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241년에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라는 놈이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 있던 쿠샨 왕조를 공격하였고, 그 이전에도 이미 샤푸르 1세의 애비였던 놈이 쿠샨왕조를 공격해서 조공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로 인하여 아프가니스칸의 헬레니즘 군벌들은 중국쪽으로 이동해가는 스노우볼이 발생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중국이 중국쪽 기록상으로는 선비족이라고 불렸던 외세의 침입을 받게 되고, 선비족으로부터 후일에 돌궐로 더 알려진 그 세력들은 946년에 그들의 거점이 카이펑을 요나라의 야율덕광이라는 놈에게 털리면서 쇠퇴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패러다임이 계속되었다.
정확하게는 카이펑은 털리고 난 이후에 더 번영하였다. 로마가 켈트족들에게 털리고 나서 더 화려하게 부활했듯이 말이다.
그러한 제국을 송이라고 하였는데, 카이펑을 재건한 잔존자들 사이에서는 아마도 그 전 세대들까지 답습되었던 돌궐계 특유의 할거경향이 새로운 태동기에서는 반성되었고, 더 이상 정치적으로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즉 송은 선비돌궐계들에게는 그 이전의 시대와는 완전히 상이한 새로운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점증하는 요와 금의 군사적 압력 때문에 그들의 번영기는 그다지 오래갈 수 없었다.
중국의 구체제 기록상으로는 아마도 황학이라는 것의 존재 때문에 성씨가 다른 왕의 존재가 있으면 나라 이름도 응당 뜯어고쳤지만 곽위와 시영과 조광윤은 모두 카이펑이 함락당한 문명의 폴아웃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재건자들이다. 그들은 기존의 법도 따위는 무시하고, 카이펑 재건에 애쓰면서 정치권력을 세습한다거나 하는 것 없이 재건공동체내에서 적당한 인물에게 리더쉽을 넘겨주고 사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서 곽위는 시영에게 선양하였고, 시영대에 카이펑은 비로소 옛 위상을 찾게 되었고, 카이펑 중심으로 지배권이 재확립되는 영토 확장이 천명되게 된다. 그 영토 확장과정에서 공을 많이 세웠던 인물이 조광윤이었던 것이다.
946년에 카이펑이 털렸을 때에 927년생이던 조광윤은 딱 20살이던 때였다. 그러므로 조광윤은 자신의 성인기를 죄다 카이펑의 재건에 투자했던 셈이 된다. 따라서 재건공동체로써 성격이 강해졌던 당시의 카이펑내에서 인지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서 중국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선양이었다고 하는 시씨로부터 조씨로의 선양이 일어났다. 이 것은 모두 실상 하나의 나라이기 때문에 송의 초기에는 부자세습을 초월한 정치체제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신정치체제에서는 그 모든 군권을 황제가 장악하고, 더 이상 당나라의 절도사의 난립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어쩌면 아프가니스탄의 군벌세력이 중국으로 난입한 것과 같은 세력으로부터 중국의 혼란기가 무려 700년이나 지속되었고, 그 시대는 그야말로 중국의 암흑기라고 할만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일대는 고대에는 박트리아라고 불리었는데, 알렉산드로스 3세라는 놈이 박트리아 여자인 록사네를 맞아들였다는 바로 그 곳이다.
그리고, 박트리아는 이후에 곧 디아도코이들이나 다름없는 알렉산더 제국의 헬레니즘 워로드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것이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이다. 그 것은 그리스계 왕조의 박트리아 왕국이라는 뜻이다.
그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은 헬레니즘 워로드들에 의해서 일관적으로 다스려져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이 지키기 쉬운 곳인만큼 팽창하기는 어려운 곳이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시대에는 아프가니스탄의 군벌들은 키르키스스탄이나 파키스탄이나 중국쪽으로 진출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특징적으로 240년대 이후에는 그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 것은 샤푸르1세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좌충우돌 전쟁 때문에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발생한 난민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흘러들어가서였을 수 있다.
헬레니즘 워로드들의 방식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애비였던 필리포스라는 놈의 방식을 따라서 엘리트 기병대는 오늘날로 치면 백두혈통과 그들의 친인척들인 지휘성분들이 이루고, 반면에 보병대나 경기병들은 현지인들로부터 이런저런한 이유로 받아낸 충성맹세나 볼모나 용병따위로 상황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차출해 쓰는 현지인 자원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들은 마케도니아에서는 그리스의 호플리테스라는 중갑보병들을 고용해서 중갑장창보병으로 장비만 조금 개량해서 활용하였고, 알렉산드로스 3세의 인도공략 때에는 중앙아시아의 기병들을 경기병으로 활용하는 등, 용병을 통한 군사문화의 도입에는 유연성을 자랑하였다.
그들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인 트란스 옥시아나 지역으로부터는 경기병들을 주로 차출하였는데, 그들이 투르코폴로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투르코폴들은 분명히 셀주크 투르크에서도 투르크 군사집단의 주축이 되는 존재들이었다.
오늘날 지도에서는 아프가니스탄계 군벌들이 중국으로 난입하려면 타지키스탄을 지나가야 하지만 고대에는 해당 영토들은 키르기스족들의 땅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키르기스족들과 돌궐인들의 전쟁이 발생하였고, 북상해오는 아프가니스탄의 그리스계 군벌들에 의해서 알마티일대 또한 전화에 휩싸였을 것이다.
알마티에서 위의 지도에서도 보이는 알마티 북동쪽의 alaqol 호수를 따라서 바이칼 호수로 통하는 길을 찾으면 타클라마칸 산맥을 북쪽의 초원으로 우회하는 초원길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초원길의 끝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나라, 고구려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투르크와 키르기스스탄의 전쟁은 고구려에게는 고구려로부터 올 수 있는 캐러반이 알마티에서 더 이상 서진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실크로드가 고구려인들에게 단절되는 것이다.
