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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제 인서울 사가덜의 고대사에 대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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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Dir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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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16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6/23 23:37:01

인서울 몽골놈 케시기새끼덜의 백제와 고구려를 엮기 위한 가장 개수작질이 무덤양식일 것이다. 이를테면 돌무지무덤 말이다.

 
돌무지무덤이라는 것은 그냥 대애충 북방계 새끼덜 돌 쌓아서 뭐 올린 그런 식으로 사람 묻은 것이다. 돌무지무덤은 결코 고구려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몽골새끼덜도 그런 식으로 뭐 이름 있는 놈 뒤지면 약간의 부장품과 함께 돌로 그냥 덮어버렸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6133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8983
 
기성 인서울 엘리트덜의 논거는 그러한 무덤이 한강유역까지 발견되니까 대애충 한성백제랑 고구려랑 엮어 버리는 거다. 물론 그건 더욱 남부에서도 발견되기는 하지만 남부에서는 그렇게 대세인 것은 아니다.
 
그러고는 그냥 삼국사기따위랑 백제를 엮어 불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통칭하는 백제는 금강백제인데, 금강백제가 돌무지무덤을 그닥 선호한 것 같지는 않다.
 
되려 금강백제에서는 완전한 전실무덤이 발견되었다. 그게 무령왕릉이다.
 
단지 무령왕릉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금강백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송산리의 고분군 전부가 그러한 무덤들이다.
 
 
이미 일찍이 중국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노매드 새끼 덜의 특징은 옷이 허접하고 무덤도 개쓰레기라는 것이다.
 
노매드새끼덜은 길쌈이나 섬유용 식물소재를 재배하지 않으니까 너무 당연한 것이다. 한대에 로마를 평가할 때에도 로마의 사람들은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는 그래서 대등할 것으로 간주된 문명인이었다.
 
 
돌무지로 대충 쌓는 짓거리 또한 그냥 노매드개쓰레기용이다.
 
 
그런데, 정작 한민족의 자연 시대의 매장은 결코 노동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곤란한 매장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게 바로 고인돌인데, 여기서 이미 한민족이 노매드는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건 애초에 농경을 하는 민족이 촌장 같은 놈 위에 덮을 돌을 봐놨다가 끌고 가서는 얹어버리는 것이다.
 
 
인서울 친일파 새끼덜이 금강백제과 한성백제의 결부점으로 결착짓는 논거는 끽해야 이조 중종 때에 나 완본이 발간되었다는 삼국사기 그 책 하나뿐이다.
 
그런데, 한성백제와 금강백제는 유물상으로는 완전히 틀린 문명이다.
 
한성백제는 압록강가에서 가장 일반적인 고구려계 돌무지무덤이나 발견되는 그런 문명이라면 금강백제는 중국의 영향을 확실히 받은 석실무덤이 발견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인서울새끼덜이 신라를 문디새끼덜이나 흉노로 부르는 이유인데, 신라와 고구려는 거의 접합점이 없다. 고구려식 무덤은 경상도에서는 아예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심지어 지금의 공간사에서도 신라의 무덤법은 한결같다. 그것은 관을 넣을 땅을 파고는 거기에다 집어넣는 방식이다. 이걸 토광묘 아니면 토광목관묘라고 한다.
 
 
오늘날의 묘법의 예로 따지면 한강유역까지도 모두 토광묘를 쓰기 때문에 아마도 그것은 거꾸로 말해야 된다. 고구려가 한반도를 제패한 것이 아니라 신라가 역시나 한강유역을 쳐 먹었다.
적석묘나 쌓던 새끼덜은 토광묘를 쓰는 종자들한테 개 쳐 발려서는 676년의 평양성전투에서 평양에서 떼도륙을 당하였다.
 
 
물론 유전적으로는 둘간의 차이는 없을 터이다. 뭐 평양에서 떼도륙하고 남은 보지년들한테 신라병사들이 좃물로 수정시켜 줬다.
 
