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까놓고 말해서 백제에 관한한 거의 대부분의 기록들이 전부 거짓말이다.
왜냐고 한다면 일본놈들이 그렇게 주작했기 때문이다.
이제서야 학계는 본인의 의견을 상당히 참고하는 것 같은데,
https://ko.wikipedia.org/wiki/%EC%9D%BC%EB%B3%B8_%EC%B2%9C%ED%99%A9
에서 지적하듯이 에도 막부 이전에는 천황이 일본의 최고 통치자라는 개념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는 에도 막부까지 천황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그러나 정이대장군은 자신을 ‘일본 국왕’이 아니라 ‘일본국 상국’(日本國相國)으로 칭했으며, 조선 또한 국왕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1407년 이후에는 정이대장군을 일본의 최고 실권자로 인식하고 국왕으로 호칭하였으며, 천황의 계보를 서술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와 같은 경우에는 쇼군을 국왕으로 호칭하고, 천황은 국정과 무관한 존재로 이름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천황을 실권자로 비정하는 일본 서기는 현실적으로 16세기 이후에나 편찬된 위서이며, 가장 현실적으로는 19세기에 발간된 것으로 간주된다.
한마디로 거짓말인 것이다.
따라서 백제왕의 계보로 일본서기에 제시되어 있는 대부분의 이름들도 죄다 날조이다.
특히 백제 말기에 제시되는 어떤 부분은 일본인들이 어떠한 곡해를 하게 되었냐에 대한 고찰을 하게끔 만든다.
그 것은 서동요라는 한국 고유 설화에 따르면 신라왕실의 성골인 선화공주와 결혼하였다는 무왕의 왕가로부터 비정되기를 백제와 신라의 투쟁은 결코 국가 대 국가의 투쟁이 아니며 되려 왕위계승분쟁이라는 관점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진흥왕의 첫째아들 동륜태자의 아들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의 아들이 의자왕이고,
진흥왕의 둘째아들 진지왕(폐위)의 아들 용춘의 아들이 김춘추이다.
여기서 김춘추는 진지왕의 부계 직계이며, 의자왕은 동륜태자의 아들의 외척집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사회에서 골품이라는 것은 부계와 모계의 정통성을 모두 반영했다. 따라서 의자왕 또한 신라의 쇼군이 될 수 있는 주장을 할 근거는 있는 것이다.
게다가 김춘추의 할배인 진지왕은 덕이 부족해서 폐위 당했다는 핸디캡이 의자왕은 외척쪽이라는 것을 상쇄시켜줄 것이다.
그런데, 둘은 실지로는 완전히 상이한 기반을 가지고 있는데, 김춘추는 서라벌의 예의 유력한 귀족집단 출신인 반면에 의자왕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것으로 추정되는 익산의 쌍릉으로 대표되는 익산이라고 하는 예로부터 목지국이라고 불리었던 매우 부유한 지방의 영주인 것이다.
유럽에서는 상당히 전형적인 중앙의 유서깊은 귀족과 가장 큰 영지를 가진 richest 영주의 갈등이다.
여기서 의자왕이 대야성을 공격할 당시에 김춘추는 자신이 정계에서 은퇴할 뜻을 내비쳤다는 기록이 중요하다. 한국식 봉건제가 몽골인들에 의해서 전제주의로 바뀌기 이전의 형태는 그나마 일본에서 발견되는데, 일본 정계의 오랜 관행에 따라서 아마도 김춘추는 자신이 정계은퇴를 하면 의자왕도 은퇴를 하는 식으로 서로가 막후가 되는 방식을 통해서 두 파벌의 첨예한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김춘추의 행동 자체가 또한 복선이 깔린 짓이다.
김춘추는 자신의 자식들 또한 역시 서라벌의 귀족들에 의한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성골집안의 거두로써 작용하는 김춘추 집안의 위신은 대가 바뀌어도 전혀 줄지 않는 반면에 의자왕은 하필 자손이 많았고, 그들이 의자왕의 영지를 분할상속하게 되면 개개인은 발언권이 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춘추의 제스쳐는 서로 물러나도 내가 이긴다라는 계산에 근거한 것이므로 진정성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거의 즉각적으로 그러한 경우에 김춘추의 딸이 하필 대야성주이던 또한 유력가문과 결혼해있었고, 아마도 둘이 함께 정계에서 칩거할 경우에 매우 유력한 다음 세대의 주자가 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날의 일본정계를 참고하거나 한국의 출계집단에서 부모의 양계를 모두 감안하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의자왕에게 그러한 제스쳐는 정치적인 기만일 뿐이다. 특히 김춘추의 사위인 대야성주가 그들의 세대의 다음 세대의 유력주자로 있는 반면에 의자왕의 아들들의 처우에 대해서 서라벌의 귀족들이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서로 좋게좋게 파벌의 수장이 나라를 파토내느니 나란히 뒤로 물러납시다라고 하는 김춘추의 행동 자체가 좋게 보일리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결렬의 제스쳐로 김춘추의 딸과 사위놈을 공격해서는 죽여버렸다. 이로부터 진흥왕의 두 자손간의 왕위계승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다지 위서로써 신뢰성은 없지만 삼국사기에서도 기록하기를 김춘추의 두 아들인 김인문이나 김법민이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 것 역시도 그 것은 가문대 가문의 싸움인 것에 근간한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그 것은 국가대 국가의 전쟁이 아니라 김춘추 집안과 의자왕 집안의 사적인 분쟁인 것이다.
