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택 일대는 실제로는 금나라때에나 개간되기 시작한 곳이다. 매우 단순한 사실로부터 고구려의 중심은 동쪽에서 시작되었고, 서쪽으로 동이들이 진출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고조선에 관한 일체의 엉터리들은 죄다 조선시대에 형성된 그릇된 인지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후대의 외삽들이 전반적인 한국의 기록역사에 엉터리로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해모수와 유화부인의 결합은 기원후 12세기에나 일어난 쿠빌라이 정권내에서의 몽골인과 여진족들의 야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요령기원설이라는 것은 한반도의 서울이나 경주보다 훨씬 역사가 짧은 북경지역에서 한반도로 문명을 전수해줬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경의 성립시기는 끽해야 947년으로써 신석기 암사동 유적때부터 존재해서는 그대로 발전한 서울의 역사에는 발끝의 때만도 못한 것이다.
정작 인류학적인 문제로 간다면 한민족과 퉁구스카들을 아우르는 신석기 동굴인들은 죄다 동해안쪽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것으로부터 조선왕조실록에조차 오랑캐들은 바닷가에만 살며, 내륙에 살 줄을 모른다고 했을 정도이다. 여기서 바닷가란 동해안을 말하는 것이다.
퉁구스와 한민족은 단지 문명화가 되었냐 아니냐에 따라서 나뉜 실질적으로는 같은 형질의 사람들인데, 신라가 영동지역을 영유하기 전에는 퉁구스인들은 적어도 강원도의 하슬라(=강릉)까지는 남하하여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오늘날 퉁구스들은 한민족과 슬라브족에게 크게 밀려나서 극지방의 북쪽의 척박한 땅에나 잔존하게 되었지고 북퉁구스의 지역적인 명칭은 아무르퉁구스지만 고대에는 아무르퉁구스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동해퉁구스나 혹은 일본해퉁구스로써 동해안의 남쪽지역에도 서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존재들로부터 고구려 역시도 동쪽에서 발흥한 것이 확실하며 따라서 서쪽의 짱개들쪽에서 고조선이 발흥했다는 것은 모조리 후대의 외삽인 것이다.
정작 훗카이도의 소수민족들은 단일계열이 아니라 한계열이 아닌 퉁구스와 아이누등이 짬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소싯적의 훗카이도는 동시베리아제민들의 멜팅스팟이었음을 알 수 있고, 그 것을 조몬문명이라고 분류한다.
그리고 훗카이도의 지정학을 고려하면 조문문명 성립당시에는 대륙과 훗카이도를 잇는 오카나 훗카이도와 혼슈를 잇는 지점까지 모두 겨울에는 얼어서 서로 통교를 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날 바다가 인간이 다닐 정도로 충분히 얼지 않게 되자 훗카이도의 소수민족들은 남겨졌던 것이다.
그러한 훗카이도와 거의 동위도에 옌벤 조선족 자치주가 있는 것은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구려에 조공을 했다거나 복속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적었던 읍루(=아이누=이누), 숙신(축치캄차카), 옥저(=오로치), 동예(동쪽의 야인들)이 모두 동시베리아의 극지제민들임은 인류학적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동시베리아의 해안가 주민들의 통교하는 거점이 훗카이도에서 고구려로 옮겨간 것으로 보이며, 그러하다면 고구려의 역사는 상당히 긴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것이 어째서 압록강 중하류의 고구려성까지 입지가 내려왔냐는 지점은 경제적인 동기에 의한 것으로 단순하게 비정해야 된다고 보인다.
고구려가 점차 압록강 상류에서 하류로 간 것은 단순히 백제나 신라와 교역해서 쌀과 소금을 얻으려했기 때문인 것이다.
훗카이도의 조몬문명은 그러한 점은 거의 없었지만 고구려의 시대에는 이미 남쪽에 백제와 신라가 성립하여있었으므로 그들과의 교역이 고려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내성에는 무려 축치캄차카 반도에서까지 사람이 와서는 신라산 소금이나 백제산 말린생선, 염제 잇빠이한것 따위를 사갔을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 시베리아제민들과 한민족 사이에 중개교역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진족의 용흥지지의 입지 따위를 고려하면 고구려인은 명백하게 동북3성내에서도 동쪽지역에서 발흥한 것이 맞고, 따라서 고조선이 동북3성 내에서 서쪽인 요령쪽에서 발흥했다는 것은 이미 북경체제가 완성된 훨씬 후대의 관점으로 당대에는 정작 그러한 의식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