문제는 토광묘나 전실식묘와 돌무지무덤의 문제를 문명과 비문명의 차리로써 접근하는 방식은 의외로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간주될 경우에 금강유역에는 애초에 중국문명을 일찍히 받아들인 대단히 선진적인(=적어도 고구려미개야만인보다는 선진적인) 문명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한 것은 중국 문명이 또한 오나라나 남조를 통해서 한자어 문명이 창원이나 김해를 통해서 바다를 통해서 퍼져서는 경상도인은 진즉에 한화된 문명정주권이 된 것과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무덤은 전통적인 토장묘 이외 중국의 황하유역에서 발달한 토광묘[土壙墓, 토갱묘(土坑墓)] 등 토총계통과 지석묘·석관묘·석곽묘·적석총 등 석총 계통까지 발견되었다. 다음에 우리나라의 무덤의 변천을 시대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대동강유역지방에 한대의 형식을 충실하게 본뜬 전실분(塼室墳)이 몇 기 있으나 송산리의 전실분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제6호분은 사면 벽에 사신도를 그렸는데 벽돌 벽면에 진흙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린 것이다.'
 
'이들 적석총은 주로 압록강유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중국 땅인 환인현(桓仁縣)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집안현(集安縣)통구(通溝) 등지에는 수천 또는 수만 기가 밀집되어 있다.'
 
 
이러한 구절들을 확인하자.
 
중국이라고 다 같은 중국이 아니다 적석총이 있다는 중국은 거기는 씨발 존나 20세기에도 마적떼들 돌아댕기던 그런 중국이고, 송산리의 전실분은 예의 지금의 중국의 저장성일대다.
 
 
여기서 소수이긴 하지만 대동강 유역에도 한때에 전실분이 있었다는 점을 참고하자.
 
그러한 것은 대동강에도 본디는 토착한인에 의한 문명이 발생했지만 고구려새끼덜한테 멸망당했다는 낙랑에 관한 부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5. 조선시대
화장묘가 사라지고 중국식 토광묘가 일반화하고 고려 시대에 이어서 풍수지리 사상이 더욱 보편화하였다. 부장물로는 백자 등 자기가 주로 애용되었다.
 
'송산리 제6호분과 무령왕릉을 비롯한 이 지역의 무덤들은 철저한 풍수지리적 방법으로 묘지가 선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풍수지리 법의 응용은 부여로 내려오면서 더욱 성행하게 되는데 그 전형적인 예로 능산리 왕릉군을 들 수 있다. 현무(玄武)에 해당하는 뒤에 주산(主山)을 업고 좌우에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능선이 감싸고 있다.
앞은 확 트여 명당(明堂)을 이루고 동에서 서로 흐른 능산천(陵山川) 건너 주작(朱雀) 방향에 안산(案山)이 있어 이른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이 갖추어져 있다. 부여지방의 횡혈식석실은 대개 판상석으로 조성된 바 이것을 세분하면 세 종류가 있다.'
 
 
를 보면 묘지를 쓰는 방식에 있어서 풍수지리적 방법은 금강백제에서 나왔고, 토광묘의 방식은 신라에서 나왔는데, 이조 때가 되면 이 두 가지가 믹스된 방식인 풍수지리에 근거한 토광묘가 일반화되고 현대에도 그런 방식이 여전히 살아있으므로, 이것은 한국 문명의 주체에 관한 일반적인 사실을 완전히 상기시키는 것이다.
 
 
요컨대 묘법에서 현대 한국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조 때부터 한국인의 보편적 방식이라는 것은 백제반 신라반 뭐 양념반 그냥반 같은 것이다.
 
 
돌무지무덤의 직계자들은 모두 축출된 것으로 봐야 하며 특히 돌무지무덤이 집중되어 있는 환인현과 집안현이라는 것은 그냥 특정국가의 지배계급만 특정하는 것이다.
즉 돌무지무덤은 고구려를 특정하는 양식이지만 그러한 양식은 모두 반도에서 고구려가 축출될 때에 또한 멸종했다.
 
