하면, 하다못해 구전 또는 야사 기록 몇 줄이라도 있어야 정상입니다.
위에 언급되는 "영조의 천출 어머니" 관련 구전 및 야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과거에 제가 한 번 댓글로 작성했던 사례 또한 그런 사례에 들어가는 게 있어서 하나 끌고 오겠습니다.
https://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454832
(19금)원숭이 나라의 어질어질한 성문화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보쌈" 이라는 문화 또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좋지 않은 문화" 라고 해서 기록을 없앴을 거다 라는 것에 대한 반대 증거나 다름없습니다.

참고로 요바이와 보쌈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지능 인증 사례" 가 종종 보이는데, 우리나라의 보쌈은 어디까지나 과부의 재가 과정에서 벌어지는 "자작극" 일 뿐이었습니다.
약탈혼, 납치혼 같은 형태로 진짜 진행하면 관아에서 족쳤다는 기록까지 남아있거든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453
https://www.youtube.com/watch?v=Ej4iIAyNQdY
나비모양의 표식, 사전 연락 등등 그 어떤 것이던 간에 보쌈 당하는 여자쪽에서 '보쌈당할 의지'가 있는 겁니다.
애초에 저 본문에서도 '여자가 갖고 있는 이불보로 여자를 보쌈해간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강간죄는 처벌 대상이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spogood/90158824506
https://dh.aks.ac.kr/sillokwiki/index.php/범간(犯奸)
옛날에는 열 살 언저리만 넘기면 시집 장가 갔다 운운하는 것 또한, 디테일 다 팔아먹고 극히 일부 사례 또는 역사적인 비극적인 사례를 억지로 일반화한 것에 불과한 게.
- 역사적인 사례 : 공녀로 보내지 않기 위해, 임시로 혼인 약조만 맺던 고려시대의 조혼 같은 경우 (실제 합방은 관례 이후)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039905
https://www.yna.co.kr/view/AKR20170428083300797
조선시대에 12살 언저리 건드리면 작살났습니다? "결혼해서 책임지겠다" 같은 소리 안 먹혔습니다.

이런 기록이 남아있는 조선시대에 , 실제로 "강제 납치 보쌈" 이라는 게 성행했다면 "기록 몇 줄" 조차 남아있어야 정상이라고 보는 게 맞을까요?
"철저히 은폐했을 거다!" 라고 하는 게 과연 합리적인 주장일 수 있을까요?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3087753

조선후기 인신매매 사건과 숙종대 함경도로의 인신매매 금지 규제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443663
인신매매 브로커 처벌 관련
 

사실상 강제 납치 보쌈이라는 건, 인신매매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신매매범들을 추적해서 처벌한 사례가 명명백백하게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위와 같이, 조선시대는 납치와 같은 인신매매는 물론이고 강간죄 같은 성범죄 또한 엄하게 처벌했으며 그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씨받이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교차검증이 문제가 아닌 수준입니다.

이런 걸 두고 "철저하게 은폐했으니까 없겠지" 라고 주장하는 것을 합리적인 주장 또는 "다른 생각" 이라 받아들여야 할까요?


언급한 김에 요바이에 대해 조금 써보자면.
일본의 요바이는 그 당시 기준으로도 그저 관습이라는 형태로 답습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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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ja.wikipedia.org/wiki/夜這い
また明治以降、夜這いの風習が廃れたことを、夜這いと言う経済に寄与しない風俗を廃して、各種性風俗産業に目を向けさせ、税収を確保しようとする政府の意図が有ったのではないか、としている[21]。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요바이의 풍습을 금한 것을 두고, 성 풍속 산업 (매춘 산업) 을 통해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요바이 대신 풍속업과 같은 매매춘을 통한 경제 활동을 촉진하려는 메이지 정부의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해석 또한 존재한다.

