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김일성의 지위는 대단히 불안정했었음. 왜냐면 일본의 항복 당시에는 더 우세한 것으로 알려졌던 장개석이 김구만을 인정하려고 했기 때문임.
게다가 장개석은 19로군의 하나인 이종인군에서 호치민을 받아줬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과 베트남의 국부로 알려진 두 명을 모두 포섭하고 있었음.
바로 그러한 보장에 의해서 김구는 정치적 영향력을 한국에서 발할 수 있었던 것임.
그 것이 아니었다면 김구에서 한국은 친일파들로 둘러쌓인 숫제 적지나 다름없는 곳이었음. 그 것은 다수의 친일파 명문 가문들을 배제하고, 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그가 이름을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기도 했음.
따라서 김구에게 가장 부담이 되었던 것이 바로 하류들 사이에서 깽판을 치는 존재인 정치깡패새끼덜이었던 것임. 그리고 오늘날에는 모조리 밝혀졌지만 정치깡패들은 모두 우파들의 하수인들인 모종의 후원을 받는 놈들이었음. 어쩌면 그러한 은원에 의해서 김구의 아들 김신은 박정희의 5.16에 가담하였고, 박정희 또한 속마음을 절대로 내비치지 않던 그의 성격 때문에 동기를 가늠하기는 당시건 지금이건 대단히 어려웠지만 개괄적으로 보자면 박정희는 적어도 그의 정권장악을 위해서라도 정치깡패들을 죽이거나 길들이는 것을 천명하였다.
그에 따라서 이정재와 임화수가 처형되었다.
어찌되었건 장개석은 김구에게는 생명줄이었고, 국공내전에서 그가 패하자 김구 또한 친일파들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연구들에 의하면 장개석과 미국은 애초에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러한 구도에 의해서 김구 또한 미국의 견제를 심하게 받았다. 특히 장개석이 김구에게 전별금조로 준 20만 달러는 미군정이 가지고 들어올 수 없게 하였기 때문에 끝내 김구는 이 돈에 손도 못 대 보고, 정치자금면에서 친일파들의 독주를 막을 수 없었다.
에서 말하듯이, 그 20만 달러는 나중에 이승만이 집요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장개석은 화교들에 의한 한중교역을 위한 기구를 설립하는 그 돈이 쓰이도록 안배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 이후부터 중국내의 정세가 급변하면서 그 돈은 영원히 붕 뜬 돈이 되었다.
통설과는 다르게 장개석과 미국은 전쟁기간동안 그다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지 않았다. 일본의 패망이 사실상 시간문제가 된 이후에나 플라잉 타이거스 따위의 공군지원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 전까지 미국의 지원은 전무하였으며, 심지어 중국이 미국에 돈 주고 사오기로 한 전투기들도 영국군이 마음대로 중간에 가져가서는 롬멜과의 아프리카 전선으로 가져갔을 뿐이다.
미국은 아마도 연합군이 버마전선에서 승리하고 베트남까지 진주하였던 일본에 원폭이 떨이지고도 난 시기 이후에 마치 이라크에 다수의 군용장비들을 운반비가 재구입비가 더 많이 든다는 명목으로 놔두고 간 것에 대해서 사후합리화를 하였지만, 정작 전쟁의 가장 필요한 지점에서는 되려 스탈린이 오퍼페이션-Z를 통해서 중국에 공여한 장비가 되려 더 많은 지경이었다. 심지어 스탈린은 그 것조차도 진정어린 지원이라기 보다는 그냥 형식적인 것으로 건네줬음에도 말이다.
오늘날 한국의 친중 색체는 매우 옅지만 194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이나 베트남은 응당 중국의 영역이 되어야 할 지역으로 적어도 중국인들에 의해서는 간주되었다.
중국은 청일전쟁과 청불전쟁 두 전쟁으로 한반도와 베트남에서 철군하기 전까지는 양국에 명백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것은 1940년대에도 장개석이 호치민과 김구를 모두 아우른 것에서 구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두 지역에서 모두 전쟁이 일어났고, 중국과 미국은 베트남과 한반도에서 한번은 직접 전쟁 한번은 대리전쟁을 펼치게 된다.
그 이후에 1970년대에나 겨우 중국과 미국은 그 전까지의 은원을 청산하고 데탕트로 돌아섰던 것이다.
따라서 1970년대 이전의 중국과 미국의 관계는 그야말로 오해와 통수로 점철된 관계였다.
