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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역사소설]대한제국 200년사 -(6)대한제국(大韓帝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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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2013년체제
추천 : 23
조회수 : 142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6/11 19:34:34
날이 갈수록 정조의 병세가 조금씩 심각해지자 켄싱턴은 조정의 대신들에게 국왕의 승하에 대비하시라는 통보를 전하였다. 고즈넉한 고궁의 나뭇잎들도 거의 떨어져 내리고 후원의 연못에 살얼음이 살짝 덮이기 시작한 어느 초 겨울날, 해거름해 질 무렵에 정원을 산책하며 사색에 잠겨 있던 정조는 문득 발걸음을 옮겨 혜경궁으로 향했다. 


돌연 찾아온 아들의 병색이 깊은 초췌한 모습을 보자 어머니 혜경궁 홍씨 경의왕후는 금새 눈시울을 붉혔다. 오랜만에 어머니와 저녁 수라상을 함께 하고 밤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정조는 어렵게 말문을 열어 경의왕후에게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손자가 왕위에 오르면 성인에 이를 때까지 수렴청정을 맡아 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아들의 손을 부여잡은 경의왕후는, 50년 전 부군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던 날, 울부짖는 어린 아들을 달래며 부둥켜안고 피눈물을 삼켜야 했던 회한의 그 날을 돌이켜 보며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밤새 흐느꼈다. 정조는 임종을 며칠 앞두고, 영국에서 돌아와 새로 영의정에 오른 정약용을 친히 불러 술잔을 권하며 숨가빴던 지난 세월을 회상하곤 어린 세자를 잘 돌봐 나라를 맡아달라는 유탁을 내렸다. 


정조가 즉위 31년만에 55세로 창경궁에서 승하하고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세자 이공(순조)이 17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1807년) 순조가 즉위하고 대왕대비인 경의왕후의 수렴청정이 발표되자 조정은 수렴청정의 수용을 놓고 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신사유람단에서 돌아온 일부 소장 개혁파 학자들과 신진 관료들은 이번 기회에 아예 영국처럼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자는 급진적인 주장을 내세우고 급기야는 광화문에 모여 상소 투쟁을 벌여 나갔다. 별기군 대장 목용검은 이들의 행동을 중대한 역모라고 규정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진압해야 된다는 강경론을 내세웠다. 영의정 정약용은 내심 이들의 주장에 공감은 하나 왕실과 정조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로 인해 심각한 인간적 고뇌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수렴청정을 맡게 된 경의왕후는, 영의정 정약용을 불러 자신은 수렴청정을 맡을 의사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임금의 보위는 의정부에서 알아서 맡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경의왕후는 노론 벽파이던 영의정 홍봉한의 딸로 세자빈 시절 부군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맞은 운명의 여인으로, 시어머니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는 반대로 정쟁에 휩쓸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경의왕후의 진언을 들은 정약용은 여러 중신들과의 신중한 논의를 거쳐, 왕이 20세가 되는 3년 후까지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맡아 국정을 돌보도록 하는 한편, 그 이후에는 외교와 국방은 왕이 전권을 행사하도록 하고 일상적인 내정은 의정부와 육조로 구성된 내각이 책임지는 이원집정부제의 형태로 국정을 운영하기로 하며 당분간 의회의 구성은 잠정적으로 보류하기로 한다는 최종결정을 내리고 경의왕후와 순조의 윤허를 받아 만방에 고하였다. 


이러한 방침이 알려지자 가장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세력은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의 아버지 김조순을 비롯한 외척세력인 안동 김씨(安東 金氏) 일파였다. 김조순은 본래 노론 시파 출신이었으나 당쟁에 휩쓸리지 않는 처신 덕분에 자신의 보신뿐 아니라 딸을 세자비에 간택되도록 하는 수완을 보인 장본인으로, 정조대의 친위정변으로 남인들이 주로 득세하자 자신의 사위인 왕세자의 즉위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려온 터였다. 별기군대장 목용검을 비롯한 근왕파의 반발도 만만찮았다. 