なお、日本の共同体においては、少女は初潮を迎えた13歳、または陰毛の生えそろった15 - 16歳から夜這いの対象とされる(ただし、婚姻中は対象外となる場合もある。この辺りは共同体により様々である)[22]。その際に儀式として性交が行われた[23]。少年は13歳でフンドシ祝いが行われ、13歳または15歳で若衆となるが、そのいずれかの時に、年上の女性[注 5]から性交を教わるのが儀式である。その後は夜這いで夜の生活の鍛練を積む[25]。
또한, 일본의 공동체 중에서는, 13세 언저리에 초경을 맞이한 소녀 또는 음모가 어느 정도 돋아나는 15~16세 부터 요바이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단, 기혼자는 대상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공동체별로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러한 의식의 과정으로 의식으로 성행위가 이루어졌다. 훈도시 이와이는 소13세의 소년이 13세~15세의 젊은이 무리에 섞여드는 과정이기도 하며, 그러한 연령대의 시기에 연상의 여성과 직접 성교를 하며 성교육을 받는 의식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는 요바이를 통해 야간 생활을 위한 단련을 쌓아가는 식이었다.

赤松は明治42年(1909年)兵庫県の出身であるが[注 6]、この当時はまだフンドシ祝いが残っていたと言う[27]。適当な相手が見つからない場合、実父や実母がその相手を務める場合もあった[28]。日本の共同体では夜這いの前に以上の如くの性教育が行われた。ちなみにこの様な次第であると当然、赤ん坊が誰の子であるのかよく解らない、などと言った例がよく見られたが、共同体の一員として、あまり気にすることなく育てられた[29]。
효고현 출신의 아카마츠는 메이지 42년 (1909년) , 당시에는 훈도시 이와이가 남아있었다고 증언했다.
적당한 상대를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친부모가 상대역을 맡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공동체에서는 요바이를 행하기 전 ,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성교육이 이루어졌다.
덧붙여, 이러한 행위가 이루어짐에 따라, 아이의 부친이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 수 없는 경우 같은 사례를 흔히 찾아볼 수 있었으나, 이러한 경우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딱히 신경쓰지 않고 양육하곤 했다.

훈도시 이와이
https://ja.wikipedia.org/wiki/褌祝
褌祝(ふんどしいわい、へこいわい)
https://kotobank.jp/word/褌祝-562328
https://kotobank.jp/word/褌祝-1587322
훈도시이와이 또는 헤코이와이 라고 읽는데, 성인식에 해당하는 "원복 (元服)" - 우리나라에서는 관례 라고 하는 의식을 치른 뒤에 성적인 의식을 치르는 것이라 생각하면 됩니다만.
만약 적당한 이성 상대가 없을 경우는 친부모 중 한쪽이 자녀의 "첫경험 (겸 성교육)" 을 해주는 게 바로 훈도시 이와이 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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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ん坊が誰の子であるのかよく解らない、などと言った例がよく見られたが

아기가 누구 아이인지 알 수 없는 경우, 같은 사례를 쉽게 (자주) 찾을 수 (보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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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과정에서 요바이라는 명목으로 상호 약속도 안 되었거나 "이미 거절당한 상대" 를 강간하는 경우도 상당히 발생했다는 겁니다. 이는 "아빠를 알 수 없는 아이가 발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라는 부분을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어머니 입장에서 아이의 부친이 누군지 알 수 없는 경우의 수를 정리하면.
(1) 요바이 상대가 누구인지 아예 알 수 없었다
(2) 요바이 상대가 불특정 다수라서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라고 해도 막장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사전 통보" 같은 게 아예 없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죠.
이런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요바이와 보쌈의 차이를 명확하게 가르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아빠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아이" 자체가 문제 아니냐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메이지 정부에서 금지한 이후인 메이지 42년까지도 훈도시 이와이 및 요바이가 남아있었다는 부분 또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https://www.consumer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347

"성관계로 애 낳아주는 '씨받이'해 드립니다"


일본은 2007년까지는 실제로 저런 식의 대리모를 찾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남아, 중국, 러시아 등으로 대리모를 찾는 조건 중 하나가 "실제 성관계" 를 명기하는 식이었거든요.


그 숫자도 그리 작지 않았습니다.


https://www.newsis.com/view/NISX20140815_0013110638

泰대리모 통해 아기 낳은 日 남성 "최소 100명 가능하면 1000명까지 아이 낳고 싶다"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165
“성관계해서라도 대리모 하겠다”


일본에서 대리모가 불법이니까, 해외에서 대리모를 찾는 것인데.

