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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뽕덜이 되려 증명해주는 발해와 한국의 무관함.
애초에 대조영의 애비라는 놈의 이름조차 걸걸중상이라고 해서 전형적인 탁발족들의 이름이다. 탁발족과 선비족이 투르크의 원조였다는 점에서 단순하게 쉽게 정리되는 것이다.
고구려는 그러한 투르크 세력과는 철천지 원수였음을 메인 프레임으로 잡아야 혼동을 피할 수 있다. 아마도 어떤 한국사가들은 고구려와 발해간의 단순한 역학조차 이해하지 못하는듯하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멸망시킨 세력이 세운 나라이다.
되려 그러한 발해를 멸망시킨 두 세력인 요와 금으로부터 그들의 신라상국론이 주장되었다.
위의 링크의 사국사나 샤이바니칸이라는 놈이 적었다는 족보의 진위를 떠나서 그러한 지점들로써 발해는 투르크-타타르계 국가의 상국으로 주장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 것이 한국사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친원계 권문세족의 소수로부터 주장된 것일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성계라는 놈이 본디 한수 이남의 혈통을 받은 자가 아니라 몽골계 군벌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조선건국 당시에 조선은 실상은 몽골-타타르계 지배세력이 다수의 한국인들을 다스리는 나라였었고, 그러한 연원이 다수 한국인의 관점이 아니라 소수 지배자의 관점에 의해서 역사의 주장이 일어난 것이 아직도 꼰대새끼덜이 닥치고 외워라 이 지랄이나 하는 미개한 방식으로 정작 몽골과 하등 지정학적 인연이 없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양광도(=경기도)의 한국인들이 세뇌나 당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인들이 쓴 사서인 튀르크의 계보나 시바니의 서에서 대씨들이 그들로 기록된 것은 발해가 실상은 한민족과는 무관한 지배세력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튀르크와 고구려는 철천지원수로써 척을 진 이민족 관계이고, 게다가 발해는 정작 튀르크식 지배체제인 3성6부제를 채택하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하자.
함보가 아골타의 선조라고 하는데, 갸들 중심의 슈프리머시에 의한 미심적은 것이고, 적어도 이들은 싸그리 요나라의 야율씨들이 멸망시키지 못해서 안달이 났던 종자들이었다.
발해를 멸망시켰던 요나라의 야율요골이 당시에 투르크-타타르 새끼덜의 가장 강력한 번성하던 거점이던 카이펑으로 원정을 단행한 것은 그들의 궁극적인 정치적 목표로써의 전략 목표가 어떤 것인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당시의 카이펑은 선비족 새끼인 수양제와 수문제라는 놈들에 의해서 운하가 파여진 뒤에 강남의 식량을 가져와서는 삥 뜯어서 쳐 먹으면서 번성하는 선비-투르크 새끼덜이 화북평야에 진을 치고 앉은 허난성의 강력한 거주구였던 것이다. 그러하면서 외몽골과 내몽골에 자리잡은 동돌궐계 군벌들과 언제든지 연합하기 좋은 위치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야율요골의 원정은 고구려가 당을 막는 것과 동일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써 고구려는 단지 수비에 급급했지만 야율요골은 아예 침공해오는 새끼덜의 거점으로 쳐 들어가서 모조리 씨를 말리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즉 야율요골과 연개소문의 전략적인 포지션이 거의 완벽하게 동일하기 때문에 야율요골이 발해를 멸망시킨 것조차 발해는 오히려 당나라계 군벌세력의 국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후일에 몽골새끼덜의 대대적인 승자 중심의 역사주작이 일어났고, 연개소문의 진짜 이름은 야율개소문 이었을 수도 있다. 이 글을 적다가 문득 직관적으로 느낀 부분이다.
연개소문의 이름은 일본서기에서는 이리카스미라고 기록되었는데, 伊梨柯須彌 라고 하는데, 사실 梨는 리라고 거의 쓰이지 않는다. 국어를 개조까치 만들어놔서 그런 건데, 이梨화여대라고 부르지 리화여대라고 하지 않는다고 씨발.
그렇다면, 윤이가스미라서 첫 두글자가 ㅇ(이응)ㅇ(이응) 이라니까 야율이랑 비슷하다고. 야율의 받침이 또 하필이면 ㄹ이기 때문에 야ㅠ伊~리梨 가스미 이런 식인 것 같다. 그러니까 중국말 야율이 한국말 야유-리가 향찰로는 윤리로 바뀐 것이 일본에서는 이리로 발음된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완전히 바뀐다.
