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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역사소설]대한제국200년사-(9)아편전쟁
게시물ID : history_47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013년체제
추천 : 29
조회수 : 1118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2/06/14 22:36:35
강희(康熙). 옹정(擁正). 건륭(乾隆) 삼대에 걸쳐 한 세기를 넘어 이어진 청제국의 전성기는 가경제(嘉慶帝)에 들어 서서히 쇠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청제국 쇠퇴의 표면적 원인은 최후의 대제국을 건설했던 건륭제의, 10여 차례에 걸친 대규모 외정에 따른 국가재정의 고갈에 두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절대 권력의 장기화에 따른 관료정치의 부패에 기인했던 것이다. 

건륭제의 잦은 출병은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막대한 경비의 지출에 따른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필연적 결과로 이민족이 세운 정복왕조에 대한 민심은 더욱 멀어져만 갔고 결국 가경제가 즉위하자마자 발생한 '백련교도의 난'과 조청전쟁의 참패로 국운은 결정적으로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은, 산업혁명 이후 과잉공급 되고 있던 자국 생산품의 시장 확보에 혈안이 되어 새로운 식민지를 찾아 나섰다. 반면 청제국은 번성기의 끝자락의 달콤한 여운에 도취되어 여전히 몽매한 꿈속을 나른히 헤매고 있었다. 

영국과 중국의 무역은 이미 18세기 초반부터 적은 양이나마 거래되어 왔다.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것은 주로 차와 생사, 도자기 등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중산층의 소득이 증가하자 따라서 기호식품인 차의 소비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이에 따른 차의 수입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반면 영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것은 주로 모직물 정도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중국인들은 모직물을 몽고 등 유목민족이나 입는 것으로 치부하고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더구나 영국이 무역을 허용 받은 지역이 따뜻한 남쪽의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직물의 인기는 더욱 시들하였다. 

이러한 무역역조의 결과로 당시 양국간의 결제 수단으로 사용되던 멕시코 은화가 중국으로 대량 유출되어, 동양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동인도회사 뿐 아니라 영국 정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수출할 새로운 상품의 개발에 고심하던 동인도회사는 당시 의약품으로 사용되던 아편을 기호상품으로 둔갑시켜 중국에 대량으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아편의 흡연으로 재정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인민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지자 청 조정은 아편금지령을 내리고 아편의 유통을 강력히 근절하려 하나 아편 흡연의 유행은 오히려 들불처럼 번져나가기만 했다. 

영국 상인들의 아편 밀무역으로 대량의 은이 유출되어 국가재정이 피폐해 지고, 인민의 건강까지 위협 받게되자 가경제에 이어 즉위한 도광제(道光帝)는 호남과 호북총독 시절 아편의 유통과 흡연을 금지하여 성과를 올린 적이 있는 임칙서(林則徐)를 양광총독(광동과 광서총독)으로 임명하고 흠차대신(欽差大臣-황제로부터 임시로 권한을 부여받은 대신)으로 삼아 아편 밀무역의 근거지인 광주(廣州)로 내려보내 아편 밀무역을 근절하도록 명령한다. 흠차대신으로 임명된 양광총독 임칙서는 임지에 부임하기 전에 미리 두 통의 포고문을 광주에 보냈다. 외국과의 무역 독점권을 얻은 특허 상인의 조합인 공행(公行)에 보내진 포고문은

'앞으로 영원히 외국 상인들로부터 아편을 반입하지 않겠다. 명령을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하고 재산은 모두 몰수해도 좋다는 서약서를 3일 이내로 제출하라. 만약 서약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너희들이 오랫동안 간사한 외국상인과 결탁하여 사리 사욕을 채운 죄로 삼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할 것이다.' 

라는 강력한 내용으로 일관해 공행의 상인들은 공포에 질리게 되었다. 또 광주에 주재하는 외국 각국의 상관인 이관(夷館)에 보내진 포고문은 아편 무역의 비인도성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우리 대황제께오서 천하 만민을 차별 없이 대우한다는 뜻에서 너희들에게 무역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너희는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 너희는 이 같은 은혜에 감사하고 법을 지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내 이익을 위하여 남을 해쳐서는 안 될 일 이거늘 어찌하여 너희 나라에서조차 금지하고 있는 아편을 우리 나라에 가져와 재산을 편취하고 목숨까지 위협하려 하느냐? 너희들이 아편으로 중화의 백성들을 고혹한 지 이미 수십 년에 이르고 그 동안 너희들이 얻은 불의의 재산은 헤아릴 수가 없는 실정이다. 이 점 공분을 금치 못하는 바이며 하늘 또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임칙서의 이러한 강경한 포고문을 접수한 영국 상관은 처음에는 임칙서가 다른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뇌물을 받아내기 위해 일부러 벌이는 수작이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리나 임칙서의 청렴함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공행 측은 영국 상관 측을 설득하고 나섰다. 임칙서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공행 측은 이관들에게, 임칙서는 다른 부패한 관리들과는 달라 흠차대신의 명예를 걸고 임무를 수행하려 들 것이고 이 점을 잘 헤아려 신중히 대처하지 않으면 상호간에 모두 큰 손해를 볼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중재에 나섰다. 

공행 측의 중재로 영국 상관은 임칙서에게 아편 1,037상자를 내 놓겠다는 제의를 하나, 사전 조사에 의해 영국 상관이 가지고 있는 아편의 재고량이 2만 상자가 넘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임칙서는 이러한 영국 상관의 제의가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판단하고 크게 격노하였다. 

