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지랄같은 지점은 역시나 그 것들은 적어도 경주 김씨 김부식이라는 놈이 적었다는 것과는 다르게 전혀 경상도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사실 삼국사기가 진짜로 김부식저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편찬시기에 감수나 검열을 핑계로 위조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부산출신인 본인이 보기에는 그 것은 이미 통일된 고려 귀족적인 관점으로 쓰였지. 경상도인 중심적인 관점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그러한 결여된 사관을 따라서 현대의 인서울 새끼덜은 통일신라, 통일신라 이 지랄이나 하는 것이다.
먼저 신라의 입장을 옹호하자면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할 수나 있단 말인가? 이 것부터 확실하게 해야 한다.
신라는 결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적이 없다. 조금 거들었다면 거들었지만 멸망시켰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백제와 고구려는 당이 멸망시켰다가 진실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신라가 김춘추라는 놈이 협력을 했으니까 나당동맹이 멸망시켰다. 그 논조는 조금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본인이 피력하려고 했다시피 고려의 지배집단은 기여히 남하한 돌궐계 정복집단이 한민족을 굴종시키고 세운 정권이라고 보여진다.
실제로 그들은 당식 성을 쓰는 성씨를 쓰는 출계집단의 세계를 형성한 뒤에 그러한 가문들을 문벌귀족이라고 하면서 고려조의 공식적인 지배계급으로 행사하게끔 하였으며, 공복과 관등명도 죄다 당나라의 시스템을 그대로 도입하였다.
당나라의 3성6부제를 본따서 2성6부제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지점들이 조선시대의 모화사상내에서는 우수한 중국 문명의 요소를 도입하는 것인마냥 호도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냥 당나라계 침략집단이 한민족을 정복한 결과라는 것이다.
마치 십자군이 아랍지역을 정복하고 나서 예루살렘에 카톨릭계 교회부터 제일 먼저 쳐 짓듯이 그러한 차원의 당식 성을 쓰는 자들의 세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를 이룬 족벌집단들이 제사를 지내고 하는 그 짓거리가 모조리 십자군원정을 단행한 서유럽계 침략집단이 서유럽식 세족을 형성하는 것과 거의 똑같다는 것이다.
그 것이 지나치게 관성화되었으니까 20세기나 21세기에 와서는 그냥 그러려니 햇지만 유교조차도 이미 신라조에 받아들여졌다고 하는 조선조 사가새끼덜의 개구라와는 다르게 신라조는 불교국가인데다가 성씨도 쓰지 않는 자들이었으니까 제사를 지낸다는 그런 개념자체가 아예 없었을 것이다.
즉, 유교적인 관념과 관습자체가 외래침략집단으로부터 기인한 것이고, 전혀 오늘날의 개독마냥 본연의 한국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적에 지적했지만 한국의 본연 불교는 게다가 당나라새끼덜이 둔황에다가 소굴을 만들어서는 엉터리 위경이나 찍어내던 체계로부터 기인하는 대승불교가 아니라 오늘날 태국의 비구승종단과도 같은 계율을 중시하는 율장불교였다고 보여진다.
화랑하면 계율, 계율하면 화랑이다 아이가.
계율은 율장이고, 화랑이라는 군사계급조차도 태국의 낙무아이와 거의 유사한 형태를 띄어요. 낙무아이들이 태국의 군사집단이면서 때로는 출가해서 소승의 법력을 쌓는 수행도 하고 태국에서 출가의 경험을 일생에 한 번 이상 해 본 것은 대단한 영예로 여겨진다.
고려새끼덜에 의해서 원효나 의상이나 설총의 행적도 엉터리로 각색되었지만 원효는 화랑이면서 출가를 했다가 눌러앉은 케이스로 보이고, 태국에서 비구승은 처자식도 거느릴 수 있어요. 설총도 그래서 원효의 자식이었던 것이에요.
