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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역사소설]대한제국200년사-(13)대원군 그리고 메이지유신
게시물ID : history_47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013년체제
추천 : 22
조회수 : 106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6/18 22:03:56
헌종이 즉위 14년 만인 2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죽자 헌종의 할머니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일파는, 헌종의 어머니인 대비 신정왕후와 풍양 조씨 일파가 미리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로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인 원범(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헌종의 죽음으로 6촌 이내의 친족이 전무한 상태였지만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아래 항렬에서 왕통을 잇게 하는 게 원칙이었다. 왜냐 하면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 일족은 자신들의 등쌀에 강화도까지 쫓겨나 거의 평민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원범을 선택하여 황실의 법통마저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 것이었다.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일파가 굳이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범을 선택한 이유는 황실의 명예와 체통은 아랑곳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세도를 독점적으로 유지하기 위함이었고,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여타의 명문대가와 아무런 인척관계를 맺지 않고 있지 않은 채 평범하게 살고 있던 원범이 자신들의 구미에 적격이었던 것이다. 

자유당은 일단 법통에 어긋나는 일이라 반대의사를 표명하지만 황제계승권은 전적으로 종친의 결정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별달리 반대할 수 있는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었고, 더 이상 황실에 어떠한 기대도 가지고 있지 않던 터라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이로써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고 나무를 내다 팔던 원범은 18살의 나이로 황제에 오르게 되었다. (184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철종이 즉위하자마자 중전 간택에 나서, 선대인 헌종의 중전에 자신의 가까운 친척인 김조근의 딸을 간택한데 이어 철종의 중전 역시 안동 김씨 문중의 김문근의 딸을 간택하는 뻔뻔한 작태를 저지르고 이로써 안동 김씨 일족의 세도는 최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영은부원군에 오른 김문근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제국당이 다시 승리하자 안동 김씨 일파가 장악하고 있던 제국당의 당수가 되어 새 총리대신에 오르게 되었다. (1855년) 

철종이 재위 14년 만인 33세의 나이로 헌종에 이어, 또 다시 세자를 두지 못한 채 죽자 황제계승권은 헌종의 친모인 신정왕후 조대비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 동안 시어머니인 순조의 비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일족에 구박받으며 살아온 조대비는 이 번 기회에 안동 김씨 일족의 세도를 무너뜨리고자, 일본 통감으로 가 있던 먼 황실의 종친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결탁하여 그의 둘째아들 명복(고종)을 11살의 나이로 황위에 오르게 하였다. (1863년) 

고종의 황위 승계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등장으로,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이나 권력을 독점해 온 안동 김씨 일족은 긴장하게 되고 그 동안 집권당에 속해 있으면서도 안동 김씨들의 권력독점에 소외당하던 제국당 비주류들은 이하응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이은 청국과 일본과의 연이은 전쟁의 과정에서 수많은 군수물자가 소요돼 산업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나 점차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발전하여 곳곳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파업을 통한 생존권 투쟁이 격화되어 나갔다. 또한 산업화 과정에서 인구의 집중으로 필연적으로 발생한 도시문제는 주거, 환경, 교육, 위생, 치안상의 여러 문제들을 한꺼번에 발생시켜 정부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제국당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들은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저항 등 급격한 사회변동에 적잖이 당황하였고, 이하응이 이끄는 당내 비주류는 자유당과의 협상을 촉구하고 나섰다. 야당인 자유당과의 협상에 나선 제국당은, 전쟁수행을 위한 재원마련과 국회비준을 얻기 위해 자유당과 시민계급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유당과의 대타협으로 제국 의회는 혁명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제반 조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먼저 기존에 양반들에게만 주어졌던 참정권을, 평민들 중에서도 중소상공인과 중농 등 일정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는 자들과 과거를 통과하여 관직에 오른 자들에게도 확대해서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평민들의 관직 승진 제한도 철폐하였다. 

또한 정조유신으로 이루어졌던 관노 해방에 이어, 모든 사노도 해방시켜 노예제를 완전 철폐시켰다. 해방된 사노들은 주로 새로 건설되는 철도현장에 임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제헌의회 수립 이후 중국과 일본과의 연이은 전쟁의 소용돌이 중에 치러진 2번의 총선에서 연거푸 참패하고 일부 전쟁지지파의 이탈로 당세가 크게 위축된 자유당은, 정조유신정권의 영의정을 지낸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명예혁명의 영웅 박규수를 영수로 하여 진열을 정비한다. 