인공수정이 아닌 "실제 성관계" 조건을 내거는 게 진짜 충격적인 부분이거든요.


그럼 여기서부터.

이규태가 직접 보고 들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지 제 나름대로 생각하고 정리해보겠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요바이를 기어이 강행하는 "재조선 일본인" 의 사례를 보고 싸잡았거나, 요바이를 강행한 일본인을 보고 마치 조선인에 의한 씨내리 또는 씨받이로 잘못 기억한 게 아닌가 싶다는 겁니다.
무자녀 가정의 일본인 유부남이, 딴 집 "조선인 여자" 에게 요바이를 강행하면서 자신의 자녀를 얻으려고 한 거 아니냐는 거죠.

 

이는 "내선일체" 라는 명목으로 혈통 지우기를 했던 일제의 방향성하고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기도 하고요.
이걸 보고 이규태가 "내가 어릴 적에 본 적 있다" 라고 했던 게 아닌가 싶다는 거죠.

 

"이규태의 서술 몇 줄" 에 근거해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를 근거로 삼아, "실존했을 가능성" 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위에도 언급했다시피, 오로지 이규태의 서술 만이 근거자료로 제시되는 되먹임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거든요.


근거도 없는 이규태의 서술을 되먹임하는 것을 무한 반복하는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에는, "조선 = 야만" 이라는 프레임을 어떻게든 되살려서 일제강점기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목적이 개입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입니다.

전술한 바, 지금까지도 대리모라는 명목으로 "실제 씨받이" 를 하고 있는 일본의 사례가 있음에도 말입니다.


 

---- 글 수정으로 추가 ----

이러한 흔적을 구글 검색을 통해 찾아볼 수 있습니다.

 

https://www.google.com/search?q=씨받이+일제+폐지

 

조선 후기까지 존재했던 악습을 일제가 폐지했다고 가르치는 경우가 실재했다고 배웠다고 하거나, 그런 식의 서술이 있었다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거든요.
"조선 = 야만 and 일제 = 합리 및 이성적" 이라는 프레임의 시도라고 의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 글 수정으로 추가함 ----

 

"가능성" 을 언급하고 싶으신 분들은.

"씨받이" 에 대한 야사 같은 실마리라도 찾아오신 다음 가능성을 언급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최소한 실마리라도 찾아와서, "조선은 이랬다!" 라고 말씀하시는 게 옳지 않을까요?

 

여담 -

 
한 가지 밝혀둘 점.
이 게시물에 댓글을 쓸 때 "훈도시와이" 라고 언급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https://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data&no=1949501#memoWrapper100318058
제가 반박 댓글을 댓글을 작성했을 당시에는, 일본 위키 쪽 요바이 서술에서 "훈도시 이와이 - フンドシ祝い" 를 제대로 못 읽었습니다.
용어를 제대로 읽어야 하는데, 뭐라 변명은 못 하겠고. 그냥 제가 그때 눈에 뭐가 씌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왜 못 읽은 건지 스스로 이해가...)

이러한 오류 및 잘못에 대한 사과를 올립니다.

여담 2 -

요바이 관련으로 타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AV 에 나올법한 내용이 실재했다는 기록을 본 기억이 있는데, 관련 키워드가 찾아내지 못 해서 생략했습니다.
일본 민속학 관련 논문을 보던 중 , "이거야말로 진짜 일본판 씨받이구나" 라는 느낌이 드는 용어를 봤던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불과 몇 년 전에도 "이거 혹시?" 싶은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것도 기억을 복원해보려다가 실패한 관계로 생략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우바스테야마를 두고 고려장이라고 날조한 사례처럼, 일본에서 실재했던 악습을 조선 쪽에 뒤집어 씌우려고 발악하는 것들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요바이 및 훈도시 이와이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글을 하나 쓰겠습니다.