 
그러므로 현대한인과 고구려를 결부 짓는 것은 심히 부당한 접근법이며 고구려와 현대 한국인은 일말의 접합점도 존재치 않는다.
 
온돌 따위를 예로 드는데, ㅋㅋㅋ 경상도에 온돌이 보급된 것은 20세기 이후이다.
 
적어도 경상도 남부에서는 쪽바리 덜 마냥 그냥 존나 냉방에서 이불로 뻐기는 움집이나 막집이 1950년대의 부산에서조차 일반적이었고, 70년대까지도 대부분의 서민들의 주거환경은 온방이 전혀 되지 않는 그런 집이었다.
 
 
씨발 남부 한인들이 보일러 넣고 살기 시작한 게 몇 년 되었다고 역사를 쳐 곡해를 하냐고.
 
가끔씩 남부 지방 사람들 마을 사람들이 옛날식으로 닭이나 돼지 잡아먹는 거 보면 아궁이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마당에서 돌무지에다가 땔깜넣고 불 피운 거에 솥 하나 걸쳐놓고는 고기랑 야채랑 왕창 집어넣고 끌여서는 존나 같이 쳐 먹잖아.
 
무슨 아프리카 사람들 손님 왔을 때에 돼지랑 바나나랑 넣고는 잡탕 존나 크게 맹글어서는 마을 것들 죄다 쳐 먹는 그런 거랑 똑같다고.
 
 
아궁이라는 것은 최소 한강유역이나 충청도권의 양갓집이나 그런 지랄하는 것이에요. 그걸 가지고 갸들은 지덜이 고구려의 후예다 그런 의식을 가졌던 거다.
 
정작 그런 것은 마한남부인 전라도나 거의 대부분의 경상도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에요.
 
아니 심지어는 한수유역에서도 돈 없는 불쌍한 것들 아마도 마한계 피지배민 그러니까 지금의 강북개병신덜의 조상같은 놈들은 움집, 막집 지어놓고 살았다는데(암사동시대말고 이조말기말이다.) 씨발 클라스를 생각하자는 거다.
 
그리고, 지금 현재에 북부 한국어를 구사하는 인구인 북한인의 대부분은 신대륙으로부터의 동북아로의 교역이 열린 이래에 강냉이가 들어오면서 인구증가를 겪은 사람들이다.
 
물론 이조 초기에는 북한 인구는 훨씬 적었다고 봐야 하지만 통설과는 다르게 북한 인구가 적은 상황에서 이조의 압록강 이북에 대한 종주권이 강화되어 있었다.
 
 
 
일반론과는 다르게 고려조의 현대외교적인 실권문제로 간다면 고려조는 결코 반도의 전성기가 아니며 이조가 반도문명의 전성기이다.
 
전에 중앙집권의 문제와 지방분권의 문제를 잘 생각해야 된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명목상 중국황제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지로는 존재하는 종주권 문제도 들어가 있다.
 
고려조가 강성했을 것이라는 대부분의 명제는 인서울엘리트들의 낭만주의와 같은 것이며 현대에는 국내국외법적인 문제로 볼 수 있는 종주권문제로 볼 때에는 결코 고려는 압록강이북에 실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 겨우 압록강유역에 대한 실력행사를 할 수 있게 해준 것조차 요나라가 나와바리를 넘겨준 것이고, 압록강중류의 정안국 따위에 실력행사를 하려다가 몽골이 와서는 새끼야 어디서 손대노 요지랄카자 깨갱 하이고 성님 드소 요랬던 것이 고려의 수준이다.
 
압록강을 넘어서 여진에 대해서 복속과 공납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조이지 고려가 아니다.
 