잘못된 정보는 그간 업데이트 되지 않은 오래된 정보의 합이라는 기본도 모르는 종자를 위해서 여기에 오래된 정보와 그나마 업데이트된 글의 대조본을 링크해봤습니다.
뭐 둘 다 읽어보면 어느쪽이 쉰 내가 나는지 알수 있습니다. 더욱이 쉰내나는 쪽은 2020년에 쓰여졌고, 업데이트 된 쪽은 2009년 글입니다.
이쪽이 쉰내나는 떡밥.
이쪽은 진짜
저는 후자의 글을 따라서 글을 쓰겠습니다.
후자의 글의 내용대로 1945년 11월 이후에 미국의 대중국 지원은 급격히 줄어서 1946년 1월 이후에 미국의 지원은 거의 없어지게 됩니다.
미제 장비가 남아돌았다는 낭설은 애초에 거짓말이고, 한국의 반공 우익들이나 만들어낸 헛소리입니다.
실제로는 2차대전 전쟁중이나 이후에나 미국은 중국을 거의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루즈벨트의 집사 문돌이던 트루먼이라는 놈의 졸렬함 때문입니다. 트루먼이라는 놈은 그냥 한갖 펜대나 굴리던 놈인데, 루즈벨르가 고령으로 인해서 사망하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자질없던 놈입니다.
트루먼은 애초에 집권할 때부터 스탈린에게 존나게 휘둘렸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스탈린에게 트루먼은 그냥 철부지 아이만큼이나 다루기 쉬운 존재였습니다.
1946년 1월에 스탈린이 국민당군이 만주지역으로 들어올 것을 가지고 설레발을 친 것만 가지고 미국은 국민당에 대한 지원을 아예 끊어버렸습니다.
요렇게 됩니다. 그 이후에는 지원이 끊기게 됩니다.
애초에 트루먼이라는 놈의 소련에 대한 과대평가와 두려움 때문에 매카시즘이 탄생하였고, 두고두고 미국의 트라우마가 되게 되었습니다.
그 트라우마는 데탕트를 통해서 키신저가 중공과의 수교를 통해서 미국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때까지는 유효하게 되었고, 그 것은 모두 트루먼이라는 놈 하나 때문에 초래된 일종의 미신이 원인입니다.
실제로는 소련은 참전할 여력이 전혀 없었으며, 전후복구와 관련한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소련의 여자들은 아이 낳기 바쁜 전형적인 전쟁 이후의 국가였습니다. 실제로도 한국전쟁에서조차도 파일럿들이나 보내는 것 외에는 소련군이 직접 개입하는 것은 기피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발을 먼저 빼서는 스탈린의 뻥카 블러핑에 트루먼이 봉잡고도 셀프로 뒤진 격입니다.
스탈린의 원페어에 봉(트리플)잡고도 뒤진 멍청이가 트루먼이었다구요.
트루먼 또한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러한 양대진영에게 각각 싸울 의지가 있는 중국인의 군대를 무장시키는 것은 메리트가 있었습니다.
요컨데, 스탈린이건 트루먼이건 2차대전 당시에 만든 남아도는 장비들을 중국인들의 자기덜 편에 공여함으로써 대신 피 흘려줄 멍청한 중국인 호구를 쟈니(잭 오브 다이아몬드)패로 쓸 수 있었지만 쟈탑 잡고도 2탑에 뒤진 머저리 새끼가 트루먼이라는 놈입니다.
요컨데, 장개석은 트루먼의 쟈니탑이었지만 트루먼이 스스로 카드를 버렸고, 반면에 스탈린은 멍청한 트루먼의 버린 카드를 주워다가 자신이 되려 중국인의 대리 전쟁해줄 무장한 군대를 거느린다는 패를 주워서는 쟈니 원페어를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나 핵무기-폭격-항모전단파견이라는 트리플 카드가 여전히 있음에도 그냥 뒤진 놈이 트루먼입니다. 정말 졸렬한 놈이죠.
그리고, 역사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끝내는 베트남전쟁의 원흉이 된 프랑스놈들의 공작도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트루먼 행정부의 망설임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어긋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고는 가장 가라앉는 배에서 갈아타기로 한 것은 장개석의 은행라인이던 쿵샹시와 송자문으로써 그 둘은 대놓고 중국이 가지고 있던 외환을 빼돌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국민당 중국은 말기에 인플레이션으로 망했다는 것은 그들에 의해서 '자행된' 외환위기의 결과인 것이지 전쟁패배의 원인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1997년 이전의 동아시아인들은 외환위기나 신용경색이나 유동성위기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무지한 기성세대들에 의해서 엉터리로 기술된 것이다.
