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당시에 중화기 및 수송차량을 빼돌린 것은 신성모가 직권으로 내린 명령이었다.
위의 시뮬라시옹의 한 예는 1공화국 시절에 실제로는 외국과 내통해서 이득을 보려고 한 자들의 행위라는 팩트로부터 남침유도설과 남침설 따위의 시뮬라시옹이 형성되는 기제를 조금 설명해 보았다.
이 사례로부터 그 것은 확성기를 지닌 언론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집단에게서 정작 인지되어야 할 사실의 곡해가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환온의 성한 멸망과 유비의 익주정복은 거의 유사한 레파토리를 지니고 있는데, 둘 중에 하나는 거짓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즉, 유비라는 인물 자체가 촉학과 도가 도사들에 의한 지역적인 창작물일 수 있다. 그들은 아마도 선비돌궐계 지배계급이었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선비돌궐계 오랑캐 국가였던 저족의 성한이라는 것을 멸망시키려고 양양일대의 군세를 모아서 서진해온 환온의 역사를 그대로 적기가 껄끄러웠을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실제와는 다르게 당나라가 고구려를 500년을 지배했다고 치고, 당나라의 고구려침략이 두고두고 고구려인들에게 희자되는 역사성을 가지는 것이 당나라계 지배계급의 비위를 건드리니까 민족적인 관점이 거세된 별개의 유사판타지를 만들어서는 설화나 구전으로 희자되는 것들의 일부를 고의로 곡해하려고 한 것이다.
삼국지라는 것 자체가 그러한 목적을 지닌 역사물이라고 밖에는 간주할 수 없고, 따라서 그러한 곡해는 절대로 자연적이지 않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외삽되고, 곡해된 것이다.
그러한 곡해에 의해서 물타기 되는 진실이 정작 환온의 성한정복이고, 환온의 성한정복과 유비의 익주정복은 팩트와 시뮬라르크가 데자뷰되는 지점이 있다.
즉, 후자는 명백하게 가짜인 것이다.
이 것 또한 그러한 데자뷰를 보이고 있다. 요컨데, 전쟁이라는 것이 물론 역사적으로는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100년 상간도 안 되는 기간에 완전히 같은 지정학적 이해를 두고 일어나기는 참으로 어려운 요행일 것이다.
물론 독일이 프랑스를 20세기 동안에 2번 공격한 적은 있지만 말이다.
만약에 그 것이 둘 다 사실이라면 우리가 삼국지에서 형주라고 알고 있는 지역의 군사적 부담은 막대했을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성한 인간들은 뻔하게 엄안, 양회, 장임이 털렸던 지역을 환온이 올 때에도 수비를 보강하지 않았다는 실질적인 문제로 갈 수 있다.
프랑스인들은 적어도 마지노선을 만들었고, 그 것이 어떻게 파훼되었는지도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말이다.
제 아무리 고대라고는 하지만 설명이 부실한 것 자체가 데자뷰의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명백하게 데자뷰되는 고사가 바로 환온의 말이 익주로 들어가는 오르막길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그 것은 삼국지에서 낙봉파에서 방통이 백마를 빌려타고 가다가 화살에 맞아죽었다는 고사와 매우 데자뷰되는 것이다.
그러나 낙봉파란 지명은 나관중이 이야기를 좀 더 신비롭게 꾸미기 위해서 만들어낸 허위 지명이다. 『삼국지ㆍ방통전』의 기록에 근거하면, ‘유비가 낙현으로 진격하여 성을 에워싸자, 방통이 무리를 인솔하여 성을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하였다. 방통은 바로 낙현에서 성을 공략하는 전투 중에 죽은 것이지 낙봉파에서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지평화』에서도 정사를 토대로 확장하여 구성했다. ‘방통이 황숙에게 말했다. “여기서 백 리 떨어진 곳에 성이 있습니다.” 곧 군사를 이끌고 소로를 찾아 멀리 낙성으로 가서 3일 만에 성문을 두드렸다. 성 위에는 유장의 동생 유진(劉珍)이 있었는데, 방통을 알아보고 여러 관리들에게 활을 쏘라고 명하니, ······ 어지러이 쏟아져 내리는 화살에 맞아 방통은 죽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나관중은 방통의 죽음에 신비한 색상을 덧칠하기 위하여 주인에게 해를 끼치는 적로마로 바꾸어 타고 낙봉파란 곳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결국 방통의 죽음을 통하여 농후한 숙명론적 사상을 주입시키고 있다. 이러한 나관중의 필치에 따라 후세 사람들은 사천(四川) 덕양현(德陽縣) 나강진(羅江鎭) 부근의 험요한 지점에 낙봉파라는 지명을 새로 만들었다. 장효범(張曉帆)은 「낙봉파를 방문하고(訪落鳳坡)」란 글에서, ‘이곳은 원래 낙봉파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훗날 방통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옴으로 인해 사람들이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낙봉파란 후세 사람이 억지로 갖다 붙여서 생겨난 이름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남침유도설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자들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격마냥 곡해가 원하는 프레임이 뭔지 모르게 되면 요정도 수준의 비판점밖에 나오지 않게 된다.