적어도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어쩌면 의자왕도 삼한일통을 했을지도 모르는 해동증자라는 표현인데, 그 표현이 의자왕의 백제가 신라를 구축하고 승리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것은 의자왕이 신라의 왕이 된다는 뜻이라고 봐야 한다.
여기서 의자왕은 대단히 shrewd 한 익산기반의 대영주로써 자신의 엄마로부터 가지고 있는 클레임을 십분 활용해서는 김춘추라는 대항마와 수가 틀리지만 않았다면 신라의 대왕이 될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익산일대의 지명은 다시 신라말기에 등장하게 되는데, 익산과 멀지 않은 전주지역의 호족이던 견훤이라는 사람이 당시에 고려와 신라의 전쟁에서 신라의 편을 들어서는 신라왕가를 지지한 것이다.
여기서 견훤은 모계든 부계이던 어떤 방식으로든 무왕과 선화공주의 먼 방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후삼국이라는 것 자체도 고려조의 인간들이 승자의 관점에서 쓴 것이 아니라 고려사 자체가 이조의 날조물이므로 고려말기에 남부민들의 대대적인 반란에 봉착해서는 그들을 진압했던 이성계의 오랑캐왕조의 무리들이 이이제이의 술책을 부려서는 의도적으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간질 시키려고 한 노력의 결과물이 후삼국이라는 것이다.
마르티나 도이힐러가 말했듯이 한국의 노비집단은 고려와 신라의 전쟁에서 패한 신라의 군사계급들의 후예들에게 천년동안 지워진 숙명이었다.
따라서 두품을 가지고 향촌에서 호족으로 행사하던 그들과 함께 지방전체가 강등되어서는 향, 소, 부곡이 되어서는 단지 주인집안만 노비가 된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 신라계 호족들이 다스리던 지방민 전체가 천민으로 격하된 것이다.
그러한 굴레는 20세기가 와서야 폐기되었고, 동학의 난이나 공산당 빨치산 남부군의 결성 등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즉, 충청도의 고려조에 충성한 몇 가지 가문들을 빼고는 삼남전체가 사실상 노예화되었다.
여기서 백제가 충청도의 토착가문이라고 비정하려는 조선조의 사가들의 시도는 충청도의 친일지주가문들에 대한 예우의 차원에서 역사를 지어내 준 것이다.
여기서 백제계 왕가로부터 그들이 나왔다고 주장하고픈 근대의 사이비 일본사가들의 이해관계가 오랑캐 왕조인 이조의 구체제 사가들의 관점과 절충된 것이다.
자 여기서 이미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신라는 왕가이고, 백제는 공가라면 왜는 한같 백작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위계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의자왕의 왕위계승분란은 공가인 의자왕이 왕이 되려고 하는 claim을 주장한 것이다.
마치 영국에서 장미전쟁 당시에 랭카스터 공작가가 왕위를 주장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의자왕의 삼촌이었다는 아좌태자라는 놈은 왜에 분봉되어서는 왜에서 영주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물론 왜를 오늘날의 일본전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때의 왜는 단지 헤이안일대의 매우 협소한 지역의 영주일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즉 봉건제적인 상식으로는 미약한 호족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간단한 위계질서가 성립하는 것이다.
신라는 왕가이고, 백제는 그 밑에 있는 익산계의 목지국의 공작가문이며, 헤이안의 갸들은 그 공작가문 밑에 있는 일개 백작가문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의 상태라는 것이 존나게 안습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 지역 나라현은 인구 꽤 넓은 땅에 인구는 단지 136만에 불과한 별 볼 일 없는 지역이다. 요컨데, 뭐 소멸예정지역이라는 경북의 군들 서너개 이어붙인 격이다.
그런 지역에 분봉이 되어서 거기서 영주나 하라고 해서는 해방직후까지는 한국의 4대 도시였던 전라도 전주일대에서 태어나서는 일본열도의 산만디 중심으로 분봉되어 가는 처지니까 아좌태자가 무왕을 불들고는 이산의 아픔을 나눴다고도 하는 것이다.