또 대한제국 최초의 신문인 〈대한순보(大韓旬報)〉를 간행하는 등 여전히 엘리트 정당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고 인민들에게 보다 가깝게 접근하기 위한 당의 정책 정비에 나섰다. 반면 제국당은 주류인 안동 김씨 일파들과 흥선대원군을 수장으로 하는 비주류로 분열되고 이 와중에 전 총리대신 김좌근의 양자로 세도를 누리며 유력한 차기 총리대신 감으로 주목됐던 국방상 김병기가 한일전쟁의 와중에 군수업체로부터 뇌물을 먹었다는 수뢰사건이 이하응 일파에 의해 누설되자 안동 김씨 일파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다. 

국방상 김병기의 수뢰사건으로 당내 주류인 안동 김씨 일파가 여론의 집중적인 포화를 맞고 있는 가운데 치러진 제국당의 총재 및 차기 총리 후보 경선을 위한 전당대회장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주류가 내세운, 현 총리 김문근의 조카인 김병학의 연설이 끝나고 비주류의 지지를 받고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연단에 오르자 장내는 일순간 술렁거림을 보였다. 

이하응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존경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 도대체 어쩌다가 우리 당의 꼴이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까? 우리 당은 정조대왕을 모시고 노론 벽파가 지배하는 몽매한 봉건사회를 혁파하여 인민을 도탄에서 구하고 조국을 번영의 길에 올려놓은 주체세력으로서 자부심을 가진 그런 당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이젠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젊을 때만 해도 막걸리 집에서 제국당의 당원증을 맡기고 외상 술을 얻어 마실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 주모한테 수고한다고 덤으로 안주까지 한 접시 더 얻어먹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제국당원이라고 하면 동네 골목에서 어린아이들에게조차 손가락질 받아야 되는 그런 참으로 한심한 처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당을 이 꼴로 만든 그 모든 책임은 바로 안동 김씨 일파에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점잖지 못한 표현을 써가며 직접 안동 김씨 문중을 거론하고 나서자 단상에 앉아 있던 현. 전직 총리대신인 김문근과 김좌근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이쯤 되면 반대파의 야유가 터져 나오고 소란스러워 졌겠지만, 상대가 황제의 아버지이고 실세로 떠오르는 흥선대원군인지라 장내는 더욱 깊은 적막감으로 빠져들어 갔다. 

"순조의 비도, 헌종의 비도, 철종의 비도 모두들 안동 김씨인데 도대체 어느 문명국가에서 국왕의 중전이 한 집안에서 대물림하며 내려온단 말입니까? 아무리 권력이 좋아도 그렇지 이건 바로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반인륜적 행위인 것입니다. 

또 황제의 외할아버지. 외삼촌. 이종형제. 이제는 조카까지 나서서, 총리니 총재니 장관이니 외갓집에서 돌려가며 다 해먹으면 도대체 의회는 무슨 필요가 있으며 또 정당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냥 안동 김씨 문중회의를 하는 것이 낫지. 

물론 백 번 양보해서 정치라도 잘하면, 백성이 잘 먹고 잘 살게만 해준다면 외갓집 개라도 정승. 판서를 시켜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전쟁통에 백성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허리를 졸라매며 먹을 거 못 먹고 하나의 총알이라도 더 만들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국방상이란 자가 군수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아먹고 질 나쁜 무기를 납품을 하다니 도대체 하늘이 무섭지도 않단 말입니까? 

더구나 지금 단상에 앉아 계신 안동 김씨 문중의 높으신 양반들의 귀한 자제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들 하는지 아신다면 아마 더욱 놀라 뒤로 자빠지실 겁니다. 지금 우리 귀한 아들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이역만리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고관대작의 자제란 것들은 유학한답시고 편안히 영국의 비싼 대학에서 공부는 안하고 허구한 날 자신들이 조선의 왕족이라 그러고 다니면서 백인 여자애들 끼고 파티니 뭐니 하며 돈을 펑펑 쓰고 다닌답디다. 제 말이 틀리면 어디 여기 나와 해명들 해보시죠." 

