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고고학적, 인류학적 증거들에 대한 현대의 해석은 두 가지 일반적인 가설을 제시했다.[41] 과거 소비에트 그 후에는 러시아의 연구자들이 조금 더 지지하는 첫 번째 이론은 스키타이인들이 내륙 아시아, 다시 말하여 투르키스탄과 서부 시베리아 지역에서 온 동부 이란족 집단이라는, 헤로도토스의 (세 번째) 설명을 따른다. [41][42]
기르스망과 다른 이들에 따른, 두 번째 가설은 스루브나야 문화권이 킴메르인과 연관이 되었음에도, 스키타이 문화의 결정체가 흑해 해안의 "목제 무덤" (또는 스루브나야) 문화권의 집단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41] 돌루하노프에 따르면, 이 가설은 스키타이 유골이 목재 문화권의 유골과 유사하고, 중앙 아시아의 사카이의 유골과는 이질적이었다는 인류학적 증거의 지지를 받는다.[43] 그러나, 맬러리에 의하면,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고, 안드로노보 문화와 "목재 무덤 문화권의 최소한의 동쪽 거주자"들은 인도이란인이라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41]
다른 이론들은 "스키타이인"이라는 것이 고대와 현대의 학자들이 생활 방식 (유목), 문화 풍습, 언어에서 특정한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는 관련없는 다른 민족들을 전반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매우 일반적인 용어라고 심지어 주장한다. 기원전 1천년은 이질적이고 광범위한 지역 사회들에 전래가 없는 문화적, 경제적 연결의 시대를 열었다. 이동이 가능하고 광범위하게 유사한 삶의 방식은 도나우강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활한 유라시아 스텝을 따라 있는 이질적인 민족 집단들 사이의 접촉을 촉진시켰고, 많은 문화적 유사점으로 이끌었다. 고대의 관찰자들인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관점에서, 이들은 "스키타이인"이라는 문화일반적 분류로 함께 묶였다.
역사적, 고고학적, 인류학적 증거들에 대한 현대의 해석은 두 가지 일반적인 가설을 제시했다.[41] 과거 소비에트 그 후에는 러시아의 연구자들이 조금 더 지지하는 첫 번째 이론은 스키타이인들이 내륙 아시아, 다시 말하여 투르키스탄과 서부 시베리아 지역에서 온 동부 이란족 집단이라는, 헤로도토스의 (세 번째) 설명을 따른다. [41][42]
기르스망과 다른 이들에 따른, 두 번째 가설은 스루브나야 문화권이 킴메르인과 연관이 되었음에도, 스키타이 문화의 결정체가 흑해 해안의 "목제 무덤" (또는 스루브나야) 문화권의 집단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41] 돌루하노프에 따르면, 이 가설은 스키타이 유골이 목재 문화권의 유골과 유사하고, 중앙 아시아의 사카이의 유골과는 이질적이었다는 인류학적 증거의 지지를 받는다.[43] 그러나, 맬러리에 의하면,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고, 안드로노보 문화와 "목재 무덤 문화권의 최소한의 동쪽 거주자"들은 인도이란인이라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41]
=>다른 부분은 실상은 그 것은 이란계가 동유럽으로도 진출한 것이다. 이 두가지는 상충되기 보다는 스키타이인들의 행동으로부터 기인한 것의 동일한 활동의 다른 해석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활동들의 총아로써 파르티아제국이 성립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파르티아제국의 몰락 이후에 스키타이들에게는 이슬람화와 슬라브화와 투르크화라는 세가지가 모두 일어났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근원집단인 이란계들로부터 이란인들이 파르시라고 하는 정체성을 사산조 페르시아를 통해서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 또한 메인스트림일 것이다.
