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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발해는 별개의 나라이다. 그리고 발해는 오랑캐 나라이다.
게시물ID : history_299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ireK
추천 : 0
조회수 : 137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5/07 17:08:27
사실 이 것은 매우 쉽게 검증되는 문제이지만, 현대의 통합당계 친일파들에 의해서 이러한 논거 전반이 부정되었음.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국립게 검증되는 문제이지만, 현대의 통합당계 친일파들에 의해서 이러한 논거 전반이 부정되었음.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국립중앙박물관관장부터 친일파였고, 얼토당토 않은 중국 물건을 한국 국보로 지정해서 얼마전에 뽀록났지.

그 외에도 서울대 사학계 전부가 친일파 이병도랑 선후배, 후학 요 지랄하던 관계라고.

문제는 이 정도까지는 환빠라는 인간들이 지적했지만 정작 갸들의 논거를 깨지를 못하고 엉뚱한 소리나 남발한거지.

전의 글에서 적었지만 고려조는 고구려와는 전혀 무관한 왕조로써 정작 당시에 중국을 지배했던 투르크계 군벌들이 한반도로 난입해서 본래 기존에 있던 정치체제인 신라왕 경순왕과 후백제공인(사실 왕이었지만 공이라고 했음) 견훤이 봉신으로 존재하던 체제 전체에 대해서 전쟁을 걸어서 한민족을 노예화한 이민족 새끼덜이 세운 나라였음.

그러한 증거로써 신라조까지 존재했던 일본과도 유사한 봉건제가 타파되었고, 당나라식 3성6부제의 변형인 2성6부제가 채택되었고, 게다가 고려세력에 저항한 영주나 화랑들은 모조리 천민으로 격하되었다고.
그리고, 그나마 잔존하게 된 영주세력들조차도 고려왕이 파견하는 총독이나 지사의 지방관청의 보좌관직이나 대대로 수행하는 의무세습이 강요되는 실질적인 왕의 노예로써 생계와 공무를 병행해야 했음. 이러한 자들을 아전이나 이방이라고 불렀음.

동학농민운동을 초래한 고부에서 풍양 조씨 지사와 당시에 끌려와서 고초를 당했다는 죄인들의 서기들의 일종의 속기록을 보면 아전들은 대체로 현지인들의 편이었음을 알 수 있음.

http://cafe.daum.net/SaAm/Dp3Q/290?q=%EA%B3%A0%EB%B6%80%2C%20%EC%A1%B0%EB%B3%91%EA%B0%91
에서 볼 수 있듯이,

조강희(趙岡熙, 1889년 ~ ?)
고부군수 조병갑의 둘때 아들
조강희의 아들은 조중완이고 조중완의 딸은 조기숙.
일제 강점기때 경성일보(京城日報)와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일했으며,

친일신문 동광신문(東光新聞)에서는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총독부 통감으로 부임한 후

침략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06년 창간한 통감부 기관지이다.

조씨덜은 죄다 친일파가 되었다고 한다.

하멜표류기에서도 조선왕조가 이민족왕조였을 가능성을 제시해놨다.
http://www.hendrick-hamel.henny-savenije.pe.kr/hollandk12.htm

언어와 문학

조선의 말은 배우기 매우 어렵다. 다른나라 언어같지 않아서 발음하는 방식이 다르다. 벼슬있는이나 학자들은 매우 천천히 말하고 상인들의 말은 배우 빠르다. 평민은 그 보통수준이다. 글은 세가지 방법으로 쓰는데 첫번째는 인쇄체로 중국어나 일본어같고, 두번째는 우리가 사용하는 서체와 비슷한데 지방관이나 다른 행정관들이 서신을 교환하거나 탄원할때 사용하며 평민은 이글을 읽을 수 없다. 마지막은 여자나 평민이 사용하는 것으로 배우기 쉽고 쓰기도 쉽다. 이들은 작은 펜으로 배우 능숙하게 쓴다. 
조선인들은 인쇄되었거나 직접 손으로 쓴 오래된 고서를 많이 가지고 있다. 세자가 이를 관리할 만큼 이들은 책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 여러 도시나 요새에는 복사본이나 판본을 가지고 있어서 화재에도 완전히 소실되지 않게 한다. 년감은 중국어로 만들어져서 조선인들 스스로 만들 기술을 알지 못한다. 책의 인쇄는 목판으로 하는데 판의 양면에 목판이 놓인다.

조선의 글자는 신분에 따라서 사용해야 하는 무려 3개의 글이 있었다. 하나는 북경에서 가져온 인쇄체이고, 두번째는 위에서 언급하듯이 지방관이나 아전들이 사용해야 하는 서체인 이두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바로 오늘날의 한글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왕조초기에 북경의 출판가들로부터 인쇄체로 된 서적들은 받아왔다. 

