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3세기경에 중국으로 난입한 선비족라는 것이 바로 선비라는 단어의 원조임. 바로 씹센비라는 계급을 창출해낸 바로 그 놈들임.
그들의 원조는 그레코-박트리아의 아프가니스탄계 헬레니즘 세력으로 보이는데, 알렉산드로스3세라는 놈이 박트리아의 록산느라는 여자와 결혼하였다고 하는 서양역사쪽에서 인정하는 팩트가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정복한 뒤에 때때로 페르시아왕의 복장을 하고는 정복민을 시찰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한 코스프레가 그들의 특징중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정작 그러한 제스쳐와는 다르게 헬레니즘 워로드들의 세력은 철저하게 이너서클 중심으로 된 그들이 구성하는 컴패니온 기병대의 엘리트들만을 위한 사회이고, 현지인들은 단지 하급용병으로나 편입될 뿐이다. 그러나 물론 여느 인간사가 그러하듯이 현지인 중에서 롤모델로 띄워주는 놈 몇몇은 있을 수 있다.
그들의 역사 기술의 오류는 수많은 코스프레로 점철된 사기질과 그로 인한 데자뷰이다.
그 것이 얼마나 엉터리냐면 남조의 마지막 황제 가문이던 진씨 황조의 진씨가 정작 삼국지의 전자라는 진수와 같은 성을 쓰는 집안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선비족의 침입을 초래했다는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그들에 의하면 전한대의 역사가인 사마천과 동성을 쓰는 것이 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사마염이나 사마소, 사마의 그 모든 것들이 싸그리 죄다 창작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견지에서 훨씬 후대의 촉학을 한다고 하던 소식, 소철 형제라는 놈은 양나라의 황제이던 소연과 성을 같이 쓰고 있다.
촉학은 후대에도 유학이 아닌 것이라는 의미로 잡학, 혹은 이경반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것이 바로 내가 고려조는 선비투르크계 외세라고 하는 이유이다.
불교신문의 기사인
으로부터,
내가 접한 태국불교는 계율불교(戒律佛敎)였다. 처음엔 적응하기가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루 일과가 완전히 《율장(律藏)》대로인 태국불교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었다.
(중략)
이러한 이게 결론이다. 그리고 기사전부를 읽어보면 확실히 신라의 계율불교는 범망경에 근간하는 대승불교가 아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사이비 불교인 대승불교와 마찬가지로 촉학은 선비투르크계 이민족들이 중국인의 흉내를 내면서 만들어낸 전적인 창작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는 실상은 부다의 말씀과는 거의 하등 연관없는 경전들을 모셔서 만들어낸 종파이다. 그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만큼의 관련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체계는 전적으로 선비족들의 진격경로인 둔황일대에서 완전히 창작되었다. 후대에 20세기에 들어서야 그러한 것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졌지만 한국의 땡중들이라는 놈들은 조까라마이신 이미 우리가 기득권이다 요 지랄이나 하는 놈들이다.
마찬가지로 북조시대의 유교나 도교도 모조리 주작이면서 짜가라는 것이다. 그 지점들이 후일에 정작 고증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비판된 것이다.
특히 도교의 메카와 메디나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오늘날의 시안과 쳉두인데, 바로 촉학이 일어난 곳과 동일한 지역이다. 또한 그 곳은 삼국지의 촉나라가 있었다는 식으로 적힌 지역이기도 하다.
제갈량이라는 놈의 북벌이라고 하는 것은 해당지역의 도사들이 멋대로 억측해서 지어낸 것들로 보이며, 해당지역은 진령산맥이라고 하는 대단히 험준한 군사적인 분쟁이 발생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 곳 일대에서 역사적으로 보고된 분쟁이라는 것은 초한전 때에 유방의 북상을 막아서 장한이라는 놈이 막아선 적이 있다. 그리고, 과장없는 한대의 기록에 의하면 장한이 가진 병력은 끽해야 5천, 한신은 1만이었다. 애초에 그 정도의 병력만이 기동가능한 곳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근세의 로지스틱스에 의하면 지역별로 병참이 가능한 한계선을 설정해놨다. 물론 이 때의 병참이라는 것은 약탈을 고려한 것이면서 또한 지형 또한 고려된 것이다.