헤이안뿐 아니라 교토시조차 인구 147만밖에 안 되는 아주 좃만한 도시이고, 사실상 관광으로 먹고 사는 아주 협소한 지역이다. 그 사이즈를 대략 비교하자면 똥푸산의 복천동 고분군이 있는 지역의 부산시 동래구와 금정구와 연제구 일대의 인구를 합한 사이즈밖에 안 되는 아주 좃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열도에서는 16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센고쿠 다이묘라고 해서는 매우 자그마한 영주들 위에 있는 큰 영지를 가진 공작급의 대영주가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열도 전체의 인구나 경제력과 무관하게 봉건제적인 입장에서는 열도의 영지에 부임한다는 것은 대단히 가난한 영지만을 상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난한 영주들은 신라천황의 직속 영주도 아니고 목지국의 서양으로 치면 공작위이던 백제공가에 복속되어 있다는 대단히 안습한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한 위계관계를 부인하기 위해서 근대 일본 사가들은 고대사를 대대적으로 위조했던 것이다.
그 작업 중에 하나가 백제와 신라가 동급인 왕조라는 관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심을 느낄 것은 아니고 어차피 봉건제라는 한계상 신라왕들의 실질적인 행정력이 미치는 곳은 경주및 경상남도 동부일대 뿐이고, 그 외의 영토들에 대해서는 영주들의 지지에 따라서만 단지 간접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서양봉건제에서 기사도가 존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낭도라는 것이 있어서 신라사회의 기틀을 유지했다.
화랑이라고 하는 것은 낭도중에서 우수한 유력자제들만 뽑은 엘리트 기사단과 같은 것이고, 낭도郞徒라는 이름은 기본적으로는 행랑채에 거숙하는 식객인 낭인浪人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디는 행낭을 하는 부랑아를 뜻하는 낭인들이 점차 성골가문들의 참모나 군인계급이 되고 일부는 분봉되어감에서 호족이 되면서 낭도라고 하는 특별한 계층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일본에서는 사무라이라고 하는 계층이 된 것이고, 여기서 애초에 일본식 봉건제는 신라에서 기인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신라의 경주 지역에서 성주, 혹은 장군으로 불리던 경주 지역의 호족가문이 크게 대두되게 됨에 따라서 후일에는 중국의 공식 책봉을 받아서는 왕이라는 칭호로 개칭하면서 정이대장군과 같은 중국문명의 승인을 받은 왕칭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그러한 칭호관계는 기존에 친일파 학자들의 비정과는 다르게 포상팔국의 난이라고 하는 경상도 동부세력과 경상도 서부세력간의 대전쟁에서 신라와 금관가야와 복천동의 세력이 연합한 세력들인 동부세력이 승리하게 됨에 따라서 적어도 권력관계는 확정된 것이다.
포상팔국의 난은 209년~212년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써 당시에 신라의 지도자이던 이사금 석내해라는 놈이 승자였던 것이다.
여기서 본인은 이미 블로그의 다른 글에 박혁거세라고 하는 것은 선비족 오랑캐 새끼덜의 민족지적인 관점이 한반도에 투사된 것으로 그 것은 전적으로 후대에 날조된 외삽이라고 주장하였고, 불교지도자의 법명을 가지고 있는 석씨가 신라의 왕공족의 근간이 됨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체계는 캄보디아에서 이미 기원후 1세기 경에 불교전제국가라는 모델이 제시되어 있던 아시아 역사의 흐름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BA%84%EB%B3%B4%EB%94%94%EC%95%84
를 보면,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캄보디아에는 기원전 2000년~1000년대 사이에 신석기 수준의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 [1] 이들은 주로 중국 동남부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후 1세기경에는 메콩 강 하류와 하구에서 농경과 어로, 목축을 통해 생활하며 조직화된 사회를 구성한 집단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인도와의 교류를 통해 종교 등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인도차이나 반도에 알려진 첫 번째 국가인 푸난을 세웠다. 푸난은 1세기 에서 6세기 말 경까지 번영했으며, 이후에는 메콩 강 중류에서 일어난 진랍의 공격을 받아 위축되다가 7세기 중엽 멸망하였다.
라고 해서 아마 기원후 1세기 경에 푸난이라고 하는 통일왕조가 제시되어 있었다. 신라의 역사는 그러한 범주를 따르는 것이며, 따라서 6세기 이후에나 성장하였다는 것 역시 인서울의 이조 하수인 새끼덜과 일본학계의 합의에 따른 연구의 산물이다.
그러나 가야사의 관점에서 이미 경상도 전체를 통합하는 대전쟁이 기원후 3세기에 진행되고 있었고, 더욱이 신라의 이사금은 자신의 이름에 부다를 뜻하는 석昔자를 세겨넣은 법왕의 개념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점들은 오랑캐들이 고려조를 찬탈해서 세운 조선 왕조 이조정권에서 피지배인들을 다루는 세뇌 프로파간다로써 유학이라는 것을 제시하게 됨에 따라서 불교 법왕들의 통일왕조라는 관점자체가 부인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500년 역사가 모조리 썰려나간 것이다.