언론이라는 것을 오늘날에는 뉴스라고 인지하지만 언론의 본 뜻은 언과 론이 담긴 출판물이다. 따라서 역사출판물들도 모두 언론의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
실질적으로 중국의 서책들의 대부분은 명대의 출판사들로부터 진위를 알 수 없는 복원과정이라는 것을 통해서 복원되었다고 하는 창작물들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이 고려조의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삼국사기도 실상은 조선조의 중종때에나 완본이 만들어져서 왕에게 헌상된 명백한 조선조 중기의 작품이다. 따라서 그 것의 실저자는 조선조 중기의 사관이면서 중종반정 이후에 정권창출에 관여된 자일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태종대에 삼국사기의 몇몇 기사라는 것이 인용되었다. 이 때에는 삼국사기라는 것도 몇몇 기사만 나왔는데, 정작 중종대에 완본이 완성된 것이다.
마치 1930년대에 이유립의 환단고기의 일부 기사라는 것이 공개되었다가 완본은 인쇄되지 않다가 1970년대의 박정희 대에 환단고기의 완본이 이유립이라는 놈이 완성했다고 한 것과 매우 유사한 프레임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조4사나 24사 전체도 정작 당대에 만들어진 것조차 아니다. 정작 당대인이 당대인의 시각으로 확실하게 썼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마천의 사기와 공자의 춘추 뿐이다. 게다가 그 두 사서만이 역사가라고 할 수 있는 저자가 일관적으로 적었다. 다른 사서들은 심각하게 후대의 정권들에 의해서 창작된 것이다.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 황태자 이건성을 죽이고, 제위에 오른 당태종 이세민은 방현령을 총책임자로 하여 미편찬된 역사서의 편찬을 명하였다. 당시 편찬된 사서로는 북제서(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수서(隋書), 주서(周書), 진서(晉書)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진서(晉書)는 가장 앞시기를 다루고 있는 사서로서 당시 편찬된 사서 가운데 필두로 꼽혔다. 또한 종래의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등은 모두 개인이 저술한 책이었으나 후대에 정사의 반열에 오른 것에 비해, 진서를 필두로 하는 6사는 당 태종의 명으로 편찬된 최초의 관찬 정사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실제로 진서 이후의 사서들은 관찬 정사라고 인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비단 진서만 곡해했냐? 송서도 선비족 정권의 것은 아니지만 관찬역사이고, 송대의 범엽이 썼다는 후한서도 관찬 역사이다. 적어도 그 것이 당대나 당대와 연속된 시기에 쓰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삼국지에 주를 많이 달았다고 하는 배송지라는 놈은 또한 어떠한가? 삼국지의 유비의 익주정복의 심각한 데자뷰인 환온(312~373)의 성한정복과 관련해서 환온의 아들 환현(369~404)이 실각한 뒤에 사마원현과 유유(363~422)등이 유송을 세웠고, 바로 그러한 송대의 인간이 배송지라는 놈인 것이다.
요컨데, 배송지(372~451)는 아무리 생각해도 환온의 익주정복을 적기에 딱 맞는 시대를 살았던 사가이지 절대로 삼국지의 유비시대와는 하등 무관한 사람이다.
환온의 아들 환현은 369년생이고, 배송지는 372년생이다. 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삼국지에 주를 달았다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참고로 본인만 하더라도 할배 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는데, 할배의 여동생이 우익 깡패들에게 맞아 뒤져서 암매장당했다는 그러한 이야기를 직접 내 귀로 들은 세대이다. 아마도 본인에게 한국전쟁과 배송지에게 환온의 북벌은 매칭이 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배송지는 본인에게 비유하자면 영정조 때의 일을 자신의 일마냥 적었다는 것이다.