 
애초에 그러한 자명한 관계에 따라서 이조의 영토가 현대의 한국 영토로 확정된 것이다. 즉 세종대왕이나 태종 때의 강역이 한국 문명의 최대 판도이며 임란 이전에는 만약에 그것이 현대에도 살아남았다면 중국과 국경분쟁 요소가 될 수 있는 북방민족들에 대한 영유권을 지니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 때에 생각해야 할 문제는 동북 3성에 대한 한국인의 클레임은 사실 이조의 이성계 집안에서 비롯하는 것이지 고구려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일찍이 이성계는 누르하치 집안이나 건주여진, 해서여진에 대해서 씨발 존나 꿇으라고 이 새끼덜아 뭐 이런 위계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애초에 현대적인 사가들에 의해서 당시에는 존재치 않던 영토라는 개념에 의해서 마치 그 땅들이 명조의 요동총병 따위가 관장하는 것으로 물타기 되지만 정작 그게 현대적인 접점을 가진 것은 아니며 임란 직전에 이자성이랑 선조의 나와바리라는 것은 본디 유동적인 거였다고 봐야 한다.
 
현대적인 입장으로 본다면 적어도 송강성(=지금은 폐지되어서 헤이룽장성이 되었음)일대정도는 현대적인 국제법상 한국땅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송강성은 명의 요동지역을 감찰하는 랴오닝성 선양시(=요동성)가 관청을 가지던 지역에서 가장 먼 지역이다.
 
그렇지만 실상은 여진족의 봉기외에도 송강성의 동쪽 지역이 러시아의 땅이 되면서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치인 그러한 지역에 대한 클레임은 완전히 소실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그러한 권리는 고구려에 기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조에 복종해야 했던 여진족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고, 이조의 현대화된 영토가 될 법리적 관점인 것이다. 물론 그 관점은 후금에 의해서 17세기에는 완전히 소실된다.
 
그것은 그냥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과 직접적인 인과를 가진 것이다. 그냥 여기에 특이점이 있다.
 
 
<여기서부터 소설>
 
거꾸로 생각해서 병자호란 때에 조선이 이겼으면 다시 말해서 쌍령전투에서 이조 군의 머스킷 일제사격이 먹혀서는 도주하는 여진족덜을 존나 학살하고는 홍타이지만큼은 살려 붙들어서는 쳐 잡아서는 인조가 야 쳐 꿇어라 새꺄 이러고는 존나 이노무새꺄 명에 압송당해서 참수당할래 아니면 내 존만이 되는 걸로 만족할래 이 조까튼 새꺄.
 
하따 근데 이미 동북 3성은 본인이 접수해버렸는데, 그럼 그 땅은 누구 것이 되는 건감유.
 
하따 씨발아 명이 토해내라면 내야지 그렇지만 동북 3성의 지방에 니가 심은 것덜 있잖아. 그 것덜은 명황제 스킵하고 나한테 직상납한다. 알간. 그러라고 너 살려주는 거야 이 새끼야.

홍타이지: 으허, 성님. 
 
 
하따 그니까 심양에 한자리 요동총병자리 그거는 명나라 새끼가 와서 차지하겠지만 이미 지방은 본좌(=홍타이지)가 다 쳐 먹었었고 부족장들 다 심어놨응께 치덜한테 나(=홍타이지)한테 조공하라고 해서는 거기서 내꺼 좀 챙겨불고 남은 것은 성님한테 상납하면 된당 말 아니요?
 
하따 이새꺄 내 말이 그 말이지 토를 단단 말이냐. 콜 오얼 낫. 아님 뒤지는 거고. 하따 당연히 콜이죠잉 하따 한때는 중국을 쳐 먹을 뻔했던 몸 그러나 오늘은 목숨을 부지해야 쓰겄소.
 