이러한 실크로드의 단절이 고대에서 중세의 암흑기로 넘어가는 것에 결정적인 것으로 적어도 아시아내에서의 패러다임에서는 작용하였다.
여기까지 상기한 내용과 거의 유사한 지정학적인 판도에 대한 보고가 인도의 영국 총독들로부터 본토에 보고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반응은 해당지역에 깽판을 놓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서 영국이 뒷배인 것이 확실한 야쿱백의 반란이 일어났고, 무려 당시에 영국에서 파견한 요인이 상황보고를 위해서 인도북부지역까지 나와서 정보수집을 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에 허당일줄 알았던 청나라는 좌종당이라는 인물들 보내서 야쿱백의 반란을 싸그리 진압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국이 뒷배지만 표면적으로는 야쿱백을 뒤에서 후원한 러시아와 이리조약을 체결하고서는 중국 서부의 영토들이 영국과 러시아의 흉책에 넘어가지 않음을 대외에 과시하였다.
이리조약이 맺어진 곳은 바로 위의 지도에서 알마티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서 정동쪽의 중국국경너머에 위치한 이리카자흐자치주내에 있다.
그런데, 애초에 영국이 어째서 해당지역에 깽판을 놨느냐가 중요한데, 그 것은 자칫 영국과 네덜란드와 스칸디나비아국가들의 발트해교역을 크게 위축시킬 수 있는 중국발 교역이 오늘날 폴란드지역이나 체코지역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육상교역로에 의해서 영국섬과 저지대에 이권을 가져다주는 해상교역이 크게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교역들이 발트해내에서 자리잡게 되면 발트해의 교역은 해로보다 육로에 크게 의지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장 타격을 입는 나라는 영국과 네덜란드와 스웨덴과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제정 러시아의 왕이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운 표트르 1세 이래에 영국과 러시아는 같은 편이었고, 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육상교역이 활성화되는 것을 지속적으로 깽판을 놓아 왔던 것이다.
그에 따라서 실크로드의 교역로상의 안보에 가장 영향을 줄 수 있는 카자흐스탄인들이나 카스피해연안의 노가이족들이 제정 러시아의 악독한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에는 결국 카자흐스탄의 독립을 막을 수 없었고, 카자흐스탄 뿐 아니라 트란스 옥시아나 전체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실크로드가 다시 부활하여서 실제로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으로부터 폴란드까지 가는 트레일러의 행렬이 교역량이 증가하였다.
여기서 세계정세를 이해하는 눈이 중요한데, 유라시아 대륙 서안에서 육상교역이 증가하면 폴란드와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에게는 매우 호재가 되는 반면에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에게는 물동량 감소가 현실적인 문제가 되게 되어있다.
러시아내에서는 특정지역중심의 권력의 재편이 일어날 수 있다. 오늘날 푸틴이라는 인간은 바로 발트해의 항구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써 그가 보이는 스탠스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매우 친서방적인 지정학적 이해를 지닌 인물이다.
유라시아대륙은 그 자체가 대륙이므로 트레일러만으로 리스본에서 부산까지 갈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스코 다 가마가 인도양을 발견하건 말건 실제로는 아프리카발이 아닌 이상 최단경로는 육상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해상으로 가는 것 자체가 직선주로를 놔두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트레일러를 타고, 폴란드나 독일로 가는 길 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가 존재하지 않는다.
되려 그 중간에는 크림반도로 살짝 사이드로 새는 길이 있긴하다. 바로 크림반도로 빠지는 길이다. 그 것을 알게 되면 어째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푸틴 정권이 크림 위기를 일으켰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크림반도에는 본래는 몽골계 칸이 있었지만 1721년~1725년 사이에 집권했던 표트르 대제를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정권의 제정 러시아에게 1783년에 크림 칸국은 멸망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그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정권이 남러시아와 크림반도나 오늘날에는 우크라이나땅인 키에프 따위에 유라시아대륙의 육상교역행렬이 집중될 수 없도록 미리미리 깽판을 쳐 두는 것이다.
실크로드의 부활을 막기위해서 깽판 칠 곳은 어쩌면 뻔한 것이다. 그 것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이며, 특히 크림 반도를 후려서는 폴란드로 가던 짐마차 행렬이나 오늘날에는 트레일러가 흑해쪽으로 빠져서는 흑해와 지중해 물류까지 모조리 실크로드세력이 장악하는 것도 제어해야 하는 것이다.
뭐 여기서 들어본 놈은 알겠지만 레판토 해전 이후에 지중해 교역은 쇠퇴하고, 대서양과 북해가 떡상하였다 그렇고 그런 시나리오인 것이다.
그러나 실상 지중해는 죽고, 대서양은 사는 그러한 구도의 원인은 저 멀리 우즈벡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달린 것이다.
여기까지 핵심을 깨닫게 되면 어재서 앵글로 색슨들이 아프가니스탄을 깽판치려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 불과 얼마전에 파키스탄은 파키스탄 경제에 활력을 주기 위한 출구를 찾기 위해서 당시에 탈레반이 집권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에 대규모의 트럭원정대를 보내서는 군벌들과 제휴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그러한 행위의 궁극적 데스티네이션은 중국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황을 다시 보게 되면 실상 파키스탄 주도로 중국과 인도가 교역하게 되면서 번영하면서 그들과 파트너쉽이기도 한 폴란드나 체코나 리투아니아 따위에 카운터파트가 될 영국과 상트페테르부르크 계파들에게는 크나큰 위협이 탄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프간에서 깽판을 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