가야라는 것은 포상팔국의 난 이전에는 강력한 대항마였지만 그 이후에는 일본봉건제의 원조인 신라봉건제 내에서 영주나 하던 것들이지 별개의 국가나 문명개념이라고 보는 것은 신라의 의미를 깍아내리려는 관점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백제라고 하는 것은 단지 신라왕가의 방계영주집안에 불과하기 때문에 신라는 애초에 경상도 및 전라도에서 거의 유일한 한국문명의 통일왕조로 제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애초에 고대에서부터 신라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중원고구려비 이북에 있는 충청도의 일부지역과 경기북부의 고구려 새끼덜만이 진짜 오랑캐 새끼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으로는 신라가 고구려 세력을 복속시켰지만 후일에는 고려새끼덜이 신라를 복속시키고 남부민들을 대대적으로 천민으로 격하시키는 과정을 겪으면서 반도사회는 노예제화 한 것이다.
그러한 위계관계로써 고려조의 수도였던 개성이나 서울의 기호지방권은 중앙이 되고, 반면에 복속당한 남부지역은 지방이 되는 것으로 정복자들의 후예인 것들이 사는 수도 서울과 피정복자들이 거하는 잡지역인 지방이라는 구도가 천년전에 제시된 것이다.
오늘날의 인서울 새끼덜의 resident of Seoul 으로써의 부심이라는 짓거리는 모두 그러한 중세전쟁의 복속관계에 근간하는 근자감인 것이고, 반면에 지방은 여전히 자본주의적인 출자관계나 중앙집권적인 행정부에 의해서 중차한 디시전 메이킹으로부터는 배제되고 단지 그가 가진 노동력을 기반으로만 한국경제에 이바지하는 국민이라는 용역을 제공하는 일개 노예에 불과한 처지인 것이다.
이미 이조시대에 제시되기를 노예는 용역을 전가할 수단으로써 간주되었고, 게다가 적은 여기에 두고 파견을 한다는 개념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명백히 이조로부터 근간한다.
이조 시대에 중차한 재판 중에 하나는 파견에 의해서 선조대와 다른 곳에서 사역하거나 경우에 그들의 부모의 공노비 신분을 복권시켜 달라고 하는 것이었을 정도로 한국의 노동시장은 이조시대적인 노비제에 상당히 근간한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507.html?_fr=mb2
에서 제시되는 예시와 같이
양인신분보다 공노비가 차라리 더 나아서 제발 공노비로 만들어주쇼라고 하던 것이 이조시대의 양상이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점은 위에서 지적했지만 위의 노파 다물사리의 아주 먼 조상은 아마도 고려와 신라의 전쟁에서 신라의 경순왕 혹은 견훤의 군사로 참전했던 집안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 한반도는 남북한으로 양단되었기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서 남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라의 후예들이고, 고려조에 의해서 노예로 강등당한 사람들이다.
그에 반해서 인서울의 강남 새끼덜만 고구려 새끼덜 이민족 지배계급의 후예새끼덜인 것이다.
그러한 관점을 가질 경우에 그들은 민주주의 반체제적인 앙시앵레짐 새끼덜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이씨 왕조라고 하는 것은 고려조의 절손된 무신정권의 이린의 자손임을 주장한(주장=팩트가 아님) 실은 몽골의 친왕집안이던 징기스칸의 동생이었던 테무게 집안을 섬기던 몽골 오랑캐 새끼인 이성계라는 놈이 당시에 친원파 매국노들에 의해서 고려왕조에 입조해서는 당시에 고려조에 대해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던 것을 진압할 목적과 함께 명에 대해서 공동행동을 하자고 해서는 몽골의 행정구역인 쌍성총관부의 유력자이던 이성계라는 놈이 고려조에 입조하였다가 마치 게르만인들 용병대장들이 로마를 전복하듯이 몽골놈 용병대장 새끼가 왕권을 찬탈하고는 세운 이민족지배왕조가 바로 이씨 조선이다.
그 과정에서 이씨 조선이 남부 지역의 한국인들과 대대적인 군사투쟁을 벌였고, 그 것에는 최무선이라 하는 이름만 한국식으로 개칭한 몽골새끼가 충청권과 전라권의 뱃사람들이 태안반도를 중심으로 뭉친 것을 공격한 것이나 후일에 이종무라는 놈이 경상도해상세력과 쓰시마섬의 사람들을 정복한 것이나 결정적으로는 이성계 본인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는 남부민들이 상경해서 고려조를 갈아엎기 위해서 결성한 아지발도라고 하는 사람의 군세를 격파한 것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어떤 병신덜만이 이성계가 어떻게 오랑캐가 될 수 있냐 이 지랄인데, 다시 말하지만 일제시대 치세내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소위 창씨개명이라고 하는 대대적인 문화말살 행위에 의해서 그 모든 한국인은 석자 이름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도록 강제되었고, 그 이전의 시대에는 되려 석자 이름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몽골놈의 하수인새끼 가문을 의미한 것이다.
작가 피천득이 밝히듯이 피씨 성을 일본관헌이 쳐 쓰도록 먹였다고 안 카나 씨발구야.
본래 석자 이름은 몽골왕가의 하수인인 문무양반이라고 하는 또한 몽골계들과 어떠한 방식으로든 결합한 집단만이 쓰는 것이고, 만약에 그런 형식의 이름을 쓴 작자가 너의 5대조 이상으로부터 기인한다면 너희 집안은 몽골놈 하수인 새끼다.