임칙서는 날이 밝자마자 모든 외국 상관으로부터 중국인 고용인을 전원 철수시키고 식량의 반입을 금지시키는 한편 나머지 아편을 전부 내놓을 것을 강요하고 각국 상인들에게 앞으로 다시는 아편을 반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청국 조정의 강경한 방침을 전해들은 영국의 무역 감독관인 찰스 엘리엇(C. Elliot)은 마카오에서 급히 광주로 돌아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이관으로 들어갔다. 임칙서가 관병들을 동원하여 이관 일대를 완전 포위한지 48시간만에 식량과 물이 다 떨어지자 결국 엘리엇은 굴복하고 이관에서 나와 아편 2만 상자를 내놓은 뒤 풀려나게 되었다. 임칙서는 광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호문(虎門) 해안에 큰 구덩이를 파고 압수한 아편을 짠물에 담갔다가 석회를 섞어 3주 동안이나 끓인 뒤 아편의 성분이 완전히 소멸되자 바다로 흘려 보내 버렸다. 

광동에서의 소식을 접한 영국의 윌리엄 멜본(William Melbon)이 이끄는 자유당 내각은 청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의 좋은 구실로 삼아 의회에 전쟁의 비준을 요청하고 나섰다. 그러나 의회에서는 부도덕한 악덕상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까지 일으키겠다는 행위는 대영제국의 불명예라고 주장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의원들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고 전쟁 비준안은 표결에 부쳐져 결과는 불과 9표 차로 결국 청국에 선전포고가 내려지게 되었다. (1840년) 

영국 외상 파머스턴(Lord Palmerston)은 이번 전쟁의 이유를 자국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애써 강변하였으나 이로써 세게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 중의 하나이며 대영제국의 명예를 두고두고 실추시킨 아편전쟁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었다. 본국으로부터 전쟁 명령을 하달 받은 인도총독 오크란드는 스리랑카에 주둔한 보병 제18연대, 캘커타의 보병 제26연대, 벵골의 공병 2개 중대, 마드라스의 포병 2개 중대 등 약 4천 명의 육군 병력에 동원령을 내렸다. 

인도양과 남지나해 인근에서 활동하고 있던 기함 웰즈리호를 비롯한 18척의 함정과 수송 선단으로 구성된 원정 함대는 싱가포르에 집결하여 중국으로 발진하였다. 중국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해군 소장 조지 엘리엇(G. Elliot)으로 무역 감독관인 찰스 엘리엇의 종형이었다. 대규모의 영국함대가 청국의 주요 항구를 봉쇄하자 북경의 청국 조정은 강경한 쇄국정책으로 버티었다. 불과 5천의 육군병력과 지엽적인 군사작전과 해군 함대에 의한 항구 봉쇄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영국 원정군은 조선의 강화도에 진주한 해병대를 동원하여 본격적인 상륙 작전을 감행하기로 하는 한편, 전쟁의 장기화로 병력의 손실이 늘어나도 지리적 여건상 신속한 병력 충원이 어려울 수밖에 없어 주한 영국대사관을 통해 대한제국 군대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영국의 참전 요청으로 제국의 내각과 의회가 발칵 뒤집어지고 각 정파간의 논쟁도 격렬하게 벌어졌다. 이 때까지 내정에 냉소적이던 보수당과 전국 각지의 서원을 중심으로 칩거하던 전통 유림세력들은 드디어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명왕조(明王祖)를 복원시켜 보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전국적으로 상소를 올리며 대청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집권 제국당도 그 동안 급속한 산업화로 공산품의 생산은 늘어났으나 그 것들을 소비할 수 있는 국내시장이 포화상태를 보이면서 경제성장이 둔화되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해로 우여곡절 끝에 전쟁에 찬성하기로 당론을 모았다. 자유당은 제국주의적 전쟁을 지원할 수 없다는 당론을 어렵게 결정하나, 일부 영국 유학생 그룹들은 유학 시절 대영제국의 위용을 평소 동경해 오던 터라 조국의 번영을 위해서는 제국주의 전쟁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번 기회에 열강으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될 때라는 판단을 내리고 전쟁반대라는 당론을 거부하고 전쟁 비준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최대 반전세력인 자유당이 분열되자 대한제국 의회는 전쟁의 비준을 결의하고 전시내각이 구성되었으며 제국군 총사령관에는 은퇴한 홍경래가 칠순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임명되었다. 강화도를 출발한 한영 해병대 각 1만으로 구성된 도합 2만의 연합군은, 청군의 결사적인 저항을 제압하고 천진에 상륙해 북경(北京)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동시에 압록강을 도하한 대한제국 육군 3개 사단 5만 명은 구식 무기로 맞서는 청국 수비대를 간단히 제압하고 만주로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북경의 관문인 천진이 한영 연합군의 전격적인 상륙 작전으로 함락되고 청왕조의 발원지인 만주 일대도 위협받게 되자 무기력한 청국 조정은 너무나 당황해서 마침내 청나라 황제 도광제의 결단으로 서둘러 항복하고 말았다. 

1824년 남경의 양자강 위에 정박 중인 영국 군함 콘 월리스 호에서 청국 측 대표 기영과 영국 측 대표 포팅거, 그리고 대한제국 측 대표 김정희가 참석한 가운데 강화 조약을 맺고, 청국은 영국에 홍콩(香港)을, 대한제국에 여순(旅順)을 각각 할양하고 광동(廣東), 상해(上海), 하문(厦門), 영파(寧波), 복주(福州) 등 5개항을 양국에 개방하기로 하는 골자의 조약안을 체결하였다. 

아편전쟁의 결과 아시아의 거대한 청제국이 그만큼 노쇠하고 무력한 상태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고 전쟁의 후유증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알고 살아왔던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대한 심각한 철학적 고민이 내부에서 발생하며 청국은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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