그래놓고서는 정작 그러한 서적들의 한자를 읽을 때에는 북경식도 그렇다고 이두도 아닌 발음으로 발음하는 법을 배워왔다. 현대에 한국인들이 한자를 읽는 법이랍시고 아는 방법들은 죄다 당식으로 한자를 읽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서책은 북경에서 당대의 북경식 한자로 쓰여진 책을 받아와서는 정작 당시에 사어였던 당나라식으로 읽게해서는 구순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게 조갑제 이런 것들의 한자부활론인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의 한자어는 진짜 한자도 아니고 신분제의 위선적인 면모에 의해서 사용되는 일종의 유사한자였다는 것이다.
정작 반면에 이두어는 적어도 일본에 전래되기도 하였고, 다만 왕실에 의해서 이두로 출간되는 발간물은 존재할 수 없었지만 이두가 본래 한민족이 한자어를 한대나 당대에 차용해서 쓰던 방식이었음.
그리고, 한글이야 뭐 하류의 commoner(커머너=보통사람, 평민) 전부가 쓰던 글이었다는 것은 오늘날 현대인이야 다 아는 사실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애초에 이두나 향찰의 존재를 논할 때에 그 것은 고려조에도 관료들의 언어로 사용되던 것이었음. 왜냐면 고려조가 고려를 세웠지만 실제로는 그 것은 한민족국가였던 신라를 뺐은 나라였기 때문에 광범위한 지식인들이 이두와 향찰을 관용어로 쓰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다만 왕실내에서만 서기들의 힘을 빌려서 포고문들 따위만 한자로 썼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기록유산자체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형편임.

어떠한 견해에 따르면 정작 고려조내에서 중국식 한자를 쓸 줄 아는 놈은 극소수여서 고려왕조차 공신들을 불러놓고 초등학교 수준의 한시짓기 숙제를 내고는 했다고 하니까 실제로는 극소수만 사용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인은 전에 알던 중국인 주재원의 자식을 비행기로 집에 데려다주면서 중국초등학교 1학년이었나 2학년수준의 국어교과서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텐기탱탱 요 지랄카는 것이었는데, 심각하게 고려조의 시조수준과 비슷하게 보였다.

곧 어차피 모든 한국인들은 그러한 실상을 알게 되겠지만 지금 미리 까둔다는거다.

따라서 고려조에서 실질적으로 문자를 쓰는 계층은 이두사용자밖에 없었다. 그러나 몽골의 카칸인 쿠빌라이라는 놈이 원조를 성립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는데, 쿠빌라이가 고려를 속국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그가 여진족이나 색목인들까지 원의 수도인 연경으로 끌어들여서는 모집해서는 광활한 원제국을 관료화하는 것에 인종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모으기 시작하자 지금의 북경어의 고어문격인 한자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다.

그에 따라서 고려중기이후부터 유학파들이나 원나라로부터 관직을 받은 자들로부터 한자어사용이 급격하게 늘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을 사대부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고려조의 북방계 무지렁뱅이 지배계급과는 달라서 명백하게 언어라는 무기를 가지고 계급을 형성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여기까지에서 중요한 지점은 신라조까지는 왕이나 공후들도 모조리 이두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 중국식 한자를 고집하는 계급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고려조는 실상 중국계들이 세운 왕조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이두는 정작 한국계 중인들이 사용하는 글로 위치가 격하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한국계 중인들이야말로 본디는 한민족의 지배성분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정작 이두의 구결을 적던 방법은 일본열도로 가서는 카타카나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조로부터 소위 바나나새끼덜과 같은 것들이 문자를 가지고는 타계급을 차별하고는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고려조때부터 어느정도는 시작되었지만, 고려조는 정작 후기에는 원의 속국이었으므로 원이 지지하는 자들만이 진정한 지배성분이 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충자돌림 왕들이나 기철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에 반해서 조선조부터는 바로 북경바나나새끼덜인 사대부가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의 왕과 왕족들 다음의 지배성분이 된 것이다.

한국의 기성세대로써 유를 좀 배웠다는 인간들이 말하는 삼봉 정도전의 새로운 세상 그 지랄은 그냥 한갖 그 바나나새끼덜이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수작질에 다름아닌 것인데,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이조후기수준을 못 벗어나는 한국 기성세대의 인문의 수준때문에 그냥 답습되어서는 표방되는 것이다.

인지부조화와 정보비대칭의 이론에 따르면 태반의 잘못된 정보들은 미처 업데이트 되지 않은 정보들의 합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한국역사는 죄다 세계사를 무시한 쇄국국가내에서 우물 안 개구리이자 특권계급이던 자들이 쓴 것들인데 그 것들이 여전히 답습되고 있는 문제가 존재한다.