사실, 글 후반에서는 근거자료 첨부가 좀 부실한 이유가... 기를 너무 빨려서... [털썩]

---- 글 수정으로 추가 ----
요약
 
1. 씨받이, 씨내리 의 실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2. 씨받이, 씨내리의 위험 부담이 오히려 더 컸다.
3. 씨받이, 씨내리의 위험 부담을 감당할 필요 없이, 조선 시대의 기존 제도 (ex: 양자) 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4. 씨받이, 씨내리를 일제가 폐지해준 거다 라고 날조하고 유포한 집단의 흔적이 있다.
출처 https://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data&no=2024615
원래는 없었는데 후손들이 왜곡시킨 조선시대 풍습

https://namu.wiki/w/씨받이(영화)
씨받이라는 영화로 시작된 논란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25170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 김진문이 아주 저급한 시나리오를 하나 가지고 왔다 라는 언급이 등장한 책자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3/01/22/1993012270503.html
씨받이와 씨내리(이규태코너) 조선일보 1993.01.22.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1012400239104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1-01-24&officeId=00023&pageNo=4&printNo=15318&publishType=00010
우리의 것을 아는 大連載(대연재) 奇俗(기속) ⑩ 「아들至上(지상)」이 낳은 悲劇(비극)「移動(이동) 人間(인간)공장」 - 조선일보 | 1971.01.24 기사(기획/연재)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202179085Y
[한국영화 세계 3대 영화제 역대 수상 사례]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216XXXH003185
산후 우울증 - 다음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7187&cid=51007&categoryId=51007
산후 우울증 - 네이버 백과

http://www.snuh.org/health/nMedInfo/nView.do?category=DIS&medid=AA000617
산후 우울증 [postpartum depression] - 서울대학교 의학정보

https://ko.wikipedia.org/wiki/산후우울증

http://yonseiwell.kr/board02/771
'아직도 우울증은 의지의 문제라고 말하는 분들께'

https://www.google.com/search?q=산후+우울증+자살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40108/122950520/1
“아이는 예쁜데 자꾸 눈물이 나요”…엄마의 산후우울증 극복기[죽고 싶은 당신에게]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2910
자살까지 부른 ‘산후 우울증’

https://www.seoul.co.kr/news/society/2021/07/11/20210711500031
[단독]엄마는 신생아를 안고 몸을 던졌다…위험한 ‘산후우울증’

https://www.cwmhc.or.kr/bbs/board.php?bo_table=data1&wr_id=78
'산후우울증', 죽음까지 부른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3/01/22/1993012270503.html
씨받이와 씨내리(이규태코너) - 조선일보 1993.01.22.

https://db.history.go.kr/id/kr_105r_0010_0020_0070
허유 - 고려사

https://ncms.nculture.org/ceremonial/story/1611
씨내리

https://ncms.nculture.org/ceremonial/story/1500
씨받이

https://esendial.tistory.com/9638
231102_씨받이: 없는 전통을 진짜로 만드는 법

https://x.com/hanbok_duckjil/status/1718660551524733322
사실 전혀 유서깊은 문화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에서나 들어와서 잠깐 생긴 악습이지 조선시대만 해도 민간의 어염집은 물론 왕실에서도 씨받이를 들였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실록에서도 정사에서도 소설에서도 야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https://x.com/woochick2/status/1718880725586600241
일단 양자 쪽이 훨씬 당연하고 씨받이 개념은 진짜 최후의 수단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낳아도 백일 못 버티고 죽는 아기가 몇이며 산모가 산달까지 못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인데 차라리 돌까지 버틴 건강한 아이를 입양하는 게 훨씬 신뢰도가 높단 말입니다.

https://x.com/HanbokPantry/status/1718771987873661320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게 조선초부터 적서차별이 엄격해서 100%자기씨인 첩자식도 자식취급을 못했던 문화가 소설로 그대로 남아있는데... 씨받이 문화가 있을리가 없었음...

https://x.com/EfTrpg/status/1718798261413429261
왜 머스크 멜론을 좋아하는 인간들은 이렇게 쥐뿔도 아는 게 없으면 당당한 걸까 조선시대에는 모친의 신분이 자식에게 그대로 넘어가는 사회였음 그러니까 부친의 아무리 양반이어도 모친이 평민이나 노비면 그 신분으로 라벨링 되는 것

https://x.com/HanbokPantry/status/1718771987873661320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게 조선초부터 적서차별이 엄격해서 100%자기씨인 첩자식도 자식취급을 못했던 문화가 소설로 그대로 남아있는데... 씨받이 문화가 있을리가 없었음...

