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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편) 북한과 (중공) 중국과의 역사적 관계..마지막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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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간담브이
추천 : 0
조회수 : 69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5/18 16:08:51
북한과 (중공)중국과의 역사적 관계 

 

(제 3편)     마지막편

 

 

1936년 말 국부군은 20개 사단 병력을 동원해 옌안의 홍군을 공격했다. 장제스가 추진한 ‘배일(排日)과

반공(反共) 동시 수행 정책’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았다.

   

 

산시(陝西)성 실력자로 한족 민족주의자인 양후청(楊虎城)은 홍군 토벌에 소극적이었다. 만주를 일본군에

빼앗기고, 부사령관으로 부임해온 장쉐량도 항일 우선을 주장하는 홍군에 동정적이었다.

   

 

장제스, 감금되다

   

 

시안사건 속 국민당원. 앞줄 가운데가 장제스.

  


양후청과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독전(督戰)을 위해 시안(西安)을 순시한 장제스를 체포·구금하고, 항일과

내전을 종식할 것을 강권했다. 홍군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까지 협상에 참여한

결과 양후청과 장쉐량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장제스는 석방될 수 있었다.

   

 

이로써 1937년 9월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됐다. 홍군 3만은 국민혁명군 8로군(八路軍)으로, 중·남부 유격대는

신사군(新四軍)으로 개편됐다.

일본은 1937년 7월 베이징 근교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일어난 국부군과의 충돌을 핑계로 중국 본토를 공격했다.

 

일본은 전쟁 초기에는 파죽지세를 과시했으나,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대도시와 주요 도로만 점령하는 데

성공했을 뿐 시간이 지나면서 힘의 한계를 드러냈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지원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과 함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중국에서 열세를 보였다.

일본이라는 외적(外敵)과 싸우면서도 만주족이 잃어버린 ‘중원의 사슴’을 차지하기 위한 장제스와 마오쩌둥

간 경쟁은 계속됐다.

   

 

홍군은 일본군에 밀린 국부군이 후퇴한 농촌지역에 침투해 권력 공백을 메워나갔다. 1936년 초반 1만 명

수준이던 홍군은 1945년에는 근 100만 명을 헤아리게 됐으며, 당원 역시 4만 명에서 120만 명으로 늘어났다.

지배지역은 100만㎢, 인구는 1억 명을 넘어섰다.

   

 

일본이 패배할 조짐이 보이자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 재발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국민당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에서 평화회담을 개최했다.

   

 

이 회담 결과 1945년 10월 10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전을 피하고, 독립·자유·부강의 새로운 중국을

건설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충칭 시대의 국민당 정부는 관료 부패 이외에도 장(蔣), 안(安), 쿵(孔), 천(陳) 4대 가문으로 이뤄진 정권 핵심

세력의 전시치부(戰時致富)로 악명을 떨쳤다. 화폐 남발이 가져온 악성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국민 불만이

높아갔다.

   

 

국부군은 미국의 원조와 소련의 중립적 태도에 힘입어 홍군에 대해 4대 1이라는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으로

‘10월 10일 협정’을 파기했다. 1946년 6월 26일 장제스가 홍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함으로써, 국부군과 홍군은

내전에 돌입했다.

   

 

홍군은 각개격파 작전을 해나갔으며, 점령지역 내 토지개혁을 실시해 정칟군사적 기반을 확대했다.

또한 ‘인민민주통일전선’을 결성해 국부군을 고립시키는 전략·전술을 추진했다. 부패한 국민당은 민중의 지지를

상실했다. 1947년 말부터 국민당, 공산당 간 세력관계가 역전됐다.

   


한강 이북 통제하려 한 장제스

   

 

당시 가장 공업화된 만주는 국·공 모두에게 사활이 걸린 곳이었다. 만주에는 1930년대 이후 일본이 건설한

상당한 규모의 공업시설이 있었다. 만주의 전력, 제철, 시멘트 생산량은 본토 전체를 합한 것의 몇 배에

달했다(1943년 기준 중국 전체 석탄생산량의 49.5%, 제철 87.5%, 시멘트 66%, 전력 72%, 철도 50%).

   

 

1930~40년대 만주(다롄선양창춘하얼빈치치하얼 지역)는 세계에서 공업이 발달한 지역 중 하나였다.