태국에서 출가라는 것은 통상은 1년한다 3년한다 이 지랄이던데 눌러앉는 케이스는 극히 드문 경우이다. 전업으로 할 정도면 나름 바닥에서 장래가 보였으니까 눌러앉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전사계급들이 Monk가 되는 것이니 Monk라는 것은 경전이나 읽는 샌님이 아니라 매우 괄괄한 여전히 승려전사이기도 한데 그러한 스탠스만이 조선시대에는 그나마 남아있어서 왜란 때에도 승병들이 활약했다고 보여진다.
다만 태국의 불교를 보자면 전사계급이 된 승려라는 것이다 보니까 승려가 성추행도 하고 세컨도 여럿 거느리고 그 지랄이긴한데 그 것에 대해서 씹선비화 된 오늘날의 한국의 중들은 어흠어흠 이 지랄이나 하지만 그러한 것 일체가 싸그리 외세지배이후에 한국인들도 그 외세들과 닮아가면서 생긴 것이라는 지점을 이해하자.
되려 신라시대의 승려들은 태국땡중들에 훨씬 더 가까웠을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심지어 승병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것이다. 산에 올라가 있던 놈도 그냥 내려와서 여느 화랑이랑 같이 싸웠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처자식도 거느리고, 자식에게는 부자승계에 따라서 자신의 사원이나 화랑집단내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도 어느 정도 물려주고 그랬을 거라는 것이다.
특히 고대에는 인구의 재생산이 중시되었으니까 태국과 마찬가지로 삼국시대의 중이라는 존재는 숫제 지역 여자들 존나게 임신시켜서 낙무아이 2세들로 맹글어서는 주변국과의 싸움에 동원하고 그런 개념이었을 거란 것이지. 중이 뭐 수절하는 그런 미친 것도 모조리 고려새끼덜의 거짓부름으부터 나온 것이다.
왜냐면 심지어 신라초기의 왕들은 부처를 의미하는 석자 성을 쓰는 불교왕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투르크 새끼덜적인 미신요소라고 보이는 박혁거세 설화조차도 모두 외삽이고, 실제로의 경상도 지배계급은 허황후로 대표되는 캄보디아계 불교국가인들로부터 문명요소를 받아들였다고 보는 것이 정사라고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신라 12대 석첨해 이사금까지 캄보디아식 불교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한민족내에서 출현해 있었다.
게임 문명5에 나오는 불교왕 람캄행의 이미지가 되려 진짜 한민족 왕의 이미지에 가까운 것이다.
자 따라서 김알지 후손들이 부자상속을 한 이후에나 신라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 이 지랄은 모두 거짓말이다.
후대의 사가들이 그들의 유교중심 패러다임에 맞춰서 엉터리로 곡해한 것이다. 오늘날의 태국왕가도 충분히 전제화된 왕가지 뭐 태국왕가가 좃이라고 보는 태국인은 아무도 없다. 다만 지배를 하는 매너가 유교식이 아니라 불교식일 뿐이다.
게다가 유교새끼덜은 한민족의 고대 역사를 전적으로 날조하였는데, 정작 문무대왕릉비에 김씨일가라는 것은 고려식 세계와는 하등 연관이 없고, 단지 남하한 흉노-스키타이계 집단이 그들의 왕조들의 근본이라고 했을 뿐이다.
고구려가 스키타이식 군사문물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정사이고, 따라서 스키타이인들이 오늘날의 러시아땅인 초원길을 통해서 대흥안령산맥북쪽의 초원을 통해서 넘어와서는 만주지역에 있던 고구려와 반도의 신라에게 여러가지 문물을 전수해줬던 것이다.
그 것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동시베리아계 제민들인 동이족들은 선진문물을 가진 당나라집단에게 러시아가 서진할 때에 아시아계 마이너들을 그들의 프론티어에 흡수했듯이 손 쉽게 지배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베리아계 제민들은 실상 동로마나 아랍으로부터 중국이나 외몽골을 통하지 않고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별개의 통로가 있었기 때문에 되려 유라시아대륙 전체에서 무서울 것이 없었던 종국에는 아나톨리아반도까지 쳐 먹고, 빈 공성전 당시에는 서유럽까지 쳐 들어가고 했던 집단인 돌궐-투르크 새끼덜이 정작 동북3성에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씨왕조로의 왕권의 이행이라는 것 역시도 람캉행이나 나레수안을 보면 본디 소승불교국가의 왕들은 소승의 수련의 마스터이자 또한 강력한 전사들로써 워리어 킹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소승불교세계에서 개인적인 수양이라는 것은 국방을 위한 심신의 수련과 종교적 수행이 크게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왕들은 그러한 마스터리의 고행자이자 수행자라는 지점들을 보여줄 의무가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실제로 앞서서 싸우는 능력이 중시되었다.