대원군의 연설이 시간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하자 안동 김씨 문중의 고관대작들의 얼굴은 거의 사색으로 변해갔고, 반면에 장내는 대원군의 추상같은 지적에 열화와 같은 환호를 보낸다. "저는 황제의 아버지라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안동 김씨 문중이 반세기 이상이나 권력을 독점하면서 저질러 놓은 폐해를 바로 잡고 실추된 황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더 이상 바라지도 않고 딱 한 임기만 하고 물러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시 우리 당의 총리 후보로 안동 김씨 문중의 지긋지긋한 '근(根)'자 돌림에 이어 이제 '병(炳)'자 돌림 마저 내놓는다면 그 땐 바로 자유당의 젊은 친구들에게 정권 내놓아야 합니다. 인민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도 않으며 더 이상 참지도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옛날에 우리 양반들끼리 투표할 때야 사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그렇다 치지만 이제 상황은 다릅니다. 새로 투표권을 얻은 시민계급들이 얼마나 우리를 지지할 것 같습니까?" 제국당의 전당대회에서 황실의 권위를 배경으로 당내 비주류였던 이하응이, 주류인 안동 김씨 문중이 지지한 현직 총리대신 김문근의 조카인 김병학을 누르고 제국당 총재로 당선되어 정조 사후 30년간에 걸친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정치는 마침내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변화된 정세를 배경으로 치러진 총선에서, 박규수가 이끄는 자유당이 중소상공인. 중소자작농 중하위 관리. 교사 등 새로 참정권을 획득한 시민계급의 절대적 지지를 얻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보수당과 합당한 제국당은 아직도 선거인의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고위관리. 대지주. 대상공인 등 양반계급들로부터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어 제 1당의 위치는 가까스로 지켜내었다. 

4대 총선의 결과는 제국당 53, 자유당 43, 기타 4의 의석 분포로 나타나고, 제국당내 경선에서 안동 김씨가 내세운 김문근의 조카 김병학을 압도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새로운 총리에 오르게 되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이 무너진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제국당과 자유당의 양당구조가 정착되고 그 지지 기반도 더욱 명확해지게 된 것이었다. (1865년) 




한일전쟁 후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지배력은 급속히 약화되고 막부타도를 위한 도막파(倒幕派)들의 왕정복고를 위한 거사 계획도 급속도로 진행되어 나갔다. 도막파는 막부를 공격하기 위한 선전 수단으로 쿄토에 있던 조정을 내세워 존왕양이론(尊王洋夷論)을 제창하고 나섰다. 

이 존왕양이라는 사상은 본래는 별개의 뜻으로 존왕사상은 일본의 왕을 천황으로 받드는 고유의 전통과 역사의 오랜 과정 동안 형성된 사상이고, 양이사상은 쇄국정책의 고수와 유학의 화이사상(華夷思想)의 세계관에 기초한 배외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별개의 두 사상을 하나의 존왕양이 사상으로 결합시켜 낸 것은 막부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외세의 침략에 따른 위기의식의 발로이며 천황의 권위를 중심으로 국가체제를 강화하여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여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데 있었다. 

1860년 3월 3일은 일본의 고유 명절로 이 날 따라 에도에는 아침부터 뒤늦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에도성에 오르던 막부의 실력자 나오스케의 행렬이 궁성 앞에 이를 무렵 갑자기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지고 이를 신호로 근처에 잠복 중이던 10여 명의 사무라이들이 일제히 행렬을 덮치면서 나오스케의 목을 날려 버렸다. 

이 사건은 바로 막부타도를 위한 도막파의 본격적인 무력행동의 서곡이었던 것이었다. 강경파인 나오스케의 죽음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막부는 한발 양보하여 요직개편을 단행하고 조정과 막부가 서로 협력하는 이른바 공무합체(公武合體)의 실현에 정책의 중점을 두게 되었다. 

공무합체의 정책으로 막부와 도막파의 대립이 지루하게 잠복해 있던 중, 존왕파의 본거지 중 하나인 사쓰마번의 다이묘(大名) 모치히사의 아버지인 히사미쓰는 천황의 막부개혁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에도로 갔다가 귀환하는 길에 요코하마에 다다랐다. 일본의 중심지 에도의 관문인 요코하마는 새로 개항된 이후 외국의 무역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수많은 상가와 유흥가가 밀집해 한적한 어촌에서 화려한 국제도시로 변모해 가던 중이었다. 

요코하마는 개항 이후 외국의 선원들과 원주민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히사미쓰 일행이 중심가를 지나칠 즈음 4명의 말을 탄 영국인이 나타나 그들의 긴 행렬과 부딪히게 되었는데, 히사미쓰의 가마를 호위하던 사무라이들은 순간 이들이 반외세 세력의 주요 인물이던 자신들의 영주를 습격해 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일제히 달려들어 단칼에 토막을 내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요코하마 일대는 순식간에 기름솥처럼 들끓게 되었고, 마침 항구에 정박 중이던 영국 . 프랑스 . 네덜란드의 해병들이 총동원되어 대한제국 주둔군의 묵인 하에 상륙하여 히사미쓰 일행을 체포하기 위해 요코하마 전역을 벌집 쑤시듯이 들쑤셔 놓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영국 정부는 막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책임자의 처벌과 함께 10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하면 무차별 공격하겠다고 협박하고 요코하마 앞바다에 12척의 함대를 집결시켜 무력시위를 벌였다. 