요컨데, 진령산맥 일대는 절대로 10만명대의 군세가 맞불을 수 없는 곳이다. 거의 비슷한 당대의 환온의 북벌이나 혹은 몽골의 스촨성 침입 때에 해당일대가 방어진으로 이용된 보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작 몽골의 스촨성 침입의 분기가 된 전투는 바로 쳉두성 전투로써 성도의 함락을 둔 공성전 그 자체이다.
그 점에 대해서 심각하게 삼국지라는 것은 전략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바로 쳉두성 그 것이 잔도와 산길로 이어져서 막기도 기동하기도 어려운 곳으로부터 공자와 수비자가 모두 병력을 전개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바로 그 곳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거주구이며, 쳉두성과 한중 사이의 길이나 한중에서 시안으로 가는 길 위에서는 애초에 전투가 벌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정작 환온의 성한멸망이나 송대의 맹공의 전투기록을 보면 가장 중요한 접전지들은 후난성에서 쓰촨성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역사적인 전투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곳에서 환온의 말이 화살에 맞았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방통이라는 놈이 유비의 말을 타고 가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는 데자뷰로 의심되는 기사가 있는 지역이다.
요컨데, 환온의 성한 멸망과 유비의 익주정복은 거의 유사한 레파토리를 지니고 있는데, 둘 중에 하나는 거짓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즉, 유비라는 인물 자체가 촉학과 도가 도사들에 의한 지역적인 창작물일 수 있다. 그들은 아마도 선비돌궐계 지배계급이었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선비돌궐계 오랑캐 국가였던 저족의 성한이라는 것을 멸망시키려고 양양일대의 군세를 모아서 서진해온 환온의 역사를 그대로 적기가 껄끄러웠을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실제와는 다르게 당나라가 고구려를 500년을 지배했다고 치고, 당나라의 고구려침략이 두고두고 희자되는 역사성을 가지는 것이 당나라계 지배계급의 비위를 건드리니까 민족적인 관점이 거세된 별개의 유사판타지를 만들어서는 설화나 구전으로 희자되는 것들의 일부를 고의로 곡해하려고 한 것이다.
삼국지라는 것 자체가 그러한 목적을 지닌 역사물이라고 밖에는 간주할 수 없고, 따라서 그러한 곡해는 절대로 자연적이지 않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외삽되고, 곡해된 것이다.
그러한 곡해에 의해서 물타기 되는 진실이 정작 환온의 성한정복이고, 환온의 성한정복과 유비의 익주정복은 팩트와 시뮬라르크가 데자뷰되는 지점이 있다.
즉, 후자는 명백하게 가짜인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반드시 인간들의 입에서 두고두고 희자되는 성격이 있고, 따라서 그들이 지배하는 남방계 한족들의 역사관을 곡해하기 위해서 삼국지라는 위서를 만든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요컨데, 후대의 북방계 지배계급들은 남방계 피지배민들이 민족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고대 도교의 원조쯤으로 알려진 한중의 오두미교와 함께 한중, 시안, 쳉두(=성도)는 도교가 매우 흥하던 지역이 되었다.
도교라는 것 자체가 선비투르크계 오랑캐들의 종교라는 관점을 가지게 된다면 해당 지역에 그들의 지배계급들이 상당히 이식된 것이다.
참고로 도교와 노장경은 상관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게 상관없는 것이다. 노자나 장자가 종파를 남긴다거나 심지어 제자를 남긴 것도 아니다. 장자경은 단지 몇 페이지의 구결로 된 짧은 경전에 불과하다.