매우 특수한 예외로써 토성이라고 하는 성씨를 쓰는 종자들만이 한국인 피지배계급으로써는 성씨를 썼을 뿐이에요.
그나마도 주로 본래는 신라조 때만 해도 지방의 영주집안이었지만 이조의 전제주의에 의해서 일개 서리로 강등된 아전집안이나 대체로 토성이나 가질 뿐이에요. 천민이나 양인따위에게는 그조차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종자들은 지금 현대에는 특히 인서울 지역에 많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 모든 이러한 복속된 세력들은 왕건의 지배 내에서는 그래도 무신으로라도 출세할 수 있었지만 몽골의 침략이후에 지배가 갱신되면서 그 이후에는 한층 더 공고한 것으로 바뀐 것이다.
이 때에 주로 기호지역의 기층계급 출신으로써 몽골 전제주의의 철퇴를 맞아서 박살난 사람들이 삼별초와 무신세력들이고, 지방의 구신라지역의 사람들 역시도 참화를 입어서 황룡사가 불에 타고 신라및 백제인들 나아가서 삼남인들 전체가 참화를 입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몽골 새기덜의 하수인짓이나 하던 매국노 새끼덜이 고려조 후기이후에는 한국의 지배계급으로 제시되었고, 단지 삼남인들 뿐 아니라 한성및 개성의 중류층들에게도 매우 가혹한 지배가 펼쳐지게 된다.
그 예로서 서얼의 허통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요컨데, 한성내에서 단지 10프로도 안 되는 사람만이 양반이었고, 그 외에는 모두 노예였다.
그리고, 서얼이라고 하더라도 통상적으로 대가 멀어져서 끈 떨어지면 여느 천인만 못하는 존재가 되게끔 되어 있었다.(양인이라고 해봤자 공노비만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자.)
즉, 아비는 양반이고, 에미는 천출인 얼자라고 해봤자 딸년이 공노비랑 결혼이나 하면 안심할 수 있는 별반 별 볼일 없는 놈이고, 아들놈은 뭐 나중에 왈패에나 안 팔려가면 다행인거다.
흥보전에 그러한 것이 잘 기술되어 있는데, 곤장대신맞기 알바나 하는게 그런 거다. 그러니 중인이라고 하는게 아주 웃긴 것이다.
용산의 용팔이 같은 것이 이조 중인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딱이고, 그게 어떤 것이었냐는 것이다.
이조라는 것은 아주 철저하게 양반엘리트만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구도가 현대에는 강북이나 지방이 별반 다름없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뭐 강북에서 쫓겨나면 뭐 경기도 지방놈이나 되는거지. 서울에 붙어 먹는 새끼덜은 죄다 점차 선택받은 종자새끼덜로 채워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조 새끼덜이 군인에게 지급하는 군인전이나 전몰장병에게 지급하는 구분전 따위를 폐지한 이래에 한국의 토지는 철저하게 상류층에게만 점유되었고, 조용조의 부담을 노예가 떠안는 형태로써 공짜복무가 상민 및 천민에게 강요되었다. 그 것을 이조 때에는 번상이라고 불렀는데, 주로 이조의 직속연대들이 수도권에 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지방 관청에서 용역을 제공하는 아전들 역시 모두 노동력은 의무로써 무상제공한다는 개념이었고, 뭐 오늘날에도 지방의 군청들의 행정과정을 이장들이 도맡아 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특별시나 광역시권을 벗어나면 마을의 일은 죄다 이장이 다 하고 지방관청의 공무원 새끼는 완장이나 찬 갑질하는 명령권자인 경우가 허다한데 이 모든 것이 현대한국의 민주주의 법통과는 하등 무관한 이조노예제의 잔재라고 본다면 한국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부터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러한 이조노예제의 잔재로써 가장 대표적으로 지방 아전이 무료봉사를 하는 마을 이장들의 저가 봉사행위와 국군이라는 이름만 국민의 군대라는 인서울 훈련도감 군대 새끼덜의 저가 복무강요인 것이다.
그러한 조용조의 용역제공의무가 여전히 한국 체제에 남아있는 것으로부터 사실상 아직 한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면 단지 모양새만 그렇게 갖춘 인서울 노예제 체제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학교들을 교묘하게 배치시켜서는 국가의 요직을 갸들이 모두 장악할 수 있게금 한 안배라던가 대기업의 소유권과 지분 문제등이 이나라는 참민주주의 국가가 아님을 간증한다.
의 문장은 참으로 인용할만 하다.
무신 정변은 한국사에서 몇 안 되게 집권 계층을 싸그리 물갈이한 사례로는 의미가 (부정적으로라도) 있는 사건이다. 특히 최근 들어 권문세족 - 사대부의 연결성과 훈구파 - 사림파의 연결성이 주목받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한국사에서는 더욱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다. 묘청의 난 등 전조가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지방의 뛰어난 인물이 중앙에 합류, 중앙 귀족과의 교류로 성장'하는 식이 아니라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면서 중앙에 진출하여 명예를 재확인'하는 식의 성장(대표적인 예가 바로 양반), 그리고 여기에 힘입어 중앙이 지방 세력과 타협할 수 있을 정도의 연결고리를 갖게 된 것도 무신 정변으로 인한 집권 세력의 격변이 미친 영향으로 평가받는다.