쿵샹시는 바로 미국의 금융의 메카인 뉴욕에서 거부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물론 그가 대만인으로써조차 활동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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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장제스는 믿을 것은 혈육인 장징궈밖에 없다고 여겨 장징궈를 1946년 5월 국립정치대학 교육장에 임명하는 등 크게 중용하기 시작했고 장징궈는 천청과 함께 장제스의 눈밖에 난 쑹쯔원, 쿵샹시, 천궈푸, 천리푸 등 대륙 시절의 요인들을 차례로 숙청하였는데 특히 1954년 부총통에 출마하려던 쿵샹시를 낡은 사회의 권세있는 집안 사람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여 그를 정치판에서 완전히 제거한 것이 장징궈였다. 입법원장 천리푸 역시 천청에게 난타당하여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또한 대만성 정부 주석이자 민주파 지도자였던 우궈전과의 대립 끝에 우궈전 사건으로 그를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1954년 국가안전회의 부비서장에 임명됨에 따라 대만의 정보기관을 장악하여 국민당 독재를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집권 후의 유화적인 모습과 달리 이때 장징궈는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국민당 통치에 방해되는 인물을 닥치는대로 체포하고 불법으로 정치자금을 모으는 데 귀재였다.[8]
의 기사도 매우 편향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중동의 아버지 같은 놈들의 연구성과가 그냥 답습된 것이다.
되려 불법으로 외환을 빼돌린 것들은 장개석의 측근들이고, 되려 장징궈는 그러한 돈들을 회수한 것이다. 그러한 한편으로는 쑹쯔원과 쿵샹시들은 정권에서 제거되었다.
중요한 것은 쑹쯔원과 쿵샹시는 한국으로 치면 당대의 금감원장+중앙은행총재+재무부장관 쯤 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중국의 은행라인에 있었던 것이다.
마치 한국의 imf가 당시에 재정경제부 외환관리과장이던 김석동이라는 놈의 방기 때문에 일이 크게 되었듯이 말이다.
김석동은 단지 상황을 제어를 못했을 뿐이지만 쿵샹시와 쑹쯔원은 나라가 망할 수준의 임팩트가 올 줄 알고도 대놓고 돈을 빼돌렸던 것이다.
애초에 그러한 일에 의해서 장징궈가 집권할 수 있었다. 장징궈는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지만 실상은 장개석의 사생아나 다름없는 장개석에 의해서 유소년기를 길러지지도 않았던 장개석이 젊은 시절에 낳은 자식인 버린 자식일 뿐이다.
대륙에 있을 시절에 장개석의 실질적인 장자자리는 장웨이궈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방이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장웨이궈에게 주어진 역할은 바로 장개석이 송씨부인을 얻으면서 사돈이 된 쑹쯔원과 쿵샹시를 철저하게 감시하라는 것이었다. 그 것만 잘 하면 어차피 그 자체가 또한 장개석의 후계자라면 권력을 다지기 위한 초석이기도 했지만 장씨가문의 가독을 승계받을 수 있는 통치행위이자 승계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것으로써 너는 그 것만 잘 하라고 맏겨졌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바로 장웨이궈의 아내이던 스징이가 그들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뉴욕으로 외환을 빼돌리는 것을 포함한 일체의 행위들을 모조리 눈감아줬다고 한다.
그 것은 결국 장씨 가문의 왕세자와 왕세녀와 다름 없던 그들로부터 승계수업 자체를 거부한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에 장개석은 매우 처절한 방법으로 그의 며느리를 처단하게 되었다.
1943년 중국 갑부의 딸인 스징이와 결혼했는데, 스징이는 사치와 밀수와 국가 기밀 누설로 구설수에 올랐다. 한번은 장웨이궈의 미국 방문 때 뉴욕에서 쇼핑을 하고 싶어서 따라가게 해달라고 남편을 조르다가 장웨이궈가 들어주지 않자 장웨이궈의 여권을 찢어발기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 때문에 장웨이궈의 미국 방문이 무산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제스가 격노했는데, 스징이가 1953년에 의문의 죽음을 맞은 것애 대해 며느리의 비행을 좌시할 수 없었던 장제스의 명령에 따른 암살설이 매우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중화민국 대사를 지낸 김신은 회고록에서 이를 아예 사실로 소개할 정도이며, 김신이 소개한 내용이 한국에서는 장제스가 부정부패를 저지른 며느리를 처형했다는 말의 출처가 된다. 이후 1957년 독일 교포인 추아이룬과 재혼하여 1963년 아들 장샤오캉을 얻었다.