여기서 테크놀러지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이다. 스키타이계 김씨들은 군공을 세우는 지점에서 월등했기 때문에 여전히 소승불교국가적인 아젠다는 손상되지 않은 채 그들이 더 잘 싸우니까 낙무아이들 혹은 화랑들 내에서 옹립된 것이다.
그나마 이러한 지점들이 전하는 바로는 진흥왕이라는 종자는 그러한 워리어 킹들의 집안내에서도 알아볼만큼 하드웨어가 출중해서 이미 어릴 때부터 임마는 뭔가 큰 공 세울 놈이라고, 미국의 슈퍼볼 드래프트 1위마냥 기대를 받았다고 한다.
야사에 의하면 워낙에 큰 분이라서 그 분의 파트너도 상당한 분이셔야지 뭐 양물을 받았다고 칸다.
뭐 상당히 소승불교적인 지점은 거의 삭제되고, 조선조적인 민초적인 정서로 쓰였지만 이러한 것 내에서 정작 신라의 워리어킹들적인 면모가 보인다는 것이다.
즉, 적당히 유교국가의 이념에 맞는 것으로 각색되지 않았다면 진짜 신라식의 진흥왕에 대한 찬사는 거진 태국에서 나레수안이 가지는 것과 유사한 형태가 되었을 테지만, 정작 역사의 중간에 당나라계 고려군세가 남하해서 지배하게 되면서 이러한 요소들이 억눌려졌다고 보는 것이다.
원론으로 돌아가서 당나라새끼덜이 그들의 원정에 신라가 진짜로 협력했다고 하는 부분조차 조금은 미심적다. 적어도 김부식이조차도 뭐 그 것이 김부식이 썼다는 가정하에 도저히 당나라새끼덜의 논조를 그대로 썼다가는 한민족사는 개좃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정작 나당전쟁의 역사를 써서 남겼다고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어쨌건 고구려와 백제는 당이 멸망시켰다고 보는 것이 맞고, 되려 그러한 지점에서 신라가 당을 상대로 반격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구고구려영토와 백제영토로 군세를 진격시켰다고 보는 것이 황산벌, 평양성전투 요 지랄말고 좀 더 크게 대국을 보는 관점인 것이다.
거꾸로 가정을 해서 당나라새끼덜이 고구려와 백제를 싸그리 다 쳐먹으면 신라는 그냥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자락 남쪽에서 존나게 존버나 치면 되?
소맥산맥이 비록 험준하다지만 히말라야도 아니고, 지리산 자락을 중심으로만 해도 제법 우회해서 산악지대를 지나서 경상도의 평야지대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는 제법 많은 편이다.
선덕여왕 때에 그 통로중에 하나로 백제군사가 급습하였다니까 지리산의 험준함을 믿고 뻐겼다가는 멸문지화를 못 면하는 것이다. 뭐 실상 딱히 험준하지도 않지만 말이다.
즉, 당나라놈들이 백제와 고구려를 그냥 쳐 먹게 내버려뒀다가는 가뜩이나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먹은 당나라놈들이니까 신라는 완전히 독안에 든 쥐꼴이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로써는 당연히 당나라놈들을 반도에서 몰아내고 반도해안선 밖으로 축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것을 다르게 말하면 신라의 전쟁의 동기는 당나라놈들의 침략으로부터 신라의 안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라는 단지 신라의 안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본연은 경상도국가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어쩔 수 없이 반도전체를 아우르는 국가가 되어버린 것이지 신라가 정치군사적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합병하려고 한 전략적 의도는 전혀 명백하지 않다.