그리고, 현대적인 기법은 가민하면서도 여전히 총론에서는 기성엘리트집단의 기술따위를 신뢰하는 전반적인 오류가 존재한다.

애초에 선비돌궐계 침략집단이 한제국을 멸망시켰고, 따라서 한나라와 교역관계이던 동이들과도 곧 전쟁상태가 되었다. 그에 따라서 본디는 탁발부 출신이었던 당고조가 세운 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와 모두 전쟁을 한 한중관계가 당시에 성립했던 것이다.

그러한 면으로 봤을 때에 신라는 애초에 당과 관계를 맺으려 했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보는 것이 세계사의 기조분석에 따른 일반적인 결론이라도 생각된다. 물론 본인의 결론이지만.

애초에 당과 신라를 결부지으려고 했던 사서들이라는 것 자체가 고려조의 지배성분들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역사는 실제 당대의 일과는 무관하고 모두 후대에 조작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민족은 끝내는 돌궐계 지배세력들에게 장악당하고, 그들에게 천년동안 사역당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한 이해관계가 동북3성 지역에서도 보여진다는 것이다.
요컨데, 고구려는 한대에 동이라고 지칭된 동쪽사람들이지만 정작 발해라는 것은 당식 시스템인 3성6부제를 차용하고 있었던 나라이고, 발해왕이라는 타이틀조차도 실상은 당나라가 공인해준 것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볼 때에 대조영이라는 놈은 실상은 돌궐계 군사집단 내에서 성장해서 당시에 동북3성 일대를 지배하는 돌궐계 군벌이라는 것이다.

연개소문을 일본에서는 이리카스미라고 하는데, 이게 정작 한국식 이두표현의 원형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이라는 것은 이리를 엉터리로 훈차해서는 淵蓋蘇文  이라고 적었던 것이다.

이리카스미(伊梨柯須彌) 는 한국식으로는 윤이가순미로 읽힌다. 그러나 여기서 야율이라는 단어와 모음정렬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율이라는 것에 인칭을 뜻하는 접미사 ~이가 붙었다고 보여진다. 동근이, 호식이 이런 단어에서 ~이의 사용방법을 현대한국어로부터도 알 수 있다.
즉, 야율이카스미=>이리가순미=>연개소문 이러한 식으로 되지 않았나 요나라어까지 접근할 수 있다.

그러하다면 정작 연개소문은 야율씨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지점은 일본놈들의 혀짧은 발음이 문제인데, 伊梨 의 발음은 한국어 이두발음으로는 야율과 똑같은 이응, 이응 조합이라는 것이다. 윤이=야율이 일본인들 코맹맹이 발음에서는 이리가 된 것이다.

야율이 야유ㄹ~이가 되면서 야유ㄹ는 윤이 되고, 이는 리가 되었다고.

여기서 시사되는 바는 동북3성에서 발해는 당나라새끼덜이 만들고 간 돌궐계 군사집단의 지배체제로 보여지고, 되려 야율씨들이 발해를 멸망시킨 것이 되려 동북3성에서 일어난 민족투쟁의 결과로 보여진다. 즉, 기존에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는 지점들은 단지 그들의 주장이고, 실제로는 고구려인들이 돌궐계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요나라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점들에서 비춰볼 때에 발해와 동질성을 강조한 고려 역시도 돌궐계 오랑캐왕조로써 그 것은 왕조간의 동질성이 그간 민족동질성으로 곡해되었음을 시사한다.

자 입장바꿔 생각해보자고. 발해는 물론 고구려를 멸망시킨 놈들이 세운 나라이므로 속지적인 지배권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현지의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2차대전에서 독일이 이겼다고 가정하고, 프랑스지역에 비시프랑스 말고도 파리지역을 다스리는 독일계 나치지배세력이 다스리는 괴뢰국을 세웠다고 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역사는 이제 국가사회주의프랑스의 역사입니다라고 할 수 있다. 점령자들의 일반적인 입장에 따라서 국가사회주의프랑스가 제5공화국입니다. 이나라는 4공화국 프랑스를 계승합니다라고 하면 뭐 어차피 승자의 입장인 것이다.  

요컨데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개소리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그 것이 결코 현지인들이 인정하는 합법정권이 아니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민족투쟁에 의해서 발해가 멸망당하고, 요나라와 금나라가 성립하였다. 적어도 동북3성 일대에서는 선비투르크계 지배세력들이 축출된 것이다.
반면에 한반도에서는 그러한 작업이 적어도 동학농민운동과 남부군에 의해서 당시의 서울고관대작들을 권좌에서 축출하겠다는 선언이 나오는 것만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리고, 그 것은 실제로는 김영삼이나 김대중, 노무현으로부터 6공화국이 나오고 나서야 정치적으로 온건하게 달성될 것이었다.