만주에서의 승패가 국·공 내전의 승부를 가를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1945년 6월 11일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우리가 만주를 장악한다면 승리의 토대를

확보하는 셈이고, 승리는 결정된 것이다”라고 연설했다. 장제스 역시 “만주가 없으면 중국도 없다” “우리가

만주를 점령하지 않으면 중국이 근대 산업국가로 발전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만주에 20명의 공산당 중앙위원을 비롯한 고위간부 2만여 명과 최정예 20만여 병력을 투입했다.

장제스 역시 ‘동북행영 정치위원회’와 ‘동북보안사령부’를 설치해 슝스후이를 주임, 두위밍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베이징 북부 청더(承德)를 통해 최정예 기계화사단 포함 13만7000명을 투입했다.

   

 

미군도 톈진항, 다롄항 등을 통한 국부군의 만주 투입을 적극 지원했다.

    

이보다 앞서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을 전후해 장제스는 한강 이북을 국

부군 통제 아래 두려 했다. 그만큼 만주와 한반도는 중국 처지에서 순치(脣齒)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만주 쟁탈전은 중국 내부 문제일 뿐만 아니라, 초강대국 미·소는 물론 남·북한 문제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

만주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남북의 운명이 바뀔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 총력 다해 中공산당 지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 행사(왼쪽)와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 대회.

   

 

 

국부군이 만주를 차지하면 북한은 남북 양쪽에서 포위당하고, 공산군이 승리하면 한국의 안보 부담이

가중된다. 특히 북한은 만주에서의 승패가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에 전쟁 진전 상황을 초조하게

지켜봤다.

   

 

코민테른 계열 동북항일연군과 강한 연계를 가진 김일성은 “조선혁명의 입장에서 만주가 장제스의 통치하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이승만은 “중국이 공산주의에 굴복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북한 정권 기관지 ‘민주주의’는 “미국이 해로(海路)와 공로(空路)를 통해 수십만 명의 국부군을 만주로 수송해

중국의 내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혼란 상태이던 한국이 장제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소련의 도움으로 정권을 공고히 한 북한은

공산군을 적극 지원했다.

   

 

마오쩌둥 옆 김일성. 1954년 10월 1일 중국 톈안먼 광장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5주년 기념 열병식을

함께 지켜보는 마오쩌둥 중국 주석(오른쪽)과 김일성 북한 주석. [징화시보]

 

 

만주에는 1936년 조직된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해 10만 명 넘는 사회주의 계열 무장 세력이 있었다. 만주

조선인들은 대거 공산군(인민해방군)에 가담했다. 만주 조선인들이 공산군을 지지한 주요 이유는 공산군이

토지개혁을 실시한 데다가 민족 차별을 하지 않아서다. 훗날 지린성 당서기까지 승진하는 청주 출신

자오난치(趙南起·조남기·1926~2018)도 이때 공산군에 가담했다.

   

 

강건, 김무정, 박일우, 김광협, 김웅, 최광, 이권무, 방호산(이천부), 전우 등이 조선의용군을 지휘했다.


만주지역 전투 과정에서 공산군에 입대하는 조선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만주에 잔류한 140만 조선인의

5%인 6만2942명이 입대했다.

   

 

1948년 랴오선(遼瀋)전투 후 방호산의 제1지대는 공산군 제166사단으로 재편됐다.

   

국·공내전 초반 국부군과 북한경비대 간 충돌도 발생했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1946~1947년 5월간 국부군은

16차례 불법 월경을 했으며, 17차례 북한 쪽에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中共·중공)은 전쟁 초기 불리한 상황에서 북한을 후방기지로 활용했다. 1946년 봄

동북민주연군(공산군의 일부) 부총사령관이자 백족(白族) 출신 저우바오중은 김일성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중공은 1946년 7월 평양에 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사무소)를 설치해 전략물자 공급, 남만주북만주 간

교통·통신선 확보, 각종 물자 구입 업무를 수행했다. 중공은 남포와 신의주, 만포, 나진에 4개 분소도 설치했다.