종파화 된 도교의 무리를 언급할 때에 반드시 언급되는 이름은 오두미교의 장릉라는 놈과 손은이라는 놈이다. 장릉이라는 놈은 청성산에다가 도관을 열었다는 전설의 인물이고, 손은이라는 놈은 남조에서 오두미교의 반란을 일으킨 놈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남조와 북조가 당시에 대립관계였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고려하면 손은이라는 놈은 대단히 의심스러운 놈이다. 게다가 삼국지의 손씨 왕조라는 것조차도 의심스러워진다.
어쩌면 손은의 실체는 남조 초기에 강남으로 쳐 들어왔다가 축출된 선비족계의 세력일 수 있다. 혹은 완전히 외삽으로써 북조 세력에게 군사적인 타격을 가했던 환온의 아들이 몰락하는 과정으로 묘사되는 기사에서 환현을 토벌하는 사마원현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종자로써 남조의 난맥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외삽된 인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것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어서 삼국지의 손가 7대의 역사를 창작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마원현이나 사마덕광이 애초에 사마씨였다는 증거부터가 조금 희박한 것이다. 사마라는 것은 그들의 타이틀일 수 있다. 타이틀과 이름이 겹친다는 것도 대단히 엉터리이다.
되려 오초7국의 난 이후에 해당지역에 유씨왕들이 책봉된 기록은 비교적 믿을 수 있는 사가인 사마천에 의해서 기술되었다.
어쩌면 북조의 오랑캐들이 정작 후대에 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유씨라는 것은 유자천하를 상징하는 종교적인 성씨였을 것이다. 마치 파라오처럼 말이다.
그 것은 성에 관한한 중국사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인데, 대부분의 중국 성씨는 5대 10국이후에나 만들어진 것이다. 그 윗대로는 실존 인물에 대한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5대 10국은 무려 당이 멸망한 뒤이고, 우문씨나 고씨, 모용씨는 일족이름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조의 시대에는 성씨조차 일반적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즉 원현이나 덕광에게 이름만 있었고, 그들은 한제국의 시대에는 유씨로 행사할 수 있었지만 유씨가 가지는 이름이 퇴색됨에 따라서 유씨를 붙이지 않았던 실제로는 오초7국의 난 때에 분봉된 유씨들의 후예일 수 있다.
사마라는 것은 당대에는 Duke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유럽에서도 당시에는 혼란기였는데, 둑스라는 것은 공작위라기 보다는 특정 지역의 보호자이자 군사적인 리더들이 스스로 칭하는 것이었다.
유럽과 아시아가 공히 로마제국과 한제국이 멸망한 혼돈기가 당대였고, 따라서 혼돈기에 군사리더들은 사마따위의 호칭을 맘대로 칭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황학은 그러한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사마원현은 정작 유씨 황제의 상징성의 복고를 원하였다. 따라서 유유라는 놈이 황제로 등극해서 유송을 세웠다.
그런데, 유송이라는 이름조차도 곡해된 것으로 보인다.
진서(晉書)는 중국 진나라(晉)의 기록을 담은 역사서이다. 이십사사중에 하나이다. 648년 당나라 태종 때에 방현령(房玄齡) · 이연수(李延壽) 등 20여명의 학자가 편찬한 책으로, 서진(265년 ~ 316년)과 동진(317년 ~ 418년)의 역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 진서 이후 사서(史書) 편찬이 국가 사업으로 행해지고 새 왕조에서 전왕조(前王朝)의 역사를 쓰는 것이 나라의 임무가 되었다.[1]
총 130권으로, 제기 10권, 열전 70권, 지 20권, 재기(載記) 30권이다.
위키따위에서도 지적하지만 진서는 아예 당대에 쓰여진 엉터리이고, 바로 측천무후가 조직적으로 역사 조작을 지시했다는 것이 치적으로 기록된 바로 그 시대의 것이고,
진서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가 많다.