그게 온당한 역사가의 관점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 것은 마치 이유립이나 박창화가 역사서를 쓴 것과 같은 전적인 모사가 아니라면 배송지라는 실존 인물은 있긴 했었고, 그는 환온에 대해서 기사를 적었지만 그의 진짜 기사는 모조리 측천무후같은 짱개 곡해자들에 의해서 난도질 당하여서는 분해되어서는 삼국지의 주라는 식으로 당나라대에나 첨삭되었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의 노태돈 교수를 비롯해 이기백, 이기동, 주보돈 등 현 한국 사학계의 주류에서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위서론을 주장한다: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박창화의 소설 화랑세기 잔본을 발견하여 1930년에 박창화가 소설 화랑세기를 집필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 역사서라고 주장되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만들어졌다는 내용의 글을 동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다.
요런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24사 전부가 이러한 식으로 쓰인 것이다. 그러니 믿을 수 없다고 할 수 밖에.
단지 시대적으로 더 이상 공자가 썼다는 책에 국명으로 제시된 나라들의 이름이 선비투르크계 지배계급들에게 데자뷰되면서 참칭되던 시대는 남송을 마지막으로 끝나게 되고, 원, 명, 청대부터는 그 전까지는 없던 국명이 사용되게 되는데 그러한 정신적인 변화를 따라서 명대부터는 달리 역사를 주작할 동기는 없어지지 않았나 정황상 참작된다.
원은 대놓고 몽골지배국가였고, 명은 대놓고 밝은 명자를 기치로 건 홍건적국가였고, 청은 대놓고 다이칭을 표방하던 만주족 국가였으니 그들은 거리낄 것이 없게 된 것이다.
결론은 바로 그러한 것과 대조적으로 꿀릴 것이 있는 선비돌궐계 지배계급들이 그들의 침략으로 말미암아서 탄생한 정권이라는 관점에 대한 모든 곡해가 마치 이승만 정권의 인간들이 부정부패라는 범행동기와 외국과의 내통혐의를 물타기 하려고 하다가 남침유도설이 도출되듯이 그들의 진의를 감추려는 지점이고, 그러한 동기를 절대로 숨길 수 없는 스모킹건으로써 정작 한나라라는 명칭이 후경의 한이나 저족의 성한이나 또한 유비의 촉한에 부여되는 지점을 그 것이 스모킹건이라는 지점을 잘 캐치해야지 그들이 무엇을 원했나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후경은 북위의 군벌이던 이주영의 막하에 있던 놈으로써 명백하게 당시에 중국을 침략했던 오랑캐 무리였던 놈이다.
그러한 후경의 나라에 한漢이라고 붙였다는 것 자체가 완전히 난센스이다.
이게 바로 스모킹건이라고 보고, 또한 저족이 세웠다는 나라에 성한이라고 붙인 것은 역시나 후대에 익주일대에서 촉학이나 도학을 하던 유학자나 도사들이 엉터리로 비정한 것이라고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게다가 만화 소오강호에서도 묘사되지만 유독 당시에도 쓰촨성 새끼덜은 우리가 익히 아는 상투를 트고, 망건을 써서는 그들이 선비라는 것을 강조하는 그러한 귀족성을 원명청대에도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쓰촨성의 청성파 도사새끼덜이 말이다.
그로 볼 때에 그 것은 쓰촨성 전체가 마치 대구경북같은 선비족계의 후예임을 강조하는 계급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그들의 총체적인 이데아가 바로 유비의 촉한을 통해서 발현된 것이다.
이런 놈이나
이런 놈 마냥 말이다.
오늘날 현대한국인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성을 가진 한국인이라면 바로 상투틀고 두건 쓴 행위의 봉건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바로 씹센비라고 하는 것의 원조가 바로 시안과 촉나라지역의 청성파 새끼덜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즉, 촉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게임으로 인지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바로 상투들고 두건 쓴 새끼덜의 아더왕의 나라같은 것이다.
아마도 삼국지 게임의 일본식 일러스트로 인해서 한국인들을 혼동하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해당 지역에 관한한 광범위한 판타지를 만들어낸 청성파 도사들이나 촉학의 유학자들은 명백하게 위의 그림과 같은 복식을 하고 있었으면서 그러한 그들의 전설의 왕국으로써 유비의 촉한을 상상하면서 만들어내었다.
