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역사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진 않아. 그렇지만 단편적인 몇 가지 것들만 남아있지. 학계의 인간들은 리컨스럭트라고 하는 엉뚱한 방식으로 교묘하게 수정적인 것들을 합리화시키려고 하지만 말이다.
조선이 애초에 고려조 때보다 쇠퇴한 것은 영락제때에 초래된 교초의 붕괴 때문이다. 오늘날로 치면 달러가 붕괴된 것이다.
그 직후에 세종이 저화라고 하는 화폐라도 유통시킬려고 했지만 실패하였고, 숙종대에 김육이라는 놈이 상평통보로 유명한 일본에서 수입한 동을 통한 동화본위제를 성립시킬 때까지 한국에서 화폐사용이 전혀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 과도기 동안에는 조공무역을 통해서 인삼을 주고, 견직물을 받아오는 물물교역을 중국과 했을 뿐이다.
동전의 공급 이전에 대량의 일본산 은들이 중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임진왜란이 물론 한국인들에게는 침략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중일의 교역이 늘어나고, 특히 일본산 화폐용 금속들이 중국과 한국으로 수출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것에서도 말하지만,
명조가 개창되면서 태조 홍무제는 종이지폐인 보초(寶鈔)를 주된 화폐로 사용하는 정책을 고수했지만, 보초에 대한 태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은광 개발을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하지만 14세기 후반 국내 은 생산은 매년 10만량(약 3,750kg)을 넘지 못했다. 영락제가 집권한 이후 은광 개발에 대한 일시적인 허용이 증가하고, 15세기 초반부터 은광에서 거두는 세금 역시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영락제때부터 교초는 붕괴하였고, 은본위제로 회귀하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음모론의 비사를 하나를 밝히자면 존에프케네디라는 놈 역시도 은광 개발에 대한 허용을 증가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가 끔살당하였다.
태환제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로 케네디라는 놈은 은증서를 화폐로 유통시킴는 은본위를 도입하려고 함과 동시에 화폐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증대시킬 수 있는 노력을 하려다가 은행세력들에게 총 맞고 뒤지게 되었다. 왜냐면 이러한 제도에서 신용창출 기능을 사실상 국가가 완전히 조절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송대의 동본위제나 원대의 교초시스템에서도 전제왕조이던 국가가 화폐의 유통을 거의 전적으로 관리하였다.
당시의 중국식 본위제에서는 화폐의 유통을 관장하는 기관이 그날그날 혹은 분기마다 들어오고 나가는 돈을 통해서 그리고, 정보수집을 통해서 신용공급의 수준을 완전히 체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 지역의 화폐수요가 많아지면 거의 즉각적으로 원인이 조사되어서 황제에게 보고가 들어갔다.
이 지역에서는 큰 손 누군가가 신용창출을 많이 하고 있어서 화폐 수요가 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오늘날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송대나 원대의 재무부가 경제를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재무부가 다름 아니라 화폐의 공급을 통제하였기 때문이다.
케네디의 은증서 역시도 화폐의 통제권이 커미셔너인 은행으로부터 정부직할로 바뀌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것은 첨예한 것인 것이다.
화폐의 몰락=선진국의 몰락.
교초가 영락제 대에 이르러서 사실상 붕괴하였던 시대 직후에 유라시아 대륙 내에서 한가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것은 독일의 철산업이 부흥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초가 유통되던 시대 이전에 12세기의 3차 십자군 원정당시만 하더라도 중동의 워페어는 중국이나 인도산 철로써 갖춰어졌다. 다시 말하면 송은 당시에 알아주던 철 수출국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이 교초의 붕괴이후에 화폐가치에 관한한 대륙서안과 동안의 근본적인 디커플링으로 다가왔다.
교초의 붕괴 이후에 중국의 하류들은 양전의 은자 한냥을 녹여서 몇개의 조각으로 나뉜 그러한 통화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통화에는 때때로는 동이 섞이기도 하였다.
케네디 하프달러같은 것이 중국 서민들의 교역수단이 된 것이다.