무신정변세력들이 후일에 몽골새끼덜에 의해서 학살당한 이래에 한국 사회에서 '지방의 뛰어난 인물이 중앙에 합류, 중앙 귀족과의 교류로 성장' 한 경우는 있어도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면서 중앙에 진출하여 명예를 재확인'하는 식으로 성장한 인물이 없다.
요컨데, 지방 출신이라고 해봤자 무늬만 지방 출신이지 실상은 중앙 새끼덜과 작당모의질해서는 좃목질로 내려온 새끼덜 뿐이라는 것이다.
그 내려갈 새끼덜을 뽑는 것이 오늘날의 중앙당의 공천이라고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날에도 수평적인 지방과 중앙의 관계는 전혀 존재치 않는다.
그러한 중앙 귀족 새끼덜의 양대정당에 의한 이조의 인서울북촌으로 결집되는 새끼덜이 전국을 통치하는 것과 같은 것이 인서울 양당독재인 것이다.
즉,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 조차도 인서울새끼덜 기레기 새끼덜이 납득하도록 세뇌하는 한갖 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본인은 단지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빨갱이 그 지랄도 거부한다. 나는 엄연히 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자 한국법률 제15750호 소위 정당법 제3조에 의하면 한국의 그 모든 정당은 수도에 소재하는 중앙당과 지방에 소재하는 시도당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만약에 독일처럼 지방의 주에 근간하는 정당을 가진다면 그 것은 법률위반이 된다.
그러하기 때문에 만약에 지방근거의 사람은 단지 무소속으로만 출마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그가 그의 근거지로부터 중앙국회의 의석및 지방시도의회의 의석만을 노린 지방기반정당을 만들면 그 것은 한국에서는 불법이다.
이미 그러한 선례로써 울산의 노조원들 중심의 민노당이라는 것이 한 때에 성립되어서 울산지역의 지방의석과 국회의원직을 다툴 수 있던 울산에서만큼은 많은 지지를 받던 정당이 있었지만 중앙당을 만들어야만 승리한 의석들이 인가될 수 있다는 압력에 의해서 중앙당이라는 것을 서울에 만들었는데, 민노당의 중앙당은 아마도 국정원새끼덜이 침투시킨 경기연합새끼덜 인서울좌파새끼덜에 의해서 전복당해서는 울산당으로써의 민노당은 인서울 엘리트 새끼들에 의해서 전복당하고, 통진당으로 바뀐 사례조차 있다.
이석기 판결로 그러한 당을 폐기시켜 버린 것조차 일종의 더블 프레임이고, 이석기 임마도 배경이 의심스러운 씨8놈이다. 나는 금마가 국정원이 침투시킨 공작원이라고 생각한다.
민노총이 영국식 노동당을 울산과 창원을 중심으로 창설하려 했다는 이유로 그러한 짓이나 하는 새끼덜이 구체제 인서울 엘리트덜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지금의 여당이 진보라고 하지만 갸들도 방관적이었고, 갸들은 어차피 철저하게 서울 중심의 권력구조만 지향하는 씨8놈들이다.
그리고, 민노총 문제에서 보듯이 한국 사회에서 용역을 제공하는 놈은 지방놈이고, 그 용역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자본의 축척및 자본소득을 거두는 새끼덜은 서울새끼덜이라는 과점에서 애초에 중소기업 문제도 접근해야 하지만 갸들은 논의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초에 노무현이 시도했듯이 구체제 상전들의 도시인 서울이 이 나라의 수도라는 것부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인서울 앙시앵레짐 새끼는 법원 새끼덜이 관습법이라고 하는 말도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나온 것이고, 그 관습법의 근거가 정작 이조의 수도로부터 근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나라는 여전히 이씨왕조의 인서울북촌의 양반세력이 중앙세력으로써 작동하는 봉건제국가임을 관습법을 통해서 확인을 한 위헌적이고 반체제적이고 반동적인 짓거리가 사법부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러한 사법부는 반헌집단의 반란수괴조직으로 간주되어서 시민권력에 의해서 끌어내려져야 한다.
그와 더불어 로스쿨의 임용체계도 엘리트 체제에서 바뀌어서는 사회봉사활동이나 노조활동이나 정당활동의 근거가 있는 자들만 넣도록 해야 햐며 무엇보다도 서울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대학체제조차 적어도 법대나 정치외교과와 같은 통치행위와 관련된 것들이라도 모두 강제로 분산시켜야 하거나 아예 폐기해야 하며, 법조계 내의 권력 세습도 금지되어야 한다.
부모의 한쪽이 판사나 검사나 변호사라면 자식은 법조계에 들일 수 없게 해야 한다.