되려 그 전략적 의도는 당나라의 대전략인 것이다.
즉, 당나라새끼덜이 백제와 고구려를 합병해서 항구적으로 그 위에 눌러앉으려고하면서 신라까지 위협할 태세니까 어쩔 수 없이 신라는 경상도 외부의 한반도지역으로 기동해서는 당나라세력을 몰아내고 신라의 안보공간을 반도남부지역전부를 확보함으로써 안정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모화사상을 지닌 이조시대 사가새끼덜에 의해서 당나라의 백제와 고구려 침공에 신라도 어떤 식으로든 기여캤다 요지랄을 하던 스탠스가 별안간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합병하려고 한 대전략을 펼쳤다까지 확대해석된 것이다.
자 씨이벌 생각을 해보라고. 백제를 멸망시킨 전투는 사비성전투라고도 하지만 660년에 일어난 제1차 백강전투라고도 한다. 663년에 왜가 백제를 부흥시키려고 와서는 벌인 백강전투는 2차백강전투라고도 할 수 있지만 1차와 2차는 완전히 상이한 전개의 전투지.
제1차 백강전투는 이건 거진 당나라의 금강상륙작전이고, 제2차는 그건 백강해전이지.
백제가 도성이 금강에 있는데, 금강에서 상륙작전을 쳐 맞으니까 당연히 백제가 멸망할 수 밖에. 마치 미드 바이킹스 3부에서 바이킹 새끼덜이 배로 파리 앞으로 흐르는 강으로 가서는 파리공선전을 펼치는 거랑 거진 똑같지.
그러면 대가리를 잘 굴려야지. 씨이벌 당나라 놈들이 배를 타고는 가서는 사비성을 훅 질렀는데, 육군이 왜 있어? 신라계 육군이 거기에 가담했다고? 응, 아닐걸.
바이킹 새끼덜이 롱쉽을 타고 파리앞마당까지 가서는 공선전을 펴듯이 하는 것이 전체적인 전개인데, 통신수단도 전무하던 고대에 갑자기 옆 사이드에서는 신라군이 나타났다는 거냐? 전혀 생뚱맞은 개지랄이지?
게다가 갸들은 군량의 공급이 목적이었다라고 개지랄을 캤지만 아니지? 롱쉽이라는 배에 배는 선적량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느 정도의 카고가 있는데, 뭘 씨발 육로로 군량공급을 요구해? 말이 되냐?
바이킹이 파리를 치는데, 배로 왜 거기까지 가냐고? 배에 무기랑 식량을 실었으니까 그 자체가 이점이라서 배를 땅으로 끌어서라도 파리앞의 센강에 댄 건데, 그 자체가 배에 실린 식량까지 고려한 보급까지 고려한 행위인데, 신라한테 식량을 대라는 개소리가 왜 튀어나오냐고? 말이 되냐?
이러한 전술적인 부분을 보면 당나라계 해상세력이 그냥 사비성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 배안에 군량이랑 며칠치는 다 실려있었고, 김유신이 군량을 가지고 당나라한테 호응했다라는 개소리는 거진 외삽으로 봐야한다고.
뭐 등짐지고 군량 날라서 도대체 몇 섬을 진다는 거야? 뭐 말이 되냐? 그냥 배에 실으면 빠르지. 야 배에는 톤단위로 실을 수 있어. 사이즈가 이건 그냥 말이 아니란 거다.
인간이 나르면 우마를 동원해도 끽해야 몇 섬인데, 그 것도 지가 가다가 다 쳐 먹어. 사이즈가 아니라고. 서라벌에서 사비성까지 거리가 그래도 제법된다. 게다가 88고속도로 뚫리기도 전인데, 하루에 20킬로는 갔을까 의심스러운데 차라리 신라가 거기에다가 군량을 대어도 김해에서 배에 실어서 가자고 할 지역인데, 한국의 도로망은 20세기 이전에는 형편없기로 유명했는데, 봇집으로 수만톤을 날랐다고?