유지기(劉知幾)는 진서가 어림(語林), 세설신어(世說新語), 유명록(幽明錄), 수신기(搜神記)와 같은 책에 기록된 괴이한 내용까지 수록록한 것을 지적하고, "분량마저 많으면 좋은자료 수집이 넓고 좋다고 하는 태도다. 소인은 기쁘게 할 수 있겠지만, 군자가 비웃고 있다."라고 매우 강하게 비판하였다. 또 구당서와 신당서의 방현령전 평에도 "진서를 편찬한 사관은 문학인이 많았기 때문에, 괴이한 기록을 적고, 이상한 말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을 뿐, 그 기술 태도는 기발하고, 정확한 사실인지 판단하지 않았다고."고 한다.
진서는 중국인들에게도 미심적은 기록으로 간주된 것이다.
송서(宋書)는 488년에 남제(南濟) 무제(武帝)의 명을 받아 심약(沈約)이 편찬한 기전체 역사서로, 동진의 뒤를 이은 남조의 왕조인 유송(劉宋, 420년~479년)의 역사를 담았다. 본기 10권, 열전60권, 지(志) 30권으로 모두 1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24사의 하나로 꼽힌다. 본기나 열전이 1년 정도 걸려 완성된 것과는 달리 지를 완성하는데 10년이 걸려 양(梁) 시대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유송이 멸망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유송의 역사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생존해 있던 시대에 편찬된 덕분에 동시대의 자료를 많이 수록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역사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라고는 하지만 이 것도 외삽이 의심된다. 적어도 후일에 측천무후라는 년이 그전까지 존재하던 모든 사서에 대해서 첨삭하기를 지시했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자.
송대에 유명한 사가로 배송지라는 놈이 있는데, 바로 삼국지에 주를 단 놈이다. 그런데, 이름의 작명센스를 이해하자. 배송지라는 이름은 '송나라의~'라는 뜻 정도가 된다. 그러니까 이름이 송나라인간이라는 뜻을 가진 한국식으로 따지면 뭐 김한국 이정도의 센스랄까나 그런 인간의 말을 빌려서 기술을 해놨다. 그런데, 정작 송이 중국을 대표하는 이름도 아니다. 그 것은 명백하게 후대에 송나라라는 것이 성립한 이후에나 발생한 인지인 것이다.
즉 배송지가 유송의 인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후대의 북송인간일 가능성까지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왜 송이라는 이름 자체가 후대의 곡해일 가능성이 있냐면 이러한 것을 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어이가 없는 것은 명백하게 돌궐계 오랑캐 놈인 후경의 나라는 한
漢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 자체가 돌궐계 오랑캐들이 국가의 이름도 마구잡이로 붙였음을 시사한다. 이 지점은 이 글내에서 다른 것들보다 조금 더 결정적인 것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국명들 자체가 후대의 분류를 위한 외삽일 수 있다. 어쩌면 국가명은 애초에 선비족들에게서 위나라라고 하는 국명이 참칭되었다.
그 이전의 중국의 황제들에게 황제의 권위는 절대성이므로 국명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
한제국이라는 것도 국명이 한이라기보다는 한족의 나라라는 일반적인 뜻이 있는 것이다. 즉 한의 이름은 'The 한' 인 것이다. 한족에게 한나라라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우리나라라는 말과 비슷한 작명센스가 있는 것이다. 그 것은 후대의 황학이 억지로 연결하려 했던 것과는 다르게 표방된 명칭이라기보다는 한민족의 국가를 한국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수준의 관습법적인 명칭이다.
그런데, 정작 송, 제, 양, 진에서는 국가명이 쓰였다는 식으로 억지로 붙여졌으며, 게다가 정통성이 있는 이름인 한나라라는 것은 오랑캐인 후경의 나라가 한나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작 선비족은 그들의 나라를 위라고 따로 불렀다. 그러한 부분에 의해서 한족의 역사가 선비족의 manner를 따르도록 기술된 흔적이 역력하다.
마찬가지로 삼국지 전체도 외삽이고, 촉한도 실상은 성한의 데자뷰인 코스프레로 보인다. 저족은 아마도 선비족의 일파일 것이고, 저족이 세운 성한이 스촨성에서는 몇 대 못가고 환온에게 축출당한 것에 대한 역사조작으로써 후대에 스촨성을 재접수한 돌궐계 오랑캐들이 그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어낸 개념이 유씨의 한이라는 촉한인 것이다.