금나라는 하얼빈 근처에 있는 안출호일대로부터 발원했다고 하는 씨족들이 건국하였는데, 오늘날에도 하얼빈은 동북3성인들의 주요 거주지이다.

오늘날 조선족들이 죄다 재중동포후예인줄 아는 아니 그렇게 알고 있었던 90년대 초반의 한국기성세대와는 다르게 조선족들을 잘 아는 한국인들은 옌뺀의 자치주 출신이 아닌 인간들은 애초에 중국인이라는 지점을 알고 있다.

오리지널 옌뺀 자치주 출신은 경북지역에서 아마도 이주한 집단으로써 그들은 한국어를 쓰더라도 경상계 방언을 쓰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상계 방언을 쓰는 조선족들만이 일제시대에 경상지역에서 해당지역으로 이주해간 집단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이 알고 있는 조선족이라는 것들의 상당수는 예의 하얼빈일대에서 건너온 자들이고, 그들은 한국인들과는 애초에 무관한 동북3성 일대의 bilingual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금을 건국했다는 아구다의 형이라는 놈도 고려와 교역 좀 하게 해달라고 고려왕한테 빌었다니까 그들이 한국어를 구사했음을 틀림없다.

애초에 함경도 일대가 여진인과 한국인들의 오랜 교역이 일어나던 지역이었고, 교역어는 한국어가 쓰였던 것이다.

즉, 고향이 하얼빈 근처라고카는 조선족들은 실상은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이중언어 사용자들인 실상은 여진족인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하얼빈 일대로 가면 심지어 공항에서 택시를 타도, 한국어를 쓸 줄 아는 기사를 공항의 택시대기열 중에서 데려다준다. 대략 현지에서 기사들 중에서는 1/3정도는 한국어를 알아들으며, 나머지는 그냥 중국말만 안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언급되는 사람들도 퉁구스카어나 몽골어나 심지어 투르크어와 매우 유사한 야쿠트어 등의 다른 기원을 가져서 한국어와는 그들의 혈연이 인연이 없어서 단지 구사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함경도의 압록강 바로 너머가 그들의 발원지인 고구려인들은 태반이 신라어도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그들이 신라어를 모르면 생필품인 쌀과 소금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대에는 아마도 동이족 전체가 물론 구성원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수들이 신라어를 세컨드 언어로 장착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러한 것에 의해서 신라글자인 이두가 일본까지 건너갔다.

그러므로 외세에 의한 정권이건 현지인 정권이건 한반도와 어떤 식으로든 교류는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 금의 건국세력들을 고려할 때에 정작 발해는 당조의 하수인 정권이고, 그들이 축출되었다. 반면에 요나라의 야율씨들은 물로 일부는 카라 키타이를 건국하러 추방되는 것을 택했지만 여전히 원대에도 야율씨들이 연경일대의 주류로 남아있었다. 징기스칸에 의해서 임용되었다는 야율초재라는 인물이 대표적이다.

https://namu.wiki/w/%EC%95%BC%EC%9C%A8%EC%B4%88%EC%9E%AC
몽골 제국의 정치가. 중국어 발음은 예뤼 추차이(Yélǜ Chǔcái)

여기서 또한 기성세대 사가들이 얼마나 엉터리를 깨닫게 되냐고 하면, 야율은 정작 중국말로는 예뤼라고 읽는다. 이걸 Yelu라고 하는데 바로 압록강을 영어로는 Yalu river라고 한다.

그러니 뭐라고 할 것인가? 예뤼라는 말 자체가 압록강에서 근본하는 집단이라는 뜻이다. 그게 무엇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고구려가 바로 압록강일대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야율씨나 아구다씨의 여진족이나 거란족이 고구려의 신민이라고 말하는 기성세대의 교과서의 부분은 뭐라고 할 것이냐?

거란족과 여진족이 고구려인인 것이라고. 그리고 여진족들은 또한 한국인이 된 여진족들도 상당하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강릉의 전신인 하슬라는 여진족들의 도시지만 신라가 먹은 뒤에 몇 차례의 이름 변경을 거쳐서 강릉이 되었다고 한다.

예뤼들이 옥저와 동예를 복속시키고, 강릉까지 내려와서는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는 신라신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예뤼의 가순미라는 놈이 연개소문이라고도 적힌 놈인데, 보장왕이라는 놈을 끌어내리고는 자기가 참주행사를 했다는 것이다.


예뤼는 아마도 5부의 주축이던 고구려의 매우 중요한 씨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뤼들이 발해를 몰아낸 것은 민족적인 투쟁으로 보이기 때문에 발해와 고려가 되려 당나라계의 오랑캐 왕조이고, 동북3성의 예뤼들은 그들을 몰아내었지만 한민족들은 그들 밑에서 노예가 되는 역사를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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