영국의 무리한 요구에도 결국 막부가 굴복하자 존왕양이를 기치로 내건 도막파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이들의 주요 근거지인 죠슈번의 시모노세키와 사쓰마번의 가고시마에서 정박 중이거나 인근 해역을 항해하던 외국 군함과 상선에 대해 일제히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두 도시의 공격에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미국 4개국은 연합군을 구성하여 양이운동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두 도시에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고 나섰다. 외국 연합군이 두 도시에 대해 함대를 동원하여 무차별 포격을 가하고 해병대 병력을 상륙시킬 태세까지 보이자, 지난 한일전쟁 이후 이 곳에 주둔하고 있던 대한제국 해병대는 강력한 경고의 뜻을 전달하고 즉각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응징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내고 한편으로는 죠슈와 사쓰마 두 번에 더 이상의 도발을 감행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대한제국군 큐슈 주둔사령부의 중재로 양측은 일단 휴전을 하게 되고 일본측은 선제 공격에 대한 배상과 책임자의 색출에 따른 처벌을 약속하는 선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이번의 교전으로 무조건적이고 배타적인 양이운동이 현실적인 힘에 밀려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도막파들은, 막부를 타도하고 구미열강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대한제국의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대한제국을 자신들의 편에 끌어들이기 위해 은밀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죠슈번과 사쓰마번이 중심이 된 도막파와 막부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던 와중에 쇼군(將軍) 이에모치가 갑자기 죽고 그 뒤를 계승한 요시노부는, 한발 늦게 일본으로 진출한 프랑스의 은밀한 지원에 힘입어 도막파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여 나갔다. 막부와 도막파의 대립이 나날이 치열해 갈 무렵 토사번의 고토(後藤象二郞)는, 기존의 존왕양이론(尊王洋夷論)과는 다른 공의정체론을 (公議正體論)을 주창하고 나섰다. 

공의정체론은 막부와 제번이 동등한 자격으로, 쇼군을 의장으로 하는 일종의 의사결정기구인 열번회의를 개최하여 이 기구에서 주요 정치 기능을 담당하자는 일종의 중재안인 것이었다. 이 안은 죠슈번과 사쓰마번 등 막부를 무력으로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정체를 확립하려는 강경파의 일관된 입장과는 달리, 막부와의 타협을 전제로 하여 과두지배체제를 확립하려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나아가 쇼군이 위임받았던 정치권력을 천황에게 반환한다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의 건의서도 동시에 제출되는데, 세의 불리함을 직감한 쇼군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에 동의하고 새로이 구성되는 열번회의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이 중재안에 찬성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중재안이 수용되면 막부타도의 구실이 없어질 것을 염려한 도막파는 쇼군의 제거를 위한 막후공작에 착수하고 연합군을 상인으로 위장시켜 은밀히 쿄토로 잠입시켰다. 쿄토의 조정에서 천황(天皇)과 조정대신, 쇼군(將軍)과 다이묘(大名)들이 참석한 가운데 일종의 정국수습을 위한 정치협상회의가 소집되었다. 

어전회의가 시작되자 잠복해 있던 도막파는 막부지지파를 기습하여 무장해제 시키고 궁궐의 안팎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천황의 칙서가 발표되자 막부의 기대와는 달리 앞서 논의되어 오던 열번회의 등 새로운 정치기구의 설립은 모조리 묵살되고 왕정복고를 통한 천황의 친정체제가 전격적으로 발표되었다. 

어전회의는 막후공작에 따른 도막파의 일방적 승리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청천벽력 같은 의외의 일격을 당한 쇼군 요시노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장군직을 사퇴하고 영지마저 반납하라고 강요하는 도막파들의 공격에 크게 당황하여 황급히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오사카로 철수했다. 