근디 본좌의 영지는 어디로 한담요? 지린성 집안현 통구 그거 고구려 새끼덜이 쓰던 거 거기 가서 처박히라고 이 조까튼 새꺄. 거기 딱 심으면 유사시에 조선군 보내서 털기도 쉽고 상납도 압록강 중류로 해서 보내기 딱 좋네 아 글고 명나라가 지랄카면 잠시 건너와서 짱박히면 되고 알간 이 개새꺄.
 
 
하따 성님 그럼 저희 나라 국호는 신고구려(여기서 국명은 그냥 나와바리명을 따는 것이지 민좃이니 하는 계통과는 무관하다는 뜻, 20세기의 민좃주의 사가 그들의 위선에 대한 반격이다)로 하고 싶은데 그래도 됩니까? 하따 시발아 고자랑 려자를 피휘해야지 고려 씨이벌 우리가 제사지내는 나라인데 니가 나라 이름을 그따위로 지어서 되긋냐? 그냥 고자랑 려자랑 조자랑 선자 신자랑 라자 안 들어가는 걸로 좃꼴린대로 지어 임마.
 
그럼 동예가 옛날에 있었으니까 북예로 짓고 싶은데 어쩔쓰까요잉. 
 
최명길:예전에 동예가 있었다고는 하나 이 나라의 직계는 아니므로 크게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홍타이지새끼가 집안현 퉁구를 거점으로 해서는 조선의 속국인 신고구려 아니 북예를 세웠다.
 
이게 이조가 이겼으면 생길 수 있는 이프라고 생각하면 된다.
 
추가 설명하자면 본인이 주장하는 요서영유설은 고려가 금에게 사대하기로 한 뒤에 금나라 이래로 북경의 황제들로부터 고려왕에게 Grant 된 권리였고, 조선중기까지도 조선의 고급장교나 사신들은 언제든지 건주여진의 부족민들의 땅을 마음대로 지나다니는 통행권을 물론이고, 복속요구나 군대나 사절단의 수발을 드는 것은 물론이고, 부족민의 사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고구려를 표방하는 것은 그냥 개나 소나 할 수 있다는 거다.
 
왕건이랑 고구려의 관련성? 그것도 그냥 개조또 있다면 있는 거고 없다면 없는 수순이라는 거다.
 
 
그런 개소리를 가지고 소설 쓰는 기성세대 개병신덜이 문제인 것이다. 그들 구체제 한국사가들은 애초에 원나라때부터 몽골놈들에게 붙어먹는 놈들로써 이들을 사대부라고 하였는데, 사대적인 puppet(괴뢰국)엘리트들이었고, 그들에게서 기인하는 선민사상적인 기술이 한국사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 때문에 정작 한국과 몽골인들을 결부시키려는 엉터리 이론들이 탄생하였다고 보고 그러한 부분들을 구축해가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학계의 과제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원대의 Mongol-Jurchen 지배계급내에서 이성계라는 놈이 기인해서는 그러한 놈이 한국을 다스렸던 것이 바로 이조시대였던 것이다.

고구려실록2.png

솔직히 중원고구려비가 고구려가 신라에게 상전행사를 했다는 것도 완전히 날조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친일파들이 한민족국가의 의미를 훼손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실상 지워진 부분이 많아서 피동, 사동관계도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실록의 기사와 비교한다면 내조하러온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에게 신라왕이 면포를 줬다는 것으로밖에는 비교론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위의 태종실록 4년 3월 21일 임술 2번째기사를 보면 동맹가첩목아뿐 아니라 그의 아우와 처남, 그리고 시위들에게도 물건을 차등 있게 모두 주었다고 한다.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 제위 상, 하에게 의복과 수교를 궤영에서 내렸다'는 중원 고구려비의 내용과 매우 매칭되지 않냐고.

이렇게 해석한다면 광개토대왕이라는 놈은 신라 매금의 일개 똘마니에 다름아닌 놈 밖에 되지 않게 된다.


