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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에 심정적 동조를 아직도 느낀다면?
게시물ID : history_299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ireK
추천 : 0
조회수 : 125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5/09 14:46:40
그건 강남 인싸나 대구 인싸 마인드일 뿐이겠지.

그런데, 알랑가 모르겠는데, 애초에 고려왕조가 도읍한 곳은 오늘날의 서울이 아니라 개성이고, 본래는 개성주변을 경기라고 했던 것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670
개경의 모체는 태조 왕건의 고향인 송악현(송악군)이었다. 신라말 혼란기에 궁예가 용건과 왕건 부자의 귀부를 받고 이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고려’를 건국했다. 하지만 궁예는 국호를 ‘마진’이라 바꾸어 철원으로 돌아가더니 국호를 ‘태봉’이라 했다. 정변을 일으켜 즉위한 왕건은 국호 ‘고려’를 회복하고 919년(태조 2)에 송악현과 개성현 일부를 통합해 ‘개주(開州)’라 하여 이곳으로 천도했다. 이리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이 탄생했다.
개주는 성종 때 개성부(開城府)로 개칭되어 왕경과 경기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현종 때 왕경은 중앙정부 직속이 되고, 경기는 개성현령과 장단현령이 관장했다. 문종 때 개성부가 설치되어 경기를 담당했다. 원간섭기인 1308년(충렬왕 34)에는 개성부가 도성 안을, 개성현이 성외 즉 경기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를 바라볼 때 ‘개경’과 ‘개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확실하게 언급하듯이 개성현이 본래 경기라고 했던 것임.

그리고, 그 외의 지역은 이러한 식으로 나뉘어져 있었음.

하멜표류기식 표현인 총독이 거하는 지역의 이름을 따서 
총독부가 황주와 해주에 있으면 황해도,
평주와 안주는 평안도,
전주와 나주는 전라도,
강릉과 원주는 강원도,
함흥과 경원은 함경도,
충주와 청주는 충청도,
경주와 상주는 경상도,
김해와 진주는 금진주라고 했는데, 나중에 격하당해서 경상북도놈들한테 합병되었음.
그리고, 양주와 광주를 양광도라고 했음. 바로 오늘날의 경기도와 서울의 태반의 지역이 바로 양광도였음.

그리고, 이러한 식으로 분류된 지역들은 개성놈들에게는 피지배민족이 사는 지역이었다는 것임.

이후에 그들은 이조가 성립하면서 행정적 부수도였던 남경(서울)과 서경(평양)중에서 남경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그게 바로 오늘날 서울이라고 하는 인서울북촌이었던 것임.

그리고, 인서울북촌이라는 곳은 한국전쟁 발발시만 하더라도 한성부 인구 90만명에 불과한 그야말로 고관대작들이나 그들의 노예들이나 사는 도시였지만 정전이후에 급격하게 피난민들이 몰려들어서 지금의 세를 형성한 것임.
즉, 지금의 서울인들과 1950년대 이전의 서울인들은 혈연집단이 상이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음.
다르게 표현하면 본래는 비서울인이던 주변의 피지배민출신이 서울로 이주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을 적어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권에서 강제로 몰아낼 수는 없었으므로 본디의 고관대작들 무리들은 그들을 위한 별도의 거주구를 계획설계하게 되는데 그 것이 바로 오늘날의 강남이다.

그러한 고려계 고관대작의 무리는 잠시 부산으로 떠나있었는데, 부산에서 악명높은 광복동 댄스홀이나 지금은 금정산이나 명륜동, 온천장일대에서 완전히 흔적조차 사라져서 볼 수 없는 요정문화등이 그 시기에 내려와있었음.

그러한 것 자체가 그 개성-한성계 고랴계 고관대작들의 패밀리 무리들의 유흥문화로써 계급적인 정렬을 지니는 문화라고 할 수 있었다는 것임.

오늘날에도 해운대에서 낙향하신 법관나으리들이나 혹은 해운대의 아파트들을 별장삼아서 사 놓고는 내려오는 것들이 간다고 하는 공인된 시장주의화된 관기새끼덜이라고 할 수 있는 룸싸롱 고구려만큼은 영업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것은 어찌된 일인지 여느 강남의 룸싸롱들과 마찬가지로 장사한지 십년단위는 넘은 것 같은데, 단속도 안 맞는다고 한다.

https://m.blog.naver.com/junglx/152966883

에서 언급하듯이 동래별장이라는 곳도 소싯적에는 인서울 고관대작들 패밀리만 가는 성격이 강해서 북치고 장구치는 기생들이 나왔지만 90년대까지에 그쳤고, 오늘날에는 단지 레스토랑으로 이용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고려때부터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특정 인구집단에게서 기인한다는 점은 자명한 것이다.