스징이와 관련해서는 이 정도의 에피소드가 남아있을 뿐이다.
결국에 쿵샹시나 스징이와 같은 중국의 오랜 사족가문들의 특권층으로써의 더러운 행태에 치가 떨린 장개석은 그들을 비판하는 공산주의이념조차 가지고 있던 장징궈의 논리를 받아들였고, 따라서 장징궈는 그들 특권층 패밀리들을 공개적으로 타이완 정치에서 몰아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장징궈가 한 때는 공산당이었다는 지점들은 한국의 반공세력 기성세대들은 결부시켜 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장개석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는데도 졌다는 둥의 대구경북식 카더라가 퍼진 것이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인지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개석은 외세의 지원을 그다지 받은 편이 아니며, 풀라잉 타이거스 조차도 당시에 중국의 중앙은행장이던 송자문이 은행의 지원을 통해서 데려온 용병들일 뿐이다.
송자문은 영국의 보호를 요청해서 파리를 거쳐서 미국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영국은 예의 전세계의 금융역외인 시티가 있는 그 곳이고, 파리는 바로 베트남과 중국간의 이해관계가 얽힌 곳이다.
따라서 송자문은 외세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다.
영국은 단지 돈을 슈킹하기 위해서 프랑스는 당시의 프랑스가 베트남을 차지하려고 하던 움직임에 따라서 청불전쟁 당시의 대립판도가 재현될 수 있는 장개석정권의 통일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뒤로는 대놓고 장개석의 금융라인들에게 그냥 돈 후리고 우리쪽으로 튈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한 통수들은 냉전시대에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입장이 물타기 되던 관점들에 의해서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수에즈위기조차도 당시에는 그냥 유대교와 무슬림의 싸움이라고 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영국과 프랑스군이 군대를 상륙시켰지만 미국이 몰아냈다는 관점이 오늘날에야 용인되듯이 당시의 한국 역사가들의 아웃풋이라는 것은 냉전당시의 보도관제나 진영논리를 반영하는 엉터리의 것이다.
적어도 1940년대 후반에는 프랑스가 대놓고 국민당의 통수를 치려하더라도 미국은 제제하지 않았다.
분명히 국민당의 취약점 중에서 몇가지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정보기관과 연루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력한 심증은 있지만 그들은 일관되게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역사에서 존재한다고 언급하기가 까다로울 뿐이다. 그러나 국민당 패배의 원인의 일부는 분명히 영국과 프랑스의 정보기관의 송자문의 포섭 따위에 근거하고 있었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송자문은 트루먼의 졸렬함으로부터 발생한 미국쪽의 자료나 발표들에 쫄아서 자기 자신도 패배주의를 가지게 되어서 배신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한 한편으로는 영프계 정보기관들이 분명히 암약하였고, 송자문과 쿵샹시는 그들 스스로가 바로 영불계 정보기관의 의뢰에 의해서 스스로가 경제저격수가 되기를 자처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는 뉴욕커로써 살 수 있는 삶은 약속받았다.
그들은 후일에 장징궈에 의해서 제거되었지만 오늘날 중국인들의 자기중심적 나몰라라 근성을 고려하면 두 눈 하나 깜딱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징궈가 깐에는 대륙시절에 부호들이 빼돌린 것을 찾았다고 하지만 쿵샹시나 송자문이 보기에는 그냥 푼 돈이나 뺐은 것으로 밖에는 보이자 않았을 것이다.
그 둘은 결과적으로 막대한 부를 누르면서 천수를 누리다가 살다가 갔다.
그리고, 그 둘 다 미국무덤에 둗혔기 때문에 부관참시를 당하지도 않았다. 그러한 것들이 정권의 핵심인사였던 것이 중국식 족벌 정권인 장씨 정권의 한계였던 것이다.
교훈:(오늘날 현대식 금융체제에서) 외환라인이나 중앙은행담당자들이 나라를 배신하면 나라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그러나 1997년 이전의 한국의 기성세대 사가는 이러한 온당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냉전적 관점으로 판타지나 써 내었다. 그러한 산물이 국공내전의 향방의 원인에 대한 기존의 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