연개소문의 진짜 이름은 야율가순미 혹은 야율개소문이고, 그에 따르면 야율씨덜이 진짜 고구려의 후예들이고 투르크 새끼덜에 의해서 잠시 대권에서 축출되어 있다가 투르크새끼덜이 세운 나라인 발해를 다시 갈아엎고 고구려의 천하를 다시 복원한 것이 된다.
즉 발해가 아니라 오히려 요가 고구려계로써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발해와 고려가 같은 뿌리를 가졌다는 발상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그 것은 실제로도 씹센비라고 불리던 선비족집단들이 한민족 국가였던 통일신라를 군사적으로 정복하고 자리잡은 나라인 고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즉, 고려는 그들의 국가명이 무엇을 표방하던 간에 실상은 중국계 이민족지배성분에 의한 한민족들을 노예로 부리는 이방인국가라고 비정한다면 고려와 발해의 동일 뿌리론을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한수이남지역이 한민족의 참강역이고, 그러한 강역에는 백제와 신라, 가야 밖에 없었다는 삼국통일이 아니라 삼한일통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생각하여야한다. 애초에 고구려 또한 우리역사라는 관점 자체가 고려족이라고 적고, 실상은 선비족들의 한민족 정복 이후에 그들의 뿌리를 한민족의 뿌리에 치환하는 갖다 대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선비라고 하는 현대한국사가들에게는 계급화된 지배계급으로만 받아들여진 계층을 형성하였고, 그러한 그 것은 실상은 구체제적인 계급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복민족과 피정복민족간의 관계가 고착되면서 교육과 인문을 장악한 지배성분들로부터는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 논란을 잠재울 역사논거가 끊임없이 세뇌됨에 따라서 이민족 지배성분이 자자손손 이어온 것이라는 관점은 구축되고, 점차 단지 신분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한 지배성분은 명목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였지만 헌법 성립 이후에도 실상은 권위주의 정권을 창출하였고, 서울대로 가는 길부터 요직을 싸그리 장악한 구체제 앙시앵레짐들 내에 존재한 혈연 혹은 혈족의 관점으로 공고하게 자리잡고 있다가 1987년 혹은 김대중이 정권을 창출한 1998년에야 비로소 토착한인 중심의 정권이 다시 탄생하였다. 후백제가 멸망한 936년, 혹은 신라가 멸망한 935년 이래에 한민족들은 선비족계 이민족들의 지배를 줄창 받아오다가 1948년에 그들이 명목상 국가의 주인이라는 확약을 얻었지만 이후에도 인서울의 선비족계 이민족 집단으로부터 이어지는 친일파계 혈연집단에게 여전히 정권을 빼았겨 있었지만 1998년에야 비로소 적어도 선비족적인 선민사상을 구가하지 않는 세력이 정권을 창출한 것이다. 선비족적인 선민사상이 바로 북한식의 우리끼리~ 이러한 것인데, 그 것은 강남과 대구의 우리끼리~와도 실상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요컨데, 그들 침략자 집단이 선비족으로불리었으면서 또한 그들의 고착화된 계층이 선비였다는 점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작명부터 그리된 것이다. 그러한 그들로부터 중국의 신사계급이라는 것이 표방된 것이다. 그에 대한 대척점으로써 946년에 야율덕광이 카이펑을 불태운 것과 같은 동이족의 난입이 1619년의 사르후 전투에서 다시 표출되었을 때에 선비족계 사족계급에 대한 지배 또한 다시 재고되었다. 그리하여 청조가 성립하였을 때에 청조는 청조의 우선시되는 지배계급은 만주족이라고 못 박아버렸다. 중국계 사족들은 물론 어느 정도는 기득권이 인정되었지만 지배성분 내에서는 만주족들에게 종사하는 계급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것은 애초에 946년 혹은 고구려 시대부터 선비족계 사족들에게 동이라는 것은 그들의 패러다임을 갈아엎을 잠재적인 위력을 가진 집단으로 간주되었음을 뜻한다. 광개토대왕 당시에도 고구려는 모용씨가 동북3성과 요하 일대에서 수립시킨 지배체제를 완전히 좌초시켜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중화질서내에서 신사계급들에게 고구려는 명목상으로는 체제내의 것으로 아우른 것처럼 되어있을 필요가 있었다. 