본인의 예시를 들자면 본인은 중1때에 아마도 부산으로 내려온 명문가집안의 친구를 사귀고 있었지만 그 친구집안은 중1 여름방학때에 상경하였다. 그리고는 무려 열차비를 다 대 줄테니 놀러오라고하는 관대한 제안도 받아보았다. 물론 그 곳이 강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가 정확하게 1993년이다. 동래별장이 요리집으로 전환한 시기와 상당히 맞물리는 것이다.

그 것은 사업상의 문제로 상경할 수 없었던 몇몇 집단으로부터 잔존하던 것으로 보이고, 그 친구집도 사업가였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태반의 부산으로 피신해있던 고려계 지배층들은 70년대나 그 이전에 이미 상경햇지만 그 때에는 본디 인서울북촌이라고 불리던 지역인 신사동이나 종로, 명동은 죄다 과부와 고아로 넘치는 지역이었다고 해서 기피되다가 결국 강남개발계획을 박정희가 수립한 것이었다.

다만 왜 그들이 그 지역을 기피했겠냐는 점인데, 그들이 알고 있는 한국의 평민들은 그들의 말을 수행하는 끽해야 주종관계라고 할 수 있는 땅콩갑질이 가능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그들에게 양반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여느 보통 한국인은 완전히 상이한 정서를 가진 자들로써 그들과 접하는 것 자체가 컬쳐쇼크였을 수 있다.

조선왕조가 10프로의 양반가족을 위해서 90프로의 평민과 노예들이 희생하는 체제였다고는 하지만 다수의 평민들에게는 지방관과 그를 수행하는 상민 혹은 노예계급의 억센 무리들이 그들이 아는 지배층의 전부이지 정작 인서울 고관대작과 평민들은 서로 접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실상은 조선왕조의 지방관들조차도 전국에서 치러지는 진사과를 거쳐서 소과에 급제한 자들로써 그들의 태반은 백제, 신라계 지식인들의 후예들 격이거나 혹은 향반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로써 경화사족의 무리와는 격이 떨어지는 인서울 고관대작 혹은 문벌귀족의 축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자들이었으니 평민들이 그들의 존재를 직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경화사족의 무리에 들려면 적어도 대과에 급제했어야 했지만 그 것은 경화사족들이 천년동안 장악한 정권의 핵심권력의 축이 되는 것으로써 그렇게 쉽게 허락된 문턱이 아니었다.
소과만 하더라도 마흔살에 걸려도 늦은 것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문은 좁았지만 그 위에는 진정한 그들만의 게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 관료사회내에의 위계나 교육특권을 이용해서 아마도 동투르크계들의 떨거지로 보이는 고려계 오랑캐 새끼덜은 천년간 한국인들을 지배하였다.

그러한 그들의 집단에 선천적 혹은 후천적으로 결합한 집단이 현대화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통합당세력으로 보여진다.
왜냐면 나경원의 경우에서 보이듯이 서울지역에서 학원재단을 운영하면서 강남을 기반으로 그들의 정치권력과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적인 권력까지 재생산되는 과정이 현격하기 때문이다.

군사혁명위원.jpg

위와 같은 사람들이 한국을 지배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박씨의 이름으로 이조식으로 된 위계질서를 수립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먼저 한가지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는 부분을 지적하자면, 장도영이 결코 박정희에게 조종당해서 쿠데타를 묵인한 것이 아니다. 되려 5.16은 당시에 국방장관이던 장도영이 일으킨 것이 확실하지만 정작 직후에 하극상을 당해서 박정희가 장도영을 끌어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가재건최고의회 의장은 장도영이 1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2대가 박정희이고, 3대는 박정희 사후에 12.12까지 잠시 집권했던 최규하였다.

장도영은 인동(=구미) 장씨로써 당시에 구미일대에서 알아주던 지주집안이던 같은 집안 사람이던 장택상의 애비이던 장승원이라는 놈 밑에서 박정희의 형이던 박무희가 소작이나 하던 관계로써 정작 나중에는 인동 장씨들 중에서 장도영과 장면 등 평북파들에 의해서 장택상이도 한자리 해 먹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그러한 관계에서 어쩌다가 똘마니가 되던 인동 장씨 집안을 섬기던 노예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가 장씨들보다 위였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다만 5.16 직후에 행동대장이던 박씨가 보스인 장씨를 몰아낸 것으로 보여진다.