여기서 한국사로 조금 넘어가게 되면 상투 틀고, 망건을 하고는 으름장을 놓는 싸가지 없는 새끼덜의 정권은 정작 오랑캐 여진족 왕이던 이성계나 혹은 북방이나 중국계 해상세력이면서 한반도로 난입한 것으로 의심되는 왕건의 정권의 대에 지배층들로부터 표방된 것이다.
즉 그 것은 정복자들의 선민의식이 종교를 통해서 표출되면서 관습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쓰촨성 지역 역시도 한제국의 멸망 이후에 지배계급이 이민족으로 대체되었다고 하는 팩트와 결부지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것은 1924년생이면서 불과 제작년이던 2018년에 사망한 김용의 개인적인 견해일 수도 있지만 김용의 필치에서조차도 스촨성의 청성파새끼덜, 즉 상투 틀고 두건 쓴 새끼덜은 매우 싸가지 없는 새끼덜로 묘사되었다.
그 것은 마치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그러한 관습을 강요했던 인서울 고관대작들에 대해서 동학도들이 표출했던 인지와 동질한 선상의 것이다.
그리고, 이 것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에 정작 실존하지도 않았던 중부 잉글랜드의 기독교왕국이라는 아서왕의 나라마냥 어째서 스촨성에 정작 진퉁 유학도 아닌 북방계식 유교의 이상국가가 존재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동기를 살필 수 있다.
사실 중부 잉글랜드의 기독교 국가라는 것은 실상은 헨리 8세에 의해서 해산되었던 요크 지역의 수도사들로부터 기인하는 계급적인 판타지이다.
바로 위의 세인트 메리 수도원 터에서는 멀린의 환영을 보았다거나 하는 지역 레전드들이 헨리8세가 수장령을 내리고도 사망한지 몇 세기가 지나고 나서도 종종 주장되었다. 건물은 위의 사진대로 1539년에 뽀겠지만 컬쳐로써 그 것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익주의 청성파나 촉학하는 자들에게 촉한은 마치 아서왕의 나라와도 같은 것이다. 그들은 마치 지구의 역사가 6천년밖에 안 되었고, 그 것은 하느님의 역사라고 하는 미국의 바이블 밸트의 기득권마냥 구체제적인 지배계급들은 그들 자신이 역사의 궁극적인 지배계급이며 그들 이전의 역사도, 혹은 이후의 역사(이후의 역사라고 하면 혁명이 될테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표징이 바로 촉한이며, 또한 촉한이라는 것을 통해서 정작 선비족들이 난입하지 않았던 시대인 한대에까지 그들이 마치 지배했던 양 매개가 되어주는 존재가 바로 유씨라는 것이 된다.
따라서 삼국지와 관련한 그 모든 체계가 바로 중국식 관제 언론의 시뮬라시옹이자, 유불도라는 오랑캐 종교집단의 릴리져스 판타지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원명청사를 제외한 구체제 중국식 역사 체계 전부가 선비족식 유불도 mythism 이라는 판타지 논조를 계속해서 되뇌이는 엉터리 역사라는 것이다.
그 것은 신유학이라고 하는 기풍에 가서야 비로소 선비족 선민사상에 의한 것들을 조금은 제거하고 경전중심주의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였지만 여전히 confucius mythism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가 비로소 현대에 와서야 공산당에 의해서 완전히 부인되고 폐기처분되었다.
그리고, 실상은 브리튼 섬에서 1539년에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끝장난 세력이나 중국대륙에서 20세기 중반에 완전히 부인된 지배세력들로부터 정작 아서왕의 이야기나 삼국지는 그 것과 결부된 지배계급들이 몰락한 뒤에 정작 대중적인 판타지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삼국지 도원결의 카페 따위에서 제갈량이 어쩌구저쩌구, 관우가 어쩌구저쩌구 서주대학살, 이릉전투, 적벽 그런 식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토픽들은 실상은 뭐 란셀롯이 중동의 3차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진 지역 근처에서 성배를 찾았다던가 하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 나오는 것과 같은 완전히 픽션을 바탕으로 하는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환온의 성한정복과 유비의 익주정복이 데자뷰이듯이 적벽전의 실제 모델은 주원장과 진우량의 파양호 전투이거나 혹은 몽골군이 송의 전선들을 가죽배를 타고 가서는 화공으로 불태워 없앴다는 애산 전투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