즉, 그 것은 고구려 또한 중국의 일부라거나 혹은 한국식 유교사회 혹은 사족중심 사회내에서 황제 혹은 왕화를 입은 역사로 둔갑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한 구체제 지식인들의 거짓부름과는 다르게 실제의 건주여진인들은 인종차별을 탑재한 한족 혹은 한민족 양쪽으로부터 극심하게 차별을 받았다. 요컨데, 한민족들이 고구려 또한 우리 역사라고 우기는 것은 실상은 고구려의 참주류들이던 여진족들을 탄압하고 차별하는 나라가 단지 명목상 거짓부름을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초반에 한민족에 대해서 패배주의를 넣으려고 했던 친일파들의 사관과는 다르게 신라는 전혀 영토적으로수축된 국가가 아니며, 되려 고구려로부터 강원도의 대부분의 지역과 함경남도의 태반을 전쟁을 통해서 손에 넣었을 뿐 아니라 해당지역들을 이후의 역사에서도 공고한 한민족의 강역으로 만드는 짓을 하였다. 그리고, 어쩌면 신라 뿐 아니라 조선조까지도 여진족에 대한 한민족의 우세는 그다지 부인되지 않았다. 심지어 금나라 때에도 단지 머리를 조아리는 댓가로 고려가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모조리 인정받았다. 입장을 달리해보면 금나라조차도 고려를 그렇게 타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금나라내에서조차도 아웃사이더로 취급되던 동여진에 대한 조선에 대한 종속과 차별은 여전했을 것이다. 애초에 금나라내에서 여진족내에서도 북경의 지배성분이 된 자들과 여전히 압록강, 두만강 유역이나 연해주에 머물러 있는 자들간의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지점들은 정작 몽골계 왕조인 원대에 와서 원의 연경정부내에서 여진족들이 대거 기용되면서 다민족 정부를 지향하였던 쿠빌라이 정권내에서 정작 보듬어졌다. 그러한 결과물이 바로 쌍성총관부였다. 애초에 북경의 여진족들에게조차도 동여진으로 기록된 자들은 숫제 야인이나 다름없었고, 그들 양자간의 민족의식은 극히 희박하였지만 적어도 원나라가 판세를 갖추는 과정에서 동여진계 야인들은 적어도 포용된 것이다. 그런데, 동여진계 야인들은 그들이 태생적으로 미개한 자들이었다라기 보다는 실상은 여진족들이 한반도와의 접점을 중시하던 고대에는 되려 여진족 내에서 주류집단이었던 것이 여진족의 남하보다는 서진이 중시된 패러다임의 교체로부터 그들이 소외된 것이다. 여진족입장에서 남하는 한민족과의 충돌을 의미하고, 서진은 한족과의 충돌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진내에서도 동여진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성계는 자연스럽게 중국보다는 한국을 그가 카운터파트해야 될 집단으로 선택하였다. 이성계가 살아있던 시기에 북경지역의 기득권들은 명목상으로는 한족을 자처하지만 실상은 여진족 혈연을 더 중시하던 집단이었고, 특히 그들은 쿠빌라이를 필두로 한 원나라에 사역하였던 자들이다. 북경 커뮤니티의 그들은 명대에도 그들의 영향력을 부려서 영락제가 건륭제를 쿠데타로 끌어내리고 폐위하는 과정을 통해서 중국전체의 기득권으로 인정받았다. 그러한 그들에게 이성계라는 것은 일개 변방에서 온 자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국수주의에 입각해서 잘 못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원명대의 북경의 한족들의 태반은 실상은 치마까발리면(치마까발리면 몽골피가 섞였다, 러시아의 표현임, 소싯적에 몽골인들의 침략을 받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유전자 교환이 일어난 슬라브들의 실상을 말하는 표현임) 일찍이 북경일대에 정착한 여진족들이 금이 중국북쪽지역의 지배자를 자처한 이후에 숫제 한족인 마냥 행사하는 자들이었고, 정작 그들과 이성계는 같은 민족이라고 비빌 수 있는 처지였지만 정작 그 지점때문에 되려 변방에서 온 놈 따위로 차별을 받던 입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같은 여진끼리도 한족행사를 하던 북경의 '경족 여진'과 동북3성 동부지역의 '변방 여진' 혹은 '지방 여진' 의 격의 차이가 엄연하던 세계로부터 이성계는 차라리 외노자 취급일 망정 동족에게 견제당하지는 않을 차라리 아사리 이민족인 한민족의 고려정권을 그가 종사할 왕의 나라로 택하였다. 그러한 조선의 이조 내에서 왕이던 이성계의 출신성분을 따라서 고구려가 한국의 역사로 기술되었던 것이지만, 정작 고구려는 한민족의 역사도, 한족의 역사도 아니었던 동북3성의 동부 변방의 나라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