   

 

1946년 가을 국부군은 만주 토벌전에 나섰다. 린퍄오의 제4야전군은 전쟁 초기 연전연패했다. 중국공산당을

지원하는 것은 신생 북한 정권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중국 내전 결과에 정권의 존망이 달려 있다고 본

김일성은 총력을 기울여 공산군을 지원했다.

   

 

1946년 국부군이 선양과 창춘 등을 점령하고 주요 철도와 교통로를 장악함으로써, 공산군은 남만주와 북만주로

분리된 채 고립됐다. 국부군에 속했다가 공산군에 투항한 1만8000여 명 약 2개 사단 병력이 부상자와 함께 전쟁

물자 2만여t을 갖고 단둥과 지안에서 북한 내부를 거쳐 북만주로 이동했다.

 

공산군은 물자는 물론 병력 이동도 불가능하게 돼 국부군에 의해 각개격파 위기에 처했는데, 북한을 교통로로

활용함으로써 패전 위기를 극복했다.

   


민족의 비극

 


삼각고지 전투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

  

 


만주의 조선인들은 대도시로 도망해 생명을 부지했으며 북한은 일제가 남겨둔 기차 2000대분 군수물자를

공산군에 제공했다. 1947년 북한중공 간 ‘중국동북물자북조선통과협정’이 체결돼 1947년 10월부터 1년간 나진항

등을 통해 총 1435만t의 물자를 공산군에 수송했다.

   

 

북한은 국부군에 의해 고립된 만주 내 해방구에 식량, 석탄, 의약품, 소금 등을 1948년 1년간 30만t 이상

지원했다. 여기에는 화약 420t, 초산 200t, 고무신 15만 켤레가 포함돼 있다.

  

 

산둥성 등 여타 지역에도 원조 물자를 제공했다. 공산군의 북한 내 통로는 2개로, 육로는

①단둥→신의주→투먼으로 연결되는 선과 ②지안→만포→투먼을 연결하는 선이었으며,

해로는 ①다롄→남포 ②다롄→나진이었다.

   

 

중공은 1948년 말 랴오선 전투 승리 후 북한의 지원이 더는 필요 없게 되자 설치 2년 7개월 만인 1949년 2월

동북국사무소와 분소를 폐쇄했다.

    

이렇듯 만주의 조선인들은 공산군의 내전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공산군은 내전에서 승리한 직후 소수민족의 땅

신장과 티베트를 유혈 점령했다.

  

 

조선인들은 주로 제4야전군에 소속돼 랴오선 전투에서부터 쉬저우 전투, 창장 도하, 하이난다오 공략까지

투입됐다. 하이난다오 공략 전투는 조선인 장교의 아이디어(트럭 엔진 장착 보트로 초신속 접근)를 활용해 쉽게

승리로 끝났다.

 

동북항일연군 및 소련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김일성의 북한 정권 장악은 외세의 영향 아래 성장한 지도자가

한반도 정권의 권력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몽골 지방군벌 이성계의 조선조 개창과 비슷한 점이 있다.

  

 

국·공내전 말기 김책이 마오쩌둥에게 공산군(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소속 조선인 대원의 북한 귀국을 요청한

결과, 이들은 1949년 말부터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군의 중핵이 되었다.

   

 

이들은 북한군 4, 5, 6, 7사단 등에 편입됐다. 마오쩌둥으로서는 인민해방군 내에 대규모 조선인 무장 세력을

안고 갈 이유가 없었다. 김일성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조선인 3개 사단(북한 육군의 47% 차지)과 남일, 알렉세이

허(허가이), 박창옥 등의 기여로 고려인 1개 연대를 확보하고 난 다음 남침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됐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4사단 18연대가 제일 먼저 서울에 입성하는 등 조선인 부대가 남침 선봉에 섰다. 북한군 중

최초로 한강을 건너 김포와 영등포를 거쳐 경기 서부와 충남, 호남, 경남 지역을 석권한 북한군 6사단 주력도

국·공내전 시 명성을 얻은 사단장 방호산 휘하 조선인으로 구성돼 있었다.

  

 

중국에 잔류한 조선인들은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인민지원군) 38, 39, 40, 42군에 집중 배치돼 한반도에

투입됐다. 북간도(옌볜)는 6·25전쟁을 전후해 북한의 충실한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 민족의 비극이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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