https://bsky.app/profile/esendial.bsky.social/post/3kczzhqovsn2e
그쵸? 특히 씨내리의 경우 남의 집안 씨앗이 들어오는 걸 양반들이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고요. 씨받이는, 적서차별을 뒤늦게서야 떠올렸습니다. 그러니 있을리가 없죠. 있었을거라 확신(..)했던 이유도 20세기 들어서의 처첩에서는 첩의 자식을 본처 자식 아래의 동일 호적에 두고 같이 대우했기 때문에 당연히 있었을 거라 생각했던 것도 있었고요. 차별이 없/덜했으니 조선도 그랬을거라는 착각에서. 덤으로, 씨내리와 씨받이 관련 이규태 칼럼을 붙여 둡니다. 이게 아마도 착각의 원인..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465308
[역사 속 전라도]홍길동, 장성서 태어난 실존인물

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21/07/28/2021072802464.html
홍길동 실존 인물은 '노인 도적'... 소설 속 '청년 의적' 과 달라

https://namu.wiki/w/홍길동

https://namu.wiki/w/홍길동(조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994
주인공 홍길동은 조선조 세종 때 서울에 사는 홍 판서의 시비(侍婢) 춘섬이 낳은 서자이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道術)을 익히고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기상(氣像)을 보였으나, 첩의 자식[賤生]이었기 때문에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恨)을 품는다.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非凡)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禍根)이 될까 두려워하여 자객(刺客)을 시켜 길동을 없애려고 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홍길동_(조선)

https://namu.wiki/w/서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056
대구(代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wordrow.kr/대구속신
노비를 대신 세워서 자신의 신역을 속하는 일.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hm/view.do?levelId=hm_107_0080
노비의 신분 상승-속량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10
양자 (養子) - 아들이 없는 집에서 자신의 대를 잇기 위한 목적으로 동성동본(同姓同本) 구성원 중에 항렬이 맞는 남자를 자식으로 맞아들이는 제도.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8_0040_0020_0020_0020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주장한 이이는 서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는 슬하에 적자 없이 서자만 있었는데 후에 서자를 승중시켜서 가통을 잇게 하였다. 그런데 이이의 사후에 그의 직계 후손들은 명문가의 자녀들과 전혀 혼인할 수가 없었으며, 그래서 결국 명문가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https://www.google.com/search?q=이이+서자+승계

https://kostma.aks.ac.kr/Contents/Dongyi/Default.aspx?Body=19
숙종의 후계자는 어떻게 결정되었나? - 영조 관련

https://kostma.aks.ac.kr/Contents/Dongyi/Default.aspx?Body=01
https://www.yna.co.kr/view/AKR20100408165000005
동이[숙빈최씨]는 천민 출신이었을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6256
면천 (免賤)

https://ko.wikipedia.org/wiki/면천_(조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2757
노비 (奴婢)

https://namu.wiki/w/이규태

https://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454832
(19금)원숭이 나라의 어질어질한 성문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453
https://www.youtube.com/watch?v=Ej4iIAyNQdY
나비모양의 표식, 사전 연락 등등 그 어떤 것이던 간에 보쌈 당하는 여자쪽에서 '보쌈당할 의지' 를 표명

https://blog.naver.com/spogood/90158824506
https://dh.aks.ac.kr/sillokwiki/index.php/범간(犯奸)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039905
https://www.yna.co.kr/view/AKR20170428083300797
조선시대의 성범죄 처벌 관련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3087753
조선후기 인신매매 사건과 숙종대 함경도로의 인신매매 금지 규제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443663
인신매매 브로커 처벌 관련

https://ja.wikipedia.org/wiki/夜這い
요바이 (夜這い) 일본 위키 서술

https://ja.wikipedia.org/wiki/褌祝
훈도시 이와이 또는 헤코이와이 (褌祝) 일본 위키 서술

https://kotobank.jp/word/褌祝-562328
https://kotobank.jp/word/褌祝-1587322
훈도시 이와이 또는 헤코이와이 일본 코토바뱅크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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