다시 각설하고 역사로 돌아와서 애초에 한국문명이 어떤 것이냐고 한다면 그 것은 삼남지역에서 발생하여서는 점차점차 반도북부지역으로 팽창하려고 한 정권이다.
따라서 중세 이후에나 정치적인 중심지로 제시되었던 중부의 엘리트 중심의 관점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신라가 아라가야 따위와 패권을 겨룰 때에 중부지역은 고구려계의 여진족 오랑캐의 지역의 의미밖에는 존재치 않았다.
그러나 매우 후일에 그러한 여진족 오랑캐들이 한국인들의 정권을 seize 하고는 이씨 왕조라는 것을 세우게 됨에 따라서 고구려따위도 한국 역사라는 관점을 조선왕조실록이나 조선 시대에 실제로는 편찬된 것이 확실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따위의 위서를 통해서 세뇌하려고 한 것이다.
적어도 왕건이라는 인간은 경기북부 혹은 황해도권의 통일신라사람이었던 반면에 이성계 출생지는 일단 갸들의 주장상으로는 함경도 화령이라고 하지만 모두 거짓이다.
이성계의 진짜 고향은 중국 하남성이고, 어쩌면 그는 아마도 하남성에서 홍건적을 물리친 공적으로 승진했을 수 있다.
https://m.blog.naver.com/sugugo/100001615446
를 보자.
'원의 홍건적 토벌사령관 차칸테무르(察열祐木兒)가 섬서성과 감숙동부 지방에서 활거하던 홍건적을 격파하고 홍건적의 본거지 개봉(開封)을 100일 동안 포위하여 성내(城內)의 식량 유입을 차단시킨 후 개봉성(開封城) 전투에서 승리한다. 개봉을 탈환한 차칸테무르는 전사하나 이어서 차칸테무르의 아들 쿠쿠데무르에 의해 회안(堆安)지역과 산동(山東) 지역(익도)에 있었던 홍건적의 본진은 궤멸을 당한다.
잔당들은 본거지를 안풍(安豊:안휘성,팍구)으로 옮겼으나 홍건적의 지도자 유복통이 장사성(張士誠)의 부하(여진)에게 죽고 이듬해(1364년)에는 허수아비 오왕(吳王:홍건적의 왕) 한림아(韓林兒)가 제주(濟州:안휘성 동부)에서 주원장(朱元章:명태조)에게 살해당한다.
로 쓰여져 있는 것이다. 고려의 경성(京城)에서 1362년(공민왕 11년) 1월에 죽었다는 홍건적 본진 1군의 지도자 관선생(關先生)과 사류(沙劉)가 대륙사(원전)에 의하면 1362년 같은 달에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에는 고려의 경성(京城)에서 홍건적의 본진올 격파하고 관선생을 비롯한 10만 명올 도육하여 적(城)의 시체가 성(城)에 가득했고, 잔당 10만 명은 압록강을 건너 (지도자 파두반) 도주했다고 쓰여져 있다. 반면에 대륙사(신원사,명사)에는 하남성 개봉(開封)에서 본진이 패(敗)할 때 관선생과 사류가 전사하고 유복통과 한림아가 개봉을 겨우 빠져 나와 안풍(安豊:안휘성 곽구현)으로 도주했다고 쓰여져 있는 것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원의 도성 대도(大都)는 공략한 일조차 없는데 원(元) 황제(순재)의 옥새를 고려의 도성 패전시 홍건적으로부터 수거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반도와 고려로 설명을 하면 반도의 황해도 개성에서 원황제의 옥새를 홍건적으로부터 수거한다는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중략)...
고려의 경성(京城:하남성 개봉)에서 홍건적 토벌에 사병(私兵)올 이끌고 혁혁한 공을 세웠올 때의 이성계 나이는 27살이었고 쌍성(雙城:타타르인의 고장, 여진 및 야인거주지 현 내몽고)에서 아버지 자춘(子春)이 고려에 귀의한 지 7년째 되는 해가 된다. 이성계가 고려의 경성(京城)에서 격파한 홍건적과 하남성 개봉(開封)에서 패전 도주한 홍건적은 같은 무리다.
이게 뭔 말이냐고 카면 1362년에는 아직 대도가 함락되지도 않았는데, 홍건적이 별안간 개성북부에 워프해서 나타난 것을 물리쳤다고 하는 개소리다.
아마도 이조 새끼덜이 미처 주작을 못 했다는가 보다.
여기에 다르면 이성계가 27살에 격파했다는 홍건적의 격파 공로는 적어야 되는데, 그 격파 공로는 정작 중국에서 이루어진 공적이었기 때문에 이성계 버러지 새끼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감추려는 시도와 절충될 수 없는 관점이라서 미처 주작을 하지 못했나 보다.