그에 반해서 독일이나 영국의 하층민들은 은과의 적정교환비율이 거의 존재하지 않던 니켈이나 백동을 화폐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서 은으로 표시된 당시의 중국과 유럽의 임금차이는 엄청났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경제학 이론을 조금만 읊자면 가격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노동이 그가 가져오는 화폐에 반영되어 있음을 내가 인정해주는 약속과 신용의 반영으로써 가격 그 자체는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인정되는 약속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약속의 앵커가 16세기 당시에 중국과 유럽의 기준이 처절하게 차이났던 것이다. 은가격으로 표시될 수 있는 노동에 대한 임대를 기준으로 볼 때에 중국의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서는 은자와 교환가치가 존재하는 화폐를 받고 있었던 반면에 독일이나 영국의 노동자들은 니켈이나 백동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값싼 동전들도 받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서 중국과 유럽간의 근원물가가 아마도 차이난 것이다.
따라서 철생산에 들어가는 노동에 대한 지불가치가 극심하게 차이났었고, 그 결과 독일 지역에서 철생산이 늘어나는 반면에 중국의 철생산은 명, 청 때애는 거의 정체되어 있었다.
중국의 철산업은 13세기에는 전세계에서 대세였지만 교초가 붕괴된 이후에는 완전히 침체하여서 무려 1916년에 최초의 현대식 제철소인 안산제철소가 가 성립할 때까지 잠자는 사자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공식은 어쩌면 현대의 염가화폐가제가 폐기된 뒤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오늘날의 경제학에 대해서 비판을 하자면 그들이 소득이라는 Y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실상은 단지 화폐의 공급수준에 따른 물가상승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선진국이라는 것은 단지 화폐가 더 많이 뿌려진 경제일 뿐이고, 그 것은 실상은 취약점을 의미한다.
그 취약점이 바로 인플레이션인 것이다.
반면에 후진국은 애초에 돈이 많이 뿌려지지 않았으니까(예외. 짐바브웨) 인플레이션의 위협도 적은 것이다. 그렇지만 자유무역이 강제되는 현경제체제내에서 선진국은 그들의 인플레이션을 수출하고는 후진국들의 재화와 용역을 수입하는 것이다. 그 것이 달러본위제가 선진국들에게 가져다주는 궁극적 이익인 것이다.
그러한 교역형태로 인해서 정작 발권위주로 된 상품권 경제가 구매력을 보장받고, 그 구매력을 바탕으로 대중문화와 민주주의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화폐제가 2개 이상의 패러다임을 가지는 복수화폐제이면서 중후진국들이 그들이 달라나 유로화를 결제화폐로 인정해주던 관행에서 벗어나서 그들이 해당 화폐를 받을 때에 실질적인 희소성을 재고해온다면 선진국들의 구매력은 급감하게 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소득이 아니라 이미 인플레가 만연해져서는 그 나라 경제 내에서 사회적 약속이 된 나라들은 산업경쟁력을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단적으로 15세기부터 성장한 독일의 산업의 역사적인 종언이 올 수 있다. 그러한 지점에 대해서 현패러다임은 지재권이나 법인의 배타적 등록을 통해서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로 산업이 이동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행해갈 때에 교초가 붕괴함에 따라서 화폐를 매개로 용역을 제공하던 고려의 공방들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그 이후에 조선의 수공업은 완전히 쇠퇴하였고, 어쩌면 화약무기 따위를 제조함에 있어서도 별도의 관청이 필요해졌다. 군사를 위한 산업의 필요성 역시도 공노비를 통해서 관이 직접 수급하는 형태로 쇠퇴한 것이다.
조선의 군사력이 매우 약해진 이유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어떤 관점으로는 조선의 쇠퇴는 17세기나 심지어 20세기까지도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김육이 숙종대에 상평통보의 보급에 애썼던 것조차도 실상 그러한 화폐제의 정착은 고대 로마나 서로마멸망 이후에 동로마제국의 금본위 화폐나 게르만인들의 화폐사용과 비슷한 수준으로 쇠퇴한 것이다.
즉 5세기경에 로마의 화폐체제가 붕괴한 뒤에 암흑기가 찾아온 유럽과 마찬가지로 15세기경부터 동양세계에도 암흑기가 찾아왔다.
그게 갑오경장 이전의 동양세계의 한계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후에 명대중기부터 화폐시스템은 복구되었지만 정작 통화들은 외국과의 교역으로 조달되었다. 그러한 취약점에 의해서 아편전쟁을 전후로 한 청나라의 경제를 영국이 얼마든지 흔들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