또한 후경과 마찬가지로 한제국의 말기에 남입한 선비계 오랑캐집단의 나라인 성한에는 그냥 성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한나라라는 성한이라고 붙인 것은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유비의 한인 촉한은 성한의 코스프레이자 데자뷰가 확실한 것이다.
따라서 유송대에 스촨성이 명백하게 남부한족들에게 여전히 영유되고 있던 시절에 배송지라는 놈이 삼국지에 주석을 달아서 촉한을 강조한다는 것도 완전히 모순되는 개념이다.
바로 유송의 창시자 유유와 동시대인이던 환현이라는 놈의 애비세대였던 환온이 성한을 멸망시킨지 불과 1세대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성립한 왕조의 배송지라는 놈이 굳이 스촨성에 별개의 외세국가가 있었다고 한다는게 말이 될까?
거진 임라일본부설을 1948년에 수립한 한국정권이 공인해준다는 수준의 모순점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완전히 거짓말이고, 배송지라는 놈은 존재조차 중국놈 뗀놈새끼덜 뻥카에서 나온 놈이라고 보여진다. 배송지의 실재인물은 1940년대 인물인 이유립이 신라대의 화랑을 코스프레한 것마냥 심지어는 천년의 역사조차 차이날 수 있다. 이러한 수준으로 중국사서는 모조리 위서라는 것이다.
되려 그들이 내세우는 관점 내에서 존재하는 특정 지배성분에 대한 논조를 고려하면 실상 그 시대의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시대를 크게 구분하면 그 것은 시안시대-정저우카이펑시대-북경시대가 된다.
북경시대는 요나라가 북경을 세운 이후에 실상은 한민족의 사촌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팔촌정도라고 할 수있는 동시베리아 고어를 조금은 공유했을지도 모르는 퉁구스계 여진-만주계가 세운 도시로부터 기인하는 이전과는 완전히 지배성분이 다른 시대이다.
북경시대에는 일시적으로는 몽골계가 명목상 군주정권을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동이계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명대에조차도 연왕 주체라는 놈이 정난의 변을 일으켜서 영락제로 집권한 뒤에는 동이계 북경주류들이 다시 정권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카이펑-정저우 시대는 돌궐놈들의 시대이지만 바로 요나라에게 털리고, 금에게 털려서 이주하게 되는 과도기이다.
그리고, 시안시대 내에서 한족시대와 돌궐시대로 나뉠 수 있는데, 바로 그 것이 한제국과 당제국인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후대의 당대의 측천무후같은 종자들은 그들이 한제국의 정통성을 잇는 것처럼 보일려고 무지 노오력을 하였는데, 바로 그러한 노력의 일부가 돌궐족 후경의 나라 따위를 한漢이라고 한 것이다.
요컨데, 중국의 한제국 이후의 역사는 이러한 의도를 지닌 돌궐족들에 의해서 전반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왜곡의 경향은 공자의 역사서 춘추에 기록된 국가의 이름들을 되풀이 해서 코스프레하던 송대까지의 모든 시대내에서 적용될 수 있고, 정작 그 이전에는 없던 국가의 이름인 원, 명, 청의 이름을 쓰기 시작한 시대에 와서야 북경의 지배계급은 전왕조들의 코스프레를 하는 경향을 보이지 않았고, 그냥 애초에 독자적인 국명을 쓰고, 정체성에 대해서 되려 변발을 강요하는 식으로 마치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왕들의 복식과 가발을 쓰고는 페르시아왕마냥 행사하는 것과 같은 코스프레를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시대들에 대한 대척점으로써 청대에는 아주 대놓고 그들이 이민족 왕조라는 지점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억지로라도 한족 코스프레를 부단히 시전했던 흔적 그 것 자체가 선비-돌궐계 오랑캐들 냄새가 풀풀 스며나오는 것이면서 그들의 전반적인 곡해에 대해서 그닥 신빙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게 겨우 24사의 신뢰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