이들은 여차하면 별기군을 동원해서라도 절대왕권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공공연히 표명하며 별기군에 24시간 대기령을 하달하여, 궁궐을 둘러싼 도성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으로 감싸이게 되었다. 왕조 체제에 익숙해 있던 일부 민간에서도 오래 전부터 민간신앙으로 유포되어 지던 정도령이 바로 정약용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등 민심이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사태가 혼란스러워 지자 순조는 별기군 대장 목용검을 직접 불러 자신은 본래 정치에 별 관심을 갖지 못하던 차에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설득하고, 자신은 영의정 정약용 대감을 전적으로 신뢰하니 가벼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선왕의 유지를 받들고 자신을 진정으로 돕는 일이라며 군사행동을 간곡히 만류하여 근왕파의 반발을 가까스로 무마시켜 내었다. 


목용검도 정약용의 인품을 평소 존경하고 있던 터이고 더구나 이번 결정이 어느 누구의 권력욕에서 나온 결정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고 근왕을 위한 거사를 접게 되었다. 왕의 장인인 김조순도 경의왕후에게 불려가 간곡한 설득의 말씀을 듣게 된데다가, 서로 내응해 왔던 근왕파의 반발도 수그러지는 등 현실적인 세에 밀려 할 수 없이 이번 결정의 수용을 표방하게 되어 외척세력들의 불만도 일단 잠복하게 되었다. 


순조 3년 경의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왕실과 조정은, 청국의 종주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고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왕을 황제로 칭하게 하였다. 수도의 명칭도 한양에서 순 우리말인 서울로 바꾸고, 정약용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초대내각을 구성하여 제국의 수립을 만천하에 공포하였다. (1810년) 


대한제국의 선포 이후 내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여 구체제의 일소를 통한 새로운 세상의 건설에 매진하게 되었다. 정약용 내각은 제일 먼저 왕실과 관청에 속해 있던 모든 관노를 완전히 해방시키고, 중인과 평민의 구별을 없애 반상의 차별만 두게 하였다. 변화된 사회상에 부합되는 제반 법률의 정비를 서둘러 성종 대에 간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보수하여 《신경국대전(新經國大典)》의 편찬에도 착수하였다. 또한 조청전쟁 이후 국방력의 강화가 절실하다고 판단하여 의주에서 회령에 이르는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하고 여기에 해방된 노비들을 고용하여 일하게 하였다. 


강화해전에서 영국 전함의 위력을 실감하고 해군력의 증강을 위한 전함의 건설에도 박차를 가하는 한 편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양반의 자제들 뿐 아니라 평민의 자제들에게까지도 입학을 허가하여 선의의 경쟁을 하게 하였다. 정약용 내각이 법률의 정비에 나서자, 신사유람단에서 돌아온 청년 관료들과 귀국한 영국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제헌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삼청각에 모인 33명의 대표자들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인 정당인 입헌당을 결성하여 헌법 제정을 위한 조직적인 정치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입헌당은 처음에는 명문가 자제 출신의 영국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적 엘리트들로 구성되었으나, 근대적 교육을 받고 있던 다수 조선대생들의 지지는 물론이고 일부 선각적인 평민층으로 그 지지세력을 확대하여 나갔다. 


산업의 발달로 급속히 성장한 부농, 중소상공인들로 형성된 새로운 계급인 시민세력들도,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정치적 권리도 아울러 요구하게 되고 이들은 형성한 부를 이용해 입헌당의 물질적 토대로 자리잡게 되었다. 


입헌당의 급속한 세력신장에 당황한 종친과 외척세력 등 근왕파들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제국당을 결성하고 현 체제의 유지와 왕권의 보위를 선언하고 나섰다. 새로 설립된 사관생도들도 후일 제국당의 주요 지지기반으로 자리잡게 된다. 총리대신 정약용은 이들 각 정파들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으로 조정자의 역할을 하며,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큰 충돌 없이 조화롭게 내각을 운영하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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