이성계가 27살일 때에 홍건적은 북경 박살내고 동북3성을 점령하고는 한반도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하남성(=허난성)에서 일진일퇴의 삽질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성계는 거의 확실하게 중국의 이 전장에서 공적을 세워서는 반도의 쌍성총관부로 임명되거나 혹은 가문의 기반지로 금의환양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한 몽골놈한테 고구려 역사가 반도 역사의 일부라고 우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한국인의 고유 역사가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반도 이남에서 발생해서는 점차 북상했다는 것이다.
이성계라는 놈은 그 과정에서 역설적인 controversy를 제시하는데,
의 글에서 적었지만 그가 비록 이민족 출신이지만 정작 한국인들의 한반도정권의 판도를 팽창시키는 것에 극적인 기여를 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위의 글에서 밝혔지만 한반도 정권의 동북3성 지역에 대한 현실적인 클레임들은 조선 왕조의 야인들과의 주종관계에 의거하는 것이지 고구려와는 하등 무관한 것이다.
고구려의 강역을 수복한다는 관점은 매우 현대의 사가들에 의해서 제시된 것으로 친일파 파시스트들이 한민족 레벤슬라움이라는 개념을 제시해서는 대일본제국의 만주사변및 중일전쟁에 한민족이 동원되게끔 하는 전쟁프로파간다로써 극히 현대적인 관점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정작 조선왕조에게 있어서 여진 야인들의 땅이 민족강역이라는 관점이라는 존재했을 리가 없으며, 게다가 속지주의적인 것이 아닌 속인주의적인 개인과 개인 차원의 복종의 차원에서 야인들에게 너거들은 우리 왕가에 충성해야 된다는 관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병도나 노태돈이나 인서울 학파들의 대다수 인간들이 자신의 관점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씨 정권의 하수인들의 관점을 그대로 옮긴 주제에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것과는 다르게 동아시아의 역사라는 것은 쓰는 주체에 따라서 관점이 상이해질 수 있는 역동적인 것으로 이해하여야 하고 그 매듭을 어떻게든 다시 풀어서는 재해석해야 하는 것이지 그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히스토리는 아시아에서 애초에 등장한 적이 없다.
역사라는 것은 애초에 정권에 의해서 기술되는 관학이라는 뜻을 가진 것이지 서양의 히스토리는 커녕 기독교 세계내에서 일관적인 관점으로 기술되는 것조차 없었다는 말이다.
중국의 정권이 수시로 오랑캐들에 의해서 찬탈되었기 때문에 유학은 결코 기독교적인 앵커가 된 적이 없다.
그리고, 일본 역사 역시도 서양인들이 도호쿠에 도래한 시점 이후에나 급속도로 기술되고 있는 편향된 관점이고, 한국사조차도 이조 정권에 의해서만 갸들의 관점으로 일방적으로 죄다 기술된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릉비조차도 정작 그 작업을 한 것으로 간주되려고 했던 광개토대왕릉비를 작업하던 작업장의 유적이라는 것이 잠시 이슈가 되었는데, 정작 그 작업장은 청대의 것이더라 이 지랄이다.
물론 그 증거만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고고학이라는 분야가 있기 때문에 말은 감히 삼가하겠다.
뭐라구요? 야 나는 공학도인데, 솔직히 이거 역사라고 쳐 넣을래? ㅋㅋㅋㅋㅋㅋ 오류데이터는 그냥 삭제해버린다가 우리 바닥에서는 상식이라서 말이다. 물론 그 체계를 검증하려면 엄청난 발굴이 되야 되겠지.
그거 팔아먹는다는게 국사검정시험 따윌 감히 낼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다. 그리고 고구려 우리 역사라고? 야 너거 스승 대일본제국 반자이 이 지랄카던 놈이잖냐. 야 씨발 사기칠래? 응, 씨8놈아?
뭐 한민족의 레벤슬라움이 동북3성에도 있응께 박정희의 만주국군 복무는 한민족의 강역내의 영향력 확장을 위한 민족적인 거사라고? 죽여불랑께.
야 그따구로 살지 말라는 거다 이 씨발 것들아. 역사가 한갖 관학에 불과하다면 그거 그냥 집어쳐라.
뭐 국사를 공무원 시험에 쳐 넣냐 이 조까튼 새끼덜아. 그거 구라 덩어리더만. 뭐 검정시험까지 쳐서는 국민들 충성심 테스트 하냐 씨발.
야 꺼지라고. 야 국사과 학교에서도 없애라는 거다 그 개같은 것.
그따구로 우리가 제시하는 관점을 점마 새끼가 믿나 안 믿나 테스트 하는 마치 IS 새끼덜이 너 무슬림 맞냐 테스트 하는 시험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건 결단코 반대다.
야 씨발 우리집 원래 죄다 무슬림인데, 내가 진짜(진짜는 뭐고 가짜는 뭐냐? ㅋㅋㅋㅋ) 무슬림이냐고 테스트 한다는 그리고 테스트에서 떨어지면 참수 이 지랄이 뭐하는 건데, 야 그게 민주주의냐? 씨발 조까라 그래라.
그따구 역사는 하지 맙시다. 제발 너희 인성 좀 챙기고, 인간이 되라고. 홍인인간 패드립 치지 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