그냥 당나라놈들이 바이킹이 파리로 난입하듯이 해서는 그냥 당일날 배로 갈 수 있는 거리인 양놈들 말로는 리그라는 단위로 그냥 쭉쭉쭉 올라가서는 다 함락시키고 쳐 먹었다 그게 가장 맞는 말이고, 심지어 중국 사서에서도 당군이 금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뭐 하루라도 지연시키면서 저항한 곳은 없었다고 그래요.
역시나 미드 바이킹스 그거랑 딱 맞아. 배로 개떼가 몰려오는데, 끽해야 돌뎅이로 쌓은 타워에 군사 몇 백이서 어떻게 쳐 막냐? 존나 내빼야제.
그렇게 강따라 올라가서는 사비성도 뭐 며칠 개기지도 못하고, 풀 어택 한 두번만에 깨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군이 여기에 관여했을 거능성은 거의 없다. 황산벌이라는 것도 어쩌면 후대의 창작이에요.
바이킹스에서도 바이킹들이 두 번 공격하지 그러다가 이중 게이트 그걸 못 뚫으니까 순순히 포기하지만 사비성의 방비수준은 석조건물로 된 파리와는 클라스가 틀렸을 것이니까 끽해야 목조로 된 게이트나 가지고 뻐겼으면 그냥 당일 하루아침 꺼리다. 통상 전투는 새벽녘에 개시하니까 존나 많이 뻐겼으면 6시간이고, 목조 게이트가 공성기로 쳐대는데 6시간이나 뻐겼겠냐? 석조게이트에다가 해자에 쇠문이 이중으로 쳐 진 것으로 막아도 될까말까인데 말이다.
요렇게 말이다. 적교가 문역할도 할 수 있고, 뒤에는 쇳문이 하나 더 보강되었고, 다리 위로만 겨우 공격이 되지 옆으로는 해자를 메우기전에는 공격하기 존나게 까다롭게 만들어놨잖아. 다리 옆으로는 죄다 해자라서 사다리 댈 곳도 없잖아. 오른쪽의 다리난간이랑 성벽사이도 자세히 보면 낭떨어지라서 사다리대고 못 들억가게 되어 있다.
얼추 오전 12시전에 일 다끝내고, 오후 1시쯤 되면 밥먹고 대애충 수습하고 나서 백제여자들 존나게 강간이나 당하고 있었을거다. 그 짧은 6시간 혹은 그 전날 해 떨어지기전까지 당일 공격시작되기전까지 24시간내에서 고대의 통신기술로 존나 타이밍러쉬로 신라군세가 합류했을 거라는 것은 완전히 날조라고 보여져요.
고대전사에서 군세가 합류할 때는 3일정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에요. 그런데, 당나라 해군이 그렇게 기다렸다고 볼 근거가 어디있냐고? 그냥 배타고 쭉 올라갔는데 말이다.
결론: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다. 되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한반도를 접수한 뒤에 신라도 압살할 것으로 보이니까 불가피하게 경상도산만디 너머의 군대를 이미 당이 접수한 백제땅과 고구려남부영토로 진격시켜서 동해와 서해와 남해로 둘러쌓인 반도영역을 신라의 안보공간으로 확보하려고 했을 뿐이다.
신라가 당에 협조했다는 스탠스로 쓴 기사들도 모두 모화사상에 입각한 후대의 외삽일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며, 특히 강으로 배를 타고 진격해온 당나라군세에 신라군세가 호응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특히 백제망조론 따위와는 다르게 배로 강으로 침략해서는 다짜고짜 도성을 깨러온 세력에게 멸망하는 것에 뻐길 수 있는 방법은 당시 기술로는 공성전에서 닥치고 뻐기는 수밖에는 없고, 설사 백제의 군세가 100만명이 있다고 해도 소용없는 거에요.
100만명이 3일 거리에 있다고 캐도 당일 함락인데 조까고 있는 것이지. 마찬가지로 황산이라는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본다.