막부군과 막부토벌군의 최후의 결전에서 사기가 꺾인 막부군이 참패하자 결국 대세가 기울어감을 뼈저리게 느낀 쇼군 요시노부는 자진해서 물러나고, 막부 권력의 근거지인 에도성이 막부토벌군에 의해 무혈 점령되었다. 이

로써 도쿠가와 정권을 끝으로 600년에 걸친 막부통치는 일본 역사에서 그 종말을 고하게 되고, 막부타도에 성공한 혁명세력들은 당시 13살이 된 무쓰히토를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으로 옹립하여 천황제를 수립하고 중앙집권국가의 체제정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1868년) 

도쿠가와 막부는 이 과정에서 각계 요로를 통해 대한제국과 구미열강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했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오히려 반막부세력을 은밀히 지원하여 막부의 몰락을 방치해 버렸다. 반막부세력은 궁극적으로 일본에서 대한제국 뿐 아니라 외세를 축출하고 자주적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꿈꾸고 있었으나, 막부를 타도하기 위한 우선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대한제국의 절대적인 지원 내지는 최소한의 중립을 절실히 필요한 터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한 정치공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일본의 민심이 막부에 완전 등을 돌리고 있었고, 반막부 연합군이 곳곳에서 막부군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막부토벌군을 무력으로 진압하더라도 일본 전역을 온전히 통치하기에는 많은 희생이 따를 것이라고 판단하고, 우선 천황을 내세워 민심을 수습하고 친한 정권의 수립을 유도하기로 최종 결정한 상태였다. 

대한제국은 아울러 막부를 노골적으로 지원하고 나서던 프랑스 등 구미열강들에게 외교적 경로를 통해 일본 내전에 개입하지 말 것을 강력히 경고하여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나섰던 것이었다. 에도에 천황이 등극한 이후에도 내륙과 동북부지역은 여전히 봉건 번주의 영향력 아래 절대적으로 장악되어 거의 독립적으로 할거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일본 정부군은 대한제국군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봉건세력의 일소를 위한 군사정벌에 나섰다. (1872년) 일본 정부는 구 막부세력들을 완전히 제압하고 일본 전역을 철저히 장악하기 위해 대한제국군의 군사력을 손쉽게 이용하려 하였지만, 대한제국군은 일본 정부의 통일전쟁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일본 전역을 군사적으로 차례차례 점령해 들어갔다. 

3년에 걸친 통일전쟁의 결과로 일본 정부가 전국을 완전 장악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일본 전역은 10만의 대한제국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간파한 일본 정부는 천황의 요청으로 대한제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나, 대한제국 정부는 자국민 보호와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오히려 일본 정부군의 해산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본 정부는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한제국과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주전파와, 대한제국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일본 전역이 참혹한 전쟁으로 큰 화를 당할 것이라는 현실론을 앞세운 주화파로 각각 나뉘어 격렬한 내부 논쟁을 벌이게 되나, 결국 대내외적으로 구미열강의 외침과 봉건세력의 반동 가능성이 여전히 상존해 있는 처지에 대한제국의 보호 아래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기로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외상 김홍집과 일본국 총리대신 이와쿠라 도모이(岩倉貝視)는 쿄토에서 최종협약을 맺고, 일본의 새 정부는 한일전쟁후 도쿠가와 막부와 체결한, 통감부에 내정과 외교에 대한 감독권을 두기로 한 요코하마 조약의 효력을 그대로 승계 받기로 하였다. 

또 대한제국 육군은 봉건세력의 위협이 소멸하는 시점까지 주요 거점에 주둔하도록 하고, 주요항구는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여 대한제국 해군이 수비하도록 하는 한편 일본군은 전체 병력 수를 제한하여 개인화기 정도만 허용하는 수준의 경무장에 한하도록 하는 조약안을 비준하였다. 

대한제국의 영향 아래 어릴 때부터 교육받고 성장한 죠슈출신의 이토오 히루부미(伊藤博文), 사카모도 료오마(板本龍馬) 와 사쓰마출신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이 이끄는 일본 정부는 에도로 천도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내정개혁을 단행하여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하여 나갔다. 이후 일본의 새로운 지배세력은 천황중심제를 강조하는 이토오 히루부미(伊藤博文)일파의 왕당파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오쿠마 시게노부(大常重信)일파의 입헌파로 나뉘고, 제국당은 전자를, 자유당은 후자를 각각 지지하여 일본정국은 정부 수립 이후에도 혼미를 거듭하였다. 

일본 정국의 거듭된 혼미상황은 장기적으로 일본을 식민지화하려는 의도를 감춘 제국당 정부가, 일본 자체의 헌법과 내각을 두려는 움직임을 원천봉쇄하고 나선 데 크게 기인한 탓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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