따라서 역으로 슬라브화와 투르크화와 이슬람화가 진행되기 전의 스키타이인들의 상태가 존재했던 시기로부터 그들은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란일대와 그리고, 유다속주를 통해서 펠릭스 아라비아로 갈 수 있는 통로들 상에서 교역권을 형성하였고, 스키타이인들의 제국이 정작 로마제국이 쇠퇴하는 시긴의 바로 직전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다속주에서 로마인 지배자들에게 트리뷴을 제공하는 유대인이라는 것 역시도 스키타이인들이 오늘날의 동유럽 백인들과 러시아 백인들과 이란 백인들의 공통분모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어째서 유대인 또한 스키타이계 백인이 되어야 하는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
판스키타이즘은 경제, 군사적으로는 무려 한반도의 신라까지 영향을 끼쳤던 흐름이고, 인종적으로는 실상 인도이란계 백인들과 동유럽 백인들과 슬라브계 백인들을 모조리 아우르는 스펙트럼을 가졌던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유대인들 또한 빠질 수 없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oodsociety&logNo=90070771099
이란 대통령은 유대인
위의 전제들을 깔고 나면 어째서 이란 대통령은 유대인이라는 영국 일간의 보도가 팩트가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의 이란은 이란인들에 의한 어쩌면 단일민족국가와 같은 것을 내세우기 때문에 유대인 집안이었던 이란의 대통령은 이슬람화를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지만, 실상은 유대인과 이란인이라는 것은 과거에는 상황에 따라서 취사선택될 수 있는 나일롱같은 아이덴티티였고, 특히 판스키타이즘이 지배집단으로부터 구현된 나라인 파르티아제국내에서는 양자간의 구분은 거의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캘리포니아의 부촌들과 뉴욕의 부를 질시하는 푸어 화이트인 레드넥들마냥 로마제국의 시리아속주의 안티오크항에서 부를 축적한 유대인들이 정작 부촌을 형성해서 거주는 많이 했다는 유다속주와 티그리스강이 사막의 열기를 식혀주기 때문에 또한 예로부터 부촌이면서 실크로드의 부가 축적되던 오늘날의 이라크지역의 부를 질시해서 생긴 없는 것들의 준동이 사산조와 나아가서 이란인들의 중세적 배타적 민족개념이던 파르시인이라는 것의 분리적 인지를 촉진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지정학적인 문제를 지적하자면 순전히 요르단강이나 티그리스강 연안은 강바람과 수분이 가져다주는 쾌적함 때문에 요르단강과 티그리스강의 언덕배기들이 일본식 표현에 의하면 야마노테를 형성하였다. 야마노테는 야마토테선 근처지역이라는 뜻도 있지만 언덕을 뜻하는 뫼 산 자가 들어가 있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일본의 부촌들은 언덕위에 많으며, 위에서 아랫동네를 조감하듯이 형성된 업타운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눈치빠른 분들은 눈치챘겠지만 오늘날 예수살렘의 성전들 역시 언덕들 위에 위치한다. 그와 함께 그 주변의 거주지들은 고급주택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미드 메시아라는 것에서 조금 그러한 장면이 나왔지만 지금은 해당 지역은 분쟁지역이고, 또한 미드 메시아에서 조금 묘사되었지만 유대인이건 아랍인이건 그들의 별장들은 또한 유대지역의 산기슭의 더위를 피하기 좋은 지역들에 지어져있고, 그러한 거주구들로 가는 산길들은 사실상 사유지나 다름 없는 도로들로써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으로써 별장주들 가문들에 의해서 통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별장들이 예로부터 해당 지역의 정세를 움직여볼려는 사악한 부자 소시오패스들에 의해서 때로는 하사신들이나 지하드 테러리스트를 육성하는 부자새끼덜의 아지트로써 이용되어 왔던 것이다.
즉, 애초에 파르티아제국에서 실크로드를 개척해서 부가 축적되었을 때에 그 부는 오늘날의 바그다드의 언덕일대의 부촌들과 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일대의 부촌들과 오늘날 이스라엘일대의 산기슭의 산 전체를 통째로 사서 짓는 별장들에 투사되었다.
미드 메시아에서도 메시아역의 친구를 그러한 별장으로 데려가서는 테러리스트로 세뇌시키면서 어린 친구를 결혼은 시켜서 내세로 보내준다면서 등장하는 이슬람 뇌섹녀가 나오지만 이스라엘과 레바논일대의 산장들은 김학의라는 놈이 노출한 경기북부의 별장들마냥 부유한 자들의 사치와 향락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을 것이고, 그 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한 지점들 때문에 완전한 반감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산장에 의거한 세력으로 명백하게 언급되었던 마론인들이나 하사신파들이나 나아가서 유대속주인을 뜻하면 유대인들 전부에 대해서 아마도 카스피해 일대의 이란인들은 반감을 느껴서 정치적으로 그 둘은 쪼개졌다. 오늘날 수니파와 레반트와 시아파지역이라는 것은 그러한 산장에서 부유한 가문들이 꾸미는 음모들 따위에 카운터파트가 되는 지역과 그 것들이 전혀 씨알이 먹히지 않는 지역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그들이 종족적으로도 나뉘었다고 믿게 되기 이전에 정치적 결렬은 유다 속주와 시리아 속주의 산장을 소유한 부유층들이 지배하는 정치적 이슈 혹은 컨센서스에 대한 반발이자 대항마로써 일어난 카스피해 연안 일대의 파르시족 포퓰리즘의 형태로써 나타난 정치적 대립이 마침내는 유대인과 이란인이라는 항구적 결렬로 이어졌을 수 있다.
그 것들에 대한 예시로써 시리안 리치새끼덜이나 유대속주의 리치들이 꾸미는 것과 같은 지하드 운동이나 수니파 이슬람형제단의 무브먼트나 시리아바트당과 이라크바트당의 연대나 중세로 가면 장기 왕조나 누르 앗 딘을 내세우려고 했던 시리안들의 시도, 하사신파, 마론인들의 예루살렘왕국에 대한 협조 그 어느 것도 끽해야 이라크의 수니파 지역인 모술일대가 그 것들이 씨알이 먹히는 지정학적 경계로 예로부터 작용하였고, 정작 시아파 이란인들은 그러한 것들에는 일절 호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PS.그리고 사족을 달자면 어쩌면 그 것은 미국의 미래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