거꾸로 되려 신라의 이후의 행보나 군제를 고려하면 당나라의 사비성전투 당시에 백제땅 곳곳에 남아있던 백제계 군사집단들은 신라의 9서당의 백제서당에 거의 그대로 흡수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즉, 황산벌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황산에 군사가 있었다면 아마도 사비성으로 달려가는 중에 이미 성은 함락되었고, 재물과 부녀자들은 털리고 있다는 척후로부터의 보고나 받았을 것이다. 그러고서는 당나라계 군사집단들이 백제계 촌락들을 개인적으로 접수해서는 금마덜의 나와바리로 만들려고 가는 도중에 백제계 촌주집단들의 반격을 초래한 것이 백제부흥군이고, 전의 글에서도 밝혔지만 중국새끼덜이 촌주가 된다는 것은 그 촌에서는 지가 왕이 되는 것이다.
중국의 여성운동가 모가 말했듯이 중국의 촌주라는 놈은 길가는 여자를 지가 겁탈해도 법인 그러한 악랄한 것이자 도저히 동일출계집단으로부터 기인하는 온정주의에 의한 촌주세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즉, 특정시기의 정복집단이 해당지역의 촌주집단으로 행사하고 있는 것임.)
반면에 부족촌으로부터 기인하는 한국만 하더라도 같은 촌사람은 패밀리라는 의식이 강하고, 족외혼의 습속으로부터도 어긋나는 반사회적인 것이다.
물론 조선조에는 조선조 카스트적인 요소에 따라서 존나 강간하거나 학대해도 되는 것들이 있긴하다. 그러나 통상의 경우에는 유부녀와 사통하는 것만으로도 지방관에게 엄벌을 받는다.
혼인한 여자와 간음한 자는 여자와 함께 발개벗겨져서 도시로 끌려다닌다. 이때 얼굴에는 차가운 석회를 바르고 양쪽 귀를 뚫어 화살을 꽂고 판결인이 :"사람들 여기를 보십시요! 이 남녀가 간음죄를 범했습니다!"라고 외치며 두드릴 작은 북을 등에 매달고 있다. 이같이 하고 도시를 돌아다닌 후에 관가 앞마당에서 50-60대의 엉덩이 곤장을 맞는다.
중국처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이라면 되려 아사리 유부도 축첩해버리면서 이건 내꺼한테 내 좃 박은거다 요지랄로 촌주들이 개길 수도 있지만 조선에서 그 지랄하면 존나 쳐 맞는거다.
따라서 백제인들은 거의 즉각적으로 저항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나중에 진격해오는 신라군에 호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나아가서 신라의 공식 군제에 포함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백제부흥군이라는 것도 모두 전제왕조의 왕조사관의 부산물로써 실상은 신라식 봉건제내에서 필요해 의해서 봉작된 인물들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보여진다.
신라는 군제에서도 오늘날로 치면 미국의 주방위군과 같은 9서당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그간 인지하였던 전제왕조와는 상이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9서당과 주방위군의 차이는 속인적인 행정분류를 하였나 속지적인 행정분류를 하였나의 차이일 뿐이다.
고려식 전제왕조라는 것은 외부에서 침략한 지배집단이 한민족을 노예로 규정하고는 그들의 세족끼리 해 쳐 먹기 위한 방식이자 그러한 방식이 심화되면서 발생한 체제라고 보는 것은 신라의 군제와 조선과 고려의 것과의 비교등 여러모로 완전히 상이하였던 것이다.
즉, 고려새끼덜과 조선새끼덜은 실질적으로 그들과 다른 체제이던 신라체제를 비하하고, 그들에게는 노예집단인 삼한계 피지배민들이 연합하지 못하게끔 이이제이적인 관점을 가지도록 역사까지 곡해할 동기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하자 여기에 안보위협을 느낀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서 대반격을 가해서는 반도전체를 아우르는 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구백제와 구고구려계 집단들은 신라에 호응한 것으로 보이며, 그에 따라서 곧 그들이 지방군을 편성할 권한까지 주어져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 것이 바로 9서당인 것이다.
고려새끼덜의 이간하는 관점과는 다르게 견훤이라는 놈도 백제서당을 이끌고 실제로는 고려-돌궐놈들로부터 신라를 구원하러 가는 과정에서 고창전투가 벌어졌다고 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