장도영은 순전히 권력에 눈이 멀어서 같은 장씨 집안이던 장면과의 인연으로 자신이 국방부장관이 될 수 있었다는 것도 망각하고 되려 자신이 해먹으려다가 박정희한테 털린 것이다.

https://namu.wiki/w/%EC%B5%9C%EC%A3%BC%EC%A2%85

1963년 제5관구사령관 재직시 반혁명사건[1]에 연루돼 구속되었다 풀려났으며, 이후 군수기지사령관을 거쳐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1] 군내 함경북도 출신의 만주군 인맥이 대부분 숙청된 사건.

최초에 국가혁명위원회 위원이던 최주종이라는 놈은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서 실각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마치 김일성이 연안파를 제거한 것과 상당히 맥이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그의 두 형인 장길상과 장직상 또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는데, 장길상은 친일 악덕 지주[10]로 그 명성이 자자했으며 장직상은 벼슬을 하다가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무려 세 차례나 지낸 전형적인 은행가 친일파였다.(나무위키 장택상항목)

장면의 집안은 8대조 때에 경상북도를 떠나 평안남도에 정착하였다. 장도영도 평안도 출신이었는데, 그래서 인동 장씨들은 중추원 참의직을 무려 세 차례나 지낸 장택상의 형 장직상과 함게 은행세력이 백업해주는 서북계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그 장씨들 밑에서 소작이나 하던 놈이 고급장교자리나 하던 축이던 박정희 또한 서북계인 것이다.

따라서 쿠데타 직후에 서북계는 동북계를 몰아내었다. 그 것이 바로 반혁명사건이다.

중요한 포인트는 고려조내의 지배계급이 이조가 들어서면서 한편으로는 숙청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권력이 재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와중에 군인출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자들이 한국을 지배하던 시절에 육군 대령 출신인 애비랑 뭐 가문은 사학재단을 열었다고 카던 박정희로부터 기인하는 위계질서의 한 축이었다고 제법 축이라고 행사했던 것이 나경원 이런 식으로 간다는 것이다.

즉, 이 시대까지는 아직 조선이 멸망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조말기적인 행태를 보이는 구체제 지배층들은 박정희를 이성계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서는 다시 그들의 지위와 부를 박정희로부터 재확인하려는 의지가 지독하게 강했다.

그래서 증언에 의하면 나경원의 애비였던 놈은 그 밑에서 육군 대령 좀 한게 엄청난 벼슬이라고, 소싯적에 운동장에서 조회하던 시절에 마이크만 잡으면 지가 뭐 되는 종자라고 존나 개지랄을 했다고 그 학교 출신 졸업생들에게 지금도 까이고 있다. 물론 이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형형인 그들은 아직 실존인물들이다.


본인이 과거의 일을 들먹여서 이상한 프레임을 만드다고 할까봐 하는 말인데, 나는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현재에도 구시대적인 불평등이 만연하다면 그 것은 정부가 자유와 평등을 잘 지지하고 있지 못함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양으로는 지금은 민주당이 이겼다지만 음으로는 여전히 요정이라카면 서울이고, 얼만전에 유씨 성을 유인촌이라는 쓰는 장관까지 했던 작자가  요정 기생에게 바로 즉석 빠구리를 해서 유명한 바로 그러한 것이다.

아 참고로 요즘에는 김학의의 별장사건을 본떠서 부산지역에서도 회동수원지 근처의 별장으로 20, 30대에는 서울에서 뜨던 별인줄 알았는데, 낙향해서 울적하시다는 분들의 유흥 트랜드가 바뀌고 있다고도 한다. ㅋㅋㅋㅋㅋㅋ 

아 물론 소싯적 요정문화건 오늘날 별장이건 나같은 부산지역 서민은 꿈에도 못 꾸는 것이고,
물론, 별 것 아닌놈도 돈 있으면 룸싸롱 고구려 갈 수는 있지만 그 곳의 기 쎈 양아치년들이 사람 간을 보고는 축이 아닌 것들한테는 호응도 잘 안 해주고 가봤자 잘 놀지도 못하고, 덤탱이나 쓴다고 칸다.

그러니 그 곳이라는 것이 소싯적 고려계 권문세족 새끼덜이 피지배민족이던 한국 것들을 아주 거들먹거리면서 대하는 그러한 레토릭이나 나는 위이고, 너는 봉사하는 자의 축이라는 확고한 서열의식 따위가 깔린 것들이나 재밌게 놀 수 있는 구체제 계급적인 유흥공간이 바로 그 곳이라는 것이며, 그 곳의 존재로 말미암아서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구체제적인 위계와 구체제 오랑캐지배성분의 후예새끼덜이 여전히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에 의한 존재감이 여전히 반증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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