즉 몽골-주르첸 지배혈통에 대해서 소중화를 자처했던 사대부 시키들부터 자국역사를 폄하했지만, 아마도 그 것조차도 사림집권 이후에 발생한 논거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조선조 중종때까지는 역사로써의 고구려조차도 신라의 속국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왜냐면 뻔하게 여진족 똘마니들이 조선왕조로 내조하러 와서는 시위라도 몇 일 서면 그 댓가로 뭐라도 받아가던 판이었는데 말이다.

하멜표류기에서도 하멜의 일당은 임금의 시위가 되어서는 복무를 하는 것으로 조선왕의 신하가 되는 것으로 되었다가 청국 사신에게 그들의 존재를 까발렸린 죄로 유배를 당했던 것이다.

부모님과 아내, 아이들, 친구, 약혼자와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자비를 베풀어 가족들이 있는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일본으로 보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왕에게 정중히 딸하였파. 그러자 왕은 벨떠프띠를 통해 "이방인들을 이 땅에서 떠나 보내는 것은 이 나라의 관습이 아니므로 여기에시 평생 살아야 하며 대신 우리를 부양해 주겠다"고   말했파, 왕은 우리에게 네덜간드식 노래를 부르게 하고 춥을 추게 하였 우리가 배운 모든 것을 해보게 하였다. 왕은 우리에게 융숭한 대펍을 한후 각자에게 아마포(亞麻佈) 2필씩을 선물했으며, 이것으펄 우리는 처음으로 조신식 의복을 입게 되었다. 그런 후 우리늘 다시 우리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총사령관의 부름을 받았는데 벨떠프레이를 통해 그는 황이 우리들을 방의 호위부대로 임명하였다는 것을 말해 주었디-. 그리고 우리는 그 대가로 한달에 각자쌀70깟떼이씩 받을수 있었다 우리들 각자는 조선 말로 이금과 나이, 출생 국가 그리고 왕을 호위하는 임무를  새긴 둥근 나무판(호패)을 받았는데 위에는 왕과 총사령관의 낙인이 새걱져 있었다. 그리고 소총(화승총)과 화약, 총알을 받고 신월(新月:초하루)과 만월(짠지:보름날) 때마다 그를 방분하여 경의를 표해야 하는 명령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조선에서는 왕의 하급 관리가상급 관리에게, 그리고 대신들은 왕에게 한 달에 두 번 경의를 표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만일 총사령관이 왕의 임무 수행으로 길을 떠날 때에는 하급 병사들은그와동행해야만한다. 그는 매년 봄에 ,3개월 가을에 3개월 모두6개 월 동안 군사들을 훈련시킨다. 그 훈련은 마치 실전과 같았고 세상의 모든 짐이 그들의 어깨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이 기간동안 그들은 한달에 세 번 맹훈련을 받았고, 사격 연습을 받았다. 그 당시 많은중국 병사들이 왕의 호위부대로 있었기 때문에 그는 중국인 친위병 한 명과 벨떠프레이를 우리의 훈련친관으로 임명하여 조선식으로 우기에게 모든 것을 가그치게 하였다. 흐는 우기가 필요한 것을 갖추고 옷 제작비를 지불할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아마포 2필씩을 지급했다. 

시위하게 하고는 물건을 차등있게 받아간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뜻이다.
 
다만 하멜과 여진족 동맹가첩목아의 차이는 하멜은 실질적으로 종신사역을 부여받은 것이었다면 동맹가첩목아와 그의 아우와 양자, 처남같은 놈들은 일시적으로만 섬긴 뒤에 인센티브만 받아챙겨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으로부터 고구려는 매우 심각하게 고평가되어 있고, 애초에 삼국사기조차도 조선조의 산물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 조선조내에서도 고구려우월론은 상식적으로 당시의 정서에서 존재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대나 태종대에 여진족 새끼덜이 내조하러 와서는 시위나 서고 돌아가는 판에 당시의 서울주류계급 내에서조차 고구려우월론이 과연 존재했을까?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 것은 아무리봐도 만주국과의 내선일체가 강조되던 20세기의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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